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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1:50 849회 0건
제 56화
산속의 밤은 상당히 일찍 찾아온다. 그리고 그 산이 세네의 산 중턱이라면 그것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별들 사이로 희뿌연 담배연기가 하늘거리며 끼어들었다.
"후아..."
남궁혁의 담배연기였다. 밤이 상당이 깊었는데, 집 뒤편으로 나와서는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뭐, 그다지 권장할 만한 모습은 아니다.
그의 이마에는 커다란 일회용 밴드를 십자모양으로 교차시켜 붙이고 있었지만, 얼핏보아도 상당히 부어 오른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제길.. 갈 때까지 갔구나 혁아.. .. 재떨이에 맞고 기절이라니..."
차마 입으로 내보내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후우... 그나저나.... 가일녀석 솜씨는 좋더만... 하나같이 A급이라니..."
이유 모를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드리워졌다.


"... 엣취! .... 응?"
요란한 재채기 소리와 함께 가일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잠꼬대라도 했었는지, 이불은 그의 오른쪽에 찰싹 붙어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세이나의 몸 위에 포개어져 있었다.
"움... 훌쩍... 쌀쌀하네..."
잠시 뒤척이던 가일은 그제 서야 방안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위험한 짓이었지만, 가일과 할아버지 단 둘이 살던 집인지라 애초에 잠을 잘 방은 한 칸 뿐이었다. 그나마 상당히 큰 편이긴 했지만.
아무리 남녀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있다 해도 추운 산중에 바깥으로 쫓아낼 수는 없는 일, 그나마 가는 실가닥 같은 믿음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가일, 그리고 그의 네 미녀들은 한 방에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가일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왼편에 그의 할아버지, 오른편엔 다른 여자들이 나란히 눕는 방식을 택했다. 사실, 미녀들 틈새에서 잠들고 싶기도 했지만, 할아버지의 옆에 여자를 재웠다간 그 이후를 보장할 수 없게 되기에 가일은 눈물을 머금고 세이나만을 옆에 재우는 것으로 만족했다.
세이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다른 세 언니를 물리치고 가일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가일의 오른팔에 볼을 맞대고 있는 세이나의 얼굴엔 한가득 미소가 배어 있었다.

"달칵.."
아주 조심스럽고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말 가일 자신의 귀에도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였다. 잠들고 있는 여자들을 깨우지 않기 위한 가일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방 안도 상당히 춥긴 했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오니 완전 겨울 날씨였다. 가일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아휴... 추워.. 응? 할아버지가 나와 계셨잖아?"
문 밖으로 나와 조금 두리번거리자, 집 뒤편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세 한탄이라도 하는 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고 계신 거지...?"
가일은 할아버지를 부르러 가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기고 말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한 대를 피우는 그를 보니 마치 방해해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아니, 웬지 들켜서는 안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벽에 딱 붙어 숨을 죽이고 있는 가일의 귀가 마치 토끼의 귀같이 쫑긋 세워진 것 같았다.


"휴우..... 그러고 보니 가일도 많이 컸구나... 그 녀석, 지 엄마를 닮았으면 성욕이 왕성할 텐데... 그래.. 세라를 닮았으면...."
문뜩 두 번째 아내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타리아모스 대륙으로 넘어와서 맞아들인 아내 세라... 그녀의 모습을...

"엣취!"
"응?"
그는 난데없이 방안에서 들려오는 재채기 소리에 깜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휴.... 가일에게 들키기 전에 들어가야겠군.... 하긴.... 이제 슬슬 말해 줄 때도 됐으니 상관 없긴 한가...?"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좀더... 좀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의 자식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아들 가일에 대해서도...
"가일 그 녀석..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인 주제에 날 할애비로 믿고 따라서 그런가..? 재주는 좋네... 허허.."
분명 마지막에 한 말은 웃음소리 였을텐데... 왜 이리도 씁쓸하고 허탈한 소리일까.
"가일이... 우리..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치?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아냐... 당신에게 뭐라 하는게... 이미 가일은 우리 아들인걸... 정말 아들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다고. 처음엔.. 좀 서먹하기도 하고... 나이 차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말이야....
그거 알아? 이젠 내가 더 아버지라고 불리고 싶은 거 있지.... 당신만 있으면... 정말 우리는 부부하고 가일은 아들 하면 될텐데...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이제 그만 돌아와도 되잖아..? 설마 200년을 산다는 엘프가 나보다 먼저죽진 않겠지..? 응?"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가는 것은 착각일까.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던 고개를 떨구고 땅을 바라보았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흙바닥 위에 동그란 물이 한두방울 떨어져 있었다.
"제발 돌아와 줘.. ..."
그는 잊지 못했다. 부족했던 자신만을 바라보다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간 두 번째 아내와의 추억을..

그리고 이젠 희미해져 가는 첫 번째 아내와의 추억도....
[욱신..]
"큭..!"
갑자기 파손되었던 단전이 아려온다. 이미 상처는 회복되었을 텐데...
더불어 가슴까지 저려온다... 단전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가는 그녀에 대한.. 아픈 기억이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찌른다.
"제기랄.... 제기랄..."
그의 양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오지만 제어할 길이 없다. 왜 그녀를 생각해 버렸을까.... 이렇게 슬프고.. 후회만 될 뿐인데.. 그러나 그는 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죽인 거야...! 당신이.. 당신이 죽인 거라고!!!"
첫 번째 아내를 생각하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첫째아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끄흑... 끅... 흐흐흑....."
결국 남궁혁은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고 말았다.


가일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냥 잠이나 자고 있을걸... 하는 마음이 절로 피어났다. 엉겁결에 몸을 숨기긴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들은 것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다니? 할아버지로 부르게 했다고? 서먹해?"
여러 가지 단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일은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해 내고야 말았다.
"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가일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일으켜 졌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잘못 들은 거야...." 가일의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은 알고 있었다. "잘못 듣지 않았어..." 라고...

[바스락]
"!!"
남궁혁의 얼굴이 가일을 향해 돌아갔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가...일?"
"아.... 아.... 저.. 나... 나는..."
가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말은 해야 하는데..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궁혁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하겠다고 다짐은 했었지만, 지금은 너무 의외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어.... 디서 부터.. 들은 거니....?"
"나.. 나는.... 모, 못들었어요.. 그, 그래.. 못들은거야... 못들었어요.. 아무것도....전혀.."
가일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반면 남궁혁은 그나마 회복이 빨랐다. 아니, 일단 정신을 차리고 보자 차라리 이렇게 된 것이 잘된 일이란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래.... 어느정도 들었나 보구나... 들은 대로야.... 냉정할지 모르겠지만... 난.. 네 할아버지가 아니다. 그리고 네 어머니는.."
"못들었어요... 안들려요.... 뭐라고 하는지 안들린다구요.... 하..하..."
가일의 온 힘을 다해 자신이 들은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네 어머니는 엘프였단다... 넌... 굳이 따지자면 하이엘프가 되는 거지... 그리고.."

"모.. 못들었다니까요!!!!!"
가일은 두 귀를 손으로 틀어막고 숲을 향해 뛰쳐나갔다.
"가일..."
생각보다 심한 거부반응. 남궁혁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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