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쿼터스(7)
개발팀 직원들의 모습이 하나둘 사라져갈 때 쯤 되서야 나는 서랍을 잠그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탁이와 만날 장소까지 이동하면서 머리속은 상념들로 가득하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처 투성이가 된 명옥의 가슴을 보듬어 주길 바랬던 탁이 기대를 저버리고 욕정을 푸는 상대로 만들어 버린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까불거리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적이 없던 그 놈이 어떤 생각으로 이혼까지 생각하며 그를 보듬으려고 하는 걸까?
오빠로서 보듬을 상처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자신을 전체 불살라 명옥을 구하려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뛰어 들었단 말인가?
"어서옵셔~."
낯익은 종업원의 힘찬 외침을 듣고서야 내가 중국집 앞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환한 조명불 아래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소리가 섞여서 잘되는 집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게 하는 집이다.
길게 늘어섰던 점심때의 풍경과는 달리 죽엽청주 한잔이 오가며 팔보채, 양잠피 등 군침이 도는 요리가 식탁을 장식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방 문을 열었다.
속죄하듯 다소곳하게 마주앉아 침묵으로 일관하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뭘 좀 먹으면서 기다리지 그랬어?"
"아니예, 행님 올 때까지 야맘속 얘기좀 들어보고 있었어예."
명옥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눈물자욱을 훔치던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아저씨, 저 어쩌면 좋아요?" 내가 들어서자 마자 명옥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 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선 요기부터 하자. 여긴 식당이니까 그게 예의 아니겠니?"
"뭘 드실라꼬예?"
"우리도 팔보채랑 양잠피 시키고 죽엽청주를 반주로 한잔씩 하자."
"알써예." 탁은 쪽문을 열고 종업원에게 음식 주문을 마친 후 돌아와 앉았다.
"행님예, 저 어쩌면 좋습니꺼?"
"우선 차분히 얘기를 풀어나가는게 좋겠다.
남녀 상열지사를 남이 끼어들어서 뭘 하냐만은 너는 내가 아끼는 후배고 이 아이는 또 나를 따르니까 모른척 할 수도 없구나.
우선 명옥아, 너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
"전 할말이 없어요. 잘못했어요."
"그래, 네가 한 일이 잘못이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맹세가 되는 셈인데, 정말 탁이 오빠를 마음속의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봐야하니?"
"아뇨, 맘 정하지 못했어요. 좋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탁아, 명옥이의 말을 풀어보면 너에게 정을 준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그 말에 동의할 수 있겠니?"
"동의 못합니더. 쟌 내 사람이야예."
"그럼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구나.
한명은 맘에 없는데 생긴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고, 한명은 죽자살자 덤비는 꼴로 판명됐으니 이젠 명백하게 지난 일을 없었던 일로 치면 끝나겠다."
"아저씨, 그게 아니고요. 제 맘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저도 오빠가 싫지 않아요."
"그럼 잘못했다는 말을 해선 안되는 법이지.
당당하게 오빠를 받아 들이겠다고 했어야 했고, 잘못된 일이 아니므로 반성하거나 울어서도 안될 일이지."
"행님요, 이젠 두사람의 뜻이 같아 진거지예?"
"그래,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아 진 셈이구나.
하지만 그 마음이 일시적인 것인지 영원한 것인지에 대해선 어떤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겠니?"
"행님요, 전 마누라랑 이혼할랍니다.
그람 증명되는거 아닙니꺼?"
"명옥아, 넌 어떤 방법으로 일시적 충동이 아니었다 말할 수 있겠니?"
"전 몸에 오빠의 이름으로 문신을 해서라도 제 맘이 한결 같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요."
"좋다. 일시적 충동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얘기했으니 이제 부터는 내가 중재를 해 주겠다.
잘 들어봐라."
잠시 뜸을 들이며 두 사람의 잘못된 만남을 원만하게 해결해서 원위치 시킬 방법을 머리속으로 구상해야 했다.
서로가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방과 한 몸이 되길 갈망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몰라도 일시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면 한 가정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꽃처럼 어여쁜 처녀 하나는 채 피기도 전에 꺽이는 꼴이 되고 만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우선 밥부터 먹고 얘기하도록 하자."
