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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 제왕이 되다. - 24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4:51 1,082회 0건
1
"그러니까 잘라야 해요"
"예"

고명희의 은밀한 안가에 있는 방이다.
고명희가 이 안가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지금 사태가 급박하다는 거다.
지금 그 방에는 감독원장, 위원장 국내 최대의 로펌인 K&M 대표가 앉아있다.
또 국내의 내로라하는 금융 전문가와 재경부 금융담당 국장도 있다.
급히 이들을 불러 모은 고명희가 이들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러나 연설이지만 실상은 질책이다.
현재 전 국민의 관심사인 K은행의 지주사 회장이 사퇴를 거부했다.
그가 현 정권 최고 책임자의 뒷백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 최고 책임자는 이미 그를 놓아버렸다. 실상은 그만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나 실무자들은 그 일을 매끄럽게 처리할 방안도 내놓지 못한다.

모두 가 권력자의 눈치만 보고 권력자는국민여론을 먹고 사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명희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도박은 말이죠. 블러핑의 기술입니다"

일장 연설을 마친 고명희의 뜬금없는 말에 참석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블러핑은 상대에게 들킬 경우 패가망신을 합니다"

K은행은 이번 주전산기 교체건으로 불거진 의혹 말고도 큰 건수로만 여러 건이 있었다.
일단 직원이 개입된 주택채권 횡령 사건이 있었다.
또 도쿄 지점 부당대출 사건도 적지 않은 사건이었다.
거기다 주택보증부대출 부당이자 수취 등도 있었다.

그때마다 은행은 자구노력을 하는 것으로 비칠 행동들을 했다.
행장이 본점 대강당에 임직원들을 모아놓고 윤리강령 실천 서약에 서명을 했다.
은행은 또 직원들의 윤리경영 실천 의지 및 근무자세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도 하는 것으로 보이게 했다.
그것은 직원들 업무용 수첩에 윤리강령 전문과 실천 서약란을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은행은 대외적으로 이런 노력들이 자정노력이라고 홍보했다.

그런데 고명희는 이런 것들을 블러핑으로 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블러핑에 당한 쪽은 감독 당국과 정부였다.
그러나 고명희는 이런 모든 문제점들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회장의 강경한 사퇴거부 또한 블러핑으로 보고 있음을 암시했다.

"내부 통제는 결국 사람이 문제라고 늘 말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은행 내부의 편가르기와 줄서기 문화를 바꾸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도 했죠"
"예"
"그런데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오래 된 것들이라서..."
"그러니까 이번에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
"...."

참석자들 모두는 고명희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한 컵 마신 고명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회장이 들어와서 한 일도 다시 자기사람 채우기였습니다"
"...."
"...."
"주전산기 교체문제...사실상 별일 아닐 수도 있어요"
"...."
"...."
"즉 그 정도만 되면 그 안에 내재된 비리 밝히고 책임자 문책하면 됩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도 이번 사건의 배경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엔 회장과 행장의 권력투쟁도 있었고..."
"네"
"그 근본적 이유, 즉 내부 갈등의 근본 원인은 줄서기 문화입니다"
"...."
"...."
"결국 내부통제 문제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고명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명희는 앞에 있는 서류를 한번 들여다 본 뒤 다시 말했다.
그 서류는 은행비리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문건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 서류를 훑어 본 고명희의 목소리는 서릿발이 내린 것 처럼 단호했다.

"제도가 아무리 잘 돼 있어도 임직원들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참석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회장과 행장이 바뀔 때마다 되는 싹쓸이 인사, 그러니 외부 줄대기 같은 문제가 없겠어요?"

고명희의 지적이 있자. 금융전문가로 불린 한 사내가 대답했다.

"네. 그래서 CEO 낙하산 인사가 계속되는 한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는 건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말을 K&M의 대표 변호사가 받았다.

"은행을 망쳐 놓은 것은 결국 회장님의 뜻을 거역하고 전 정권 때 내려 온 낙하산들입니다"

그러자 다시 감독원의 실세가 이었다.

"그렇습니다. 다소 비약일 수 있지만 전 정권 당시 지주사 회장과 행장 등 고위 임원들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고명희가 그들의 말을 자르고 뛰어들었다.

"국내 다른 금융회사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시 참석자들이 고명희를 바라보았다.

