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검기가 무엇인가? 기를 검에 주입하여 극도의 예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검기이다. 검기가 시전 되면 검 주변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히고, 그렇게 변한 검은 그 어떠한 보검, 명검보다도 더 날카롭게 변한다.
하지만, 그만큼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때문에 대륙 전체를 뒤져 본다고 해도 검기를 사용한다는 소드마스터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원래 타리아모스 대륙 자체가 마나라는 개념은 있을지언정 내공이라는 개념이 없는데다가, 옛날부터 개인의 검술보다 그 사람이 입고있는 갑옷과, 검의 능력을 중요시하는 (또는 마법에 의존하는) 터라, 평생토록 검을 수련하는 자라고 해도 소드마스터의 경지는 그 그림자나 구경해 볼까 하는 그런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경지에 올라있는 가일은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이것은 또 경지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검기를 시전 하는데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말은, 그 검기를 시전하기가 그만큼 난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일의 아버지가 만들어낸 심법은 기적적이게도 깨달음이 필요 없이 내공이 쌓이는 순간부터 자유자재로 이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무림인들이 "단전" 이라는 곳에 내공을 쌓는 것과는 달리 "심장"에 내공을 쌓는 것으로 가능해 졌다.
전신을 도는 혈관의 중심인 심장에 기가 쌓이자, 말 그대로 피가 순환하듯 자연스럽게 그 내공의 다스림이 가능해 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론 쉬워도 그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지금껏 그런 심법은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가능을 해결한 가일의 내공 심법 이야말로 반대편, 새로운 땅의 무림인들이 꿈에 그리는 심법이지만, 알게뭐냐, 가일은 제 목숨 구제하기 바빠 죽겠는데 말이다.

어쨌든, 검기는 맘만 먹으면 쓸 수 있지만, 오히려 또 다른 문제가 생겼으니... 가일이 할아버지께 배운 것이라고는 내공 심법이 전부였다. 보법이니, 검술이니 하는 것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덕분에 가일의 검술(검술이라 하긴 뭣 하지만서도..)은 순전히 "본능, 그리고 몬스터들과의 경험, 마지막으로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른 몸놀림" 이게 전부인 것이다.
내공에 맞는 보법과 검술만 제대로 익힌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가일은 단지 내공을 전신의 근육에 집중시켜 더 빠른 다리, 더 강한 주먹, 지치지 않는 체력정도의 기초적인 곳에만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가일의 실력은 어린아이가 총을 가지고 싸우는 형상이었다. 들고있는 것은 "총" 이라는 살상 무기이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상대편에게 집어던지고 있는 꼴이다.

"크헉.... ... 젠장..."
가일이 세이나가 누워있는 침대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벌어진 살을 타고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가일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아 걱정 말래두... 내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갈 정도는 되니까... 그곳엔 신관도 있고... 정말 괜찮....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가일의 입에서 또다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세이나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역력했다.
"차라리 제가 몰래 신관을 불러올까요? 이곳에도 저 때문에 왔던 신관이 묵고 있을 거예요.."
세이나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가일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그 신관을 부르면 오히려 일이 커질걸.... 여기 시체도 있고 피로 바닥이 완전히 뒤덮여 버렸으니..."

가일이 고개를 돌려 반으로 쪼개진 병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일이 본 것은 그 시체 위에 떠있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였다...!
"뭐, 뭐지 저건?!"
가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확하게 반 토막난 시체 위에 떠 있다고 느낀 것은 사람모양의 마법으로 형성된 듯 한 이미지였다.
가일의 어설픈 실력으로도 마법임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일도 명색이 기(氣)를 느끼고 수련하는 무림인 인지라 어느 정도 공기, 또는 마나의 파동을 잡아낼 수 있는 덕이었다. 그리고 무림과는 전혀다른 세계인 타리아모스 대륙에서 살아 남기 위한 방법으로, 가일의 아버지가 수련에 "마나와의 교감"을 집어넣은 덕분이기도 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영은 후드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누, 누구냐? 마법으로 혼란시키려 하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가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외쳤다. 마법이 있다면 그 마법을 시전한 마법사가 근처에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일은 마법사의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닐테고.. 마법사인데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다니... 잔득 긴장한 가일이 망신창이가 된 몸을 간신히 간신히 일으켜서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의외의 말이었다.
"아.. 아... 성급하게 굴지마.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이미 한번 대결은 했었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안그래?"
"대결을... 했다고.....? 난 마법사는 할아버지한테 이름만 들어봤지 실제 마주치는건 처음이라구. 거짓말을 하려면 뭘 알고 해야지! 타앗!"
가일의 몸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그 얼굴에 드러난 표정에는 투지보다는 "고통"이라는 느낌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미지 마법"은 시전자의 모습을 다른 곳에 나타나게 하는 일종의 "분신"을 만드는 마법. 가일의 앞에 있는 존재는 실체가 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흐흐흐... 안 통하리라는 걸 잘 알면서 그러시나.. 진정하라구..... 거짓말이 아니야.. 난 방금 전에 너와 싸웠던 인물이니까.. 단검을 들고서 말이야... 큭큭큭..."
"다, 단검을 들고서...? 저 사람은 반으로 쪼개졌는데.. 어떻게 저렇게 살아있지....?!!?"
가일의 얼굴이 피가 모자란지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