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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0:26 1,344회 0건
-재즈 속으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게의 문을 연다. 나의 손때가 묻어 이제는 그 푸르른 빛에 더하여 세월이 느껴지는 입구의 문은 나에게 항상 새로운 날이 찾아 왔음을 알린다. 여느 가게 처럼 아침 나절 부터 열고 커피나 팔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에 나는 항상 느즈막한 오후에 문을 연다. 손님들도 나의 버릇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가 보다. 서로가 약속을 적어 넣은 메모지들도 오후 3시가 넘어서 만나자는 글들로만 되어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빼곡히 예쁜 글씨들로 적힌 메모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입구 옆의 메모판을 나는 항상 하던 버릇 처럼 찬찬히 살펴 본다. 언젠가 나도 그 메모지의 한 쪽을 차지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아주 더운 81년 여름이었다. 나와 형석이는 죽이 잘 맞는, 혈액형도 같은 고등학교 동창생 이었고, 일류 대는 아니지만 다행히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들어간 것만 해도 서로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면서 잘났어 정말을 외쳐대던 치기 어린 시절. 공부 외에 서로가 음악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쏘다니던 고등학교 시절을 뒤로 하면서도 둘은 대학이 주는 자유와 낭만에 제 스스로 혼취하여 시간을 잊고 지냈었다. 고등학교 연주 모임에서 만나, 둘은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가요제에 나가서 한 번 폼 나게 해보자고 서로를 을러댔었고... 형석이는 기타를, 나는 테너 색스폰을 했었는데, 형석이는 음악적인 재주가 아주 뛰어 나서 현악기 스타일의 것들은 조금만 연습해도 비스무그리한 소리를 내곤 해서 내가 놀란 적이 많았다. 그 당시 형석이는 흑인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비트가 강하고, 디스코가 판치던 시절, 이단아 처럼 흑인 음악 예찬을 펼 때면 무슨 혼령에 도취 된 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강변을 늘어 놓았었다. 나는 그 친구의 그런 열정이 부럽기도 했고, 유일한 동조자 이기도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빽판(이름하여 해적판이라고도 하였음)을 이태원을 뒤져가면서 사다 날랐고, 기존의 라이센스 음반보다 음질이 엄청나게 뛰어 났었던 빽판의 초판 버전을 구하기 위해 예약까지도 불사 했던 열렬광들 이었다. 대학은 우리들을 폭 넓은 허용의 바다로 인도하긴 했어도 대학에 들어온 대부분의 학우들은 우리 같이 별난 취미를 갖고 있질 않았고, 이제야 배우려고 머리를 기웃거리는 판이어서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은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면서 학교가 다른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늘상 붙어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진우야, 나 어제 ?시 죤스거 한 장 샀다. 고것도 오지지날 원판으로….낄낄’

‘엉, 어데서? 진짜 오리지날 원판?’

그 당시, 을지로의 풍전상가 밑에는 외국의 원판을 밀수로 들여와 판매하는 곳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곳을 자주는 갈 수가 없었다. 워낙 비싼 가격 때문 이었다. 원판을 덮고 있는 얇은 버진팩은 세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던 것처럼 위장해서 들여왔었는데 LP판 껍질을 교묘한 방법으로 오픈 해서 들여온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기전에 비닐 확인은 했냐? 냄새는?’

이 두 가지는 바로 우리 끼리의 비법이기도 했다.

‘고롬 내가 누군데, 아쟈씨가 비닐을 열어주면서 디스크가 빠져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 샀지롱.’

초짜 들이 가면 속고 사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LP판의 위와 아래에 한 2센치 정도 되게 비닐을 오픈 하지 않으면 절대로 디스크가 그 비닐을 찢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규격을 이용한 밀수 방법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한국의 라이센스 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콩기름을 사용한 원본 LP 판 껍질에서 나는 고소한 인쇄잉크 냄새도 다른 확인 방법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형석이와 나는 다른 대학생들과는 유별난 행로를 살았다. 카페를 가더라도 그 당시 유명했던 이태원의 올뎃재즈나, 대학로의 블랙 엔드 화이트, 명동의 가무 같은 곳을 다녔다. 커피 한잔이나 혹은 맥주 한 병이면 하루종일 웨이터의 눈치 보지 않고 편한 소파에 파묻혀 듣고 싶은 흑인 음악들을 실컷 들을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시절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 소중한 추억 중 에서도 버릴 수 없는 것들로만 채워진 순간들 이었다.

‘진우야, 근데, 너 올뎃재즈 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재즈세션 있는 것 아냐?’

나는 들은 적은 있는데 내용을 잘은 몰랐다.

‘잘 몰라. 왜?’

‘그 세션에 미군 부대의 재즈 팀이 나와서 라이브로 연주한데, 한번 안 가볼래?’

나는 귀가 솔깃 했다. 내가 연주하는 악기가 색스폰 이기도 했지만 재즈는 나에게 하나의 커다란 우상적인 이미지의 하나였기에 형석이의 제안은 나에게도 특별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손님 중에서 가능한 사람은 그 사람들과 같이 세션에 동참할 수도 있대 나봐. 어때?’

‘무조건 악기만 들고 갈 수는 없잖아, 그 사람들도 잘 알고, 우리도 연습을 해야 할 곡이 우선 준비 되야지.’

‘곡은 이미 정했어. 그루버 워싱턴 주니어의 와인라이트, 어떨까?’

형석이의 선곡은 참 놀라왔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잔잔한 소프트 재즈 이면서 리듬 앤 블루스의 분위기도 적절히 가미되어 있는 연주곡 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곡쯤은 그 곳에서 세션을 한다는 미군들도 애드립으로 나마 장단을 맞출 것 같아 보였다. 형석이가 리드 기타로 키를 잡아 나가고 내가 색스폰으로 메인 멜로디를 연주하면 드럼과 베이스는 그에 맞추어 반복적인 코드와 비트로 내 뒤를 받쳐주면 될 것 같았다. 둘은 의기투합 되어 그 날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집의 지하실로 집합했다. 항상 연습을 할때면 색스폰의 소리가 밖으로 나갈 것에 대비해서 부모님이 지하실을 개조해서 만들어 주신 나만의 연습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2주일 후, 금요일 저녁을 타겟으로 맹연습을 했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바람만으로 땀을 줄줄 흘려가면서 지하실 방에서 한여름을 악기 연주로 떼우고 있는 두 놈의 대학생이 그 당시 부모님들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으셨을 것이다. 허구 헌날 모여 앉아서 빤스 차림의 맨몸으로 연습을 하다 보면 나야 색스폰 과의 자세도 자세려니와 겨드랑이가 조금은 편했지만 전자기타를 안고서 연주를 해야 하는 형석이 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편치 않는 음역이 연주되면 원곡을 다시 틀어야 되는데 지금이야 CD플레이어가 많이 보급되어 듣고 싶은 부분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 LP판을 되돌리면서 악보를 보면서 연주를 따라 한다는 것은 무진장의 인내가 요구되던 시절이었다.
그럭저럭 악보 없이도 GWJ(우리는 그당시 그루버 워싱턴 주니어를 그렇게 불렀다)의 와인라이트를 비스름하게 연주하게 되자,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목요일 저녁, 올댓재즈에 오디션을 받으러 갔다. 그 날은 여름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고 지나가서 길거리는 조금 시원해 진 듯 했지만 저녁이 되면서 후끈한 열대야가 다시 몰려 오고 있던 저녁 이었다.