종업원이 들고 온 요리를 섞으며 작은 접시에 음식을 나눴다.
은은한 향기가 좋아 즐겨 마시던 죽엽청주마저 목에 꺼끄럽게 느껴졌다.
침묵 속에서 내 말이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니 세상사는 일이 참으로 오묘하고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랑이 무엇인가?
받고자 하는 마음 없이도 한없이 내 것을 주고 싶은 마음.
불바다에 떨어진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내 몸을 아낌 없이 던지는 용기.
맺어진 인연의 끈이 몇겁의 세월 속에서도 끊어짐이 없이 계속되는 그리움.
진정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사랑이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탁아, 넌 처음엔 내 여자라면서 멀리하던 명옥이를 어떤 마음에서 받아 들이기로 했니?"
"몰라예. 순간적이었으니까예."
"니 나이가 있는데 설마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사랑으로까지 확대하지는 않겠지?"
"행님요, 사랑이 핵교 수업처럼 찬찬이 쌓아야 합니꺼?
전 순간적으로 돌아버렸어예. 그냥 야가 좋다니까예."
"그 말은 설득력이 없다. 적어도 자연과학을 이해하는 너의 태도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논리 부적절한 어거지로 들린다."
"행님요, 사랑한다니까예. 그냥 눈감아 주이소."
"명옥아, 니 아픈 상처를 어루만저줄 오빠로만 여기라 했는데, 또 네 마음에 상처를 남길 일을 또 한 이유가 뭐니?
예전에 받은 상처가 벌써 아물어서 다시 생채기를 만들고 싶었던거니?"
"전 오빠가 맘에 안들었어요.
어쩜 아저씨를 맘 속에 새겼으니까요.
몇번 만나면서 오빠의 따뜻한 배려가 내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아요.
이젠 오빠를 사랑하는 일이 기뻐서 아저씨한테 혼나더라도 눈감아 달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래, 넌 진정한 용기를 가진 아이구나.
오히려 나이 많은 탁이 오빠보다 더 진솔한 얘기를 하고 있어.
탁아, 넌 나이도 많고 남자인데 불구하고 네 주장이 너무 없어.
너의 얘기를 듣다 보면 화가 나려고 해.
넌 왜 명옥이 처럼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어거지만 부리고 같은 결과니까 같이 평가해 달라고 떼를 쓰니?"
"행님요. 제 입장이 안그렇습니꺼. 아까지 있는 몸으로 어떻게 행님한테 논리적으로 대들겠어예."
"그래, 니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한번 몸을 섞은 일로 인해 새로운 불행을 키워선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옥의 뚜렷한 입장표명은 이해가 충분히 간다만 너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그런 너의 뜻을 알고자 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당부할 말이 있어서다."
"어떤말요?"
"우선 네가 처했던 예전의 암울한 시기를 생각해 봐라.
너를 사랑하는 듯하며 너를 탐했던 예전의 오빠 친구들과 탁이 오빠는 다를 바가 없단다.
너는 엊그제 일을 해프닝으로 돌리고 이제 부턴 굳은 마음으로 너를 평생 편안하게 보듬어줄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떠야 한단다.
탁이 오빠도 진정으로 너를 사랑해 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너를 사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단다.
그 산은 평온했던 한 가정이 파괴되고 아빠와 엄마를 의지하며 살던 어린 아이들의 눈물이 바다를 이룬 후에도 넘기 힘든 높은 장애물이란다.
네가 조금만 탁이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면 영원히 너의 곁에서 너를 돌보며 힘들 때 위로가 되는 두 사람을 얻게 된단다.
탁이 오빠가 너를 어여뻐 해줄 것이고 나 역시 너를 귀여운 딸처럼 지켜봐 줄테니까."
"아저씨, 말씀을 들어보니 탁이 오빠를 사랑하는 것은 지난날 내가 겪었던 쓰라림 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미안해요."
"탁아, 너도 명옥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한 템포 늦춰봐라.
