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16)


사람이 사람을 이용해선 안된다. 상호간 이해의 범위를 확대하고 그 속에서 나의 이익된 부분이 상대에게 손해로 작용하지 않는 배려가 있으면 된다. 나는 그녀의 제의가 맘에 든다. 고독한 승부사의 기질로 현재까지는 버텨왔지만 이젠 관중과 후원자 없는 프로의 세계는 존재의미가 없다. 그동안 사장님이 아낌없는 후원을 했다지만 항상 자금력이 부족하여 프로젝트의 진행이 원만하지 않았고 특히 외로운 개발자의 입장에선 돈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나를 이해하는 동반자였다.

그래, 무조건 거절만 할 필요는 없다. 감정적 접근은 가급적 우회하고 일과 일로써만 협력자의 길을 간다면 더 좋은 기회가 없다.

"앞으론 정말 내 기사 해줄겁니까?"
"난 당신과 얘기할게 많을 것 같아요. 그러자면 기사라도 하면서 함께 할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제의하는 거에요."
"내가 옹졸했어요. 당신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자꾸 나를 귀찮게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피하려고 했는데 정말 그런 배려라면 나도 마다할 필요가 없지요. 더구나 박봉에 미녀 기사까지 생기고 가끔은 주유소에서 기름넣을 때 설마 내 카드 달란 소린 않을테니 기름값 절약되고, 하하 이젠 술값 엄청써도 될판이네요."
"댁이 술먹는건 파트너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란 걸 알아요. 내가 그 역할을 할테니 이젠 술 먹지 말아요."

생각을 바꾸니 세상이 달라보인다. 시원하게 달리는 차창너머는 어둠에 싸인 가로등불이 환한 보름달처럼 주변을 밝히고 있다. 짜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악세레터를 밟았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경쾌한 콧노래와 함께 즐거운 인생을 위해 나는 페달을 밟고 있다.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어요?"
"네, 당신이 예뻐보이기 시작하네요."

멀리 바라다 보이는 어두운 하늘에선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몰려있다. 칠흙같은 어둠에서 달빛만큼이나 빛나던 가로등 불빛도 그 기세에 맥이 풀린 듯 흐늘거린다. 포플라 가지는 거친 바람을 예견하듯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뽀송뽀송한 도로를 달리면서도 웬지 큰 폭우가 쏟아질 것같은 끈적임이 몰려든다.

"후두두두둑"
시야는 미처 일초도 안된 시간 속에 완전히 장대비로 막혀버렸다. 급히 열려진 창문을 닫았지만 쏟아져 들어온 빗물에 한 쪽 어깨가 흥건히 젖는다.
"미안해요. 미처 이런 폭우를 예상하지 못해서 옷을 다 버렸죠?"
"전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기분이 너무 좋네요."
"그래요? 참 별나군요."
"댁과 비오는 날 만나겠다고 벼뤘는데 오늘 다른 일 때문에 앞당겨져서 자존심이 좀 상했었거든요. 뒤 늦게라도 이렇게 비가 쏟아지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이 비는 정말 시원한 빗줄기가 되겠군요."
"조심해서 운전하세요."

같은 빗줄기라도 마음을 열고 함께 맞는 지금의 기분과 암울한 상황에서 맞는 기분은 천지차이였다. 아직 많은 물이 고이지는 않았지만 주행하며 양 옆으로 물방울이 튕기는 포말을 느끼며 나는 그녀의 집으로 가고 있다.

약간 구불한 산길을 오르면 그녀의 집이다. 어떤 배려를 하며 오늘은 나를 초대할것인지 궁금하다. 집에 데려다만 주고 차 머리를 돌리겠다는 처음 의도대로 나는 허무한 발길을 돌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