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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2:47 1,465회 0건
비오는 날(13)


"이젠 그만"
"싫어요. 조금만 더 쎄게 안아주세요."
"명옥아, 너무 힘들어."

나는 힘이 들어갔던 두 팔을 살짝 놓아주었다. 하지만 명옥은 부등켜 안은 내 목을 놔 줄 생각도 않고 계속 입이며 가슴이며 허벅지를 부비며 자꾸 나를 뒤로 휘청이게 한다. 차라리 내가 주도적으로 그녀를 압박한 다음에 일순간 방심할 때 위기를 모면하는게 났겠다 싶어서 나는 그녀를 두 팔로 안고 벽쪽으로 몰아 붙혔다.

"아저씨, 사랑해요."
"그래, 나도 네가 좋아."
"좋기만 해요? 사랑까진 아니구요?"

더 이상의 말을 막아야 된다.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내 자신을 추스르며 그녀를 껴 안던 팔 하나를 살짝 아래로 내려 엉덩이를 감싸며 조였다.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얇은 천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느껴졌다. 아니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단단한 그 무엇인가가 장애물을 뚫지 못해 애쓰며 분출하는 열기라고 해야 옳았다. 서로 숨이 탁탁 막힐 정도로 탐닉하고 아쉬워하며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점이 그녀를 버릴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벽쪽에 몰아 붙히던 힘을 갑자기 빼버리고 몸을 분리 시켰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안돼요. 조금만 더 안아줘요."
"아냐, 넌 이제 새 출발을 한다고 했잖아. 그 출발이 나여서는 안된다."
"왜 안된다는 거죠?"
"네겐 희망이 있잖니, 너를 오랫동안 아껴줄 사람이 나타날꺼야. 그때까지 너를 개발하고 가꾸면서 예전에 겪었던 일이 다시 닥치지 않토록 준비해야지 이건 아니다."
"그럼 아저씨랑 언제 영화보고 밥도 먹어요?"
"그런 네가 나를 편안히 대할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야."

몹시 서운해 하는 그녀를 달래서 차에 태워 보낸다.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내 집 현관문인데 몇 발자국을 남겨논 채 나는 젊은 여자의 향기를 느꼈다.


이 세상의 반은 여자, 그 반은 남자. 서로 짝하여 사랑하기로 맹세하면 두 사람 사이를 갈라 놓을 어떤 것도 없을 것 같던 아주 오랜 시간들. 난 그 맹세를 힘들어 한 적도 없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 몇일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내 생활의 질서를 송두리채 흔들기 위해 다가서는 폭풍과 같은 사건이다.
나는 조금 힘에 겨운 발걸음으로 현관에 도착하여 열쇄로 문을 열고 있다. 막힌 곳. 그래 막혀 있는 곳은 열쇄로 열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딪힌 숫한 난관들을 슬기롭게 열쇄로 열며 헤쳐나오지 않았던가. 요즘의 일들은 내가 겪었던 더 어려웠던 것들에 비하면 가벼운 바람과 같은 것.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방 문을 연다.
곤히 잠든 사람. 배를 꺼내놓고 이불을 발로 차내고 자는 아이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내겐 평화다. 나는 더 이상 갈등할 필요 없이 조용히 벼게를 꺼내어 한쪽 끝에 누웠다.

어제 밤에 팩스를 통해 몇 군데서 주문 상담이 들어왔다. 불과 몇일전만 해도 침체된 분위기였던 회사에 활기가 돌고 이젠 끊겼던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계음이 심한 팩스 소리가 젤 싫다던 직원들도 이젠 그 소리가 하늘에서 나는 음악소리 같다며 좋아한다.

오늘 방문해야 할 거래처를 함께 점검하려고 사장실에 들어갔다. 영업팀 유부장이 낯색이 푸르팅팅하다. 아무리 애써도 오르지 않던 영업력이 어느날 갑자기 사기충천으로 바뀐 것에 대한 본인의 무능함을 단단히 질책받은 모양이다.

"사장님, 오늘 방문할 거래처 명단인데 시간을 짜보시죠."
"이사람아, 자네는 이제 이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되겠네. 어느정도 사기가 충전하니까 수주량에 따라 원래 영업팀 직원들을 보내면 될꺼야."
"이제 시작인데 벌써 들뜨시면 안됩니다. 적은 양이든 많은 양이든 어려웠던 순간을 생각해서라도 사장님이 직접 뛰어 다녀야 합니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어려운 경기를 체감하긴 마찬가질테고, 이럴 때 안이하게 일반영업사원이 뛴다면 경쟁업체에 기회를 줄 뿐입니다. 따라서 저희 회사는 일정한 괘도에 다시 진입될때까지는 무조건 사장님이 직접 방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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