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8)

번개와 천둥으로 몸서리 쳐진 긴 밤은 어느새 아침 햇살의 날카로움에 꼬리를 감추고 있다. 낮게 드리워져 언제라도 한 차례 비를 뿌릴 것 같은 구름사이로 빛의 날개를 무지개 보다 더 멋지게 뽐내는 태양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찾아온 평온의 순간에 밤새 울지못한 온갖 새들도 재잘거리고 비를 피해 늘어져 잠만 잤을 세퍼트도 어슬렁거리며 마당을 배회하고 있다.

"산책하며 한 바퀴 돕시다."
"너무 나른해요."
"강가까지 걸어가며 시원한 공기라도 흠뻑 마셔야겠어."
게으른 늘보처럼 늘어진 몸을 추슬르며 가벼운 차림의 산책길에 나선다.
대문에서 집까지만 걷는 동안에도 무성한 화초들 가득하다.
꼬리치며 따라붙는 세퍼트를 데리고 문을 나서니 언덕이 보인다.
어둠속에서만 익숙하게 찾은 이 집의 풍광이 빛으로 인해 낱낱이 드러난다.
약간 비탈진 진입로를 따라 편도 일차선의 도로까지 걸으며 온갖 새들의 인사를 듣는다.
울창한 수풀사이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어깨에 받으며 십분정도를 걸으면 엊저녁 강가를 볼 수 있겠다.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라뇨? 행복한걸요."
"앞으로 어떻할거요?"
"주말부부도 많잖아요.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면 안될까요?"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소?"
"혼자서도 살아왔어요. 제발 부담갖지 마세요."
"부담갖지 말라는 말이 부담으로 들리니 큰일이네."
"그럼 같이 일해요."
"어떤?"
"그 프로젝트를 우리 학교로 옮겨서 하면 되잖아요."
"아니, 지금까지 과정을 도와준 사장을 배신할 순 없소."
"배신하는게 아니라 중간 산출물을 만들어봐요.
그걸 상용화해서 그 사장이 돈을 벌도록 하고 부담스럽게 남은 부분만 같이 연구하자구요."
"사실 중간 산출물은 만들어놨어요.
하지만 돈이 말라서 시제품을 만들자는 제의를 못하고 있지..."
"시제품 만드는걸 도와줄테니 먼저 상품화에 주력해 보세요."
"좋은 방법이긴 한데 뚝딱하고 만들어지진않아."
"전체 공정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중간 산출물을 적당히 끊어서 매듭줘주고 자금화 할수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엄두가 안나서 중간산출물 상품화를 미루고 있다오."
"그걸 내가 도와줄테니 상품화하세요.
거기에 사장이 만족해 하면 적당한 구실로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상용화에 진입하세요.
상품이 나오고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사장은 당신을 잊어버릴꺼에요."
"설마..."
"난 교수이기전에 사업가에요.
사업가는 돈을 최고로 치죠.
당신 사장도 돈되는 물건이라 판단하면 더 이상 당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꺼에요.
어쩌면 사라져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겠죠.
그래야 몫이 커질테니까요."
"하하, 믿어지지 않는 얘기만 하는구료."
"세상은 냉정하죠.
내 얘기가 맞구나 하는 경험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면 죽고 싶어질꺼에요.
그러기 전에 당신의 진로를 결정해야겠죠."
"우리 사장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밀어줬고 난 그 도움으로 여태까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던 거요. 그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을 한치도 엿볼 수가 없었다오."
"그 사람은 당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돈을 대면서도 관여하지 않았겠지만 속이 얼마나 탓겠어요. 적당히 끊으면 상품인데 악착같이 아직 멀었다며 일만하는 당신이 요즘은 미웠을텐데요."
"사실 사장이 나에게 인맥을 통해서라도 마케팅을 해 달라고는 하더군.
내가 시장에 약간 관여해서 숨통을 틔어는 놨는데 만족하던 눈치던데..."
"맞아요. 당신의 능력을 개발쪽에서 영업쪽으로 이동시키려는 시도였죠.
선비가 배고프다고 소잡는거 봤어요?
당신의 능력을 확인한 이상 집요하게 회사 사정을 들먹이며 영업쪽 지원을 요청하게 될거에요. 그러면 프로젝트의 안정화를 위해 또 다른 일에 매달려야하겠죠."
"벌써 영업에서 손때고 연구만 하라던걸?"
"당신이 아직 중간산출물을 상품으로 완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꺼에요.
그러니 내가 시키는데로 적당히 끊어서 일단 상용화를 시키세요.
그러면 또 다른 요구가 있을꺼에요."
"허~, 몸으로 겪기 전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지 않으니..."
"난 이제 당신의 여자에요.
사업적 수완이 더 많은 피를 이어 받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
"우리아버진 대상이었죠.
전쟁으로 피난가면서도 세간 한점 가져가지 않고 성냥과 소금 한가마만 딸랑 갖고 다녔데요. 피난간 빈 벌판에는 먹을 것 천지라서 불지펴 날음식 익히고 소금에 찍어 먹으면 배골을 염려가 없었데요.
바리바리 짐 실고 피난온 사람들은 오히려 밍밍한 맛 때문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곡식들을 보고도 먹지못하고 배를 곯았다더군요.
