프롤로그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상념은 문뜩문뜩 떠오르지만 바람처럼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 마치 이제는 잊었다 싶었던 사람처럼.

가을이면 새로운 사랑이 찾아 올 거라고 믿었다. 믿음은 늘 그렇듯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지만, 이번만큼은 분명할 거라는 확신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 해 가을도 그랬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새롭게 시작되는 가을 때문에 설다. 다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반갑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입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아이들의 수시 서류 준비 때문에 쉴 새 없이 바쁜 하루로 가을은 짧은 저녁만큼 금세 잊혀졌다.

-흠, 이 녀석 성적으로 여긴 무리인데... 자소서는 또 엉망이고.

“저기...”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낯선,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젊은 여자가 거기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싱긋 웃을 때 살짝 보이는 하얀 치아와 싱그러운 붉은 입술이 매력적이다. 나는 살짝 언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뭐야~ 저 기억 안 나요? 벌써 잊어버린 게예요?”

“아... 음...”

“아, 정말...”

그녀는 정말 너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양 볼에 숨을 잔뜩 불어 넣었다. 너무 하다는 듯이, 복어의 배가 부풀어 오르듯이.

그녀가 앉아 있는 내 앞에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순간 그녀의 긴 밤색 생머리가 사르르 쓰러지며 떨어졌다.

그녀가 커다란 눈망울을 내게 맞추며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쑥, 부, 쟁, 이.”

말을 마친 그녀가 피식 웃다가 꾹 눌러 참는 듯 입을 오므렸다. 양쪽 입가가 살짝 올라가며 보조개를 만들었다. 고양이 같은 입꼬리.

나는 아무런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웃음이 낯설다.

“정은희, 너 은희 아니니?”

맞은편에 앉은 이 선생이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정은희, 그녀의 이름이 가을 햇살처럼 찰랑이며 돌아선다.

“꺅, 이혜영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어쩜 더 예뻐지셨어요?”

정은희, 그녀의 이름이 내 눈 앞에서 돌아서며 이 선생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널 잊었겠니?

너를 다시 본 순간, 긴 시간의 간격이 순식간에 접힌 느낌이었다. 밤색 단발머리가 이제 길게 자랐지만.

너를 바라보는 순간 낯선 것은 변해버린 네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는 내가 변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