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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9 1,378회 0건
거실 소파에서 널부러져 자고 있는 나를 깨운 사람은 엄마였다.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콘도에는 엄마하고 나 밖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엄마는 큰 누나가 광식 군하고 잤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 같았다.

“밥 먹어라. 술 좀 작작 마시지. 아이구, 그런 건 꼭 지 아버지를 닮아가지고..”

머리가 조금 아픈 것 말고는 기분이 괜찮았다. 밥을 먹고 유미 누나를 찾아 해명을 해야 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눈부실 만큼 반짝였다. 그런데 내가 찾는 병아리는 해변의 맨 왼쪽부터, 오른쪽 끝까지 훑어봐도 보이지 않았다. 뭐 점심 먹을 때는 다시 콘도로 오겠지. 누나를 찾는 걸 포기하고 가게에서 음료를 한 병 산 다음, 파라솔 아래에 있는 플라스틱 베드에 누웠다. 그 더위에 모래에서 뛰어 노는 건 자살행위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더 큰 목적은 큭큭큭... 관람이었다. 해변에 가면 내 최고의 즐거움...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면, 좀 더 노골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겠지만, 맨 눈으로 지나가는 여자들의 몸을 훑어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실눈을 뜨고 게으르게 관찰을 했더니, 이내 졸음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김 수호?”

약간은 구리 빛이 도는 긴 다리가 젓가락처럼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좀 더 위로 시선을 올리니, 분홍색의 비키니가 둘러싼 삼각지... 죽이는 그림이었다. 바캉스 용의 화려한 면 티가 벌어진 사이로, 늘씬한 아랫배와 앙증맞은 배꼽이 보였다.

기가 막힌 몸매구나. 흠집하나 없는 피부를 따라 올라가니 분홍색의 천에 채 다 둘러싸이지 못한 불룩한 과실이 보였다. 가슴도 만 점. 사실 그 당시 해변에서 그렇게 과감한 수영복을 입은 여자는 드물었다.

좀 더 위로 올라가니 드디어 내 이름을 부른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짧은 커트... 얼굴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이 여자를 내가 어디서 봤더라?

졸음이 순식간에 가셨다. 후다닥 베드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선생님!”
“맞구나. 몰라볼 뻔 했네.”

“휴가 오셨어요?”
“응, 너도?”

“네. 그 동안 잘 계셨어요?”
“그래... 잘 있었어.”

“신랑하고 같이 오셨나 봐요?”
“신랑? 그 사이에 내가 유부녀처럼 변했나 보네?”

고등학교 2학년 때 두 달 정도 우리 반 담임이었던, 박 은혜 선생님이었다. 어쩌면 그 기간은 선생님에게는 가장 기억하기 싫은 과거였을 것이다. 그 기억의 한 가운데에 성수와 내가 있었다. 그러니 모처럼 만나 반갑긴 했어도, 그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옛날 일 쯤은 잊은 듯 했다. 시원한 거나 한 잔 마시자며, 앞장서서 콘도에 딸린 카페로 향했고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총각이 다 됐네. 그 때도 인기 많았지?”
“뭘요. 선생님 인기에 비하면...”

“호호호, 내 별명이 독가시였던가?”
“안 잊으셨네요.”

그녀가 고등학교에서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교사를 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튀는 외모였다. 생활체육을 전공했던 터라 몸매야 그렇다 치고, 얼굴도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운동은 하지 않고 나무 그늘 같은데 숨어, 그녀를 훔쳐보면서 고추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던 녀석들이 꽤 많았다.

두 번째는 그 호감 주는 외모를 상쇄시키고도 남을 못된 성격이었다. 교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표독스러웠고, 집요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임을 맡은 반이 우리 반이었다.

오랜 만에 은사님을 만났지만, 정체 모를 뭔가가 내 입을 막고 있었다. 마치 구술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말하기가 꺼려졌다.