명옥이의 쓰라린 상처가 믿었던 오빠 친구들로부터 생긴 것이라면 이젠 너를 통해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다고 치자.
네가 명옥을 아끼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앞으로 명옥이에게 불어 닥칠 폭풍을 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폭풍은 네가 이혼을 감행하면서 너의 아낙이 분노를 참지 못해 명옥의 실체를 파악하게 될테고 그 분풀이를 한다면 명옥이 겪어야할 고통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명옥이야 너를 사랑하니까 그 정도 고통은 감내한다 치더라도 너의 어린 아이들이 점차 커가면서 엄마가 바뀐 내막을 알게 된다면 아빠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커 지겠니?"
"행님요, 참으로 논리적입니다만 저를 설득하려 하지 마세여."
"넌 나이가 들어서 내 말에 순종하기 보다는 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이 일을 해결 해야 한다.
난 너를 설득하지 않겠다.
지금의 감정이 한달이 넘도록 계속된다면 네가 이혼하든 아이들을 버리든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너의 결정에 동의하겠다.
그러니까 오늘 이후론 명옥과 한달간 연락을 끊고 너의 결심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나에게 보여줬으면 한다."
"행님요, 제 결심은 한달이 아니라 죽을때까지 계속될꺼니까 염려 마이소."
"그래, 너를 잘 아는 나로서는 이 정도 선에서 너의 기다림을 지켜볼 수 밖에 없구나."
내 조정의견이 두 사람에게 받아 들여졌는지 모른다.
내 말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았는지 모른다.
아끼는 두 사람이 동시에 절망의 벼랑끝에선 모습을 보고 해 줄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는 자괴섞인 위안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다 술이 다 떨어진 빈 병을 계속 잔에 따라 붓고 있다.
"행님요, 맘 상했어예?"
"몰라. 술 더 갖고와."
"그만해예. 술 혼자 다 마셔서 취한 것 같네예."
"몰라. 난 먼저 자릴 뜰테니까 니들일은 알아서 해."
갑자기 마신 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내게 엄청난 취기로 다리를 휘청이게 했다.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싶다.
빵빵거리며 골목을 서행하던 차로부터 크락션이 울렸다.
비틀거리며 주행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를 향한 경고 메시지가 날라 온 셈이다.
낯익은 간판들이 핑핑 돌며 눈 앞에 어른 거린다.
"따르릉~"
무심결에 받아 든 핸드폰으로부터 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많이 취했어?"
"몰라. 여기가 어딘지 몰라."
"창문에서 휘청거리는 사람이 있길래 봤더니 당신이더라!
금방 내려 갈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전화를 끊고 휘청이며 큰 길가로 걸어 나갔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이 더욱 소란스럽게 보였다.
"타!!"
"엉, 벌써 왔어?"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몰라, 한병을 한꺼번에 입에 부어 버렸지."
"속상한 일 있었어?"
"아니, 기분 좋은일만 있었어."
"내가 집에 데려다 줄게. 잠시 눈좀 붙혀."
조수석에 걸치듯 앉아 있는 내 몸을 더듬으며 안전벨트가 메어지고 있다.
"더듬지마. 징그러."
"뭐? 징그러?"
"응..."
"술 취했어. 이렇게 취한걸 보면 분명 무슨일이 있었어."
"없어!"
숙은 말없이 패달을 가속하며 팔당쪽으로 차를 모는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방향감각을 찾으려고 애쓰며 창밖을 보니 팔팔도로위를 질주 하고 있었다.
"이봐, 어딜갈라고?"
"우리집..."
"뭐? 또?"
"싫어?"
"응. 집에 데려다 줘."
"집? 당신 집이 어딘데?"
"도봉동..."
"아냐, 당신 집은 이제부터 팔당이야.
나랑 같은 집에서 사는 내 자기란 말야."
"안돼. 오늘은 집에 가야해."
"그래! 집에 가고 있으니까 편안히 눈을 붙히고 잠을 자고 있으라니까."
