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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14 1,398회 0건
가을 야화 (14)
여선이 자기 동생과의 관계에 대해서 왜 이토록 솔직하게 털어놓는가에 대해 궁금했지만 더 추궁할 수가 없었다.

"여진인 이번에 자기 온 것 아직 모르고 있어"
"................"
"여진이 전화번호 갈켜줄까?"
".........."

나는 당장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구걸하고픈 맘이 간절했지만 차마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아-. 역시 여진은 내 사람이 아니었구나를 새삼 확인하는데 마음이 무척 아팠다. 여선이 자기 동생이야기를 내게 해 주는 의도는 단순명료했다. 어짜피 둘이 어울릴수 없으니 더이상 어린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현실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이혼남이고 게다가 여진과는 무려 14살 차이가 나는 고리타분한 아저씨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이제 막 피어오르는 남의 집 귀한 막내딸을 만나겠다는 발상자체가 불건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짜피 내 여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더 사랑이 깊어지기전에 일찌감치 잊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날 사모하고 있다는 여진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진다.

"별일 없었어. 그저 가을을 탔던가봐"
"정말요? 아무일 없었어요? 둘이서?"
"허 참. 왜 사람말을 못 믿어"
"자기란 사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왜 내가 어때서?"
"유능하겠다. 돈 많겠다. 편안하겠다 어느 여자가 싫어하겠어요"
"그런가. 결점 투성이인 날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가 보지?"

여선은 자기 동생가 내가 이미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다고 단정하고 있는듯 했다. 참 진실을 알아주지 못하니 답답하고 화가 났다. 오해가 깊어지면 여진에게 좋지 않을 것같아 여진과의 관계를 숨김없이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내 말을 듣고 있던 여선은 "맹추같이...아직 너무 어리다니까"라고 혼잣말 처럼 내뱉었다.

"여진에겐 아무 잘못이 없어. 감정을 잘못 전달한 내게 문제가 있지"
"알긴 아네요. 자기 잘못을"
"미안해. 하지만 그애에게 상처를 주고픈 마음은 없었어"
"애가 너무 순진해서...그 나이 먹도록 연애 한번 못해 봤으니..."
"그래? 그동안 남자친구 사귀지 않았었어?"
"자기가 처음이래요. 첫사랑."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 25세된 처녀가 그동안 사랑한번 해보질 않았다니...하필 첫사랑의 상대가 이혼한 상처투성이의 아저씨라니....

여선은 자기 동생이 내게 빠져든 이유를 집안환경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진이 고2때 갑자기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처음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별것 아닌것으로 알았는데 몇일동안 낫질 않아서 병원을 찾았더니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로부터 2개월도 채 못채우고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여진은 그 충격이 심했을 것이란 설명이다. 그래서 아빠의 모습과 많이 닮은 나에게서 정을 느낀 것 같다는 여선의 말을 들으니 어느정도 수긍이 갔다.

여진은 처음엔 내게 관심이 없었는데 오페라 관람을 함께 하고부터 부쩍 내게 기대왔던게 생각이 났다. 어쨌든 나를 남자라기 보다는 아빠라는 감정 때문이었다니 한편으론 섭섭했지만 잘 됐다 싶었다.

"미안해...여진에게 잘 해줘"
"자기가 미안해 할것 까지는... 그럴께요. 여진이가 그동안 많이 외로웠나 봐요"
"그렇다고 나를 멀리하진 않을거지?"
"동생까지 넘 본 남자를 뭘 믿고..."

그렇게 정리가 됐다. 나도 마음속에서 여진을 완전히 지워내기로 했고 여진의 사랑앓이는 언니가 신경을 써서 해결해 내기로. 그대신 여선에게 더 충실하기로.

"우리 관계를 동생도 알아?"
"눈치를 챈 것같아요"
"조심해야지...괜히 말 나면 좋을게 없으니..."
"그래서 자기 왔다는 말 안했어요"

여선은 내 생각보다 훨씬 사려가 깊은 여자였다. 이미 내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했고 동생의 장래를 위해서도 어떻게 하는게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도 말끔히 정리를 해 논 것이다.

"만일 내가 자기 대신 여진을 선택하면 어쩔라고 했어?"
"싫컷 두드려 패 줘야지 뭐"
"그리곤..."
"동생에게 양보해야 겠죠....."

새삼 여선의 매력이 돋보였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나는 내 다짐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여선을 힘껏 끌어안았다. 여선도 내 뜻을 알았는지 날 감싼 두팔에 힘을 주었다.

일하는 사람을 충분히 보강하고 밤새 작업을 진행 시킨 결과 예정보다 하루 앞서 선적을 할 수 있었다. 여선과의 마지막 밤은 화려한 불꽃놀이 처럼 밤새워서 정열을 불태웠다. 다음날 공항으로 나가는데 다리가 뻐근해서 제대로 걷질 못하겠다고 말했더니 여선은 자기도 그렇다면서 마구 웃었다.

LA로 돌아와서 쌓여있는 우편물을 정리하는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편지가 있었다.
여진이 보낸 편지였다.겉봉을 뜯기 조차 두려웠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뜯어서 읽어내려가는데 온 마음이 후들거렸다.

여진은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25년을 한 순간순간을 빼 놓지 않고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나에게 느낀 감정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통이라는 것과 언니의 따뜻한 마음에 불구하고 잊기가 어렵다면서 어떻하면 좋냐고 물어왔다.

답장을 하기도 안하기도 참으로 난처했다. 답장을 안 하면 여진의 마음을 두번씩이나 무참히 짖밟는 것이 되고 답장을 하자니 내 마음을 붙잡지 못할 것 같았다. 고민을 하다가 여선에게 전화를 했다.

여선도 당혹스런 눈치였다. 자기도 여진의 사랑앓이가 그토록 심각할 줄 몰랐다면서... 한 1주일만 시간을 갖고 서로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녀도 나도 어떻해야 좋을지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여선의 말에 따르면 여진은 학교의 강의도 제대로 하곤 있지만 점점 생기가 없어져 가는 듯 하다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아무 내용도 모르는 어머니는 막내딸이 무슨 중병에 걸렸을까 매일같이 병원에 가자고 보채는 등 상황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난감했다. 나는 단안을 내려야만 했다. 편지로 내 마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녀의 진실을 우롱하는 것같아 직접 만나서 우리가 만나서는 안된다는 현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유민화는 잦은 서울나들이에 온통 신경을 곧두세웠다. 여자의 직감으로 내가 여자문제에 깊숙히 빠져들었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민화에게까지 여진의 일을 알릴수가 없었다. 그저 골치아픈 일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안에서 서울에 가까워 질수록 나는 초조함을 달랠수 없어 애꿋은 술만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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