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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3:13 1,430회 0건
SF] 혹성상인 40. ---- 리에는 여동생
40.

방으로 돌아온 한스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가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쁜 년, 정말 나쁜 년. 마칼레나는 한스가 이시스에 와서 마음을 준 유일한 여자였다. 비록 마칼레나가 죄인이나 암캐라 해도 한스는 진짜로 그녀를 사랑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를 배신하다니…

한스는 폐쇄회로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마칼레나와 링링이 서로 다투던 장면. 처음서부터 링링과 마칼레나는 서로 미워하고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다. 그러나 링링의 의심에는 근거가 있었다. 마칼레나는 반역자고 음모를 꾸민 여자였다. 링링이 그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한스는 마칼레나에게 끌려 언제나 링링을 면박주고 마칼레나를 두둔했다.

하지만 마칼레나의 모함은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링링이 한스를 사모하거나 카를로스의 끄나풀일 수 도 있다. 원래 링링은 전략정보처 요원이 아닌가. 그렇다해도 그걸 마칼레나가 찔러 바칠 것은 아니다. 마칼레나가 링링에게 대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눈이 멀었었지. 마칼레나의 눈부신 육체에 속아 그녀의 마음도 청순하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옛날 어떤 작가가 책에서 말했었지. 얼굴 예쁜 여자일수록 믿지 말라고. 그래 마칼레나 이 나쁜 년. 너는 나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없어. 넌 그냥 내가 필요할 때마다 정액을 배출하는 구정물통이고 내가 성질날 때마다 두들겨 패는 샌드백이면 족해. 네 엉덩이가 헐어 달아 없어질 때까지 내 채찍질을 퍼부을 개년이면 족한 거야.

한스가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과 카를로스를 미워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링링을 모함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술수를 쓰다니…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리라고 생각하다니… 한스는 생각할수록 솟아나는 분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술병을 들고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한 모금 넘어가자 뜨거운 분노가 바뀌어 서서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로 마칼레나를 사랑했었나 보다. 마칼레나에게 속은 것이 분하기 보다는 점차 이렇게 그녀를 잃어야 한다는 것이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마칼레나, 네가 조금만 참았어도, 네가 조금만 착하게 굴었어도 나는… 나는 내 사랑을 잃지 않아도 되잖아.

한스는 술병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병이 깨지며 온 방안으로 술과 유리가 튀었다.


다음날 아침, 한스와 링링은 도심의 오시리스 타워로 출근했다. 금융가 한복판에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오시리스 타워는 스페이스하버에 있는 회사의 금융전초 기지였다. 이곳은 트레이드 트윈에서 행해지는 회사의 모든 금융거래가 이루어지는 건물이었다.

한스는 오시리스 타워를 돌아 보았다. 수십 명의 회사 측 트레이더들이 거래에 열중하고 있고 수백명의 백오피스 요원들이 그 거래를 보조하고 있었다. 회사는 트레이드 트윈의 증권거래소에서 주로 서버를 사들이고 기술제품과 귀금속을 팔고 있었다.

막스 오닐이라는 현지 지배인이 한스에게 이곳을 브리핑해주었다.
“증권거래라고 하지만 실은 주로 선물거래입니다. 서버나 귀금속 같은 상품선물과 독립행성의 국채나 특별통화 같은 금융선물이 거래됩니다. 물론 금융선물의 주거래종목은 회사발행 채권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니까 주식은 없는 거군요. 선물거래가 이뤄지면 결재는 현물로 되나요 아니면 차액 결재로 이루어지나요?”
“결재는 현물과 차액결재 양쪽으로 이루어집니다. 종목마다 시장조성 딜러가 있고 시장조성딜러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상대편 조건을 받아야 되는 것이지요. 예컨대 서버는 회사가 마켓 메이커입니다. 그래서 선택권이 없죠. 상대편이 현물 결재를 원하면 그걸 받아야 하고 차액 결재를 원하면 그에 따라야 합니다.”
“실제로는 어느 쪽이 주류를 이룹니까?”
“아무래도 현물 결재가 주종이지요. 그러니까 회사는 서버를 넘겨받고 다이야몬드를 넘겨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시장은 어떻습니까?”
“최근 들어 서버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다이아몬드 값은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회사에 유리한 시장 환경이군요.”
“네. 그래요. 하지만 저는 그게 불안합니다.”
“왜요?”
“타이힐에서 다이아몬드가 양산되기 시작하면서 회사는 막대한 양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더 많은 양의 다이아가 시장에 풀리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다이야 가격은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을 몰라 불안합니다.”

