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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2:05 1,608회 0건
강가에서(2)


집에 전화를 하면 세상모르고 잠에 빠졌을 아내는 무슨 급한 일인줄 알고 놀라겠지. 어깨에 눌리는 무게보다 더 큰 무거움이 가슴을 짖누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고 집에갈 빌미를 만들어보자.

"우산 큰거 있어요?"
"왜요?"
"이런 폭우땐 강을 바라보며 비를 맞고 싶어요."
"같이 나가요, 그럼."

"조금만 걸으면 제방대신 낮은 모래톱으로 된 곳이 있어요. 그곳엔 항상 물이 찰랑이고 바람에 따라 버들가지도 찰랑거려요."
"구두가 장화였음 좋겠네."
"비가 너무 오죠?"
"하늘에서 땅 닿기 전까지만 내리고 흐르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이러다 물이 불어서 낮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 혼쭐 나겠어요."
"매년 봐왔지만 댐이 열리면 장관이에요. 아니 어쩜 지옥같은 폭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두려움에 싸이죠."
"난 비가 좋아요."
"전 바람이 좋아요."
"광나루 다리 근처에 살던 어린 시절엔 비만오면 아버진 팔당 수문이 몇 개 열렸나에 온 신경을 쓰며 살았죠."
"제가 사는 곳을 미리 찜한 셈이네요."
"제가 어릴 땐 매년 두 번 큰 물난리를 겪었어요. 유월엔 장마, 팔월엔 태풍 때문에 동네에서 제일 큰 우리집 지붕까지 넘쳐드는 물길을 피해 언덕 위로 또 그 위로 피하곤 했죠. 그땐 아버지가 계시니까 두려움이 없었어요. 돼지 몇마리 몰고 언덕에 오르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이젠 그런 일이 닥치면 내가 직접해야 하는데 아버지 만큼 잘 해낼지 의문이에요."
"잘 하실거에요. 이젠 제방이 높고 튼튼해서 별탈도 없을테고요."
"큰 물난리가 났으면 해요."
"왜죠?"
"어릴 때 추억이죠. 세상이 온통 흙빛 물로 덮혀서 이리저리 피난은 했지만 세상의 모든 지붕 위로 넘실대는 물결을 보면 통일된 느낌이었어요."
"전 천둥보다 큰 물소리와 하늘로 치솟는 물줄기를 볼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죠. 바람이 불면 쌩쌩거리며 나뭇가지들이 소리지르는 것이 더 맘에 들어요."
"비와 바람이라..."

무의식 적으로 잡은 그녀의 허리는 비를 덜 맞게 하려는 배려였지만 의식의 세계로 나서는 순간 짤록하다는걸 알았다. 목부터 발 끝까지 내 기운이 땅밑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서운 설레임이 밀어 닥친다..

"허리가 한줌밖에 안되요."
"처녀니까요."
"전설속의 숯처녀?"
"당연하죠."
"유부남인데, 왜 나를 택했죠?.."
"몸을 택한게 아니라 미래를 택한거에요."
"쟁쟁한 사람들이 많을텐데..."
"운명이죠."
"후회 않겠어요?"
"후회없는 삶이 어디있겠어요. 당신을 택한 순간 비참한 마음도 택했는데."
"무리수를 거두시죠."
"부담갖지 마세요."

빗소리 보다 더 크게 나를 꾸짖는 소리가 있었다. 인생은 어차피 순리에 맞춰가며 평안함을 추구하는 족속과 맘대로 사는 족속이 있다. 불행을 잉태하고 있음을 알고 선택한 그녀의 결정에 나를 맡겨야 한다. 평탄한 삶이 싫어서 모든 영광과 부귀를 버리고 험난한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나를 볼 때, 그런 나를 이해하고 동반자로써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겐 큰 힘이다. 눈부신 그녀에 비해 초라한 몰골로 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의식을 치룹시다."
"어떤?"
"당신의 제의를 받아 들인다는 언약으로 키스를 하겠어요."
"나도 당신의 일부분이 되겠다는 언약으로 그 키스를 받겠어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산을 팽개치고 빗속에서 깊은 키스를 하고 있다.
빗물이 두 사람의 온 몸을 흠뻑적시며 기승을 부리더라도 두 사람의 키스는 좀처럼 식어들지 않았다.

"난 당신의 재산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질테요."
"난 당신의 가족과 평화를 제외한 모든 능력을 소유할꺼에요."
"이런 거래는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꺼요."
"거래가 아니에요. 모든 것을 드리는 저의 마음이죠."
"난 당신만 갖겠소. 모든 것은 그대로 있도록 해요."
"그건 당신 생각.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걸겠어요."


온 몸이 흠뻑 젖은 상태에서 우산을 다시 쓴다는 것은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샤워를 마쳤다. 곱게 살아온 살결들. 한번도 타인의 손길에 맡겨져 본적이 없는 살들이 내 앞에 드러나 두려움과 환희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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