"따라서...이번에 정권 낙하산으로 온 회장까지 잘라야 합니다"

결국 고명희의 의지는 확고했다.
재경부의 국장이나 감독원장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물을 한잔 마신 고명희가 결론을 짓듯이 말했다.

"지주사 회장이 가진 카드는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내리 찍은 권력자 뿐이지요"
"...."
"...."
"그러나 그 카드는 뻥카입니다. 실카는 제가 쥐고 있어요"
"...."
"...."
"오늘날의 고명희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카드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
"일단 자르는 것으로 오늘은 정리합니다. 블러핑 카드를 까게 해야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윗선에는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고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무려 3시간이 넘는 긴 시간의 회의를 마친 참석자들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이 자료를 들고 방을 나가자 명희가 인터폰을 들었다.

"이 팀장님 오시라고 해요"
"네, 회장님"

회의실 의자에서 자기 책상으로 가려고 몸을 일으킨 명희가 손으로 배를 쓸었다.
배 안에서 꿈틀 태동이 느껴졌다.
명희는 그 태동이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배 안에 한 생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책상 앞에 있는 자기 의자로 돌아 가서 앉은 명희의 배가 예사롭지 않았다.
명희는 가디건을 여미면서 그 배를 살짝 가렸다.

"부르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 온 이경훈이 명희를 보고 인사했다.

"명준인 지금 어쩌고 있죠?"
"요새 상당히 바쁩니다"
"회사채 발행은 순조롭게 되나요?"
"예, 주거래 증권사가 추진하고 있습니다"
"확인은 해 봤어요?"
"네"
"어떻던가요?"
"외적 조건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요? 자세히 좀..."

경훈은 그동안 조사한 자료들을 명희 책상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자료는 매우 치밀하게 조사한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군청이 있는 본 섬에서 직선거리로 1.2km이니 가깝다.
또 전체 면적은 50만 평은 조금 넘고 60만 평에는 좀 모자란 크기였다.
그 정도면 18홀 기준의 골프장은 건설할 수 있다.

설계만 잘 나오면 정상 쪽으로 200실 정도 호텔과 콘도까지 가능할 것 같다.
여기에 카지노만 허가를 받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고명준의 실력으로 카지노 허가는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고명준의 계획은 성공할 확률이 20%미만이다.
총 소요비용은 아무리 미니멈으로 잡아도 약 1천억이다.
500억을 회사채 팔아서 충당한다면 나머지는 회원권과 콘도 분양으로 충당해야 한다.
그러나 지형적 위치로 봤을 때 고가분양은 매우 힘들다.
특별한 메리트가 첨가되지 않으면 거기까지 골프치러 갈 부유층 없다.

서류를 검토한 명희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있던 이경훈이 그런 고명희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예, 아저씨..."
"몸도 그러신데...너무 업무가 과중하신 건 아닌지..."

그렇게 말하는 이경훈을 보는 명희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결혼 말이 오가면서 경훈의 명희를 대하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이전에 정말 상하관계가 확실한 수하 직원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경훈은 살짝 그 범주를 넘으려 한다.

이런 경훈의 변화에 대해 명희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결혼을 계속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들고 있다.
결혼식을 올려버리면 혼인신고가 어떻든 대외적으로 이경훈은 남편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은 직원들이나 대외적인 손님들 앞에서 깍듯하게 경훈을 남편으로 대접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
자신을 정복하고 자신에게 씨앗을 심어 준 그 외에는 누구도 인정할 수 없다.

다시 그가 보고싶다.
그의 강함이 그립다.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하체가 신호를 보낸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눈도 충혈되는 것 같다.

"어디 계실까?"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덮은 명희가 고개를 숙인다.

"회장님, 이만 퇴근 하시지요"

앞에 서 있던 경훈이 명희의 뒤로 돌아와서 명희의 몸에 손을 댄다.
흠칫 놀란 명희가 고개를 들어 경훈을 바라본다.
눈가에 위엄과 함께 노기가 서려있다.
이를 발견한 이경훈이 급히 손을 떼고 한 발 물러선다.

"아! 저는..."
"아저씨..."
"예"
"결심 하셨어요?"
"예...뭐..."

직설적인 명희의 물음에 경훈이 말 끝을 흐렸다.
그의 말을 자른 명희가 일어섰다.

