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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2:05 1,452회 0건
강가에서(1)

제 2 부 강 가에서

제1부 비오는날(1~16)에서는 등장인물의 프로필이 나왔습니다. 숙, 명옥, 그리고 나, 탁과장, 젊은찻집주인이었죠.
이제는 명옥과 나와 숙과의 관계가 진행되고 숙과 탁과 젊은찻집주인의 관계가 진행됩니다.
순수소설같다며 외면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저두 갈등 많이 느껴요. 하자만 야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어차피 많은 분들이 표현을 잘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절제의 모습으로 글을 써보는것인데 아껴주시는 분들에겐 감사의 마음을 ...


"밤이 늦긴했지만 차 한잔 하고 가요."
"그럼 따뜻한 커피로 주세요."

지난 폭우 땐 마음에 여유가 없어 둘러보지 못했던 세간을 둘러 볼 여유도 이젠 있다. 넓은 대청이다. 쇼파에 앉으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몇 개의 방문을 빼면 나머지 모두 빽빽한 책들 진열된 도서실과 같은 분위기다. 작업대에는 테스트용 장비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

"오슬로스코프는 왜 여기있죠?"
"아주 오래된거에요. 박물관에 기증해야할 정도로 오래됐죠. 그거 말고 이번에 새로 구입한 이 장비를 보세요. 작고 파워풀해요."
"갖고 싶어도 돈이 없어 포기한 장비들이 모두 여기 있군요."
"이젠 맘대로 쓰세요. 혼자 긴 밤을 지새울땐 이 장비를 애인같은 기분으로 다루죠.."
"댁의 애인을 앞으로 다루게 되면 섭섭하겠군요."
"아뇨, 기계 애인을 다루는 사람이 생긴걸요."

따뜻한 커피. 그 향기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 온통 빗줄기로 왕왕거리는 창 밖의 세상과는 달리 나는 조용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

"남자들이 프로포즈 안해요?"
"전 두 얼굴을 갖고 있어요. 일할때는 마귀할멈 같이 심술궂고 근엄한 표정으로 살죠. 개인적인 모습을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요."
"지금 같은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흠모하는 정으로 깊은 병에 걸렸을 겁니다."
"댁은 지난번 나를 다 보고도 돌아섰잖아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지각하면 짤릴 것 같아서요."
"어?든 난 그때 감동받았어요. 남자들은 무조건 여자 몸만 탐한다는 일상적인 상식이 빗나가는 현실을 보면서."
"커피향 음미하고 마시게 복잡한 얘기 그만 하시죠."

지난 번 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화제를 커피향으로 돌렸다.

"제게 구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좋으시겠어요."
"여태 혼자 살아오면서 마음의 문을 닫았죠. 내 맘을 완전히 맡길 사람이 나타나면 모두 열어주고 싶지만 아직 그런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 사람은 앞으로도 안나타날걸요."
"글쎄요, 남자 경험을 한번도 못하고 죽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어요."
"그렇게 죽는 사람도 많아요. 가령 열살에 요절한 아이들이라든지..."
"장난말아요. 지금 내 나이가 벌써 사십이 넘어 오십줄로 접어들면서 느끼는 소외감인데."
"근엄한 표정을 보고 청혼하는 사람들은 돈 때문이겠군요."
"아직 내 모습이 봐줄만 하진 않나요?"
"빼어난 미모에요. 전 이십대쯤 된줄 알았어요."
"기분 나쁘진 않군요."
"전 이런 원두커피를 싫어해요. 그 향은 좋은데 맛은 밥맛이걸랑요."
"다른 커피로 드릴까요?"
"맨날 밴딩커피만 다시다 보니 입맛이 싸구려에 맞춰지더군요. 어쩜 호화스런 향이 거북하기도 하고요. 혹시 인스턴트커피 있어요?"
"찾아볼께요. 잠시만 기다려요."