‘안녕하세요? 금요일 세션 때문에 왔는데요.’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미국사람과 얘기중 이었다.

‘아, 그래요? 학생들 처럼 보이는데, 연주해 본 경험은 있어요? 재즈는 생소한 분야라서…’

‘한번 들어 보실 래요?’

그러자, 주인은 그 미국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자, 놀라는 눈짓으로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멋모르고 악수를 하면서도 영문을 몰랐다. 그 사람은 바로 그 밴드의 베이시스트 였다. 주인 말로는 드럼이 없지만 베이스로도 충분하게 오디션은 가능하니 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항상 하던 대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쩍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리는 악기를 풀었다. 입구에 왼쪽 끝에 있는 작은 무대로 올라가 형석이는 앰프에 코드를 꽂고는 능숙한 솜씨로 튜닝을 했고 나는 색스폰에 리이드를 새 것으로 갈고 무대에 올랐다. 우리는 안 되는 영어지만 그 사람에게 곡 이름을 얘기해 주었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폼이 느이가 그걸 우짜 하겠노 라는 표정이었다. 나와 형석이는 서로 마주 보며 빙긋이 웃었다. 곧바로 연주가 시작되고 우리는 한치도 틀림이 없이 연습한 대로 리듬을 밟아 나갔다. 내가 긴장한 탓인지 중간의 애드립 부문에서 옥타브를 놓쳤던 한 부분 이외에는 거의 완벽한 솜씨였다. 그 미국인은 연주를 하는 도중에도 뷰티풀을 연발하면서 베이스를 연신 흔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주인의 박수소리 보다 더 큰 환호가 좌석에서 터져 나왔다. 정신이 없어서 실내에 손님이 없는 줄 알고 있었던 우리 두 사람은 그것도 커다란 소리로 환호성을 보내는 사람이 다름아닌 여자라는 사실에 놀랐다.

‘어이구, 우리 젊은 분들이 벌써 팬이 생겼네. 내일 볼만 하겠는데…’

미국 사람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가게를 나갔다. 아마도 세션 상대가 정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대에서 내려와 우리는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스텐드에 주인과 마주 앉았다.

‘곡은 이거 하나 뿐인가? 한 서너곡 하면 좋을 텐데…그런데 이거 뭐야?’

일하는 웨이터가 주인도 모르게 우리에게 날라다 준 것은 보기에도 시원한 냉커피 두 잔이었다. 손님중의 누군가가 우리에게 보낸 것이었다. 바로 그 환호성을 올리던 그 여자. 올댓재즈의 실내에는 낮에도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었다. 그래서 형석이와 나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구섞의 여자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잘 마시겠다는 답례를 보냈다.

‘진우야, 너 저 여자 봤냐? 우리 보다 나이는 들어 보이는데 몸매 죽인다. 얼굴은 잘 안 보이는데….’

형석이가 테리우스 같은 긴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흔들면서 기타를 등에 메고 나타날 때면 그 당시 대학생 연인들의 집합장소 였던 종로2가 포켓까페 골목을 무대로, 날고 기던 대학 초년생 들은 넋을 잃고 바라다 보곤 했다. 게다가 그런 형석이 주변에는 항상 이쁘장한 아가씨들이 들끌었던 것은 물론이고…역시 형석이는 여자 보는 눈이 재빨랐다. 그 여자는 일행들을 뒤로 하고 스텐드 쪽을 향해 걸어왔다. 우리는 일순 긴장했다.

‘연주 잘 들었어요. 학생이세요?’

우리는 선생님 앞의 학생처럼 둘이 동시에 네하고 대답하고는 바라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얇은 린넨 블라우스에 살짝 비치는 브레지어, 타이트한 흰색 스커트는 가운데가 심하게 위로 찢어진 야한 디자인 이었다. 항상 책을 팔에 안고 화장품만 잔뜩 들어간 가방을 옆에 둘러메고 나 대학생입네 하며 돌아다니던 그 당시의 여학생들만을 보아오던 우리로서 이른바 요즈음 일컫는 연상녀를 대하고 있는 것은 지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풍조로 연상의 여자를 대한다는 것은 시대조류를 역행하는 분위기가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두 분 다 젊으신 것 같은데 어디서 그렇게 좋은 솜씨들을 닦으셨어요?’

계속되는 칭찬에 우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리 옆 자리에 앉았다. 학교 얘기며, 연주에 대한 우리들의 주변 얘기가 이어지면서 우리는 점차 스스럼 없이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형석이 옆에 앉은 그녀는, 또다시 버릇처럼 열변을 토해내는 형석이의 흑인음악 예찬론을 지긋한 눈길로 응시하면서 들어주고 있었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나가자고 말을 했다. 그녀는 내일 세션때 보자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는 까페를 나섰다. 주변의 일행은 그 당시 척하면 알아볼 수 있는 오렌지 들이었다. 낑깡도 토종귤도 아닌 원조 오렌지 들처럼 보였다. 나가자면서 손에서 덜그렁 거리는 자동차 키가 우선 그랬고, 그들의 머리 스타일들이나 차림새가 동네 미장원에서 다듬은 솜씨가 아니었고 옷들도 신촌 이대앞 패션이나 남싸롱 패션은 더더욱 이나 아니었다. 이름하야 다른 부류의 인간들 이었다. 그녀는 그 속에 속한 주목 받는 꽃이었고…아무튼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보다도 우리는 내일의 세션 걱정으로 우리집에서 자면서 다시 한번 연주를 맞추기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직행 좌석버스에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진우야. 그 여자 뭐 하는 여자 같아 보이던?’

‘글쎄….형석이 너! 그 여자에게 관심있냐? 나이도 꽤 있어 보이던데…’

나는 형석이를 나무라면서도 내심 나도 끌리는 구섞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데 참고 말았다. 항상 소심하기로 유명한 내가 그런 말 을 한다는 것이 왠지 나와 걸맞지 않게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내일 그 여자 나오면 세션 끝나고 닭장에나 가자고 한 번 해봐야지.’