막스 오닐의 말에 한스의 머리에도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기무라박사의 말과 진즈에서 겪은 일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독립행성들이 그 비밀을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한스는 링링과 오닐의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오시리스 타워를 둘러보고 난 한스는 지정된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트레이딩 브라우저가 떠올랐다. 한스는 미리 주어진 채권 트레이더의 아이디를 입력했다. 시세판과 뉴스창, 채팅창이 함께 떠올랐다.

독립행성들 채권값이 조금씩 약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회사 채권 가격은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한스는 채팅창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력을 시작했다.

Apache48 > 밀레니카 행성의 옛 채권을 가지고 있는데…

잠시동안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Apache48 > 밀레니카 행성의 옛 채권 살 사람 없나?
Troi14 > 미친 놈
Zebra01 > 사기꾼 아니야?
Yamato AA > 개새끼
Apache48 > 밀레니카 채권 500개 살 사람? 싸게 준다
Yamato AA > 여왕…
Apache48 > 여왕이라니?
Yamato AA > 이표있나?
Apache48 > 이표있으면 안되나?
Yamato AA > 있으나 마나지만 있으면 귀찮지
Apache48 > 이표 없다.
Yamato AA > 니 네 에미 보지다.
Apache48 > 뭐라고?
Yamato AA > 18 18 18 18
Zebra01 > 나도 동감 18 18 18
Yamato AA > 태평양 고래보지
Apache48 > ASK withdrawn.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스는 오시리스 타워를 나왔다. 혼자서 평범한 세단형 자동차를 몰고 거리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자 이정표가 보였다. Queen Mother Road. 한스는 이정표를 따라 차를 왼쪽으로 돌렸다. 조금 더 가자 조금 음침한 거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링링의 설명이 떠올랐다.

Queen Mother Road는 오래 전에 번화했던 곳이나 지금은 퇴락하고 있는 도심 내의 슬럼지역이다. 지금쯤 늦은 시간에는 매춘부들이 들끓는 곳이다. 거리가 음침한 곳에 오자 한스는 나타나는 건물들의 번지수를 살폈다. 15번지. 한스는 차를 계속 몰았다. 16, 17…

18번지의 표시가 나타나자 한스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8번지의 길가에는 큰 코트를 입은 여자들이 줄을 서있었다. 일견해서도 콜걸들임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한스는 바깥 차선으로 차를 천천히 몰았다. 한스의 차가 지나갈 때마다 길가에 서있던 콜걸들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벌려 보였다. 콜걸들은 코트 안에 아무 것도 안입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콜걸들은 통나무 스타일이어서 한스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콜걸의 구매자가 대부분 서버들인 것 같았다.

몇 명의 콜걸들을 지나자 한 콜걸이 뒤돌아서며 코트를 들추면서 엉덩이를 내밀었다. 한스의 눈앞으로 내밀어지는 커다란 엉덩이, 그 골짜기가 시작하는 곳의 바로 위에 새겨진 고래 문신이 보였다. 한스는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그 콜걸이 얼른 차안으로 들어왔다.

한스의 옆자리에 탄 콜걸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는 직진 방향으로 계속 달렸다. Queen Maother Road를 벗어날 때쯤 콜걸이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여러 차례 방향을 바꾼 한스는 마침내 어떤 큰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하 5층으로 가니 차가 없는 한적한 곳이 나타났다. 콜걸이 정면을 가리켰다.