“나 학교 그만 둔 거 알고 있지?”
“들었어요. 요즘은 어떤 일 하세요?”

“대학원 다녀. 학위 받고 유학가려고...”
“더 잘된 건지도 모르겠네요.”

선생님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과거를 더듬고 있다는 걸 말해 주었다. 나는 주스를 한 모금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썼다.

“학교는 다 잊었는데, 너만은 기억에 남아.”
“그 때는 죄송했어요.”

“넌 죄송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보호해 줄 필요가 있는 친구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성수는 지금도.. 가끔 만나요.”

선생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 잊지는 못했구나.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결혼은 언제하실 거예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그 때 그분은요?”
“헤어졌어.”

하는 질문마다 적당하지 못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 만났으면 좋았을 걸... 어쩔 수 없이 성수와 나, 그리고 그녀가 연루된 과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암 투병 차 휴직을 하시고, 2학기 때 임시로 담임을 맡은 분이 박 은혜 선생님이었다. 원래 예체능 전담 선생님들에겐 담임을 잘 맡기지 않았지만, 몇 달 뿐이기도 하고, 마땅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예체능 과목 교사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거의 떠밀려 맡은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우리에게도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임시 담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 반은 물론, 초상집이었다. 단 한 명, 눈치 없이 학교 다니던 성수만을 제외하고...

사실 성수하고는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얼굴 한 번 못 본 사이였다. 1학기 중간고사 때 자리배치를 하다, 그저 우연히 내 뒤에 앉아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 성수가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 이유였다.

“잘해 보자.”
“뭘?”

“학교는 무사히 졸업해야지?”

녀석이 나에게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시험 중에 뒤에서 귀찮게 쿡쿡 찔러대는 녀석의 요구를 나는 무시해 버렸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체육관 뒤로 따라가야 했다. 성수하고, 평소에 그 녀석을 졸졸 따라다니던 똘마니 하나...

녀석의 아버지가 학교에 힘깨나 쓰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리 못을 박았다.

“꼰지르기 없기.”
“씹 새끼 지랄하네.”

“약속한 거지?”
“너나 잘해, 이 썅~~!”

적당히 몇 대 두들겨 놓고, 기만 죽여 놓으려던 내 생각이 변한 이유는, 성수가 연장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녀석도 나름대로 악바리라 몇 대 맞은 걸 참지 못했고, 게다가 주변에 숨어서 구경하는 관중들도 꽤 많았으니 자존심도 상했을 터였다.

내 무릎에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은 성수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졌을 때는 이미 싸움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는 데굴데굴 굴러 피해 다니는 녀석을 끝까지 쫓아다니며, 비명 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잘근잘근 밟아 주었다. 두 번 다시 내게 재크 나이프 따위는 들이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약속대로 성수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대신 몸이 나을 때까지 무단 결석을 했다. 쪽 팔려서 학교를 그만 두기라도 할 줄 알았던 녀석이, 다시 학교에 나온 것도 의외였지만, 나오자마자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 건 더 의외였다.

“친해 보자, 씨발 놈아.”
“다시는 대들지 마!”

우리는 친해졌다. 성수는 항상 낙천적이었고, 항상 웃었고, 나는 그런 성수의 성격이 좋았다. 엄마가 한 명 더 생겼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 때문에 여동생이 가출했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표정은 웃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분풀이를 했다.

그 나이에도 벌써 머리에 무쓰를 바르고, 나이트 클럽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툭 하면 결석을 밥 먹듯 했다. 보다 못한 내가 성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 때문에 그래? 그래서 반항하는 거냐?”
“아니... 그 핑계 대고 노는 거야. 딱이잖아. 결손 가정의 비행 청소년.”

녀석의 그런 생활 습관은 박 은혜 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뒤로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별명이 독가시인 그녀가 성수를 그냥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선생님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처벌은 다 받았지만, 그래도 정학이나 퇴학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돈 많은 아버지의 후광이었다. 그리고 그건, 박 은혜 선생님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현실이었다.