"그래요. 오늘은 이만..."
"예,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경훈이 급히 대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백을 들고 일어 선 명희도 경훈의 뒤를 따랐다.

2
눈이 퉁퉁 부은 화영을 보는 주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전화를 해왔다. 그리고는 무조건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주희는 지금껏 화영과 친분관계를 맺어왔지만 화영의 이런 태도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커피가 식어갔지만 화영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명희의 호텔 스카이라운지 귀빈실은 전면이 원통형 창문이다.
초고층 호텔의 꼭대기에 있는 원통형 창문으로 바라 본 남산의 녹음이 새삼 짙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깰 수 없어서 주희는 맥없이 냉수로 입을 축이며 화영의 입술만 바라볼 뿐이었다.

화영은 남산을 보는 것 같았는데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하나의 생각이 떨칠 수 없도록 짓눌렀다.

그날, 잠에서 깬 화영은 곁에 용주가 없다는 것에 다시 실망했다.
산속 움막에서 하룻밤에 천국을 수십차례 왕복하게 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날도 잠에서 깨어보니 그 남자는 없고 딸들만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으며 어떻게 시외버스 터미널 의자에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꿈에도 그리던 남자였다.

그 남자를 뜬금없이 자신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것도 지수와 같이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수도 그에게 죽어가며 종속되고 있었다.
불가사의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런 남자가 다시 자신을 품었는데 어떤 죄책감도 부끄럼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몸 속의 물을 쏟아내며 또 죽어갔다.

그런데 그가 다시 없었다. 이층에도 없는 것은 확실했다.
그가 있다면 2층이 저처럼 조용할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비비며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 옆 탁자에 글씨가 쓰인 종이가 한 장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이빨이 딱딱 마주칠만큼 얼굴도 떨렸다.

"아!"
"그가...그 분이...미경의 아들이라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친구인 주희와 보연의 문제였다.
지금 그 분은 그들과 살고 그 둘도 자신과 지수와 마찬가지 신세라는 것이다.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열흘이 흘렀다.
병원 일도 건성건성...모든 일에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왠일인지 지수는 이전보다 강서방과 더 사이가 좋아보였다.
미경을 볼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들 수 없는데 미경도 예전보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결국 결심했다.
주희를 만나 이 모든 것을 털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둘은 이렇게 마주앉아 있다.
입술을 깨문 화영이 다 식어버린 커피로 목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자기야"
"응?

나직한 목소리로 단 한번도 불러본 일이 없는 호칭을 써서 주희를 불렀다.
주희는 그런 화영의 태도에 흠칫 놀라며 급히 대답했다.

"나..."
"???"
"다 알아."
"뭘?"
"지금 자기 처지..."
"내 처지?"
"응"

주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가 뭘 안다는 말인가?

"혹시?"

주희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보연이 남자..."
"????"

화끈거리던 얼굴에 뜨거운 불꽃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황급히 물컵을 들어 입에 부었는데 너무 급히 서둘다 옷에다 붓고 말았다.
주희가 냅킨을 들어 자기 옷을 닦으며 화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 표정을 바라보던 화영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같애"
"뭐가"
"내 처지도 자기와 같다고"

주희는 더욱 알 수 없었다. 뜨겁던 얼굴이 의혹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화영이 지금 지수의 남편인 사위와 불륜이란 말인가?
그는 현직 검사인데 설마...
정신을 차린 주희가 이제 화영의 눈을 보며 되려 직선적으로 물었다.

"그 때문에 눈이 부은 거야. 지수가 알았어? 그래서 지수에게 당했어?"

이번엔 화영이 주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불꽃을 튀었다.

"그게 아냐..."
"그럼?"
"그냥 듣기만 해 줘"
"그래 말 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화영이 긴 얘기를 시작했다.
그런 화영의 이야기 도중에 주희의 얼굴이 뜨거워졌다가 식었다가를 반복했다.
나이 60을 바라보는 과부들 둘이 앉아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나눈다.
둘 다 그 남자에게 이미 몸도 마음도 다 정복당한 처지들이다.
자신들만이 아니라 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한 미혼모로 부터 화영이 20년 전에 받았던 아이다.
그리고 그 미혼모는 지금 화영의 집에서 일을 거들며 사는 여자다.
아이들은 그녀를 이모라고 불렀고 그녀는 화영을 깍듯하게 원장님으로 불렀다.
자신들 몸과 마음의 주인인 남자의 어머니라면 이치적으로 시어머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
두 여자는 이 청천벽력같은 현실을 공유하고 있다.
화영의 눈이 부은 이유를 주희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화영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야"
"응?"