아버지는 이 사람들에게 소금을 피난하는 동안 내내 팔아서 돈으 많이 모았데요.
정말 그 돈으로 일어섰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만큼 계산이 빠른 분이셨죠.
난 그 피를 이어받아서인진 몰라도 사업에 손만 데면 잘되더군요.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공부는 할 만큼 했고 그 덕분에 교수까진 하겠지만 내 맘속엔 큰 야망 덩어리가 있었죠.
내가 모든걸 희생하면서도 당신을 택한 이유가 어디있다고 생각하죠?"
"글세, 내가 워낙 아랑드롱같이 멋있어서 반했겠지 뭐."
"놀리지 말아요.
당신이 첫눈에 띈건 사실이지만 사업가의 눈엔 이용가치가 충분하지 않으면 길바닥에 버려진 돌멩이와 다를 바 없이 취급될 뿐이죠.
난 당신을 동물적 감각으로 선택했어요.
그런 내 직감은 한번도 틀려본 적도 없을 정도로 적중되도록 훈련되있구요."
"음~, 이번에 처음으로 그 직감이 틀리겠군."
"계속 그런 얘기를 맥빠지게 할꺼에요?"
"아니,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야.
난 한가지만 생각하는 단순 무식형이라서 사람을 상대로 복잡한 계산을 하지 않지.
그런데 당신은 나를 복잡한 연산기에 넣고 이미 계산을 다 때려본거라니까 하는 말인데 그 계산기 회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시스템을 점검해보라는 충고일 뿐이야."
"그렇게 부인한다면 어쩔수 없죠.
하지만 나는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그 믿음으로 내가 파멸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 문제일 뿐이니 염려 놓으세요."
"좋아, 그 정도의 확신이라면 당신 말대로 중간산출물을 만들어 봅시다."
"아이 좋아~"
"허, 말 뿐인걸 그리 좋아해요?"
"아니, 당신의 결심을 이렇게 쉽게 돌려놓을 수 있게 되서 기쁘단말에요."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요.
내 당장 프로젝트의 방향을 바꿔 실용화부터 하리다.
대신 당신은 내 일에 한동안 관여하지 말아요.
돈이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우리 사장과 협의해서 진행하겠소."
"시제품이 나오면 내가 일정규모 소화 시켜줄께요."
"근데 중간산출물은 어떤 기능까지만 포함하면 좋겠소?"
"글세, 마이크로프로세스를 8비트급으로 떨어뜨리고 대신 확장컨트롤러를 부착해서 각 포트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정도의 수준이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요.
기능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면 좋겠소?"
"무선통신이나 인터넷쪽 제어권, 무선제어쪽도 일단 빼세요.
그러면 유선통신만 남게되죠.
유선통신의 이용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장비 중에서 엔코딩과 디코딩을 추가하고 오디오를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기능이면 좋겠어요.
그 평범함 속에서도 메인보드가 모든 제어권을 관리하고 컴퓨터와의 인터페이스는 초고속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USB통신을 썼으면 해요."
"알겠소. 그 정도라면 어려운 설계는 아닐꺼요.
다만 오디오를 관리하면서도 USB통신을 쓴다면 스트리밍제어를 해야할텐데 그러려면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장치도 추가되야할거요.
그리고 엔코딩과 디코딩을 따로 얘기한 이유는 뭐지?
그냥 제너레이터만 있음 양방향 모두 될텐데..."
"확장성을 위해서죠.
한 부품으로 모두 처리하면 나중에 버전업할 때 다시 회로설계를 해야하니까 처음부터 불편하더라도 따로따로 장치하면 나중을 위해서도 용이하잖아요."
"그래요 그럼 외부로 신호를 보내는 장치도 추가해야겠네."
"당연하죠. 주파수 범위를 소프트웨어적으로 조정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니야. 주파수를 조정할 수 있게되면 소비자가 잘못 건드려서 발생하는 오동작에 대한 아프터서비스 문제가 생기니까 처음부터 주파수는 고정시키는게 좋겠소."
"아, 그래요. 사용자 조작오류를 생각하지 못했어요.
역시 당신은 순간적으로 많은 사려깊은 생각을 하고 있군요."
"좋은 아침에 너무 복잡한 얘기는 이제 그만 합시다.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출근하자마자 당신의 뜻대로 프로젝트를 축소하고 상용화 가능한 범위내에서 빨리 시제품을 만들어보리다."
"개의치마세요. 전 학문을 논하는게 익숙하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과는 학문을 논하시구려.
하지만 나한텐 귀여운 여인으로만 있어주시구."

사랑스런 눈빛은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빛 만큼이나 내게 닥아온다.
살며시 잡은 허리선을 따라 가깝게 그녀를 끌어 당긴다.
언제부턴가 나는 하늘거리듯 작아 내 한손에 움켜쥘 듯 잡히는 것에 감동을 받고 있다.
지금의 느낌은 오늘 해야할 또 다른 어떤 중요한 일보다 더 소중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격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