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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1:50 837회 0건
제 55화
가일의 몸이 중간에 딱 멈추어 섰다. 그러자 가일을 뒤따라오던 레나들도 자연스럽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요? 가일님?"
"잠깐만.... 뭔가가 있어. 점점 다가오는데... 한둘이 아닌 것 같아."
가일이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세이나와 엘레제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나 가일의 머릿속에는 걱정보다는 오히려 기쁨이 더 컸다.
"잘됐군... 어차피 몸이 완쾌되었는지 확인도 해야 했는데..."
가일은 자신의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레나, 모이아."
"네, 네?"
뭔가 다가온다는 가일의 말에 바짝 긴장해 있던 둘은 잠깐 말을 더듬었다.
"내가 앞쪽에서 싸울 테니까, 가끔씩 다가오는 몬스터들이나 좀 잡아 줘. 아무리 나라도 몇 놈은 놓칠 것 같아. 엘레제랑 세이나를 보호해 줘. 한두 마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가일이 한 말에 두 여자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네! 주인님. 걱정 마세요."
레나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그녀의 두 손에는 날카로운 단검 두 자루가 들려있었다. 얼마나 빠른 동작인지 도저히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 몬스터를 주, 죽이라고요...??"
반면 모이아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몸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가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어디 몸이라도 안좋은 거야?"
"자, 잠시만요..... 거, 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약초를 캐다가 도, 도망갈 때만 써봐서... 아, 아직 뭔가를 죽여본 적이 없어서.... 하아.... 후우...."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일로써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몬스터도 잡아 본 적 없이 검술 수련을 하지? 난 입문 때부터 지겹도록 때려잡았는데..."
자신의 수련법이 너무나도 독특했다는 사실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가일이었다.
"그럼 레나 혼자서 할 수 있겠어?"
가일은 모이아를 엘레제, 세이나와 같이 뒤쪽으로 밀며 말했다. 그러나 모이아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거, 걱정 마세요! 이제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가일은 모이아의 의외의 행동에 잠깐 멍 해 졌다. 그러나 그런 여유도 잠시뿐이었다.
"가일님.. 들려요... 뭔가 오는 것 같은 소리가..."
세이나의 목소리였다. 겁에 질렸는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긴.. 도시 한가운데에서만 지내왔던 그녀가 언제 몬스터의 "몬"이나 볼 수 있었을까?
"부스럭... 부스럭"
"!!"
가일도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어느틈엔가 세이나의 귓가에 그들이 다가오며 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접근했던 것이다.
"쳇, 더 이상 접근하면 귀찮아지겠군... 모이아, 정말 할 수 있는거지?"
모이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좋아, 믿을게. 레나랑 같이 여기 있어. 옆으로 돌아 들어오는 녀석도 있을지 몰라. 상당히 퍼져서 접근하고 있어... 잘 지켜줘."
가일이 레나와 모이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가일과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들의 마음속에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환한 미소가 되어 가일에게 되돌아 갔다.

"다녀올게."
그리고 가일의 몸이 그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심하세요!"
아직 세네 시에서의 일이 잊혀지지 않은 듯, 엘레제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주변 어딘가에 있을 가일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멀리 퍼져나갔다.


"후후.... 슬슬 내가 나가야 할 차롄가?"
남궁혁은 약간 높은 지역에서 납작 엎드린 채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그의 주변에선 나뭇잎 하나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훈련받은 암살자 조차도 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살금살금, 느릿느릿 내려가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배여 있었다.
몬스터들의 소리 때문에 아래쪽의 미녀들은 분명 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시야에 몬스터가 나타날 때쯤 쏜살같이 날아가 멋진 용사가 되어 못된 몬스터 들을 무찌르고, 악의 손아귀에서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구해낼 예정이었다.
적어도 약간의 오차가 생기기 전까진 그랬었다. 그런데..
"어? 어라...?"
천천히 내려가며 한걸음에 몬스터들에게 달려들 간격으로 진입하려는데, 난데없이 미녀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남궁혁의 귓가로 얼핏 "조심하세요" 라는 소리도 들려왔다.
듣는 자신이 애절해질 정도로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그 목소리에 감동하고 있지 못했다. 몬스터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을 향해 겁도 없이 달려든 아가씨를 구출해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길, 어디서 검술 좀 배웠다고 달려든 모양인데...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로군!"
툴툴거리면 서도, 그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잘못했다가 연약한 미녀가 -멀리서 바라보는 남궁혁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저 잔인한 몬스터의 손에 생채기라도 생겼다간... 아마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점점 다가갈수록 수상한 점이 많아졌다.