나는 못이기는 척 차가 팔당으로 향하는 것에 대한 반항을 포기했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차가운 강바람이 얼굴을 때리면서 어느정도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개발팀 직원들의 모습이 하나둘 사라져갈 때 쯤 되서야 나는 서랍을 잠그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탁이와 만날 장소까지 이동하면서 머리속은 상념들로 가득하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처 투성이가 된 명옥의 가슴을 보듬어 주길 바랬던 탁이 기대를 저버리고 욕정을 푸는 상대로 만들어 버린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까불거리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적이 없던 그 놈이 어떤 생각으로 이혼까지 생각하며 그를 보듬으려고 하는 걸까?
오빠로서 보듬을 상처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자신을 전체 불살라 명옥을 구하려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뛰어 들었단 말인가?
"어서옵셔~."
낯익은 종업원의 힘찬 외침을 듣고서야 내가 중국집 앞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환한 조명불 아래 왁자지껄한 손님들의 소리가 섞여서 잘되는 집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수 있게 하는 집이다.
길게 늘어섰던 점심때의 풍경과는 달리 죽엽청주 한잔이 오가며 팔보채, 양잠피 등 군침이 도는 요리가 식탁을 장식하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방 문을 열었다.
속죄하듯 다소곳하게 마주앉아 침묵으로 일관하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뭘 좀 먹으면서 기다리지 그랬어?"
"아니예, 행님 올 때까지 야맘속 얘기좀 들어보고 있었어예."
명옥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눈물자욱을 훔치던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아저씨, 저 어쩌면 좋아요?" 내가 들어서자 마자 명옥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 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선 요기부터 하자. 여긴 식당이니까 그게 예의 아니겠니?"
"뭘 드실라꼬예?"
"우리도 팔보채랑 양잠피 시키고 죽엽청주를 반주로 한잔씩 하자."
"알써예." 탁은 쪽문을 열고 종업원에게 음식 주문을 마친 후 돌아와 앉았다.
"행님예, 저 어쩌면 좋습니꺼?"
"우선 차분히 얘기를 풀어나가는게 좋겠다.
남녀 상열지사를 남이 끼어들어서 뭘 하냐만은 너는 내가 아끼는 후배고 이 아이는 또 나를 따르니까 모른척 할 수도 없구나.
우선 명옥아, 너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
"전 할말이 없어요. 잘못했어요."
"그래, 네가 한 일이 잘못이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맹세가 되는 셈인데, 정말 탁이 오빠를 마음속의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봐야하니?"
"아뇨, 맘 정하지 못했어요. 좋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탁아, 명옥이의 말을 풀어보면 너에게 정을 준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그 말에 동의할 수 있겠니?"
"동의 못합니더. 쟌 내 사람이야예."
"그럼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구나.
한명은 맘에 없는데 생긴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고, 한명은 죽자살자 덤비는 꼴로 판명됐으니 이젠 명백하게 지난 일을 없었던 일로 치면 끝나겠다."
"아저씨, 그게 아니고요. 제 맘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저도 오빠가 싫지 않아요."
"그럼 잘못했다는 말을 해선 안되는 법이지.
당당하게 오빠를 받아 들이겠다고 했어야 했고, 잘못된 일이 아니므로 반성하거나 울어서도 안될 일이지."
"행님요, 이젠 두사람의 뜻이 같아 진거지예?"
"그래,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아 진 셈이구나.
하지만 그 마음이 일시적인 것인지 영원한 것인지에 대해선 어떤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겠니?"
"행님요, 전 마누라랑 이혼할랍니다.
그람 증명되는거 아닙니꺼?"
"명옥아, 넌 어떤 방법으로 일시적 충동이 아니었다 말할 수 있겠니?"
"전 몸에 오빠의 이름으로 문신을 해서라도 제 맘이 한결 같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요."
"좋다. 일시적 충동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얘기했으니 이제 부터는 내가 중재를 해 주겠다.
잘 들어봐라."
잠시 뜸을 들이며 두 사람의 잘못된 만남을 원만하게 해결해서 원위치 시킬 방법을 머리속으로 구상해야 했다.
서로가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방과 한 몸이 되길 갈망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몰라도 일시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면 한 가정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꽃처럼 어여쁜 처녀 하나는 채 피기도 전에 꺽이는 꼴이 되고 만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우선 밥부터 먹고 얘기하도록 하자."
