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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2:47 1,488회 0건
비오는 날(14)

"고려상사에서 상담이 들어왔길래 그렇지 않아도 내가 직접 뛸 생각으로 전화했었네. 하지만 상대 파트너가 과장이야. 그건데 내가 직접 상대하긴 너무 맥 빠지잖은가?"
"당연히 맥 빠지겠죠. 과장이 구매결정권을 가졌을리 없을테니깐요. 하지만 돈이 걸린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 일단 우리쪽에서도 과장을 데리고 가세요. 과장과 과장이 상담하는 동안 그쪽 회사 사장과 별도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고 계시면 그게 다 회사를 알리는 일 아니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거래처를 직접 다 돌아다녀야 한단 말인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쪼개서 다녀 보세요. 영업사원이 혼자 여러번 들락거리는 것보다는 빠른 의사결정을 얻을꺼에요."
"내가 간다고 모두 계약 되는것도 아닐텐데 넘 심한 요구야."
"우리가 대기업입니까? 사장님이 수천억 은행에 돈 쌓놓은 분이냐고요. 그렇지 않다면 상대의 직책에 연연하지 말고 회사를 위해 발로 뛰셔야죠. 저도 그 반은 뛰겠습니다."
"유부장이 뛰면 안되겠나?"
"당연히 유부장도 뛰어야죠.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영업 현장에 직접 투입되면 그만큼 상담 시간이 절약되고 그게 돈을 버는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상담 몇건 받았다고 사기가 충천이라면 그 상담이 상담에만 그치게 된다면 사기가 얼마나 떨어지겠습니까?"
"자네 말에 일리가 있네. 그럼 유부장, 김박사 파이팅하고 함께 뛰어보세."

안정적으로 회사가 돌아가다 갑자기 밀어닥친 경제불황이 여파로 쓸어지는 회사가 한 두 개가 아닌 현실에서 우리 사장님은 빠른 현실 인식으로 영업 현장에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직접 만나는 등 신속한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불과 몇일 사이에 어느 정도 물량 확보를 할 수가 있었고 이를 통해 영업은 다리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달으셨다.

"이봐, 김박사."
"네, 사장님"
"이번달 물량확보가 끝났으니 이제 한시름 놨네."
"남들이 경기 탓하며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 움직이는 사람은 두 배 성공하죠."
"난 당신을 그저 샌님으로만 알았었네. 내 야망을 언젠가 실현시켜줄 미래투자 정도로만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번 일을 하면서 자네의 위력을 확실히 봤네."
"아닙니다. 사장님이 빠른 승부를 원하시면서 제 인맥을 동원했으면 하는 마음을 읽었지만 이 정도의 어려움에 인맥을 동원하면 정말 중요한 사안이 닥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 분위기를 정적에서 동적으로 바꾸도록 한 것일 뿐이죠."
"그래, 어차피 움직이던 사람들을 모두 꼼짝말라 묶어둬서 원성이 심했었는데, 그런 자네가 처음엔 미덥지 않았는데 결과를 보니 엄청난 활동으로 바뀌더군."
"현실 인식이 안된 사람들이 움직이면 낭비일 뿐이죠. 그래서 저는 회사의 어려움을 안에서 체득하고 이를 타개 하기 위한 전략이 수립된 후에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냥 돌아 다니는 것은 도피일뿐이거든요."
"오늘 인근 사장들이 어려운 경제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작은 모임이 있네. 자네도 한번 참여해서 그 사람들에게 힘이 되 주겠나?"
"술이 따른 다면 당연히 가야죠."
"아냐, 술은 반주 정도만 있을꺼야. 식사만 하기로 했네."
"사장님이 위기극복에 만족하시고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면 함께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자네의 대처 방안이 다른 회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일세. 업종별로 적절한 대응 방안을 제시해 주게."
"제가 우리 회사에 적용한 방법은 오랫동안 안에서 분위기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뿐이지 다른 회사를 밖에서 쳐다보고 진단과 처방을 할 수준까지는 절대 안됩니다."
"알았네, 자네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개별적으로 도와주면 될걸세."
"그럼 저를 팔아먹는건가요?"
"이 사람아, 영국이 세익스피어 안 팔 듯이 난 자네를 딴 회사에 팔지 않네."
"하하, 그럼 조금 안심이 되네요. 꼭 새우잡이 배에 저를 태우는 느낌이 팍 들어서요."

