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쿼터스(10)

이른 아침 개발팀 회의를 시작했다.
양과장의 다이어그램을 토대로 이대리가 부품을 수배하면서 나름대로의 문제점이 있다며 회의를 요청했다.
아날로그 신호를 무조건 다 받아 들이려면 필터를 많이 써야하고 그러면 마이크로프로세스에 부담이 많이 갈텐데 8비트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다.
음성신호를 전류로 변환할때 사용하는 마이크로폰의 성능에 따라 데시벨이 흡착되어 신호에 좋지 않은 점과 데시벨을 낮추면 신호가 약해져서 필터링 하기도 전에 신호를 판독할 수 없게 되고, 전력을 높이면 신호는 강하지만 회로가 커지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양과장은 이런 모순이 내포된 다이어그램에 대한 이대리의 지적에 고심하고 있다.
전력이 높아지면 마이크로폰에서 발생한 전류의 크기가 커지고 회로에서 갑자기 높아진 전류를 어느정도 극복하지 못하면 회로가 타 버릴 수도 있다.

"박사님, 상호 모순되는 점이 노출됐는데 어떻하죠?"
"원칙을 먼저 정하세요.
정해진 원칙을 위반하려는 시도는 일단 모순이라 추정하세요.
발견된 모순이라도 나름대로 필요하다 싶으면 정해진 원칙을 수정하세요."

"아이구, 행님요. 선문답하십니꺼?" 탁과장이 이해하지 못한 듯 거들어온다.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그게 답이다."
"왜요? 모순이 원칙을 이긴다면 그게 뭔 원칙입니꺼?"
"여러분은 너무 디지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자연계에는 디지털이 없다는걸 잊어선 안되요.
모든 개체는 아날로그 신호를 갖고 있는데, 올챙이프로젝트에서는 자연계의 모든 신호를 받아들인 후, 불필요한 신호는 필터로 제거하고 필요한 신호만 디지털로 활용하는 일종의 지문인식과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문인식이요?"
"그래요, 아날로그 신호는 임피던스값을 체크하거나 주파수 파형을 체크해야 전기량으로 변환할 수 있는데 그런 값들을 필터로 채용하려면 회로가 너무 커지는거 아시죠?
올챙이의 마이크로프로세스는 겨우 8비트인걸 잊어선 안되요.
우선 필터링 하기 전에 모든 신호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환시키세요.
변환된 16진수를 스코프해서 모델링값을 찾도록 하시고, 찾아진 모델값을 지문과 같은 방식으로 저장해선 필요할 때만 100만분의 1초 단위로 블럭화된 자료가 날라오면 패턴체크를 해서 신호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아마 이 방법을 응용한다면 무수한 자연계의 소리를 모델링해야 하는 노고는 따르겠지만 프로세스는 수백만배 빨라지고 신호해석이 정확하기 때문에 판단도 정확해 질껍니다."

"박사님 이해는 되지만 저흰 디지털패턴을 어떻게 추출해야 할지 방법을 모릅니다."
"그건 간단해요. 디지털이라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느끼는 그대로를 아날로그에서 얻어 보세요.
그런 노력을 하는 동안 컴퓨터에다 A/D변환된 값을 계속 흘리면서 벌크방식의 덤프를 모니터에다 뿌려봐요. 그럼 일정한 패턴이 발생할꺼고 그때 모델링 데이타베이스에 16진수값을 저장하면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방식은 모델링 추출도 쉽지만 처리속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핵심기술에 해당될껍니다."

"전력 상승에 따른 회로 불안정은 어떻하죠?"
"외부신호와 접점을 갖는 회로부분에 저항값을 높여봐요."
"왜곡되지 않을까요?"
"왜곡됩니다. 하지만 A/D변환 이전에 증폭회로를 먼저 거치도록 해 보세요.
왜곡된 임피던스는 다시 접점을 통과하자 마자 증폭회로를 통해 회복될테고 변환기에서는 잃었던 신호를 정확히 마이크로프로세스에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렇게 되면 회로의 안정성도 보장되고 신호도 놓치지 않을 수 있겠네요." 양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마이크로프로세스는 요즘 8비트에서 16비트로 많이 이동했는데 굳이 8비트를 쓰는 이유는 뭐죠?
부품을 수배하다 보니 가격차이도 없던데요." 이대리가 새삼 이의를 단다.

"첫날 얘기했지만 우리의 목표는 32비트였지.
올챙이프로젝트는 그 목표로 가는 징검다리 역활을 하는 것이니까 회로를 간소화하고 기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컨트롤러만 추가로 장착해서 쓰면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의욕은 알겠지만 개발기간 단축과 경험 축적을 우선으로 한 중간 프로젝트의 성격탓도 있는것이지요."

"마이크로프로세스의 성능에 비해 양과장님의 다이어그램은 회로가 너무 복잡한것 같던데요."
"내가 검토해봤는데 충분해요. 메모리도 추가할 필요 없이 기능성 IC와 임피던스를 제어하기위한 저항값만 적절히 조절하면 부하를 최소화할 수 있는 좋은 설계니까 양과장을 신뢰하고 부품을 선정해 봐요."