종업원이 들고 온 요리를 섞으며 작은 접시에 음식을 나눴다.
은은한 향기가 좋아 즐겨 마시던 죽엽청주마저 목에 꺼끄럽게 느껴졌다.
침묵 속에서 내 말이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니 세상사는 일이 참으로 오묘하고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랑이 무엇인가?
받고자 하는 마음 없이도 한없이 내 것을 주고 싶은 마음.
불바다에 떨어진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내 몸을 아낌 없이 던지는 용기.
맺어진 인연의 끈이 몇겁의 세월 속에서도 끊어짐이 없이 계속되는 그리움.
진정 이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사랑이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탁아, 넌 처음엔 내 여자라면서 멀리하던 명옥이를 어떤 마음에서 받아 들이기로 했니?"
"몰라예. 순간적이었으니까예."
"니 나이가 있는데 설마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사랑으로까지 확대하지는 않겠지?"
"행님요, 사랑이 핵교 수업처럼 찬찬이 쌓아야 합니꺼?
전 순간적으로 돌아버렸어예. 그냥 야가 좋다니까예."
"그 말은 설득력이 없다. 적어도 자연과학을 이해하는 너의 태도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논리 부적절한 어거지로 들린다."
"행님요, 사랑한다니까예. 그냥 눈감아 주이소."
"명옥아, 니 아픈 상처를 어루만저줄 오빠로만 여기라 했는데, 또 네 마음에 상처를 남길 일을 또 한 이유가 뭐니?
예전에 받은 상처가 벌써 아물어서 다시 생채기를 만들고 싶었던거니?"
"전 오빠가 맘에 안들었어요.
어쩜 아저씨를 맘 속에 새겼으니까요.
몇번 만나면서 오빠의 따뜻한 배려가 내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아요.
이젠 오빠를 사랑하는 일이 기뻐서 아저씨한테 혼나더라도 눈감아 달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래, 넌 진정한 용기를 가진 아이구나.
오히려 나이 많은 탁이 오빠보다 더 진솔한 얘기를 하고 있어.
탁아, 넌 나이도 많고 남자인데 불구하고 네 주장이 너무 없어.
너의 얘기를 듣다 보면 화가 나려고 해.
넌 왜 명옥이 처럼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어거지만 부리고 같은 결과니까 같이 평가해 달라고 떼를 쓰니?"
"행님요. 제 입장이 안그렇습니꺼. 아까지 있는 몸으로 어떻게 행님한테 논리적으로 대들겠어예."
"그래, 니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한번 몸을 섞은 일로 인해 새로운 불행을 키워선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옥의 뚜렷한 입장표명은 이해가 충분히 간다만 너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그런 너의 뜻을 알고자 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당부할 말이 있어서다."
"어떤말요?"
"우선 네가 처했던 예전의 암울한 시기를 생각해 봐라.
너를 사랑하는 듯하며 너를 탐했던 예전의 오빠 친구들과 탁이 오빠는 다를 바가 없단다.
너는 엊그제 일을 해프닝으로 돌리고 이제 부턴 굳은 마음으로 너를 평생 편안하게 보듬어줄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떠야 한단다.
탁이 오빠도 진정으로 너를 사랑해 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너를 사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단다.
그 산은 평온했던 한 가정이 파괴되고 아빠와 엄마를 의지하며 살던 어린 아이들의 눈물이 바다를 이룬 후에도 넘기 힘든 높은 장애물이란다.
네가 조금만 탁이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면 영원히 너의 곁에서 너를 돌보며 힘들 때 위로가 되는 두 사람을 얻게 된단다.
탁이 오빠가 너를 어여뻐 해줄 것이고 나 역시 너를 귀여운 딸처럼 지켜봐 줄테니까."
"아저씨, 말씀을 들어보니 탁이 오빠를 사랑하는 것은 지난날 내가 겪었던 쓰라림 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미안해요."
"탁아, 너도 명옥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한 템포 늦춰봐라.
명옥이의 쓰라린 상처가 믿었던 오빠 친구들로부터 생긴 것이라면 이젠 너를 통해 그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다고 치자.
