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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2:21 1,178회 0건
패션 디자이너 1부


미진은 커튼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을 느끼곤 시트자락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잠시후 그녀는 왠지 어색한 분위기에 놀라 살며시 시트자락을 내려 방안을 둘러보니 그녀의 방이 아니라 낯설은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내가 어디에 있는거지?" "어제 호텔바에서 칵테일 몇잔 마신것 까진 생각이 나는데....."
미진은 침대옆 스탠드가 높여 있는 테이블에 자신이 어제 갔던 바의 호텔이름이 써 있음을 확인하고는 "내가 어제 많이 취했었나보네...." 하며 몸을 일으키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잠시후 몸을 추스린 미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욕실로 가다가 화장대에 놓여진 쪽지를 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분께 ! 어제밤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시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여기 제 명함이 있으니 꼭 연락을 주십시오"

"아니..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길래 이런 쪽지가 있는거야" 미진은 욕조에 물을 받으며 골돌히 어제일을 회상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욕실안의 거울은 욕조의 물이 내뿜는 더운 김으로 인해 뿌여져갔고, 그걸 보는 미진은 마치 자신의 기억이 시들어져 가는 모습을 보는것 같아 갑자기 서글퍼졌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약해질 순 없어...." 미진의 되새김과는 달리 미진의 눈에서는 한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가득찬 욕조에 몸을 넣으며 미진은 머리까지 푹 잠겨본다.

남편과의 단란했던 결혼생활을 접은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4개월이 흘렀다. 5년여의 결혼생활이 먼 기억속으로 잠겨만 갔다.

미진의 친정은 NY, Paris, London, Milano에 현지법인과 지사를 두고 있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패션의류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적어도 1년전 까지만 해도.
미진의 아버지는 30여년간 키워온 사업을 한순간에 송두리째 빼았기곤 이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쓰러져 11개월째 중환자실에서 계시고 있다.
비록 미진의 사회활동을 반대하셨지만 늘 자상하고 가정적이셨던 아버지는 오로지 엄마만을 사랑하며 바쁜 회사일속에서도 늘 가정에 충실하셨고, 엄마는 그런 남편에게 헌신적인 내조로 보필하셨다. 어린시절 교내, 외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휩쓸더니 미진은 중학교에 입학하자 의상 디자이너가 되려고 마음을 먹고 습작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미진의 그러한 습작들은 지금 유행하는 최첨단의 디자인들과 매우 흡사하였고, 이러한 자질로 미진은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공부만 하고 사회활동은 안하겠다는 조건으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고 , 급기야 NY의 디자인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을 하자마자 부모의 권유로 한 남자와 맞선을 보게 되었다.
국회의원의 외동아들, MBA 학위, 하얀 피부에 180cm의 귀공자같은 준수한 외모, 잘나가는 증권회사의 펀드매니저....
미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남자의 내조자로써의 인생에 몸을 던졌다.
비록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혹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두루 갖춘 지석과의 결혼은 그녀를 담담하게 했다. 시아버지의 덕으로 친정아버지의 회사는 업계의 선두로 치달으며 밀려오는 주문에 버거워 할 정도가 되었다.

처음 3년간의 결혼생활은 그런대로 순탄했다. 미진은 그녀의 엄마가 해 오셨던 그대로 남편의 내조에 신경을 썼고, 양가의 부모가 마련해 준 70평의 빌라의 한 방을 그녀의 아뜨리에로 개조하여 틈틈히 디자인하는 것을 낙을 삼았다.

지석은 준수한 외모에 명석한 두뇌로 증권계의 더오르는 펀드매니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지석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지더니 어느덧 외박을 하는 날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선임 펀드매니저 되니까 업무가 더 많아서 그렇겠지..
미진은 오로지 남편을 편하게 해주자는 마음으로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단지 지석의 건강을 걱정하며 " 당신 건강을 생각하세요. 연일 힘들지 않으세요?" "전 당신이 너무 힘이 들까봐 걱정이에요" 미진은 진심으로 지석을 걱정했었다.
"지금이 중요한 시기니가 당신이 좀 이해해줘" 지석의 말에 미진은 한평생 지석을 위한 살겠다는 마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석의 셔츠에서 립스틱이 묻은 걸 보았으나 흔히 있는 접대나 회식에서의 접촉으로 간주해 버렸다.

출근하는 지석의 양복을 털어주며 미진은 "오늘 엄마한테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편찮으신 것 같아서..."
"그래? 장모님이? 아무 걱정 말고 몇일 다녀와. 내 걱정은 말고"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집에서 먹지도 않는데 뭐... 간호 잘 해드리고"
"고마워요 여보" 미진은 단지 잠깐 낮에 다녀올 생각으로 말을 꺼냈는데 의외로 남편이 몇일 다녀오라는 말에 감격하며, 발을 들어 지석의 뺨에 키스를 했다.
" 아냐. 당신 친정에 다녀온게 언제야.. 그간 내가 너무 무심했지. 다녀와 그럼"
" 전화 자주 할게요. 다녀오세요"
" ok"

미진은 남편을 출근시키고,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하면서, "정말 내가 얼마만에 외출야... 친정집에 간지 언제지...? 내가 너무했어... 어머 이 얼굴은 또 뭐야.. 진작에 좀 가꿀껄.." 오랜만의 외출에 미진은 그동안 너무 집에만 있어서 화장도 안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뤄지는 외출에 약간 흥분이 되었다.
그리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165cm의 늘씬한 키에 발레, 에어로빅으로 다져온 탄력있고 볼륨있는 몸매를 가졌고 약간 그을린 듯한 까마잡잡한 피부를 그녀를 더욱 생기 있게 보이게 했다. 귀한 집에서 자란 귀티나는 얼굴 또한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 이게 누구야? 미진이 아니니? 온다는 연락도 없이 왠일이니?"
" 엄마 편찮으시대더니... 괜찮으세요?"
" 응. 몸살이었는데 약 먹고 푹 잤더니 오늘은 한결 개운하구나"
" 강서방은 여전히 바쁘지?"
" 네. 그사람 요즘 일에 취해서 정신없어요"
" 아버지랑 강서방 보약이라도 지어야겠다. 아버지도 요즘 너무 바쁘신가보더라"
" 그래요. 이따가 나가볼께요. 엄마 정말 괜찮아요?"
" 그렇다니까.. 미진아 우리 저녁에 어디 근사한데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 너도 맨날 집에서 있었으니 답답할 것 아니니? 나도 그렇고. 우리 나가자"
" 그래요.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 난 늙엇으니 그렇다치자. 넌 젊은애가 좀 바람도 쐬고 그러지 어떻게 갑갑하게 집에만 있니? "
" 다 엄마한테 배운거 아니에요?"
" 에그.. 에미 한테 그런가나 배워가지고는.. 쯧쯧... 너라도 재미있게 살아라."
" 엄마 내 방 아직 그대로죠? "
" 그럼. 그대로고 말고. 내가 아줌마 시켜서 차 올려 보낼테니 네 방에서 좀 쉬거라"
미진은 마치 결혼전의 시절로 돌아간 양, 처녀시절 사용했던 방으로 갔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청결히 잘 관리 되어 있는 모습이 아줌마가 매일 청소해 주는 모양이었다. 미진은 곧 아줌마가 갖다 준 차한잔을 마시고 전축을 틀었다. 결혼전 즐겨듣던 보첼리의 고운 노래가 흘러 나왔다.
" 어머 정말 얼마만이야 이게...." 고운 음률과 아늑한 공간에 취해 미진은 곧 잠이 들었다.

- 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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