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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1:36 1,488회 0건
청춘회상
고 3 시절 나는 꽤 오랜 기간 당시 친했던 친구들과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밤늦게 돌아오곤 했다.
어떤 날은 아예 담날 수업분을 준비해서 바로 학교에 가버리곤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부모님은 그런 외박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시지 않았다. 모범생의 범주에까지는 들지 못했더라도 나름대로 착실한 학생이었고, 공부도 평소 하는 거에 비해선 꽤 우수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이따금씩 친구들과 독서실 옥상에서 술도 마시고 한밤에 동대문에 놀러가 헌팅을 하는 등 일탈의 행동도 서슴치 않았지만 언제나 유희는 유희로서 끝났을 뿐이다. 사실 그만한 즐거움도 누리지 못 할만큼 빠듯하고 정적인 학생시절이라면 이제 와서 돌이켜도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런 추억이 될만한 꺼리 외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생활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어느 한 사건, 그러니까 그 발단이 되었던 고3시절의 여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7월초 이제 막 기말고사가 끝났을 무렵이다. 10대를 벗어난 분들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고3에게 있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따위는 고1이나 고2때의 쪽지 시험에 불과할 뿐이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대와 흥분에 부풀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이 정열적인 여름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부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컸다. 결국엔 불안은 불안대로 끝나고 놀거 다 놀았지만 말이다.
시험이 끝난 날, 저녁에 나 혼자 독서실에 나와 있었다. 해이지지 말고 나와서 함께 공부하자고 다짐했던 녀석들은 하나같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당시엔 핸드폰도 없었고 괜히 녀석들 집에 전화했다가 부모님들에게 우리들의 간혹스런 일탈행위가 들통이라도 날까봐 그만두기로 했다. 밤 8시쯤 되었을까.. 도저히 책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질 않아서 무작정 독서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초여름이긴 했지만 날씨는 이미 후덕지근했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채로 주위를 서성이다가 - 당시엔 겜방이란 것도 없었다. - 갑자기 오늘 부모님이 내일 새벽이나 되야 집에 돌아 오실거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집에 가서 비디오를 빌려다 보기로 했다. 부모님 제사 때문에 내 저녁까지 차려 주시고는 바로 경기도 파주에 있는 큰 아버지 댁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대학생인 누나가 와 있을 지도 모르지만 동생이 비디오 좀 본다고 야박하게 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곧장 비디오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야한 비디오를 빌려볼까 했었지만 주인아저씨 대신 아줌마가 카운터안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나는 그냥 공포영화를 빌렸다. 그게 "나미트 메어"3편이었던가.. 워낙 잊을 수 없는 날이었는지 10년 전에 본 비디오까지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우리집의 구조에 대해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겠다. 당시 우리집은 청파동(숙대근처)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으며, 넓진 않지만 자그마한 뜰도 가지고 있었다. 이 뜰에는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주는 편편한 돌이 깔려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골프장에나 깔리는 외산 잔디가 덮혀져 있었다. 건물은, 내가 살았던 때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네 식구가 살기엔 꽤 넉넉한 규모였던 것 같다. 1층에는 방이 세 개가 있었고 안방과 내방 그리고 나머지는 손님방이라 불렸으나 보통 잡동사니들이 쌓아져 있었다. 마루는 꽤 큰 편이었고 내방 옆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 밑으로는 화장실이 있었고, 그옆이 주방이었다. 2층은 누나방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 시절에 1층, 2층에 화장실이 따로 있었던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던 것 같다.
대문에 이른 나는 당연히 집안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갖고 있던 키로 대문을 열었다. 안방과 손님방, 그리고 2층의 누나방은 대문밖에서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불이 꺼져 있으면 당연히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 서있으니까 내 방엔 당연히 아무도 없었을 테고..
대문을 열고 현관앞에 서서 현관키를 고르던 나는 반 직감적으로 현관문이 잠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눈에 띄게 열려져 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우리집 식구들이라면 누구나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순간 웬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지금쯤 파주에 도착하실 시간이고 누나방에는 분명 불이 꺼져 있었다. 혹시 도둑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갔지만 도둑이 들어오기엔 다소 이른 시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집주위에는 여전히 지나가는 행인들도 많았다.
그러다 누나가 일찍 들어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속에서 누나의 신발을 살펴보기 위해 집중하던 나는 바로 누나의 구두를 찾았는데, 순간 깜짝 놀란 것은 누나의 구두 옆에 못보던 신발 한 켤레를 발견하고 나서였다. 어둠에 바로 익숙해진 나의 눈은 그것이 곧 남자의 신발이라는 것을 알아 채고 온몸에 쭈삣한 기운이 감도는 느꼈다. 더운 날씨로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맺혀 있던 나는 이 낯선 남자의 신발로 인해 내부에서조차 타오르는 열기에 심한 더위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잠시 제 자리에서 망설이기는 했지만, 2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분간할수 없었던 -를 듣고나선 슬그머니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나의 목소리같긴 한데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처음엔 혹시 "도둑 놈이 우리 누나를.." 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따금 들려오는 박수 비슷한 소리와 누나로 추정되는 옅은 웃음소리는 그런 상상속의 상황을 바로 불식시켜 버렸다. 계단을 밟고 오르는 단계까지 왔을때는 정말 너무 긴장해서 내가 숨조차 쉬지 않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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