회의라기 보다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맨파워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 토론할 때는 직급을 따지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해왔고 그 덕분에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일을 참고 따른는 경우는 드물다.

"행님요, 디지털회로에서 왜 아날로그 신호를 그리 많이 따집니꺼?"
"탁아, 디지털은 아날로그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단다.
너희가 디지털에 익숙하다지만 그런것만 사용해서 어떤 회로를 설계한다면 그것은 마치 종이에 호랑이를 그려놓고 숲속을 달리라는 격과 다를 바 없단다.
전자회로를 디지털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날로그를 해석해서 디지털로 변환할 능력이 갖춰진 상태에서 더 빠르고 더 작게 제품을 만들겠다는 것이지 아날로그를 배제하겠다는 뜻은 아니란다."
"사람들은 전부 디지털화라고 하는데 행님은 어찌 꺼꾸로 말하죠?"
"그건 아날로그를 해석할 칩들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회로를 설계한다는 뜻이란다."
"아이쿠, 난 헷깔려서 참견도 못하겠수."
"하하, 너도 많이 따라오고 있잖니. 조금 만 더 견디면 나를 이길라구 그럴꺼다."
"에잉, 제가 어떻게 행님을 이겨요?"
"앞물결은 뒷물결에 밀려나는 법인것을..."

"행님요, 이번에 과학위성 우리별4호 잃어버렸다 찾은거 어떻게 생각하요?"
"괘도를 잘못 계산해서 엉뚱한 위성에다 신호를 때렸다는데 난 이해가 안간다."
"열한번이나 교신을 시도하다 겨우 동반 발사한 영국위성의 신호로 찾았다던데요."
"나도 들었다. 저위도 위성이라서 간혹 괘도를 잘못 계산할수는 있겠지만."
"과학위성은 왜 저위도에다 쏴 올리죠?"
"방송위성은 계속 동일 지역의 머리 위에서 전파를 주고 받아야 하기 때문에 3만5천킬로미터 이상의 우주 공간에 쏴 올리지만 과학위성은 정밀한 사진촬영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겨우 800킬로미터 정도에 쏴 올려야 하지.
방송위성을 보통 고정괘도 위성이라 하는데 비해 과학위성은 음속의 20배 정도로 지구 괘도를 거꾸로 날면서 한시간반만에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도록 설계한단다."
"그럼 머리위에 뚝 떨어질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먹구름이 350미터 상공에 있고 하얀구름이 600미터 상공에 있는 것에 비교하면 아주 먼 거리인건 사실이지만 저위도 위성은 자체 추진체를 갖고 있어서 연료의 수명이 다하면 지구 어딘가에 떨어지게 되어 있지."

"그럼 방송위성도 떨어져요?"
"아냐, 그건 너무 멀리 있어서 에너지가 다하면 우주쓰레기가 되는거야. 중력을 점차 벗어나서 언젠가는 무한한 우주끝으로 유영을 하겠지."

"행님은 아는게 너무 많아예."
"인터넷을 자주 이용해라.
책으로 읽기는 너무 딱딱하더라도 관심있는 분야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 짬짬이 읽고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는 지식이 축적되어 필요할 땐 응용할 수가 있게되지."

"나는 인공위성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단다.
다만 위성안테나를 컴퓨터에 연결하는 부분과 기지국에서 RF 통신을 하는 분야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이 방법은 앞으로 로봇프로젝트에 크게 접목될 분야니까 너도 신경써야 할꺼야."
"RF 정도야 뭐 신경쓸것 있어요?"
"그래, RF는 다 알지만 CDMA 기술과 같이 좀더 세분화시키는 방법이 검토되야 하거든."
"왜요? 지금도 열댓가지는 나뉘잖아요?"
"유비쿼터스에 적용하려면 열가지로는 안되지. 적어도 수백만가지 채널로 세분화 할 수 있도록 기술이 진보해야 할꺼야."
"아, 유비쿼터스에 RF를 쓰게 되나요?"
"다양한 방법이 논의 되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근거리 개체와 교신하는데는 RF 이상 가는것이 아직은 없단다."
"블루투스가 있잖아요?"
"하하, 니 말도 맞다."

해가 서산마루로 기울어질때 사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김박사, 몇일전에 올챙이 프로젝트에 자금 투입한다는것 말인데, 예산을 5천만원 책정했으니까 지출품의서를 써서 적절한 때 자금을 아끼지 말고 쓰세요."

"사장님의 배려 감사 드립니다."
"난 김박사 당신의 올챙이에 대한 분석을 끝냈는데, 아주 획기적인 제품이더군."
"아직 회로만 겨우 다이어그램 수준으로 만들고 부품 선정도 안끝났는데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계시죠?"
"허허, 내게도 첩보가 있다네. 자네의 능력만큼이나 나도 정보력은 있으니까 맘 푹 놓고 열중하게."

