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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1:39 747회 0건
바람의 고향 3

3. 줄탁

“어머, 너 혁진이 아니니?”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나 귀에 익었다.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보는 순간, 내 목표는 정해졌다.
“어, 사모님 안녕 하세요?”
주말이었다. 하복을 착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만, 예년 보다 일찍 찾아온 여름 기온이었다. 역에서 내려서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걸어서 가면 한 삼십 분 남짓하고, 버스를 타면 십여 분 안쪽인 거리에 집이 있었다. 버스 정류소에 기다리니 도로 포장 관계로 버스가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았다.
날씨도 한결 더워진 것 같았지만, 시골의 날씨는 바람이 불면 시원했다. 그렇게 빨리 가야 할 이유도 없는 터여서, 손에 책을 들고 걷기로 했다.
읍 중심지를 벗어나자, 평화로운 들판이 나타났다. 붉은 빛으로 살아있는 흙과, 그 사이에서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는 풍부한 물, 그리고 주위에 둘러 쳐진 연두색 보다 조금 더 진해진 잎사귀들을 흔들고 있는 나무들.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먼지 나는 회색빛의 도로와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삶과 치열한 투쟁을 하는 지친 그림자만 보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싱싱하게 살아 있고,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경치에 빠져서 보던 책을 손에 쥐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앞에서 뒤로 초점을 맞추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계시였다. 그저 꿈으로만 자라던 작은 카사노바가 부화하는 순간이었다.
새의 알들이 부화할 때가 되면, 안에서 연약한 부리로 껍질을 두드린다. 그러나 연약한 부리로는 단단한 껍질을 깨지 못한다. 어미 새가 그 소리를 듣고 살짝 깨뜨려 준다. 그것을 줄탁이라고 한다. 내가 안으로 잠재우며 키워 왔던 욕망의 씨앗을 두드려서 깨뜨려 준 소리였다. 물론 그 순간은 그런 결론을 미리 말할 수 없었다. 미래는 언제나 불안하므로.

그녀는 내가 국민학교 육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사모님이셨다. 선생님이 처음 우리 학교로 부임하셨을 때는 내가 오학년 때였다.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 선생님은 실력이 높은 것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그 선생님께 개인 지도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때 형편으로는 공무원 한 달 치에 가까운 과외 수업비를 낼만한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대로 부유한 부모님을 둔 까닭에 나는 오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면서부터 그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았다. 그리고 육학년이 되자 담임이 되었다. 나는 선생님 집에 살다시피 하였다. 매일 학교가 파하면 선생님 집에서 공부를 했다.

내가 선생님에게 그렇게 과외를 받은 이유는 학업 성적도 이유였지만, 사실은 사모님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모님은 스무 살 후반이었다. 돌이 채 되지 못한 간난 아이를 낳은 후였는데, 사모님은 처녀처럼 날씬했고 예뻤다. 키도 컸고, 눈이 컸다. 얼굴이 당신 한창 인기 있던 문희라는 배우를 닮았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사모님의 인물을 칭찬했다. 그때 학교 선생님 사모님이라면 대우가 달랐다. 사모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 빛을 잃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은 사모님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럴 때면 상냥하게 웃으면서 ‘혁진씨 공부 안 하고 뭘 그렇게 봐요?’ 하고 농담을 했다.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황홀했다.
그녀는 내게 안개처럼 찾아와서 스며든 나비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이 바로 그녀를 닮았으리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그때는 육욕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선생님은 바싹 마른 체질이었다. 사모님과 다섯 살 이상 차이가 났는데, 몸이 약하였다. 늘 기침이나 감기를 달고 살았다. 집이 가난한 탓에 잘 먹지 못하고 커서 그렇다고 부모님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선생님은 사모님에게 꼼짝을 하지 못하였다. 뭐라고 말대답을 하면, 사모님의 음성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러면 선생님은 슬그머니 표정을 감추었다. 그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공부하러 가면서 집에 있는 물건 중에 내 맘에 드는 것을 가져다 드렸다.
“어머, 혁진씨 선물인가?”
서울말을 쓰는 사모님이 그렇게 반겨 줄 때는 그날 공부가 잘 되었다. 내가 시험을 잘 치면 그녀는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 말을 잘 듣는 것이 그녀의 환심을 산다는 것을 체득하였다.

가끔 일요일에 과외를 받으러 가면, 사모님은 아기 목욕을 시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잽싸게 도와주었다. 선생님의 희고 긴 손가락이 내 손과 부딪칠 때는 온 몸에 전기가 돌았다.
사모님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모두들 가난한 시절이라서, 웬만한 집이 아니면, 여자가 미술을 전공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여고만 졸업하고 선생님에게 시집을 온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겐 큰 불만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별로 눈에 띄는 그런 호남이 아니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아니면, 눈여겨 볼 사람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합격하던 날. 사모님이 더 좋아했다. 너무 기뻐서인지 날 껴안고 동생처럼 축하해 주었다.
“넌, 참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나중에 나 잊지 마.”
어찌 잊을까. 나의 모나리자인데.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자주 찾아갔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하지만 시간이란 참 묘하다. 도회의 번화한 모습과 세련된 사람들 속에 생활하다보니 사모님의 생각은 슬며시 희미해져 갔다. 그때만 해도 그저 여자의 얼굴에 모든 기준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세련되고 이쁘게 화장을 한 도시 여자들을 보면서 풋풋하게 아름다움을 주던 사모님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여자를 생각하면서도 내내 길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세련된 여대생을 상상했지, 사모님은 생각하지 않았다. 보석이 바로 곁에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제 딴에는 도시 물이 들었다고 건방을 떤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웃 마을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서 얼굴을 자주 찾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었다.
잊지 말아달라고 한 축하의 말은 아침 햇살에 사라진 이슬처럼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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