어떤 꼴을 당해도 그저 실실 웃던 성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누군가의 입에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어떤 새끼는 아비 잘 만나서... 니 애비 아니면 너는 시체야. 이 인간 말종 같은 새끼야.”

반 아이들이 다 듣는 종례시간에 한 그녀의 말이, 박 은혜 선생님이 그 동안 성수에게 가했던 어떤 매질보다 더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성수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걸 그때 처음 보았다. 그리고 며칠 동안의 무단 결석... 다시 학교에 나온 성수는 웃고 있었다. 조용히 내게 오더니 사진 몇 장을 보여 주었다.

“나이트 클럽에서 찍은 거야. 크크크.”

아마 며칠 동안 박 은혜 선생님의 뒤를 추적한 것 같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남자의 품에 안겨 춤을 추고 있는 여자는 박 은혜 선생님이 분명했다. 그리고 선명한 여관 간판을 향해, 남자의 팔에 허리를 내준 채 걸어가는 모습도 선생님의 뒷모습이 분명했다.

성수는 의기양양했고, 나도 어쩌면 그런 게 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 선생님이 남자와 여관에 들어가는 사진이니 무척이나 부끄러울 건 사실이었다. 결석하고 학교에 나오면 늘상 그랬던 대로, 선생님의 호출을 받아 면담실로 향하던 성수는 내게 윙크까지 보냈다.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할 결정적 무기를 가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때까지 시달리면서도, 성수도 나도 박 은혜 선생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 게 확실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개방적이고도 당당했다. 사진을 본 박 은혜 선생님은 그걸 감추며 곤혹스러워하기는 커녕, 성수의 귀를 잡고 교장실까지 가서 뺏은 사진들을 당당하게 교장 선생님 앞에 늘어 놓았다.

“이런 새끼는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징계위원회 열어 주세요.”

그리고는 선생님들이 가득 찬 교무실에서, 보다 못한 다른 선생님이 말릴 때까지 성수를 쥐어 팼다. 교실로 돌아온 성수의 얼굴은 얼마나 맞았는지, 뺨은 불나는 것처럼 빨갛고, 입술은 퉁퉁 부어올라 마치 고릴라 같았다. 그런 얼굴로도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는 성수가 절대 그렇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성수의 퇴학은 기정 사실이었다. 얼굴도 처음 보는 성수의 아버지가 학교를 몇 번 들락거리며, 용서를 구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터라, 다른 선생님들은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쪽이었지만,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는 박은혜 선생님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성수 아버지의 그 많은 면담 요청을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긴 시간 동안의 시달림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독가시 편이 아닌 사람은 다 우리 편으로 생각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어졌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성수의 행동이 분명히 범죄의 영역에 속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성수의 행동을 두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야간의 자율학습 시간에 성수가 가방만 버려두고 교실에서 사라졌을 때, 그리고, 어둑어둑한 체육관 앞에 어른거리던 성수의 그림자가 체육관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교실 창문을 보았을 때, 나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 시간의 체육관에는 재산을 관리 대장에 기록하는 일이 밀려 있던 박 은혜 선생님 말고는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성공할 확률도 무척 높았다.

내가 발길을 체육관으로 옮긴 이유는 그 때까지만 해도 박 은혜 선생님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었다. 스스로는 재치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간 성수의 행동은 어리숙한 고등학생의 범주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퇴학 정도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 철퇴를 당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체육관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주변을 빙빙 돌아 고장 난 창문을 찾아 들어갔을 때에는, 시간이 이미 많이 흘러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고개 똑바로 해, 씨발 년아!”
“흐.... 흐.... 흑....!”

“한 번만 더 숙여 봐, 씨바.. 그냥 콱!”

