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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12 1,475회 0건
가을 야화 (24)
담당의사는 환자와의 관계를 물었다. 남편이라고 했더니 여진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곤 내게 놀라지 말라면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아무래도 백혈병 같다면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자는 것이다. 황당해 하는 내게 닥터는 만일 백혈병이라도 해도 초기인 만큼 완치 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위안의 말을 전했다.

믿을수 없었다.
하지만 백혈병으로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고서 아무렇지 않게 살순 없었다. 여진에겐 이 병원의 기자재가 너무 낡고 모자라는게 많아서 종합병원서 다시 진단을 받아야 겠다고 겨우 설득했다.

종합병원서 진단이 나오는 날.
나는 전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런 날 여진이 오히려 걱정했다. 그저 신경쇄약 같은데 뭘 그리 걱정하냐 면서 여진은 날 위로했다.

여진에겐 집에 있으라고 말하곤 병원에 혼자갔다. 의사의 입에서 호즈킨즈씨 림프종이라는 일종의 혈액암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닥터는 오늘 당장 입원해서 치료를 하자고 권했다. 요즘엔 치료법이 많이 개발된데다 환자가 젊어서 쉽게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왜 그리 눈물이 쏟아지는지...
내가 여진을 만난 것 때문에 그녀에게 이런 불행이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 문을 열어주는 여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뭐라고 그래요?"
"응...별거 아니래..."
"거봐요.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
"왜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니... 그냥 피곤하네..."
"아찌, 내가 어떻게 되는줄 알고 무지 신경 썼구나."

여진은 자기에게 어떤 운명의 C이 놓인줄도 모르고 내 걱정만 했다. 집에서 여진을 볼 수가 없어서 회사에 가봐야 한다고 집을 나왔지만 막상 갈데가 없었다. 회사에 돌아와서 고민을 하다가 다시 그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다시 확인을 해 봐야 겠다싶어서다. 혹시 오진한게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담당의사는 여러가지 검사결과를 보여주면서 빨리 치료하자고 했다.
고민하다가 여선에게 먼저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여선은 아무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곤 여진이 알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차마 알릴 수가 없어서 여선에게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여선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여진을 데리서 서울서 검사를 다시 받아보자는 것이다. 여진에게 갑자기 서울갈 일이 있는데 같이 가자니까 좋아라 하면서 따라 나섰다.

서울서의 검진 결과도 마찬가지 였다. 장모님은 소식을 듣고 울기만할 뿐이다. 여진에게 사실을 알리고 치료를 받게 하는 방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진의 어머니는 가족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여진의 발병 소식을 전하는 장모님은 말씀하시는 내내 떨었다.

여진은 의외로 자기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너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처음 병원에 갈때 부터 이상조짐을 느꼈다는 것이다. 가족회의 결과 서울서 치료를 받게 했다. 나도 가급적 서울에 머물기로 했다.

여진을 입원시키고 LA로 돌아와서 간부회의를 통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회사운영을 이부사장에게 맡길테니 모두 협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서울에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서 내 거처와 사무실을 겸하기로 정하고 LA와 연락을 해줄 여직원을 하나 채용했다.

병원에 입원한 여진은 독성이 강한 항암치료를 받아선지 하루가 다르게 병색으로 바뀌었지만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의료진들과 미국으로 옮기는 문제를 협의했는데 혈액암의 경우 미국보다는 한국의술이 뛰어난데다 가족들 옆에서 치료를 받는게 환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장모님을 비롯한 여진의 가족들도 서울서 계속 치료를 하는게 좋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루는 밤늦게 여선이 찾아왔다.
이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출산이 다가올수록 남편의 의심이 심해져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선은 그저 자기가 하는데로 내버려 달라고 했다.

여진이 병원에 입원한지도 2달이 지났지만 병세는 호전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처음엔 완치를 자신하던 의료진들도 점점 고개를 내저으면서 자신없어 했다. 여진은 마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진아 조금만 참아. 곧 완치될 거야"
"아찌. 내 걱정마요. 나 낳을테니까. 회사일은 하는 거예요"
"응. 매일 LA와 연락하고 있으니 걱정마"
"아찌."
"왜?"
"우리 춘천에 갔다오면 안돼요?"
"춘천엔 왜?"
"그냥... 가고 싶어요"

처음엔 왜 춘천에 다녀오자고 하는지 몰랐지만 여선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진의 의도를 알수 있었다. 춘천은 여진과의 사랑이 피어난 곳이었다.

여진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온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가뜩이나 커다란 눈동자가 핼쑥한 얼굴의 절반이나 차지할 정도다.

어느덧 우리가 결혼하기로 했던 5월5일이 다가왔다.
여진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날이 다가오는게 무척 괴로운 모양이었다. 나는 장모님께 다시 한번 결혼승낙을 받아냈다. 처음엔 무슨 말이냐면서 완강하게 반대하던 장모님은 내 고집앞에 겨우 승낙해 줬다. 여선의 도움이 컸다. 여진에겐 아무 말도 않았다. 반대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5월5일.
어렵게 병원측의 외출 허가를 받아내곤 여선은 영문도 모르는 여진을 데리고 관악산에 있는 작은 암자로 왔다. 휠체어를 탄 채 절마당으로 들어서는 여진을 보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이제서야 여진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알아챈 모양이다.

여진은 끝까지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으려 했다. 여선이 설득하고 장모님이 설득하고... 나는 모두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곤 여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여진아. 내게 해 줄수 있는게 이것뿐이야."

그말을 듣곤 여진은 눈물을 흘렸다. 여진은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절대 사진을 찍어선 안된다고.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없는 세상에서 걸려질 웨딩사진...

새하얀 웨딩드레스보다 더 창백한 신부...그렇게 우리는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는 여진을 데리고 춘천으로 갔다.

"여진...여기가 우리가 만난데야"
"아찌. 난 그때 아찌가 너무 편안했어요. 아빠 처럼..."
"그랬어?"
"아찌 부탁이 있어요"
"뭔데?"
"나 이곳에 다시 오게해줘요. 이 호수가 좋아..."
그녀는 이곳에 묻히길 원했다.

그날밤 늦게야 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에선 난리였다. 그날 무리를 해선지 여진은 기동을 하기 힘들정도로 나빠졌다. 내 친구가 몰래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여진은 사진을 물끄럼이 보다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젠 울 힘 조차 없어보였다.

그로부터 4개월쯤 지났을 무렵 어느날 새벽에 전화가 울렸다. 마침 장모님과 교대하고 오피스텔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직감으로 여진의 마지막인줄 알았다.

병원으로 달려가니 여진은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날 쳐다보고 미소를 짓다가 숨을 거뒀다.

장모님에게 여진이 원했던 것을 말했다. 춘천 호수에서 잠들고 싶어했다는... 가족들은 아무말없이 내 뜻대로 따라주었다.

춘천의 호숫가. 4년전 여진과 함께 했던 그곳엔 전처럼 낙엽이 뒤둥굴고 있었다. 여진과 함께 앉았던 벤치를 찾아서 그때 그 모습대로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여보. 여진이가 뭐래?"

여선이다. 여진이 죽고난 이듬해 우리는 장모님께 그동안의 일을 모두 말씀드리고 결혼할 수 있었다. 나는 여선의 손을 꼭 잡으며 "응 이젠 여진이 외롭지 않다고 그래네"라고 말해줬다.

그때 멀리서 어린 여자애가 아둥바둥 뛰어오면서 소리친다.
"아빠. 나 이쁜 잎사귀 줏었어. 이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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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런 슬픈 가을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지요.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Drea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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