"얼라....? 뭐가 저렇게 빨라? 아무리 여자라지만.... 허허.. 가일이랑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응? 그러고 보니 저 검도 어디서 많이 본 검일세..."
그리고 좀 더 가까워졌다.
"얼래? 몬스터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져 나가? 잉? 어디서 많이 본 뒷모습이야.... 이봐, 일루 얼굴좀 돌려보라고!"
그리고 약간 더 거리가 좁혀졌다.
"가, 갑자기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군..."

그리고..
"헉!! 가, 가일이잖아!!"
"으악! 할아버지?!"
그렇게 실로 오래간만에 가족상봉이 있었다. 장장 50여화 만에 드디어 가출한 가일과 그의 보호자가 대면한 것이었다.
그 둘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지난 50화의 시간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을 서로 나누며 즐거워할 시간도, 마음도 없는 듯 했다.
얼굴을 맞대자 마자 서로 반대쪽으로 잽싸게 튀어나가 더니, 어느샌가 꺼내든 칼로 자신 근처에 있는 몬스터, 나무, 곤충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도륙해 버리는 것이었다.

"제길!! 제길!! 내 미녀들이... 미녀들이!! 꿈결 같은 밤이!!"
남궁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쉬움과 자신의 "지랄맞은 운명에 대한 분노의 눈물" 이라고 해 두자.
"제길,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됐는데 벌써부터! 그나저나 언제부터 주변에 있었던 거야.. 혹시 레나랑 모이아랑 세이나랑 엘레제를 덮치진 않겠지...? 아니, 벌서 덮치고 내가 여잔줄 착각하고 나까지 덮치려 달려든 거 아니었을까...? 이런 젠장!!!"
이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이 너무 앞서나가 걱정이 팔자인 가일의 한탄이었다. (뭐... 가일의 긴 머리카락만을 보고 여자라고 착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


"그래, 가출했다가 돌아온 소감이 어떠냐?"
어느새 장소가 바뀌어 방안이 되어 있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방안에 가일과 남궁혁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아까 전에 있었던 접근하던 몬스터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더 이상 세네 근처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가출이라고 하지 마세요. 여행이라고 하면 좋잖아요. 기분 나쁘게 가출 가출... 쳇.."
가일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어째 며칠 집 나갔다 돌아온 녀석이 너무 까분다? 좀 더 성숙하거나, 점잖아 지거나, 어른스러워 져서 돌아와야 되는거 아니냐?"
남궁혁의 목소리도 한층 커졌다.
"흥, 어른스러워 졌었는데, 집에 계신 어느 분이 너무 유치해서 저도 그냥 그분 수준에 맞춰드리기로 했습니다요!"
"엇쭈 이게!"
그리고 가일의 머리를 향해 정확히 날아가는 재떨이.. 가일은 평소처럼 방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했었다. 평소 할아버지의 내력이 실린 재떨이에 잘못 맞았다간 저승문 앞에서 노크해야 할 테니...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어, 어라?"
가일의 눈에도 훤히 들어올 정도로 눈에 띄게 속도가 줄어있었다. 물론, 범인의 눈에는 여전히 전광석화겠지만, 애석하게도 가일은 평범하지 않았다.
"퍽!"
둔탁한 음과 함께 재떨이가 다시 자신을 내던진 사람에게 되돌아갔다. 그러자 순간, 가일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남궁혁의 얼굴에는 한탄의 표정이 지어졌다.
"얼래? 이건 너무 강도가 약한 거 아닌가? 혹시나 해서 주먹으로 쳐봤더니... 좀 묵직한 정도잖아?"
가일의 생각이었다. 정말 그랬다. 평소보다 재떨이에 실린 힘이 적었던 것이다. 평소였다면 주먹이 날아갔으면 날아갔지 재떨이가 날아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속도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위력조차도 이상하게 약했다. 물론, 예전에 비해 "상대적으로"이긴 하지만.
"으음..."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재떨이를 바라보며 남궁혁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역시 단전파괴는 무시못할 수준인가.... 그동안 쌓아놨던 진기가 현격하게 줄어있군.... 제길... 몸도 많이 안 좋아 졌어..."
그러나 그의 생각은 너무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었다. 자신의 앞으로 재떨이가 날아들면, 우선은 그것을 피하거나 받아낼 생각을 했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시대를 앞서간 우를 범한 그는 재떨이에 정면으로 이마 한복판을 가격 당할 수밖에 없었다.
"퍽"
"으윽..."
"어, 어라? 할아버지!"
당황한 가일의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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