사실 나는 인스턴트식품에 익숙해져있다. 밤 늦게까지 술마시다 집에가서 새벽에 또 나오려면 여우같은 마누라 잠을 깨우기 미안해서 출근 후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수다. 누구라도 빼먹기 좋으라고 설치된 자판기는 내가 단골손님이고, 이동시간을 줄이려고 운전중에 잠시 들러 햄버거로 식사를 떼우기도 한다.

"자, 새로 타온 커피에요."
"오~, 향기 좋네요. 역시 난 싸구려가 좋군요."
"정말 좋아요?"
"네, 원래 마시던 그 커피 맛이네요."
"웃기지 말아요."
"뭔 소리?"
"우리집에는 원래부터 인스턴트 커피가 없어요. 원두커피에 프림만 살짝 넣어서 다시 가져온걸요."

그랬다. 숨겨진 진실을 외면하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온 나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여자는 내면속의 나를 읽어버린 것 같다. 자신을 외면하는 내 태도가 가식적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야망과 욕망과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척하며 나를 어린애 사탕 주듯이 어루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젊은 애들 다루기 힘들죠?"
"맞아요. 걔네들은 공부보다는 동거를 좋아해요."
"무슨말을?"
"젊은애들이 추구하는 것은 합법적인 향락일 뿐이에요. 뭐랄까 대학을 빙자해서 남녀가 함께 마주앉을 기회를 만드는거고. 성년이 됐다는 이유로 성을 개방하고 그걸 즐기며 살죠."
"그걸 보면서도 마음이 아프진 않나요?"
"미국생활을 오래하면서 그런 문화 정도는 익숙해 있어요. 걔들이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걔들 문제일 뿐이지 내겐 어떤 영향도 안주죠."
"동거를 인정하는 건가요?"
"인정? 난 걔들에게 내 학문을 전달할 뿐이지 서당 훈장이 아니에요."
"도덕은 나이먹은 사람들이 지켜야할 경계일텐데 양심의 가책은 안드나요?"
"걔들 부모가 못한 일을 내가 떠 맡아야할 이유는 없죠. 도덕은 가정에서 실천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럼 대학에선 난장판이 벌어지더라도 관여할 수 없단 얘기네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에요. 세상이 모두 그렇다면 그런 행위가 도덕적이겠지만 다행이 더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해요. 결국 세상을 이끄는 힘은 몇 명의 엘리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공부할 땐 엘리트란 소릴 들었어요. 하지만 세상을 끌고 가진 못하는데..."
"댁은 진행형이고 완료형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그런 얘길 들으니 정말 선생한테 훈계 듣는 느낌이군요."
"당신을 가르쳐야 할 교수의 입장이라면 전 자살하고 말꺼에요?"
"그건 왜죠?"
"대등하고 싶어서죠. 난 당신의 좋은 파트너로 있고 싶어요."
"내 파트너라..."
"그래요,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꿈과 야망을 가진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여자 몸으로 더구나 이런 깊은 밤에 그런 얘기하면 오해 산다는건 아시죠?"
"나를 불살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나타난다면 난 그사람을 위해 모든걸 버릴거에요."
"그럼 그 사람이 접니까?"
"그래요. 하지만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어요."
"하하, 그럼 결심이 유보된 셈이군요. 다행이에요."
"아뇨, 어떤 형태로 당신을 압박할까, 당신에게 메달릴까, 또 당신을 해방시킬까 그런 생각을 정리하겠단 뜻이죠."
"결국 나는 댁으로부터 찜 당한이후론 자유로울 수가 없어진것이군요."
"당신은 자유로워요."
"그렇게 속박의 말을 하고도 어떻게 자유로워지란 얘기죠?"
"난 당신이 어떤 여자를 만나든, 어떤 관계를 갖든 관여하지 않을거에요. 다만 내 혼신을 다해 당신과 함께 할 생각이에요."

자리를 내 곁으로 옮겨온 그녀는 단아한 머리를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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