다시 화영이 그 호칭으로 부르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급히 주희가 말을 받았다.

"우리 어쩌지?"
"...."
"어떡해야 할까?"
"어땠으면 좋겠어?"
"난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나도 지금 그래"
"우리 어쩌지?"
"그러게"
"오늘 바빠?"
"그냥"
"난 지금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나도..."
"우리 술이나 마실까?"
"둘이서?"
"주여사도 부를까?"
"얘기 하려고?"
"못하지"
"그래"
"그냥 둘이 먹으면 통제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도 안 돼"
"왜?"
"혹시 술이 취하면 다 나올 수 있잖어"
"그건 그래"
"그럼 고회장을 부를까?"
"고회장 임신 중이라며"
"그렇지"
"참..."
"자기는 애 아빠 알아?"
"자세히는 모르지"
"말 안 해?"
"거기까지...술 마시자"
"그래..."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부른 그녀들은 가약도 없는 술자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자기의 잔에 술이 떨어지면 자기가 부어서 마시는 대작을 해 나갔다.
술병이 두병이 비워지면서 두 여자의 입술이 꼬이기 시작했다.
성질이 급한 주희가 이제 화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박"
"왜?"
"보연이 그 분에게 시집 보낼까?"
"주인을 사위 삼는다고?"
"뭐...지금도 보연이랑 같이도 모시는데..."
"진짜?"
"응"
"대단해"
"자기도 지수하고 하고 난 다음에도 전혀 걸림돌이 없었다며?"
"응...그래"
"거 봐"
"그래도 난 달라"
"뭐가?"
"내가 지수보다 먼저잖아"
"그렇네"

이제 둘의 대화는 걸림돌이 없었다.
이미 용주가 자신들의 몸과 마음의 주인임을 고백한 이상 더 숨길 것도 없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하던 두 사람은 또 술을 한병 시켰다.
그리고 그 술병이 반쯤 비워졌을 때 화영이 말했다.

"자기야"
"엉?"
"자기가 조금 양보해라"
"뭘?"
"자기, 나, 보연이, 지수...아마도 그분에게 버림받기는 싫을 거야"
"그렇지"
"그러면 방법은 하나야"
"뭔데?"
"공유"
"공유?"
"그래. 공유..."

다시 술을 한잔 따라마신 화영이 결심을 굳힌듯 말했다.

"사실 우리에게 어떤 권한도 없어. 그분이 하는대로지"
"그건 그래"
"그래서...돈이 문제가 아니지만 우리 둘이 조금씩 부담해서 그분을 독립시켜드리는 거지
"그래서?"
"현관 비밀번호만 공유하면 우리끼리 신사협정을 맺어 서로 겹치지 않게 만나는 거지"
"될까?"
"그게..."
"???"
"좀 부끄럽지만 보연이에게 맡겨보는 거지"
"그래도 안 되면?"
"내게 전화번호를 남겼다는 것은 내 전화를 받겠다는 뜻 아니겠어?"
"그렇지"
"그럼 나도 만나서 사정하고...자기도 사정하고...안 되면 지수까지 동원하지 뭐"
"그래서 허락을 받으면 집을 하나 사자고?"
"그렇지"
"한 몇 평?"
"그래도 40평은 넘어야지. 그분이 사실 집인데..."
"그래...그런데...그러면 그분 식사는?"
"누구든지 그분과 자는 여자가 그날 책임을 지는 거지"
"할 수 있겠어?"
"왜 못해? 그분이 드시는 건데...어떻게든 해야지"
"그건 나도 그래"

여자들 주량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마신 것 같은데 둘은 술이 취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둘은 이미 의기가 투합하여 용주의 미래를 자기들끼리 그리고 있었다.

3
그렇게 두 여자가 용주와의 미래를 꿈꾸는 시간에 용주는 강철준과 같이 있었다.
강철준의 사무실이 있는 서초동의 한 카페 밀실이다.
법원과 검찰청이 가까운 지역이므로 이곳 카페들은 웬만한 규모면 이런 방들이 있다.
방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강철준이 있고 맞은 편으로 용주가 輧팀獵?
용주의 뒤에는 보디가드 모양으로 박펄우와 정명석이 부동자세로 서있다.