자재실이었다. 조금 전까지 선생님은 거기서 대장하고 실제 기물의 개수를 맞춰보는 일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시간을 많이 지체하는 바람에 이미 일이 많이 진행되어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캄캄한 마루바닥을 발소리를 죽여 가며 지나, 자재실의 문 앞까지 간 후 문고리를 쥐었다. 자재실 문이야 안쪽에서는 잠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열어 제끼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저항해 온다면... 내게 대드는 것이야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행여 박 은혜 선생님의 몸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그걸로 성수의 인생은 종말이었다.

그래도 만약, 문에 달린 간유리가 깨져 있어, 자재실 안의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즉시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 작은 틈으로 자재실 안을 들여다 본 나는 성수가 그저 명예 회복 정도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깟 사진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좀 더 확실한 무기를 손에 넣고자 한 것이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가운데 깔린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는 박은혜 선생님의 몸에서는 이미 그녀가 학교에서 주로 입는 츄리닝이 제거되어 있었고, 두 장의 속옷만 남아 있었다. 그 옆에 선 성수는 집요하게 고개를 반듯하게 할 걸 요구하면서 캠코더로 그녀를 촬영하고 있었다.

검은 색의 속옷에 유난히 대비되는 하얀 피부... 가슴이 벌떡거리는 그 와중에서도 그녀의 몸매가 기가 막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니 년 때문에 내 인생은 쫑 났어, 씨발. 어차피 망할 학교 더 다닐 생각도 없고... 수틀리면 확 그어버리고, 나도 죽으면 그 뿐이야!”
“흑....흑....!”

선생님을 본 후 처음으로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지막한 울음 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오다 성수가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면, 으읍~하고 잠시 멈추고선,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분명히 적개심이 서려 있었지만, 감히 성수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캠코더를 놓은 성수의 손엔 재크 나이프가 들려져 있었다. 그게 선생님의 피부를 스칠 듯 내려가더니, 볼록한 브라의 융기 가운데서 멈췄다.

“자업자득이야, 씨발 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라도 하듯 한마디 내뱉은 성수는 손에 힘을 불끈 주고 재크 나이프를 들어올렸다. 칼날을 따라 주욱 끌려오던 브래져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지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양쪽으로 벌어졌다.

여자의 가슴을 본 적이 별로 없는 내게도 불룩한 선생님의 젖가슴은 아찔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약간은 갈색이 감도는 꼭지가 드러나는 순간, 선생님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지만 성수의 추행을 저지할 수 있을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고개 똑바로 들어, 쌍년아!”

성수의 촬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차근차근 하나씩 벗겨가며 촬영을 마칠 생각인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들어가면 성수가 칼을 사용할까...?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의 하나 그 칼이 선생님의 하얀 피부에 가서 박히기라도 하면, 그 날의 일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고, 그 때는 정말 성수 뿐만 아니라 선생님마저 파멸이었다. 갈등하고 있는 사이에도 녀석들은 촬영을 계속했고, 성수의 재크 나이프는 이제 아랫배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문고리를 돌렸다.

“이제 그만 하자.”

성수는 놀란 듯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 뒤쪽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듯, 성수의 표정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성수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다지 동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교실에서 가벼운 이야기를 하듯 작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못 본 걸로 하겠다면, 그냥 보내 줄게.”
“그럴려면 뭐하러 왔겠냐?”

“아니면 잠자코 구경이나 하던지!”
“너 지금 진짜 잘못하고 있는 거야, 임마!”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성수의 두 눈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나가 있어, 성수야.”
“못 가, 새끼야! 그냥 가면 이년이 날 가만 둘 것 같아?”

“그러면... 나랑 또 해 볼래?”

성수의 두 눈은 충혈 되어 있었다. 재크 나이프를 집어 들더니, 선생님이 아닌 자신의 목에 그 끝을 가져다 댔다.

“여기서 그만 두면... 어차피 나는 죽었어.”
“이리 내!”