네가 명옥을 아끼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앞으로 명옥이에게 불어 닥칠 폭풍을 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폭풍은 네가 이혼을 감행하면서 너의 아낙이 분노를 참지 못해 명옥의 실체를 파악하게 될테고 그 분풀이를 한다면 명옥이 겪어야할 고통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명옥이야 너를 사랑하니까 그 정도 고통은 감내한다 치더라도 너의 어린 아이들이 점차 커가면서 엄마가 바뀐 내막을 알게 된다면 아빠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커 지겠니?"
"행님요, 참으로 논리적입니다만 저를 설득하려 하지 마세여."
"넌 나이가 들어서 내 말에 순종하기 보다는 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이 일을 해결 해야 한다.
난 너를 설득하지 않겠다.
지금의 감정이 한달이 넘도록 계속된다면 네가 이혼하든 아이들을 버리든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너의 결정에 동의하겠다.
그러니까 오늘 이후론 명옥과 한달간 연락을 끊고 너의 결심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나에게 보여줬으면 한다."
"행님요, 제 결심은 한달이 아니라 죽을때까지 계속될꺼니까 염려 마이소."
"그래, 너를 잘 아는 나로서는 이 정도 선에서 너의 기다림을 지켜볼 수 밖에 없구나."
내 조정의견이 두 사람에게 받아 들여졌는지 모른다.
내 말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았는지 모른다.
아끼는 두 사람이 동시에 절망의 벼랑끝에선 모습을 보고 해 줄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었다는 자괴섞인 위안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다 술이 다 떨어진 빈 병을 계속 잔에 따라 붓고 있다.
"행님요, 맘 상했어예?"
"몰라. 술 더 갖고와."
"그만해예. 술 혼자 다 마셔서 취한 것 같네예."
"몰라. 난 먼저 자릴 뜰테니까 니들일은 알아서 해."
갑자기 마신 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내게 엄청난 취기로 다리를 휘청이게 했다.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싶다.
빵빵거리며 골목을 서행하던 차로부터 크락션이 울렸다.
비틀거리며 주행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를 향한 경고 메시지가 날라 온 셈이다.
낯익은 간판들이 핑핑 돌며 눈 앞에 어른 거린다.
"따르릉~"
무심결에 받아 든 핸드폰으로부터 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많이 취했어?"
"몰라. 여기가 어딘지 몰라."
"창문에서 휘청거리는 사람이 있길래 봤더니 당신이더라!
금방 내려 갈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전화를 끊고 휘청이며 큰 길가로 걸어 나갔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불빛이 더욱 소란스럽게 보였다.
"타!!"
"엉, 벌써 왔어?"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몰라, 한병을 한꺼번에 입에 부어 버렸지."
"속상한 일 있었어?"
"아니, 기분 좋은일만 있었어."
"내가 집에 데려다 줄게. 잠시 눈좀 붙혀."
조수석에 걸치듯 앉아 있는 내 몸을 더듬으며 안전벨트가 메어지고 있다.
"더듬지마. 징그러."
"뭐? 징그러?"
"응..."
"술 취했어. 이렇게 취한걸 보면 분명 무슨일이 있었어."
"없어!"
숙은 말없이 패달을 가속하며 팔당쪽으로 차를 모는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방향감각을 찾으려고 애쓰며 창밖을 보니 팔팔도로위를 질주 하고 있었다.
"이봐, 어딜갈라고?"
"우리집..."
"뭐? 또?"
"싫어?"
"응. 집에 데려다 줘."
"집? 당신 집이 어딘데?"
"도봉동..."
"아냐, 당신 집은 이제부터 팔당이야.
나랑 같은 집에서 사는 내 자기란 말야."
"안돼. 오늘은 집에 가야해."
"그래! 집에 가고 있으니까 편안히 눈을 붙히고 잠을 자고 있으라니까."
나는 못이기는 척 차가 팔당으로 향하는 것에 대한 반항을 포기했다.
열려진 창문을 통해 차가운 강바람이 얼굴을 때리면서 어느정도의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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