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야화 (19)
여선은 담담해 했지만 나는 안절부절했다.
나는 아무말도 할수도 할 말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뒤죽박죽인지 알수가 없었다.

여선은 최근 여진의 근황을 말했다.
대학에다가 사표를 이미 제출했고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여진은 이미 앞으로 자기 인생이 어떻게 불행해 지든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내 옆에 있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는 여선에게 따졌다.
왜 언니로서 말리지 않고...서울을 떠나올때 내가 한 말을 무시했느냐...
여선은 자기가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도 여진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떠나온 내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되물었다.

자기가 여진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냐고. 여선은 내 맘을 궤뚫고 있었다.
내가 왜 여진과 동침하지 않았는지 그녀는 그 사실 때문에 혼자서 무척 괴로워했다고 했다. 처음 여진이와 내가 여행을 떠날때 여선은 제발 육체적인 관계를 맺길 맘속으로 간절히 원했는데 자기가 일부러 전화까지해서 부탁을 했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여진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쯤 되니 나는 솔직해 질 수 밖에 없다.
여진을 이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여진을 만나면서 나는 먹구름 같은 내 맘이 환하게 밝아지는 행복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는 것도 밝혔다.
그녀를 감싸줄 자신이 없었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여진에 대한 내 마음을 하나도 거침없이 말했다.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한가지 더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예...임신 3개월째래요"
".................."
"그날 당신이 날 원했을때 나는 이런 순간을 원했는지도 몰라요"
"................."
"임신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 자기 밖에"
"................."
"나도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있잖아요? 허락해 줘요"
"어떻게...."
"내가 당신아기를 가져야 당신을 보내줄수 있을 것같아요"
"..................."

나는 점점 여선에게 설득당하고 있었다.
여선은 정말로 날 사랑했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 마저 뺏으면 여선에겐 여진을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비밀 지킬수 있겠어?"
이말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 여선은 정말로 기뻐했다.
그녀는 내 몸을 원했다.
나도 그녀를 원했다.
여선은 내게 벗은 몸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리고 나도 몰래 그녀의 배를 만졌다.
여기에 내 아기가 자라고 있다....

이튿날 여선은 서울로 되돌아갔다.
공항에 여선을 데려다 주고 회사에 돌아오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책상위엔 두개의 봉투가 있었다.
직감으로 사표인줄 알았다.
하나는 예상했던대로 유민화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김부사장의 것이다.

"민화언니랑 김부사장이랑 얼마전부터 자주 어울렸어요"

유니스가 방으로 들어서면서 말을 꺼냈다.
유민화는 결국 어제밤 나의 맘을 확인하곤 떠나갔다.
그런데 유민화는 그냥 떠난게 아니었다.
회사의 중요부분을 마구 흠집내 놓고 떠났다.
그녀로선 내게 당한 앙갚음인 셈이다.

간부들을 소집해 진상을 파악해 보니 예상보다 심각했다.
그동안 김부사장이 맡아서 추진해 오던 모든 업무가 마비됐다.
아니 김부사장이 거래처 파일 등을 모저리 자기 것인양 갖고 나갔다.
일부 직원들도 동요하는 모양이다.

다행히 유니스가 유민화의 파일들을 모두 복사해 놔서 재정쪽으론 별 문제가 없었다.
유니스가 기특해 보였다.
유니스는 유민화만 제거하면 될 줄 아는 모양이지만...지금 내 입장에선 유니스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