“못 줘, 씨바...! 나한테 어떡하라고?”
“그러면 콱 뒈져버려! 멍청한 새끼.”

다가가는 나를 피해 성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벽에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표정이 일그러지고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한 번만 봐주지...! 찍기만 하려고 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성수는 강간을 경멸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손목을 쥐고 칼을 뺏자, 저항할 의지가 없는 성수는 순순히 그것을 내 주었다. 뺨에 주먹을 한방 먹여 바닥에 굴렸다.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등나무 벤치에 있어. 금방 갈게.”

어깨가 축 쳐진 성수도 비틀거리며 체육관을 빠져 나갔다. 선생님은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녀가 입었던 옷은 이미 걸레가 된 터라, 한 쪽 구석에 있는 시트 중에 제일 깨끗한 걸 골라 그녀에게 내밀었더니, 그녀가 그걸로 몸을 감쌌다. 여전히 고개는 푹 숙이고 있었다.

성수의 말대로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성수를 학교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바닥을 치우고 캠코더에서 필름을 꺼내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옷 여벌 있으세요?”

찢어진 츄리닝 조각을 그녀가 주섬주섬 더듬었다. 그리고는 내게 조그마한 열쇠를 내밀었다.

“조금만 계세요. 금방 올게요.”

교무실에 달려가 서무 보는 누나에게 부탁해 선생님의 옷과 가방을 찾아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그녀 앞에 그걸 놓아두고 자재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은 후, 다시 한 번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그냥 사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안된다면... 나는 손에 든 비디오 테이프를 내려다 보았다. 이거라도 사용할 수 밖에...

문을 열고 나온 그녀의 옷차림에서 조금 전의 난동의 흔적은 없었다. 출퇴근 때 입는 말쑥한 정장... 하지만 얼굴만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창백한 채 ?점을 잃은 눈동자... 그 때는 그런 상태에서 여자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오직 어떻게든 없었던 일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조금 전에.. 제가 성수한테 한 말 들으셨죠?”

그녀가 시선이 잘 모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나무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

“한 번만 봐주세요, 선생님. 안 그러면 성수 죽을 거예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 손에든 작은 8mm 비디오 테이프로 향해 있었다.

“이리 줘....”

잔인하지만 그것만은 건네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등 뒤로 감췄다.

“죄송해요... 드릴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약속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것 때문에 제가 성수랑 같은 운명이 되더라도 어쩔 수가 없어요.”

짝! 소리와 함께 뺨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떨어졌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크흐흐흐....!”

그녀는 바닥에 주저 앉았고, 울음 소리는 텅 빈 체육관을 울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누나!”

“속 괜찮아?”
“응. 누나는?”

“비교적... 머리는 좀 아프다. 올라가자.”
“작은 누나 봤어?”

“아니, 아침에 눈뜨니까 이미 없던데?”
“좀 챙겨가지고 다니지.”

항상 식사 시간 이전에 먼저 돌아와 준비를 하곤 했던, 유미 누나가 그 날은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색은 안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어젯밤의 내 말 때문에 충격 먹었나?

오후 내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유미 누나를 찾아 다녔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흥!, 어디 가서 남자라도 하나 꼬셔서 놀고 있나 보지...? 다시 콘도로 올라갔다.

“작은 누나 안 왔지, 엄마?”
“누나 집에 갔는데?”

“가다니? 왜?”
“집에... 뭐, 내일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야 한다더라.”

“얼마나 됐어?”
“너 나가고 바로 들어와서 가방 쌌어.”

“비행기 표도 없잖아?”
“가서 기다린대.”

“누나 배웅하고 올께!”

평소 그렇게 동작이 빨랐다면, 강의 시간에 절대 지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다닥 옷을 갈아 입고 내려와 택시를 탔다. 속 타게 밀리는 교통... 어쩐지 누나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의 일 때문일까? 오해를 했다 쳐도, 휴가를 포기하고 집에 갈 것 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누나로서 그냥, 왜 그렇게 못된 짓을 했냐고 야단만 쳐도 될 텐데...