그 당시 초저녁에 문을 열고 10시 반이면 파장을 하는 이른바 고고장들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무교동의 코파카바나, 신촌의 우산속, 강남의 스튜디오 80등이 그런 곳이었다. 나는 형석이가 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알았다. 다음 날이 되어 우리는 악기를 챙기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일기예보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소나기 같은 폭우가 예상된다는 김동완 기상캐스터의 예보에 우리는 한 풀 기가 꺾여 있었다. 형석이는 하염없이 주룩주룩 내리는 소나기를 보면서 그 여자가 이 빗속에 올 수 있을까 하고 한숨을 내 쉬기도 했다. 저녁이 되어 그 세션 팀들이 도착하고 우리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먼저 세션 팀이 주옥 같은 스윙재즈 곡들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밖에는 비가 처량하게 퍼붓고 실내에는 분위기 있는 재즈가 넘쳐 나는데 장내의 손님은 한산해서 그 분위기가 을씨년스럽기 까지 했다. 우리 차례가 다가왔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제의 그 여자 였다. 우산이 없었는지 온 몸에 비를 홈빡 맞고서 머리까지 온통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눈인사도 할 사이 없이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일행이 없이 스텐드에 홀로 앉아서 우리의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검고 가느다란 모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파랗게 허공을 가르는 담배 연기와 맞추어 우리의 연주는 시작 되었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면서 한 손으로는 비에 젖어 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머리결을 쓸어 올렸고, 주인이 권하는 수건도 마다한 채, 어깨를 움추린 채로 우리의 연주를 경청했다. 포개 얹은 그녀의 종아리가 아스름한 실내의 불빛을 받아 미처 닦여지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함께 반사되고, 그녀의 고혹 스런 자태는 젖어있는 그녀의 몸뚱아리와 함께 흠씬 우리 둘의 머리를 강한 햄머 같이 두들겨 대고 있었다.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연주는 막을 내리고 장내의 박수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두 사람은 무대에서 개선장군 마냥 걸어내려 왔다. 게다가 세션맨 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해주는 통에 정말 혼이 쏙 빠져 나가는 듯한 짜릿한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연예인들이 이 맛에 팬들의 성원에 연연해 하는가 보다 라는 생각을 불현듯 했고…그녀 또한 우리 두 사람 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환호성은 없이….

‘괜찮았어요? 비가 이렇게 오시는데 와 주셨네요. 저는 혹시 않 오시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형석이가 먼저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뻘쭘히 서서, 형석이의 뒤에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웃고 있는 그녀의 치아가 무척 희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형석이는 어제 이후, 그녀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 주자고 했다. 다름아닌 입술이었다. 얼굴은 한국 여성처럼 생겼는데 그 여자의 입술은 다분히 도전적이고, 그 당시 여자들이 별반 선호하지 않는 적쥐색 립스틱을 발랐기 때문에 붙인다는 별명이었다. 입술. 그녀의 입술은 정말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을 색깔로 막고 있는 듯한 형태였다. 누구라도 그녀의 입술을 맛보면 자신의 입술이 뜯겨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정도로 파괴성이 농후한 특이한 느낌의 입술이었다. 형석이는 그녀와 마주하듯이 스텐드에 앉았고, 나는 형석이의 뒤에 앉아 주인 아저씨가 만들어 준 냉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형석이 혼자 신이 나서 그녀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어이 닭장얘기를 꺼낼 모양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 오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오줌도 마려웠지만 형석이를 따라서 닭장에 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화장실 안으로 형석이가 뛰어 들어왔다.

‘진우야! 너 돈 좀 가진거 있냐?’

형석이는 다급한 목소리 였지만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형석이 에게 지갑 속에 든 비상금 5만원을 달랑 내주었다. 나야 회수권으로 집에 가면 그만 이었으니까. 지금 처럼 신용카드가 있던 시절도 아니라서 현금만이 유일한 지불수단 이었었다.

‘오늘 내 기타 좀 갖고 가라. 알았지? 이유는 묻지 말고…’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석이는 아마도 그녀와 만리장성을 쌓고 싶은 모양 이었다. 그 입술에게 지 입술이나 뜯기지 말지. 녀석 허둥대기는…내가 화장실을 나서는데 입구에서 나가려고 하던 그녀와 형석이를 보게 되었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그녀는 형석이를 따라 나가면서 나를 돌아다 보았다. 입구의 문이 열리고 바깥에서 들리는 장엄한 빗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촉촉히 젖은 눈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듯한 시선은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 같은 것으로 가슴을 때리고… 나는 또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고개를 떨구는 그녀를 보면서 다시 입이 닫히고 말았다. 에이 병신 자식! 따라가도 될까요라고 한마디만 물어보지! 그렇게 그녀는 형석이와 내리는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집으로 오는 도중에 들고 있는 악기의 무게 보다도 더욱 무겁고 음울하게 느껴 졌었던 그녀의 그 마지막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다음날이 되어도 형석이 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나는 단연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구나 하고 단정 지었다. 3일째 되는 날, 저녁에 형석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야, 임마, 어떻게 된거야? 왠 연락이 되야지?’

나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나무 래고 있었다.

‘어때, 진우야, 내 얘기가 궁금하지 않냐?’

나는 궁금했다. 몹시도.

‘야, 윤희씨, 정말 끝내줬다. 춤도 잘추고, 술도 잘 먹고, 놀기는 얼마나 잘 놀던지…우리랑 5살 차이가 나긴 했지만 정말 아쉽더라. 나이만 어떻게 차이가 안져도 데리고 살아 볼 만 한 여잔데 말이야. 그리고, 옛다 꿔간 돈. 나 그날, 땡전 한 푼 안 쓰고 홍콩 갔다 왔지롱. 그 여자 돈도 끝내주게 많은 가봐.’

나는 대학 초년생인 형석이가 너무 장황한 데까지 생각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닌가 했다. 인연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그녀를 가늠질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둘이 잤냐?’

‘고롬, 물론이쥐. 이 형님이 끝내줬어. 나중에는 벌벌 기더라.’

‘아니, 벌벌 기다니, 무슨?’

‘임마, 척하면 삼천리고 쿵 하면 감 떨어지는 소리지. 이 형님의 대포 맛을 보고 나니 한번 더, 한번 더 하는 게 그 날밤, 네번 이나 허질 않았겄냐?’

뻥도 조금 섞였겠지만 무슨 무용담 줏어 담듯이 형석이는 그녀를 꿰찬 것이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만 하자고 했다. 어차피 뒷감당 없이 작업 끝에 두 사람이 하룻밤, 원나잇 스텐드로 섹스를 한 것 가지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형석이는 그녀와의 섹스 시에 그녀가 어쨌다, 저쨌다 하면서 시시콜콜이 중계방송을 하다가 갔다. 나는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마지막으로 보이던 그녀의 눈 빛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주가 지난 어느날, 나는 홍대 앞의 한 까페에서 가게를 봐달라는 졸업했다는 동아리 선배의 부탁을 받았다. 할 일도 마땅치 않았고 음악이나 실컷 듣자는 심산으로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홍대 입구와는 떨어진 조금 한산한 지역에 주택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그 까페는 오히려 화랑에 더 분위기가 가까웠다. 나는 첫 날, 음악을 틀려다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 디스크 때문에 꼭지가 뺑 돌아버렸다. 그래서 마음 먹고 집에 있는 LP들을 한짐 지고 택시를 타고 까페로 되돌아 왔다. 나는 심통도 났지만 이제는 내 마음대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틀자는 심정으로 사람도 별로 없는 카페 안이 떠나가도록 음악을 틀어 제꼈다. 혼자서 톰 브라운의 트럼펫 연주곡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 바람처럼 까페 안으로 들어왔다. 뒷모습 만이 보이고 나는 기계적으로 어서 오세요 라고 응대했다. 그 여자는 구섞진 자리를 찾아서 나와 등을 대고 앉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판을 들고 그 손님 앞에 섰다.

