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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2:48 1,282회 0건
비오는 날(8)


"맞아요, 낙태한지 얼마 안되요. 웬만하면 안나가는데, 그 손님이 많이 취해있길래 오랄 몇번 해주면 끝날 것 같았아서 나갔다가 난리가 났죠. 그때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전 맞아 죽었을거에요."
"그 사람이 몇날을 벼뤄서 간 건데 그냥 재울리 있나. 덕분에 내 파트너만 호강했겠지 뭐~"
"우리 술집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양주에 쩔어서 갈 때 까지 가는 사람치고 힘 한번 쓰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따라만 가주면 골아 떨어지거든요."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건 알아야 할꺼야."
"그럼 아저씨가 그런 사람인가요?"
"아니, 난 그런걸 좋아하지 않아, 사는게 뭔지 궁금하곤 해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술 먹고 얘기 하며 나름대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뭐 그런 것만 좋아할 뿐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하루밤을 보낸다는 것은 생리에 안맞아."
"절 사랑해 보세요."
"아가씬 어린 조카뻘쯤 될까? 사랑이란 예쁘다고 되는게 아니야. 주고 또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어디선가 계속 솟아나도는 그런 정. 받으려고 하지 않고 받지 않아도 줬다는 것만으로 만족을 얻는 상태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아가씨에겐 내가 줄 것이 없어."
"그럼 제가 아저씨한테 뭔가를 계속 주면 사랑인가요?"
"이치로 따지면 그렇지. 하지만 내게 뭔가를 계속 준다한들 그대에게 돌아갈 건 절망 뿐인걸."
"아저씨를 닮은 애기가 생긴다면 난 낙태 안할거에요. 사랑한다고 말해서 모든 걸 다 가져가곤 저에게 고통만 주는 오빠친구보담 솔직하잖아요."
"애기는 살면서 큰 짐이야. 어릴 때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꿈을 키워야해. 짐을 지고 달리면 멀리 가질 못해. 지금 생각나는데로 막 어떤 일을 하면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동안 고통만 따를 뿐이지."
"전 복잡한 걸 몰라요. 그냥 좋으면 되고, 아저씨 말대로 아저씨에게 바라는 마음 없이 내 마음만 계속 줘 볼래요."
"하하, 난 애도 있고 생활에만 충실한 사람이야. 그대가 있다하더라도 전혀 돌봐줄 여력도 없는 가난한 샐러리맨이지."
"전 제가 벌어요."
"몸은 다른 사람들이 뒤적거릴수 있지만 마음까지는 뺏지 못할걸요."
"아가씨와 난 겨우 두 번 봤을 뿐인데도 내게 마음을 준다면, 열번 본 사람에겐 뭘 줄꺼야?"
"그렇군요. 전 아직 어린가봐요."
"아가씨에게 남은 거라곤 희망 밖에 없어. 절망은 쳐다 보지도 말아봐."
밀고 밀리며 여러 층을 돌아다니며 어깨를 마주하며 얘기를 하는 사이 웬만한 쇼핑은 다 끝난 것 같다. 사람들도 하나 둘 목적을 이루고 자신이 처음 왔던 곳으로 가고 있어서 점차 밤이 깊어갔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타워를 빠져나와 다시 택시를 잡기 위해 한 블록 더 지나서 이대 병원쪽까지 걸었다. 여긴 그래도 북적거림이 덜했지만 나이트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인파와 또 맞닿트렸다.
"오늘 영 시간이 안맞네. 우리 신설동 쪽으로 좀만 더 걸어야겠어."
"네, 밤 바람이 시원해요. 그냥 걸었음 좋겠어요."
"조금만 더 가면 택시 잡기가 쉬울꺼야. 이젠 할증료 낼 필요도 없어질 시간이 다 됐거든."
옹기종기 따닥따닥 붙은 상가들 사이로 노란 여인숙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저 다리 엄청 아파요. 저기서 잠시만 쉬면 안돼요?"
"안돼, 더구나 난 오늘 택시비 밖에 없어. 어서 가자."
"저 돈 많아요. 지난번 구해주신거 보답하구 싶고요."
"아냐, 오늘은 그냥 집에 가자. 넘 늦었어. 난 밖에서 자면 뜬 눈으로 밤 샌다구. 아침에 피곤해서 미움받는단 말야."
"그럼 딱 한시간만 커피 마신다 생각하고 들어가요. 쇼핑하며 돌아다닌 거리도 엄청나지만 지금 서있는 자체가 너무 힘들어요."
"알았어. 그럼 잠시 쉬기만 하자."
그녀는 허름한 여인숙 간판이 붙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선 얼른 계산을 한다. 초라한 늙은이가 턱으로 위를 가리키고 나는 턱을 따라 이 층에 올라갔다. 퀴퀴한 냄새. 누군가가 덮었는지 모를 수없이 많은 체취, 한 번도 빨래를 안했을 것 같은 땟국물이 덕지덕지 묻혀있다.
창을 열면 옆집의 낡은 기와가 보이고 새끼가진 도둑고양이와 마주쳐야한다. 삐그덕 거리는 선풍기의 힘든 날개짓, 냉장고에 준비된 주전자물은 언제 받아논건지 유효기일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어릴 적에 온 가족이 한 방에 섞여서 자면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추함이 이 곳에 있었다. 도저히 앉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옷을 벗는다면 속옷에 온갖 더러움이 묻어날 것만 같은 헛구역질...
"너무 심하다."
"전 이런 곳도 좋아요. 너무 다리가 아프거든요."
14인치 낡은 TV를 통해 나오는 음험한 성인영화. 화면발이 다 돼서 이젠 흑백보다 화질이 어수선하다.
"이 집은 정말 할머니 주름살 보다 더 심하네."
"일단, 앉아요. 전 다리 아프단 말에요."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치우며 앉았다. 그녀는 벌러덩 더러운 이불위에 눕더니 말 한마디 없이 세상 모를 잠에 떨어진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는 낡은 TV 화면을 응시하며 요즘 내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들이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는 상념에 빠졌다. 한 시간쯤의 시간이 어쩌면 한달같이 흘렀다.
"아가씨, 이젠 일어나!"
"아휴~ 벌써 한시간 됐어요?"
"응, 이젠 출근시간 한 시간 전이야. 난 간단히 머리좀 깜고 여기서 다시 출근해야겠어. 아가씨는 내가 출근한 후 얼마간 더 자며 피로를 풀어."
"아뇨, 저도 간단히 씻고 아저씨 따라 나갈래요. 아저씨 일할 시간에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면서 놀다가 저녁에 룸에 나가면 되요. 어차피 집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는걸요."
"왜, 혼자 살아?"
"돈 몇푼 모아서 독신자임대아파트 하나 얻었어요. 저 혼자 궁상떨며 사니 참 편해요."
"그래, 그럼 어서 씻고 나가자."
나는 양복 웃옷만 못에다 살짝 걸어놓고 와이셔츠를 입은 채로 머리를 깜았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도록 손가락 열 개를 모두 사용해서 버벅 버벅 문질렀다. 세상의 일들이 모두 이렇게 씻겨나가고 뽀송뽀송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저도 같이 씻어요" 하며 옷을 훌러덩 벗고 아가씨가 뛰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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