두 시간 이상 차이가 났으니 누나가 공항에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게 가 버리니 더 보고 싶었다. 저녁 시간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집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 누나...

[여보세요?]
[나야, 누나.]

[수호...]
[그렇게 그냥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

[미안해.]
[거짓말이지? 학교에 일 있다는 거?]

[으응.]
[어젯밤 일은 오해야.]

[알아...]
[아는데 왜 그랬어? 그냥 같이 있다 내일 가지?]

[그냥...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누나!]

[응?]
[내가 누나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지?]

[.....]
[아느냐고?]

[그런 말 왜 해?]

왜 하냐고? 그렇게라도 해 놓지 않으면 내 눈 앞에서 훌렁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였다. 아직은 유미 누나도 자신의 출생에 대해 다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나도 생부가 누군 지 의문을 가질 것이고, 그걸 알아내는 건 너무도 쉬웠다. 그러면 아마, 견디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의 못 말리는 청춘들...! 부모님이 잠들자마자 광식 군과 내가 쓰고 있는 방에 눌러 붙어, 일어나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선미 누나 덕분에 나는 거실로 밀려 나왔다. 휴가를 완전히 망친 것이다. 잠도 오지 않고 해서, 산책이나 하려고 해변으로 나갔다. 유미 누나에 대해서 나도 좀 생각을 해야 했다.

삼촌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실 상 미래에 대한 나의 아름다운 상상은 끝난 셈이었다. 그걸 거부하는 것은 내 욕심일 뿐...

설령 유미 누나를 어떻게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녀가 비록 절반이지만 피가 섞인 혈육인 나를 반려자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를 희망할 확률은 0%였다. 오히려, 유미 누나에 대한 내 집착이 그녀의 미래를 참혹하게 일그러뜨릴 확률만 100%였다.

그러니, 편지를 본 이후에 있었던 동요는 잊고, 여느 오누이처럼 다시 예전의 누나와 남동생의 관계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유미 누나도 그간 힘들었겠지만, 어차피 몇 년 안에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할 것이고, 그 후에는 그녀와 내가 친 혈육이든, 절반만 섞인 혈육이든, 아니면 완전히 남남이든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녀에게 힘든 것은 과거일 뿐이었다. 어떤 일이 있었어도, 미래는 어차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리는 되었지만, 왜 그렇게 허전한지.... 그 편지만 없었다면, 나도 그렇게까지 갈등하진 않았을 텐데... 이제는 마음 속에 있는 여자로서의 김 유미를 보내야 했다. 파도가 철썩거리는 바다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잘 가라, 김 유미~~~!! 행복해라~~~!!”

그리고선 들어가 잠을 자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한 10여 미터쯤 떨어져 서서 박 은혜 선생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낮에 입었던 섹시한 수영복 대신 바람에 나폴 거리는 플레어 스커트와, 끈으로 체결된 헐렁한 나시를 입은 그녀는 마치 이제 막 물에서 나와 다리가 자라난 인어와 같은 느낌이었다.

“안 주무셨어요?”
“응, 또 보네. 지나다 보니 누군가 괴성을 지르고 있어서... 호호호.”

“누가 듣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애인이랑 헤어졌나 보다?”

애인이라...

“그런 셈이죠. 사실 뭐, 사귄 건 아니지만... 저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잘 자라.”

서둘러 그녀의 곁을 떠났다. 저런 천하의 미인과 함께 있으면서, 뭔가 거북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나 하나 뿐일 거야....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수호야.”

“네.”

“일찍 들어가야 하니?”
“아뇨.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잖아요.”

“이제 술 마시지?”

망설여졌다. 그녀를 싫어하지도 않고, 사실 기분도 그래서 술을 한 잔 하고 싶기는 했지만, 같이 앉아 술 마시기는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힘들고... 제자된 도리로 먼저 제안을 해 버렸다.