‘손님, 무얼 드시…’

나는 깜짝 놀랐다. 윤희 라는 그 여자 였다. 피워 물려던 모아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그녀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때 올댓재즈 에서, 맞죠?’

그녀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어야 했다.

‘세상 참 좁죠?’

나는 그녀에게 지나친 냉방으로 선선할 거라며 따스한 커피를 갖다 주면서 그 앞에 앉았다.

‘여기는 어떻게?’

‘이제 출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학교의 친구들이나 만나고 가려 했는데, 방학이라서 그런지 만나기가 여의치 않네요.’

나는 그녀가 뉴욕 근처의 델라웨어라는 곳에서 공부중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빼고는 시골이나 다름 없다는 그 곳에서 그녀는 현대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고, 서울에 방학중에는 나오는데 겨울에는 방학이 짧아서 나오기가 힘들 다는 말을 했다. 오늘따라 그녀는 그때와 다르게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고등학생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간단한 기초 화장도 없이 맨 얼굴로 나를 대하고 있는 그녀 인데도 나는 화장을 한 모습보다 더 보기 좋다는 웃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톰 브라운의 음악이 끝나 가고 있음을 알고서 판을 갈고 오겠다고 얘기하고는 쏜살같이 턴테이블로 향했다. 얘기하기 좋은 음악을 고르다 고르다 나는 스티비 원더의 Send one your love이라는 곡을 자동 연속 플레이로 해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두 남녀가 불어로 와인을 따르면서 속삭이는 인트로가 좋아서 항상 애청하는 곡이었다. 그녀는 그 곡을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인데, 이 곳은 신청하는 사람의 마음처럼 노래를 틀어주나 보죠?’

나는 그녀의 조크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연주, 너무 좋았어요. 그 말을 꼭 다시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을 줄 알았어요.’

나는 묻지 말아야 할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던지고 말았다.

‘형석이 와는 다시 만나셨어요?’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묵묵히 담배를 피운다.

‘……사람이 사는게 그런 거 같아요. 원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쳐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결국에는 원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얘기 말이죠.’

어디 선가 책에서 읽은 얘기였다. 그녀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미국 생활은 지독하게 외롭죠. 여기서 보기에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화려한 외출처럼 보여도 막상 한국 사람 하나 없는 이방인들로 가득찬 집단에서 생활하다 보면 자기가 향수병인지도 모르게 한국을 그리워 하게 되요. 이곳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살게 되죠. 이를테면, 동물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같이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사연이 있게 된다고 할까요? 형석씨는 아주 똑똑한 사람 이에요. 섬세하기도 하고 열정이 있고, 그런 사람은 미국에 가면 성공할 수 있어요. 적어도 저처럼 덜 떨어진 낙오자가 되지는 않을 거에요. 형석씨는 음악때문에라도 미국에 가고 싶어 하드라고요.’

‘형석이가요?’

금시초문 이었다. 3대독자 외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은 군대에 갈 필요도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뒷 꼭지 가렵게 시리 병역문제로 골머리 썩으면서 외국에 유할 갈 필요가 없어서 좋기는 한데, 머리가 모자란 게 흠이라고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는데 그게 진심인줄은 모르고 있었다.

‘출국하기 전에 다시 보기로 했었어요. 미국 유학에 대해서 저에게 조언을 들을 것이 있다고 해서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형석이를 사귀어 왔지만 그런 계획을 갖고 사는 지는 정말 몰랐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나는 눈 주위가 아파 오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갑자기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거나 신경이 곤두설 때면 언제나 처럼 두통이 오고, 집안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내 주머니에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항상 몇 알의 사리돈이 들어 있었다.

‘언제 출국하시는데요?’

‘이번 주 토요일 이요.’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앞으로 3일 후.

‘촉박하네요. 오늘은 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친구 분을 만나신다고…’

‘오늘은 어차피 틀린 것 같죠?. 계획이 어그러 졌으니 오랜 만에 느긋하게 혼자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아요. 근데 여기서 일하세요?’

‘네, 선배 형이 부탁해서요. 휴가철이라 일할 사람도 마땅치 않아서 제가 봐주기로 했지요. 피서지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시원하게 냉방 잘되는 곳에서 듣고 싶은 음악이나 실컷 들으려 구요.’

그녀는 나에게 오늘 하루가 비었으니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아주 반갑게 그녀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녀는 나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신이 먹은 커피 잔과 재털이를 들고는 카운터 뒤의 주방으로 들고 갔다. 내가 해도 된다고 말렸지만 막무가내 였다. 미국에서도 주방보조나,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로 이런 것쯤은 문제도 아니라면서 팔을 걷어 부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손님이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 바램과 다르게 카페는 그 날 따라 젊은 이들로 정신 없이 붐볐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모두들 피서계획을 위해서 학교 주변에서 만나 계획들을 세우기에 여념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는 날을 아주 잘 잡아서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 구경 많이 한다며, 너무도 기꺼워 했다. 나는 음악을 틀면서 그녀와 함께 서빙을 하느라 눈코뜰 새 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저녁 11시가 되고, 난 가게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그녀와 늦은 저녁을 차려서 홀의 중앙에 탁자를 갖다 놓고 마주하게 된다. 오랜만에 힘이 들었다며, 그녀는 어깨를 주물렀다.

‘힘드셨죠? 근데, 제가 듣기로는 누님 뻘인데 말 놓으시지요.’

‘아니에요, 미국에서는 만학도 들도 많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고 혹은 많다고 말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어요. 버릇이다 보니…부담스러우세요?’

‘아니오, 그런 것은 아니고… 저 맥주 한잔 할께요.’

그녀에게도 나는 맥주를 권했다. 유리잔을 내밀자, 그녀는 아니라며, 맥주병 목을 내밀면서 건배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런 문화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었다. 병 채 마시는 것은 쌍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기에…그래도 나는 스스럼 없이 그녀와 병목으로 건배를 했다.

‘우리, 음악이나 들을까요? 제가 골라도 되죠?’

우리 라는 단어에 나는 찔끔 놀랐다. 친밀감을 격앙 시키던 그 우리 라는 단어에 나는 한 껏 들떴으며, 그녀는 한참을 고르더니만 곧 이어 자리에 돌아왔다. 그것은 로버타 플랙의 노래였다.

‘이 노래 아세요?’

‘로버타 플랙이죠?’

‘이 노래는 사연이 깊은 오래죠. 이 노래의 듀엣을 했던 남자 가수가 자살 했거든요. 이름이 하써웨이 뭔가 였는데, 뭐더라?…’

‘자살 이라니요?’