정말 알수 없는 노릇이다.
내 맘속에서 조차 올챙이 프로젝트에 대한 확신이 안선 마당에 사장님이 앞질러 제품에 대한 확신을 어찌 안다는말인지. 조금도 의심가는 사람이 없는 마당에 그분의 선경지명에 감탄만 할 따름이다.

날이 어두워지며 직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뜬다.
탁이 가까이 오며 뭔가 할 말이 있는듯 주저한다.

"또 뭔데?" 퉁명스럽게 탁에게 말을 건넨다.
"행님요, 오늘도 교수님 만날끼요?"
"왠 관심?"
"저도 공부좀 할라꼬예."
"쟈슥아, 교수가 학교 밖에서도 공부 가르친다냐?"
"행님은 교수한테 과외받는거 아닌교?"
"됐다. 술이나 한잔 하자."
"왜 말을 짤라예?"
"됐다니까. 어서 자리나 치우고 요 앞 호프집으로 와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웃옷을 걸쳤다.
"알써예, 퍼뜩 그리 갈께예."

시끌한 술자리가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
클레식이 흐르는 선율에 맞춰 라이브 가수가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뽑아낸다.
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혼탁한 담배연기에 휘말려 멀리 퍼지지 않는다.
멋들어진 춤 솜씨를 뽐내지만 손님들은 각자의 흥미거리에 눈여겨 보지 않았다.
프로젝트 빔을 타고 뿌려지는 영상이 담배연기와 만나 멋진 무지개를 연출한다.

"행님요, 오래 기다렸어예?"
"자리만 치우고 나오랐더니 삼십문이나 걸리냐?"
"아휴 말마예, 명옥이 고년이 출입문에서 딱 기다리구 있잖아예."
"그놈이 널 왜 기다리냐? 너 일주일간 생각하고 만나랬더니 아직도 만나냐?"
"제가 뭐 압니까. 두발달린 짐슴이 찾아오면 그만이지."
"단단히 일러두지만 일주일 생각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알써예, 머리 아프니까 후딱 한잔 주이소."

얼마간의 술이 오가다 보면 찌든 얘기들은 맥주에 씻겨 내려가고 기분전환이 되어 기분좋은 취기만 남는다.
탁과 어깨동무를 하며 계단을 같이 올라간다.
흥겹지만 잊혀버린 옛노랫가락을 더듬으며 계단을 올라간다.
하루가 지나가기 위해 밤이 찾아오면 또 다른 하루를 맞이 하기 위해 각자는 집으로 향한다.
휘청이며 탁을 택시에 태워보려 했지만 완강히 버티며 집까지 바라다 준다고 우긴다.

전화벨이 울렸다.
"어, 왜?"
"술 취했어?"
"어, 많이."
"데려다줘?"
"당근."
"어디야?"
"지하도 건너 회사앞으로 내가 걸어갈께."
"알았어. 5분이내에 차 댈께."

전화가 끊어졌다.
탁이 휘청이며 내 어깨에 메달린다.
"행님요, 교수님이제?"
"응."
"지도예, 명옥이가 쪼그리구 행님이랑 술 끝날때까정 기달리구 있었어예."
"니가 나를 엮겠단 얘기니?"
"행님은 되고 저는 안된단 말입니꺼?"
"넌 달라. 명옥인 돌봐주라 내가 부탁한 애잖니."
"명옥이가 미성년잡니꺼? 지 좋은대루 냅둬줘예."

이놈들이 작당을 하고 나에게 술을 먹인 다음에 내가 숙을 만나는 걸 기회삼아 자기들의 끈을 단단하게 조여매려한 모양이다.
박사학위 따며 온갖 논리로 현혹하는 기술을 배운바 있지만 딱히 두 사람의 행동을 자제시킬 명분이 없다는 것, 의도된 바 있어 나를 붙잡아두고 같은 처지로 몰고 가려한다는 배신감이 교차했다.

"니 인생은 니 몫이다.
너를 아끼는 마음에 후회없는 선택을 했으면 하는 배려였다만 네가 그 모양으로 상황을 만들어 버린다면 나도 더 이상 너를 챙기기 어렵다.
알았다. 가라. 보기 싫다."

명옥이 어느새 차를 몰고 나타났다.
"아저씨, 오빠 혼내지 마세요. 오빤 죄없어요." 울부짖으며 메달리는 명옥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래, 너도 후회없는 선택이길 바란다." 포기한듯 명옥의 머릴 쓸어주며 탁을 태워 가도록 했다.

"행님요, 저 맘 아픈거 알지예?"
"모른다. 하지만 간섭은 안하마."

"엉~, 엉~" 탁은 복바친 설음을 토해내며 차에 실린 채 울음을 터뜨린다.

가슴이 미어질 것 처럼 아프다.

지하도를 어떻게 건넜는지 모른다.
슬픈 마음에 숙의 차를 타자 마자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귀를 누르던 고난의 길을 걷던 그저 죽으면 한줌 흙 되는 것을 어찌들 아둥바둥 사는걸까?
사랑도 영화도 한낮의 꿈이란걸 왜 알지 못할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차는 도봉동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