“한 잔 하러 가실래요?”
“그러자.”

카페는 우리 테이블만 빼고는 떠들썩했다. 짝을 데리고 온 남녀, 짝을 구하는 남녀. 우리처럼 어색한 커플은 없는 듯 했다. 그래도 시선들이 언뜻언뜻 우리들에게 쏠리는 건, 눈에 띄는 선생님의 외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오늘 기분 별로다.”
“이해해요, 선생님.”

“선생님이라는 호칭, 듣기 싫은데...”

하긴... 교사 생활을 채 3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낸 데다, 그렇게 불리는 것만으로도 쓰린 기억을 떠올리게 했을 터였다.

“누나라고 해, 그냥. 이제 교사도 아니고...”
“그럴게요.”

“너... 그때 참 멋있었다.”
“죄송해요. 선생님은 힘드셨죠?”

“또, 선생님...”
“헤헤, 잘 안되네.”

“힘들었어, 네 말대로. 교사로서... 아니 여자로서 정말 수치스러운 상태였으니까.”
“항상 감사하고 있었어요.”

“고마운 건 나다. 너 아니었으면 그때... 물론 뭐, 그랬어도 죽거나 하진 않았겠지.”
“성수이야기... 해도 되요?”

“응.”
“걔도 반성 많이 했어요.”

선생님이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때문에 더 우울해 보이고, 퇴폐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반성? 호호호... 하긴... 나도 잘한 건 없었으니까.”
“성수도 그때 힘들었던 때였어요. 새엄마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뻔질나게 가출하는 여동생에... 그래서 그때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나도 맥주잔을 들고 타는 속을 좀 식혔다.

“그때... 선생님 가시고 나서, 성수 만나러 갔을 때 걔도 목을 매고 있었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등나무 벤치에 있어야 할 성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학교 내에 있는 작은 언덕까지 찾으러 갔을 때, 성수는 혁대를 풀어 그걸 목에 감고, 다른 끝을 나뭇가지에 묶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내가 그때 그렇게 너희들한테 독하게 굴었니?”
“사실... 저도 누나가 미웠던 적 있었어요. 하하하.”

“너까지 그랬다면 전부 다 그런 거네, 후후후.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 거야.”
“성수 용서해 주세요.”

“지금도 그 때하고 똑 같구나. 잘못한 놈은 어디 가버리고, 엉뚱한 녀석이 나타나 용서해 달라 그러고... 수레바퀴처럼 빙빙 도네?”
“죄송해요.”

“나한테 돌려주기 전에, 그 테이프 봤었지?”
“솔직히... 한 번 봤어요.”

“어떻든?”

질문의 의도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테이프를 가지고 있던 두 달 동안, 정말이지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걸 그녀에게 돌려 주었을 때의 그 후련함... 하지만, 화면에 비친 그녀의 벗은 몸이 무척이나 육감적이었다는 것만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후후후, 당황하기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했고, 그런 나를 쳐다보는 선생님의 눈빛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는 누나 뵙지 않았으면 했어요. 어쨌든 그 때 일은.. 저에겐, 아니, 성수나 누나에게도... 다시 기억해서 좋을 건 없잖아요?”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너한테 지금 나는 어떤 느낌일까?”

“하하하, 아마 누나를 꼬실려고 했을 거예요.”
“솔직해서 좋구나.”

“누나가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예요.”
“그래. 고맙다. 핸드폰 있니?”

“아뇨. 아직...”
“여기, 내 전화번호야. 서울에 가면 꼭 한 번 연락해라. 그 때는 우리, 옛날 기억은 다 잊고 한 번 보자.”

“그럴게요.”

대답은 했지만, 그런 일은 절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도 나도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된다면 어설프게나마 묻어두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작은 쪽지에 적어준 전화번호는 그저 힐끗 보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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