"야. 느그들도 앙거"
"예"

용주가 둘을 행해 말하자 둘은 바로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철준은 새삼 용주의 능력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고맹준이는 밸일 읍지요?"
"네. 별일 없는 것 같습니다"
"느그덜이 보기에도 그라드냐?"
"예, 근데..."
"뭐시여"
"무리하게 회사채를 발행하는 것 같습니다"
"고것이 뭐여?"

용주의 물음에 다시 입을 열려던 박철우를 막으며 철준이 말했다.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려요? 그라믄 해 보시요"

철준은 회사채의 정의와 발행절차 그리고 판매절차를 일목요연하지만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런 철준의 설명을 들으며 박철우와 정명석은 새삼 검사들의 머리에 감탄했다.
철준의 설명이라면 누구라도 단박에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앝기 때문이다.
그런데 듣고 있던 용주가 철준의 말을 잘랐다.

"그라믄...고거시 사기 아니여?"
"모두 사기는 아닙니다. 회사가 갚지 못할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흔치 않다는 것은 그런 경우도 있다는 거 아니여"
"그렇습니다. 어쩌다가 있습니다. 그래서 판매를 하는 증권사는 매수자에게 그만큼 위험부담을 고지합니다"
"긍게 요것은 요런 위험이 있다 그라고 알려준다는 말이재?"
"그렇습니다."
"그란디도 사는 사람이 있다?"
"예. 이자가 다른 어떤 금융상품보다 월등하니까요"
"긍게 이자 션?더 묵자고 뛰어든 불나방들이 있단 말이구만"
"건전한 기업은...."
"알어..알어...근디 시방 고맹준인가 하는 넘들은 글치 않다는 거 아녀"
"아주 그런 거는 아니고..."
"뭐시 아녀. 거그 개발을 실패하믄 회사 부도나는 거시고 글믄 그 회사채 산 사람들은 종이쪼각 산 것이재"
"그거야..."
"긍게 사기란 말여"

자신 스스로 결론을 내린 용주를 보며 철준은 용주의 지능이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수를 통해서 전해들은 바로는 용주는 무학자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에야 비로소 주민등록증을 받은 무적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서너차례 만나 본 용주의 기개와 위압감 그리고 현상 이해력은 대단했다.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도 그의 제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이미 인정했다.
그러나 대화 중 계속 느낀 것은 머리도 자신보다 더 좋은 것 같음이었다.

"자 그라믄..."
"예"
"예"
"예"

세 사람이 동시에 용주의 말에 대답하다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 검사는 그 고맹준이와 더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진행 실태를 파악하고..."
"예_"
"느그들은...그 증권사가 어치코롬 하는지 잘 살피고..."
"예"
"그라믄 오널은 여그까지..."

말을 마친 용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 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가 용주와 눈을 마주쳤다.

"헉"

여자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용주는 아차 하고 후회했다.
여자를 정면으로 마주칠 일이 없을 것으로 알고 갈무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용주와 눈을 마주친 여자가 흠칫 놀라며 표정을 감춘 뒤 철준에게 인사했다.

"벌써 가시려구요?"
"예...요즘 좀 바빠서..."
"네에, 강검사님 오셨대서...감사 인사나 드릴려고"
"감사는 무슨..."
"자주 좀 오세요"
"그러지요 뭐"
"근데...?"
"아! 그냥 제 손님들입니다"
"네에"
"그럼 이만"

철준이 대화를 마무리하고 일어서더니 용주의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철우와 명석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문을 밀고 나간 일행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러더니 급히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나온 여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
"강검사 말고 3분 더"
"...."
"잘 모르는 분들이었어요"
"...."
"자기 이름도 부르고..."
"...."
"수염이 더부룩한 사람에게...깎듯이"
"...."
"회사채 설명하고..."
"...."
"그 수염이 더부룩한 사람이 사기라고..."
"...."
"언제 와요?"
"...."
"알았어요. 맨날 기다리라고만 하고..."
"...."
"알았어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전화를 끊은 영선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괜히 화를 내는 고명준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이상했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아랫도리 계곡은 감당할 수 없이 물이 흐른다.
급히 백을 열고 팬티를 하나 꺼낸 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용주가 복도 끝 출입문 쪽에서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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