‘연상이었던 로버타 플랙을 짝사랑한 나머지 그녀에게 구혼 했다가 거절 당하자, 자살했거든요. 제목처럼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이 세상에서는 가까이 갈 수 없음을 깨닫고 그만 목숨을 버린 거죠. 용기 있는 사람이었어요. 바보 같지만…’

그 노래는 Closer I get to you라는 노래였다. 그렇게 슬픈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녀는 맥주를 들이켰고, 뒤로 조금 제껴진, 그녀의 목젖과 하얀 피부와 함께 드러나는 그녀의 목선은 어깨와 더불어 안정감이 높은 스타일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남자 가수의 느낌을 조금은 이해해요. 자존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존심이 상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만큼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없죠. 난 유학생활 중에 …….한 남자와 ……동거를 했어요. 같은 유학생의 처지이고, 서로가 외롭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그래서 흔쾌히 그 사람과 같이 살기로 했구요. 나 이런 얘기해도 부담 안되죠?’

나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유학생의 신분으로 그 당시 동거를 했었다는 얘기는 그 당시 나의 정서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주제 였음은 분명했다.

‘그 사람은 철저한 완벽주의자 였어요. 서울에서 걸려올 수도 있는 국제전화에서 그 당시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아파트 안에 전화를 따로 두었고, 귀국할 때를 대비한다며, 필름에서 조차, 꼬투리를 남기지 않으려고 사진은 언제나 자신들의 사진기로 찍게끔 했고, 둘이 같이 찍는 사진을 위해서는 중고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구입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미국 유학을 하면서 찍은 사진에는 우루르 몰려서 찍은 사진 이외에는 전부 배경을 뒤로 하고 혼자서 찍은 것 밖에 없구요. 그나마 귀국 할 때는 내가 보는 앞에서 그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두 태우고 갔고…저 담배 좀 피울께요.’

그녀는 백에서 그녀가 주로 피우던 가느다란 검은색의 모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 하나 달라고 했지만 나는 첫 모금에 그 쓴 맛으로 인해서 얼마간을 피다간 꺼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열정은 있었지만 나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저를 철저히 이용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죠. 커리큘럼을 따라 잡으려면 엄청난 시간의 투자와 노력, 자기 관리가 필요한데, 그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요구하는 타입이었어요. 나는 섹스
후에는 절대로 공부를 다시 할 수도 없었는데 그 사람은 섹스 후에도 밤을 새고는 새벽에 나를 다시 깨워서는 저를 들복았고.. 아침이면 나는 풀곤죽이 되어 버린 몸으로 아침조차도 차려먹기 힘들었는데 그 사람은 조깅을 빼먹는 적이 없었고, 새벽같이 도서관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런 철인 같은 사람이었죠. 그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 사람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나의 안식처 였는데 그 사람은 나를 일개 섹스의 배설구 정도로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러는 사이 저도 조금씩 유학 생활에 익숙해지고, 그 사람의 패턴에 서서히 적응되어 가는 것을 느꼈어요. 그 사람처럼 저도 섹스 머신처럼 바뀌어 간 거죠. 나는 그 사람과 살았던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자주 받았어요. 보험도 되지 않아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 사람의 파격적인 섹스요구 때문이었죠.’

‘파격적 이라뇨?’

‘DP라고 들어봤어요?’

지금에야 알아듣지만 나는 그 당시 섹스 경험이 없었고 그런 지식은 도무지 관심이 없어서 인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외국 사람들은 섹스의 종류를 부를 때, 특별한 단어를 쓰죠. 이를테면 DP라고 하면 Double Penetration이라고 해서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하는 것이고, Orgy는 이름하여 다수의 남녀가 혼음을 하는 거고…아무튼 그 남자는 나와 살면서 나를 그런 부류들에게 자연 스럽게 접목시켰어요. 정신이 뺑글 돌 지경이었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광란의 섹스가 벌어지는 하루 하루가 저에게는 지옥으로의 급행열차에 탄 기분이었으니까요.’

나는 무슨 딴 세상의 동화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의 철저함은 몸서리 치도록 징그러웠던 그 준비성이었죠. 열심히 나와 섹스를 하다가도 불현듯 콘돔을 끼우고, 친구들을 불러 다가 섹스를 할 때도 반드시 콘돔을 갖고 오라고 당부하던 그 철저함. 외국 사람들, 특히 흑인들은 그 크기가 대단해서 일반 콘돔은 맞지도 않거든요. 다 이유가 있었죠. 같이 살다가 언제 끝낼지 모르는데 혹시 임신이라도 되면 서로에게 괴로울 뿐이라는 게 이유라고 언젠가 말하더군요.’

나는 그녀의 고백이 놀라왔다. 그런 일들을 스스럼 없이 얘기하는 것도 그러려니와 생면부지인 나에게 마음 속 저 깊은 곳의 감추어진 일들을 토해 놓는 것들을 그 당시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그녀도 그런 의 동조자가 아니었겠는가라는 의구심마저도 갖게 하였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쳐다 보면서,

‘시간이 갈수록 나도 나 자신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사람의 섹스 감각에 맞추어 살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내 자신이 하루라도 섹스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로 변해 있는 것이었어요. 난 내가 겁이 나기 시작 했죠. 그래서 병원을 찾아간 것이고… 의사는 나에게 섹스 중독증이라는 판정을 내렸죠. 듣도 보도 못했던 병명이었어요. 겉으로도 표도 안나고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섹스에 한해서 만은 기준도, 도덕도 없고 무조건 수긍하게만 되는 일종의 중독 증세라는 거죠. 이렇게 밤이 되면 나는 불안감에 떨어요. 섹스를 할 상대가 없으면 초조와 긴장,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덮쳐오면서 아무나 붙잡고 섹스하고 싶은 생각에 안절 부절 못하게끔 변해버린 거에요. 그 인간 때문에….지금 제 앞에 앉아있는 진우씨 와도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마도 오늘, 수천 번은 했겠죠.’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 미친 여자 같죠?’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녀의 심경을 이해할 생각을 전혀 하질 않고 있었다. 이미 음식은 반 이상이 식어 버렸고, 두 사람은 적막하게 흐르는 로버타 플랙의 노래를 들으며, 독약을 삼키듯이 술을 마셔대고 있었다.

‘이렇게 변해 버린 나는 이제 한국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도 들고…그렇다고 미국에서 불법으로 주저 않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이나 그렇고.. 그러다 보니 결론은 공부밖에 없었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결심하고서 귀국한 것이 바로 그 날, 올댓재즈에서 만난 날이에요. 그렇지만 나라는 애는 이제 어쩔 수가 없더 라구요. 형석씨의 제의를 거절하기도 전에 내 앞에 있던 형석씨는 나의 중독증세를 달래줄 안 앰플의 진통제에 불과했고… 그래서…’

나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자리를 잠시 피하기 위해서 였다. 그녀의 눈은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고, 나도 그녀를 위한 한 마리의 동물처럼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장실을 나와보니 그녀는 의자에 목을 젖히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나의 발걸음 소리가 나도 그녀는 미동도 하질 않았다.