이른 저녁에 인근 사장들의 모임이 있었다. 딴 때 같으면 은행이나 협회 주관으로 골프회동을 하겠지만 요즘같이 어려운 현안이 산적한 경우에는 이렇게 조촐하고 진지한 모임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자리도 활성화가 된 듯 했다.
나는 사장님의 입을 통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소개되어졌고 우리회사의 침체로부터 벗어난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을 여러사람들에게 개념적 접근과 현실적 접근에 대한 컨셉으로 짧은 강의를 마쳤다. 참석자들이 인식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인식토록 하는 방법론에 대한 견해를 제시했을때는 많은 반발도 있었지만 우리 사장님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발언과 질문들, 그에 대한 답을 주고 받느라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모임을 마쳐야 했다.

"자네, 이젠 유명인사일세."
"전 원래 유명인사였어요. 사장님."
"아니, 경제쪽으로 말일세. 리모델링 컨설턴트라고 해야할라나?"
"전 단지 술한잔 공짜로 먹을 수 있을까 해서 참석했을 뿐이고, 경제는 우리 회사 안에서만 챙기면 될뿐이지 다른 회사까지는 몰라요."
"자네 덕에 우리회사 입지가 엄청 커진 느낌이야. 고맙네."
"그럼 사장님은 다음 골프 회동땐 돈 안드시는건가요?"
"아무래도 모임에 나를 꼭 넣으려고 안달나겠지. 허허허."
"위기도 극복하고 위상도 높이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자네 덕일세. 고맙네."

기분이 좋아진 사장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를 불러 귀가했다. 쫄병들은 내가 사장들 모임에 같으니 엄청 대접 받겠다 싶어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먹고 있을텐데 정작 나는 술도 못먹고 밥값이상으로 떠들다 왔으니 오히려 제일 손해를 본 샘이다.

"그래, 오늘은 모처럼 술도 안먹었으니 차를 몰고 집에나 일찍 들어가자." 혼자 중얼거리며 주차장에 세워둔 차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갔다.
"이봐요, 저에요."
"누구?"
"당신 오늘 강의 잘하던데, 날 못본척 하더군요."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 날이잖아요."
"난 못본건 아니죠?"
"제가 장님입니까? 화사한 외모와 지성을 품어내는 교수님을 못보게?"
"그런데 왜 아는척도 안했죠?"
"거긴 사장이고 난 조그만 회사 종업원인데, 자리가 사적입니까?"
"알고도 모른척 했단 말이죠?"
"제 몫이 아니란 얘깁니다. 뽀송뽀송 맑은 날인데 더구나 제가 왜 아는척 해야하죠?"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전 당신의 모습이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혔어요."
"쓸데없긴요. 전 임무 수행을 위해 참석했을 뿐이고, 제 임무를 수행하느라 술 한잔 못해서 짜증만 났는데 마치 내 주인처럼 우아하게 앉아서 무게만 잡는 사람을 왜 생각해야 합니까?"
"술 한잔 못해서 화났어요?"
"술 자리라고 꼬셔서 나갔는데 정작 밥한그릇 사먹이곤 제 에너지를 얼마나 삣어갔는지나 알아요? 담부턴 절대 그런 자리에 안나가렵니다. 에이 오늘은 마이너스네."
"제가 한잔 살께요. 같이 가요."
"아뇨, 오늘은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가서 애들 얼굴이나 자세히 볼래요."
"잔말 말아요. 나중에 댁까지 모셔다 드릴테니 한 잔 해요."
"아니 집에만 가면 낼 아침 출근은 어떻하라고요. 만약 술 먹여서 차 못끌고 가게 되면 낼 아침 출근까진 책임져야 손익계산이 맞는거 아녀요?"
난 술자리를 피할 생각으로 어거지를 쓰고 있다. 오늘 이 여자와 만나면 어떤 변화가 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생떼를 써서라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좋아요. 제가 낼 아침에 댁 앞에 가서 출근할 수 있도록 기다리죠."
"낼 일을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더구나 아줌마는 술 안먹어요?"
"아줌마라뇨?"
"아줌마, 난 집에 그냥 갈래요. 나중에 비오는 날 전화하든 만나든 그때 결정합시다."
"정말 내 호의를 그딴 식으로 무시할꺼에요?"
"오호, 그래. 화내세요. 난 하나도 안무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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