정면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끝은 벽 뿐. 한스는 의아해 하다가 콜걸이 계속 정면을 가리키자 눈을 감고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차는 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순식간이었다, 벽이 열렸다 닫힌 것은. 안은 깜깜하기 그지없었다. 무엇인가가 차를 잡아 고정시켰다. 그리고 공간 전체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계속되던 속도감은 마침내 멈추고 차를 물었던 장치도 풀렸다.

한스는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앞쪽의 벽이 열렸다. 한스가 걸어 들어가자 한 서버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한스는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아주 넓고 아름다운 집무실. 정면을 보았다. 커다란 책상 뒤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팽팽한 모습이었으나 약간 나이가 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스는 그녀를 보고 난 뒤 시선을 돌려 방안을 살폈다. 왼편을 보다가 엇하고 놀랐다. 한스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쪽에 서서 한스를 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역시 제임스 당신이었군요.”
그녀를 쳐다보며 한스는 뭐라고 해야할 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 한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수… 수지,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뭐야, 서로 이미 아는 사이였나?”
책상 뒤에 앉아있던 여자가 한스와 수지를 쳐다보고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 혹시나 했었는데 제 육감이 맞았어요.”
“어머니?”
한스가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의혹에 차 묻자 수지가 대답했다.
“네, 그래요. 제가 이오츠카 리에에요.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어머니에게 인사하세요.”
한스는 수지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상 뒤의 여자를 보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사드립니다. 제가 한스 김입니다. 바라크 김의 아들입니다.”
“오느라고 수고했네. 내가 이오츠카 레이코야. 자네를 보니 꼭 자네 부친 젊었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반갑군.”
“네. 저도 트윈의 지배자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내 딸 리에를 어떻게 알았나?”
‘네… 그, 그건…”
“어머니.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리에가 레이코의 말을 잘랐다.

한스가 자리에 앉자 셋은 일을 논의했다. 레이코는 트레이드 트윈의 상황을 설명하고 회사와 트윈의 협력과 상호 존중이 서로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고 중요한 가를 역설했다. 한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미 한스의 마음에는 언젠가는 트레이드 트윈을 삼키겠다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레이코의 말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이코는 한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이야기를 회사 내부로 돌렸다. 트레이드 트윈은 별도의 정보망을 가지고 회사 내부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곧 머지않아 후계 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트레이드 트윈은 많은 정보와 지원수단을 가지고 있다. 경쟁자 중 한 명을 도울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후계 경쟁에서 한스를 도울 테니 한스는 트레이드 트윈의 지위에 대해 약속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스는 잠시 망설였다. 레이코를 보고 리에를 보았다. 한스가 머뭇거리자 레이코는 리에를 내보냈다.
“리에야, 이처럼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이 소홀한 것 같구나. 네가 나가서 직접 우리의 자랑 작설차를 타오려무나.”
레이코의 말에 리에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리에가 나가자 레이코가 한스를 쳐다보고 심각하게 물었다.

“자네, 저 애와 같이 잤는가?”
“… 네. 그랬습니다.”
“운명인가…”
레이코는 한숨을 쉬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이코는 의아해하는 한스를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회사와 트윈은 뜨거운 협력을 유지해야겠지만… 앞으로는 저 애하고 같이 자지 말게.”
“네?”
한스가 의혹에 찬 시선으로 레이코를 쳐다보자 레이코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죄는 … 한번이면 족해.”
“무슨 말씀이신지…”
“저 애는 자네 여동생이야.”
“네?!”
한스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해졌다. 수지가, 아니 리에가 내 여동생. 그러면 이 여자는… 이 여자는 아버지의 여자. 순간 트레이드 트윈이 중립을 유지하며 이권을 독차지하고 있는 수수께끼가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에가 내 여동생이라니. 그럼 나는 여동생과 같이 잤단 말인가. 수지가 아니 리에가 나에게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단 말인가. 한스는 운명이 퍼드득거리며 지나쳐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 일을…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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