‘진우씨, 오늘 제 애인이 되어 줄 수 있어요?’

그녀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돌아서 의자에 앉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챙피한 일이지만 저는 아직 여자 경험이 없어서…’

그녀는 나의 승낙대신에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내 얼굴을 슬며시 자신 쪽으로 돌려 놓으면서 그 파괴력 넘치는 입술을 조금 벌렸다. 고개가 옆으로 조금 틀어지면서 눈을 감는 것으로 보아 나는 키스를 하려 한다고 짐작했다. 곧 이어 내 입술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화끈한 그녀의 입술이 닿았을 때, 나는 얼결에 눈을 뜨고 말았다. 대개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키스할 때에 눈을 감는다고 들어왔는데 그녀는 그 반대였다. 나를 뚫어 질듯이 바라보면서 입을 맞추는 모습에 나는 황급히 입술을 箚?말았다.

‘미안해요. 제 버릇 이에요.’

그녀는 다시 한번 나에게 키스를 부추 켰다. 이번 에는 실눈을 뜨고 보았는데 그녀는 키스에 취한 듯 두 눈을 감고 나의 혀를 찾고 있었다. 키스의 경험이 없었던 나로서는 입술만 닿는 것이 키스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혀를 이용해서 타액으로 흥건한 나의 입안을 자유로이 헤집고 다녔다. 나는 바보처럼 입가로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그녀와의 키스에 열중했다. 나는 키스 도중에 그녀의 블라우스의 단추가 하나 둘 그녀의 손에 의해서 풀려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키스가 끝난 것과 동시에 나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녀와 거리를 두면서 눈을 살며시 떴다. 내 앞에는 블라우스가 열려 거의 드러난 어깨로 브래지어의 정면 후크를 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키스 도중에 발기된 내 물건은 가뜩이나 꽉 끼게 입은 청바지를 사정없이 쳐 받들고 있었기에 나는 앉아 있는 것 조차 어려웠다. 그녀는 웃으면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밑으로 내려다보니 열려진 브레지어와 블라우스를 다 벗지도 않은 채, 내 앞에서 바지 앞을 쓰다듬는 그녀의 풍만한 두 젖무덤이 낭실낭실 좌우로 흔들거리고…나는 옷을 다 벗은 것 보다 그렇게 걸치듯이 입고 있는 그녀의 나신이 더 매력적이고 섹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어깨는 조금 마른 듯 했고, 어깨 위의 자그마한 우두자국이 앙증맞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의 손 신호에 의해 허리를 들고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어 버렸다. 시원한 냉방이라고는 해도 하루종일 일을 하느라 땀냄새와 지린내에 절어있을 좇 인데도 아랑곳하질 않고 그녀는 심호흡을 하듯이 내 좇 위에 얼굴을 드리우고 냄새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 냄새가 페로몬 과도 같은 위로효과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생전 처음 여자로부터 받아보는 사까시에 몸이 움찔 거렸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대어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그녀가 리드 하는 대로 나의 몸은 그녀의 악기가 되어 연주되어 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이라는 말을 감안했는지 오랄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내가 멍하니 좇을 세운 채로, 헉헉대고 있자, 내 앞에서 나머지 치마를 벗어 내렸다.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팬티를 벗어 내리면서 말을 타듯이 내 좇 위에 둘러 앉았다. 그녀는 걸그적 거리는 것도 괜찮은지, 아니면 자신만의 연출인지는 몰라도 온 몸의 옷을 벗었는데도 맨 몸에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는 벗지를 않았다. 내 목을 껴 안으면서 나는 그녀의 옷과 딱딱해진 유두, 그리고 그 살결을 동시에 느끼면서 묘한 요염함을 느꼈다.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여자가 블라우스 한 장만 걸친 나신으로 바람을 휘가르면서 질주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나의 좇 위에서 몸부림 쳤다. 내 등을 돌려 안은 그녀의 손톱은 시시각각 나의 살을 파고 들어왔고, 아무런 준비 없이 섹스를 맞은 나는 도저히 사정을 조절할 여유를 갖질 못했다. 나는 어어어 하는 비명과 함께 어이없게도 그녀가 광란하는 상황도 감당하질 못하고 사정하고 말았다. 그녀는 나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들어가는 내 좇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광란적으로 씹을 내두르며, 자기만의 환희에 빠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보지에서 내 좇은 혼이 난 아이마냥 삐져 나와 버렸고 그녀는 안돼, 싸면 안돼라는 절규도 모자란지, 나의 등을 마구 때리면서 울부짖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소파로 엎어졌다. 그리고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잘 못했나 하는 생각에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미안해요. 나란 여자 원래 이래요. …섹스에 미친 년. 흑흑…내 자신이 저주스럽지만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된 저를 그나마 용서ㅎ---…….’

나는 용서가 안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동정을 가져가면서도 나에 대한 배려는 조금만치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씁쓸한 후회와 공허감…그녀와의 섹스는 형석이의 말만큼이나 즐겁다거나 유쾌한 놀이가 아니었다.

‘이제 많이 늦었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채근에 밀려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진우씨, 다음 번에 만날 때는 이렇지는 않을 거에요. 약속해요. 저 내일, 어때요? 내가 이리로 올께요.’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극구 내일 오겠다고 하고는 황급히 가게를 빠져 나갔다. 나는 바래다 줄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기에 실내를 좀더 치우고 나중에 가겠다고 했다. 목에 걸린 생선가시를 삼키려고 아무리 맨밥을 삼켜도 넘어가지 않고서 깔딱깔딱 목구멍을 성가시게 하는 것처럼 그녀와의 섹스는 나에게 거친 크로키의 느낌처럼 찜찜한 여운을 남겼다. 나는 다음 날 그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질 않은 채, 가게에 다시 나갔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서 맨 먼저 하는 일은 입구 옆에 걸어놓는 메모판을 실내로 갖고 들어오는 것인데, 나는 그 메모판에서 오늘 오겠다던 그녀의 메모를 발견 하게 된다.

‘진우씨,
우선 어제의 일을 사과하고 싶어서 이렇게 몇자 적어 봅니다. 황당한 년이라고 욕하셔도 되고, 아님 미친년이라고 하셔도 할 말은 없네요. 이렇게 글만을 남기고 돌아가는 제 심정은 그저 진우씨 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생각에서 입니다. 저는 저 같은 여자를 순수한 마음으로 대해 주는 남자를 이제껏 한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 남자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내 몸뚱아리와 섹스만이 탐이나서 허락하는 거겠지 라는 제 선입견은 왠만 해서는 없어지질 않는군요. 그런데 진우씨는 달랐어요. 아주 많이. 제가 갖고 있는 남자에 대한 편협한 생각들을 많이 바꿀 수 있도록 도와 준 셈이에요. 그래도 아직까지 바뀌어지지 않는 저라는 여자를 저는 잘 압니다. 그래서 도저히 진우씨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부디 저에 대한 나쁜 기억은 모두 잊으시고 착하고 예쁜 인연을 만나시길 빌께요. 멀리서나마…
즐거웠습니다. 그럼..

-윤희-‘

일을 하는 하루종일 난 기분이 우울했다.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그녀 보다도 솔직히 내가 더 했으니까. 그녀가 출국 한다던 이틀까지 나의 우울은 극에 달하고 두통은 왠만큼 진통제를 먹어도 낫지를 않았다. 젊디 젊은 놈이 두통 때문에 병원에 가기는 더욱 싫었고…그렇게 그 여름은 지나가고 나는 2학기 등록을 하지 않고 병사휴학을 하고서 군에 지원 입대를 위해 신검날짜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군대에 갔다 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 였다. 그러던 중, 학교를 나가지 않음으로 인해서 나와 형석이와는 뜸하게 가끔 만나는 관계로 되고 있던 중에 집으로 오랜만에 그가 찾아왔다.

‘야 이놈아! 꼭 이 형님이 이렇게 왕림해야 쓰겄냐?’

‘왕림은 무쉰, 군바리 될 날만 기다리는 놈에게 뭐 볼게 있다고 왕림씩이나?’

‘진우야, 놀라지 마라. 나 유학 가기로 했다. 그것도 미국으로.’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왠 뜬금 없이 유학?’

‘나 윤희씨랑 연락 많이 하고 지냈어, 사실은…’

‘너, 그 여자랑 사귀니?’

‘사귄다기 보다 미국에 가면 만날 여자니까 그렇지!’

‘미국가면 만나다니?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이야?’

‘그건 아니고, 그 근처에 있는 유일한 재즈학과 있는 학교를 그녀가 소개해 줬거든. 일단 랭귀지 코스는 윤희씨 학교에서 다니면서 토플 점수를 좋게 받으면 그걸 갖고서 그 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오디션을 받는다 이거지. 그 학교는 오디션에 통과하지 못하면 다닐 수가 없대나봐, 그것도 재즈로…’

나는 군대에 대한 부담감이 없이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형석이가 부러웠다.

‘좋겠네. 미국 물도 먹고, 거기서 아주 않오는 거 아냐?’

‘음,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아하! 그건 농담이고, 와야지 왜 않와?’

내가 신검을 받는 날, 형석이는 미국으로 출국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출국 날인데 나는 신검으로 인해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신검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과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신체검사 불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었다. 항상 뇌리를 떠나질 않던 두통이 그 원인 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시력과는 상관없는 선천성 불교정성 난시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방위조차도 될 수 없는 결과였다. 나는 홀가분 하기는 했지만 군대도 가지 않은 신분으로 사회생활이 제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마저 앞섰다. 군대 문제가 사라지고 형석이도 떠나자, 나는 더욱 더 외톨이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도 활기를 잃고, 취미였던 섹스폰도 점차 멀리하는 시기 즈음에 형석이가 미국으로 간 1년쯤 지났을 때인가, 미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 들었다. 그 안에는 비행기 표와 외국 스타일의 청첩장 그리고 복사해서 보낸 듯한 그 재즈학과의 입학허가서 그리고 형석이의 편지가 있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합격했노라!
진우야, 형님이 드디어 토플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그 학교에 당당 입학하게 되었다.
어떠냐? 기쁘지? 이 모든 영광을 그러니까 네가 아니고 말씀이야…..나는 특별히 윤희씨 에게 돌리고 싶다. 내가 합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 바로 윤희씨야. 내가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아예 윤희씨의 아파트에서 둥지를 틀었었어. 생각보다 정말 괜찮은 여자 더라구. 그래서 이제는 합격도 되고, 뭐 합격으로 인생이 종친 것은 아니지만, 윤희씨와 한번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말이야. 편지에 비행기 표는 받았으리라고 믿는다. 날짜에 맞추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렴. 한국에서 부모님도 오시고 하지만 초청할 친구는 너 하나밖에 없더라구. 없는 돈 쪼개서 윤희씨가 보내는 비행기 표니 공수표 때리지 말고 꼭 와. 형수 될 사람 얼굴도 봐야 허질 않겄냐! 껄껄껄…알았지?

-친구 형석으로부터-

P.S.색스폰 꼭 가져와. 우리 한번 옛날 처럼 놀아 봐야지?’

형석이와 윤희씨의 급작스런 결혼. 나는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형석이가 그녀와 결혼 한다는 사실에 나는 한동안 말도 못하고 그의 편지를 물끄러미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날짜의 촉박함 보다도 나는 여권을 만들 일과 미국방문비자를 받는 일이 시급했다. 억지춘향 으로 나는 부랴부랴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생전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에 나는 내내 기내에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항에는 윤희씨와 형석이가 나와있었다. 형석이는 그 긴 머리를 레게파마로 디디 꼬와서 잘 못 했더라면 못 알아 볼 뻔 했다. 윤희씨는 서울에서 볼 때보다 조금 살이 올라 아주 보기가 좋았다.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우선 축하 드려요.’

나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형석이가 가로막으면서,

‘악수는 무슨 악수, 형수에게 큰 절 해야지 임마!’

세 사람은 오랜만에 낄낄대며, 공항이 떠나가라고 웃었다. 아파트로 가는 도중에 차에서도 윤희씬 말이 없었다. 예전처럼 형석이 혼자서 계속 주절 대면서 미국 사는 얘기며, 결혼 준비에 대한 얘기들을 했다. 나는 뒷 좌석에서 가져온 색스폰 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이미 지난 주에 도착하신 형석이네 부모님께서 와 계셨다. 분주한 방안이 꼭 서울에 온 기분이었다. 독자인 아들을 외국에서 조촐하게 장가를 보낸다는 것과 나이 많은 며느리를 본다는 것에 조금은 섭섭하신 눈치 였지만 누가 보더라도 참한 윤희씨의 모습과 남편 될 사람을 위해 유학 생활 도중에 정성을 다해 지원 했었던 심성에 점수를 후하게 주신 듯 했다. 방이 비좁아 나는 아파트와 가까운 곳에 있는 Motel 6라고 하는 작은 모텔에 묵기로 했다. 이틀 후로 다가온 결혼식으로 해서 두 사람은 아주 바빴고, 나는 시차 적응이 어려워 도착한 날 아침부터 그 다음날 점심때까지 내리 잠을 퍼질러 잤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오후 4시였다. 배도 고팠지만 방안에 들어서는 두 사람이 들고 들어온 KFC의 튀김닭 냄새와 어디서 테이크아웃 해왔는지 냄새가 기가 막힌 중국요리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먹고 조금 쉬겠다고 해서 둘은 금방 돌아갔다. 내일은 두 사람의 결혼식이었다. 나는 축하와 축복을 두 사람 에게 퍼부어 주어야 할 입장이었는데 실제 내 마음은 그렇질 않았다. 저녁때 샤워를 끝냈을 즈음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윤희씨가 서있었다.

‘어쩐 일로… 형석이는?’

‘형석씨는 친구들이 배?러 파티에 데리고 갔어요. 총각 마지막 날이라고 이 나라에서는 결혼 전날, 신랑 될 사람을 데리고 야한 곳에 가서 하룻밤 지내고 오는 것이 풍습이에요. 진우씨는 시차 적응이 힘든 것 같다고 제가 말렸구요. 어차피 결혼식 이후에 회포를 풀어도 될 것 같아서…’

‘아, 내가 깜빡 했네. 어서 들어 오세요.’

나는 내가 샤워하고 타올만 두른 차림이란 이면서도 문 밖에 그녀를 세워 놓았던 것을 잊고 있었다.

‘앉으세요. 준비는 다 되었죠?’

‘외국에서의 결혼은 마음만 먹으면 무척 간단하게 치룰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한국 못지 않게 돈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유학생 신분이라 조촐한 편이 더 나아요. 눈총도 않 받고…’

두 사람은 너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 나는 윤희씨 네의 식구가 결혼식에 오느냐고 물었다. 시내의 일급 호텔에 벌써 식구들은 와 있단다. 나는 속으로 정말 대단한 집안 들이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 날은 정말 미안 했어요. 본의 아니게 괴롭혀 드린 것 같아서…’

‘아니에요. 저는 그때 윤희씨를, 아니 이제 뭐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때 저는 다시 한 번 뵐 줄 알았어요. 너무 두서없이 헤어지는 바람에 잘 가시라는 인사도 못했고…또 저 나름대로 못다한 말들도 있었고…

‘무슨 얘기 인데요?’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뭐, 그,런 거…

나는 말을 얼버 무렸다. 이제는 별 소용도 없는 옛날 얘기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인지 하는 생각 때문 이었다.

‘이제는 뭐 별 소용없게 되 버렸지만요. 그때는 말없이 떠나가신 것이 조금 섭섭했었어요. ‘

나는 그 말과 함께 가방 속에 여권과 함께 들어 있던 내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다이어리 사이에 곱게 접혀져 있던 종이를 꺼냈다. 그녀가 남긴 메모지 였다. 나는 그것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 메모지를 다시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그렁그렁 하다가는 이내 방울방울 메모지로 눈물을 떨구었다. 메모지의 잉크가 번져가면서도 그녀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제가 괜한 걸 보여 드렸나 봐요. 그냥 재미있어 하실 것 같아서 갖고 왔는데…’

그녀는 아니라며, 그 메모지를 나에게 돌려 주었다. 나는 다시 곱게 접어서 다이어리에 끼워 넣었다.

‘이렇게 온 건 다름이 아니고, 저도 할 말이 남아있다는 생각 때문 이에요.’

나는 탁자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또다시 백에서 눈에 익은 모아 담배를 꺼냈다. 방은 이미 흡연실로 체크인을 했기 때문에 염려는 없었다.

‘앞으로 언제 다시 진우씨를 볼 수 있겠어요? 5년, 10년, 아니 20년? 형석씨는 한국에 나갈 생각이 없다고 해요. 저도 그렇고…내일이면 결혼식이고 다시는 이렇게 둘이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는 허락되지 않을 거고…그러니 오늘 만큼은 그때의 내가 아닌, 보통의 여자 윤희로 진우씨 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어서…’

그녀는 힘든 말을 떼어내고 있었다. 간간히 멈추는 호흡과 떨림이 그녀의 괴로운 심정을 다분히 전해주고 있었다.

‘정말 못 보게 될까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언제까지고…’

나는 그때 일어서서 창 밖을 바라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내 등 뒤로 그녀가 나를 껴안고 있었다.

‘진우씨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아요? 저는 제 과거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잊어줄 남자가 정말 그리워요. 형석씨는 모르고 있지만 진우씨는 아시잖아요?’

그녀는 내 등에 얼굴을 부비면서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내 등의 감촉을 뺨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 보는 것 같더니만 이내 일어서서 천천히 서두름이 없는 손길로 옷을 벗어나갔다. 나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창문의 커튼을 닫았고…그녀는 처음 섹스를 하는 여자처럼 젖과 보지를 손으로 가린 채, 내 앞에 섰다. 나는 가리고 있는 그녀의 두 팔을 좌우로 걷어냈다. 그녀의 나신은 나에게 아마죤의 원시림 같은 탐험의 존재, 그 자체였었다. 자다가 깰 때 마다 살갗에 진짜로 남아있는 것 같은 그녀의 팔랑거림 들이 모두 확실히 느껴져서 피가 뻗치도록 살을 긁어댄 적이 여러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살풋이 껴 앉았다. 속으로는 절친한 친구의 신부될 사람에게 해서는 안되는 짓을 내가 하고 있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의 묵시적인 이해는 서로의 몸을 통한 마무리만을 인정하는 분위기 였다.

‘후회 않해요?’

나는 그녀의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속삭였다.

‘저는 오래 전부터 진우씨가 나를 여자로 대해주면서 안아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가봐요. 오늘 오지 않으려고 그렇게 참았는데 결국 할 수 없었어요. 내일이 결혼이지만 진우씨 에게 이렇게라도 내 몸을 주지 않고는 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녀의 말은 나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뇌리에 와서 박히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이 느낌과 그녀의 온기, 호흡, 향기 등을 모두 머릿 속에 담고 돌아가리라고…

‘윤희!…’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토씨 없이 불러보았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깃털 같은 그녀를 번쩍 안아서 침대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내가 자느라 흐트러진 침대 위에 누워 나를 올려다 보면서 웃고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진우씨, 우리,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는 아니라도 반드시 만나게 되겠죠.’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젊은 날의 우리 세 사람의 얽혔던 실타래 들은 다시 만나지 않음으로 인해 조용히 세월의 앙금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처럼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의 입가에서 환한 아카시아 향내가 났다.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입술을 나는 눈을 감고 손 끝으로 더듬어 나갔다. 그녀는 이미 발기한 내 좇을 말아 쥐고는 천천히 주무르고 있었고…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기억해야 되는 의무감을 가진 것처럼 그녀의 온몸에 키스로 도장을 찍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짙은 눈썹, 반듯한 이마, 부드러운 뺨, 입술, 고운 턱선, 목, 어깨, 팔, 손끝….나는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려고 눈을 바로 뜨고 그 모든 하나 하나들을 소중하게 머릿 속에 담아 나갔다. 그녀의 젖과 겨드랑이을 지날 때에 그녀는 나를 내려다 보면서 간지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알맞은 아랫배와 둔덕에 다다라서는 이미 바르르 떨리다 못해 골반이 조금씩 들썩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돌려 뉘였다. 내 아래에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엎드려 있는 사슴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사정없이 핥았다. 마치 살을 녹혀 먹을 것처럼, 그녀의 둔부는 나의 핥아 내려감에 보조를 맞추어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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