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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1 869회 0건

천마대전

Written by 검은나비




===3. 마신 카리넨===

....지루하네.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건지.
이런 조약은 솔직히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도 의문인데 말이야... 사실상 천계와 마계는 모두 절대왕정(絶對王政), 아니 절대신정(絶對神政)인가? 아무튼 모든 것이 나와 렌의 말로 이루어지는 건데. 저딴 종이에 무슨 효력이 있다고 저렇게 열심인지.
실제로 지금까지 매번 조약마다 불가침 조약이 있었지만, 천계는 언제나 쳐들어왔잖아? 물론 대대적인 침략 전까지 소규모전은 없었지만...
솔직히 우리 애들이나 렌의 애들도 별로 조약을 안 믿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아, 끝났나 보다. 슬슬 정리되는군.
나는 무릎을 꿇는 크리시안을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난 듯합니다. 천신이시여."
"대화는 이걸로 끝입니다. 마신이시여.

탁자 저 쪽에서 렌을 향해 자세를 취한 천사를 흘낏 쳐다본다.
저 녀석이 지금의 대천사장인가. 이름은... 음, 뭐랬더라? 뭐 상관없나.
아무튼 중요한 건 얼른얼른 이 녀석들을 내보내는 거지. 수십 년 만에 맞은 동생과의 재회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을 늘려야지.
나는 살짝 목소릴 가다듬으며 위엄 넘치는 목소릴 냈다. 내가 내는 목소리지만 이 울림, 정말 매력적이라니까.

"수고했다. 모두 나가 보도록."
"수고했군. 언제나처럼 모두 나가 있어라."
"예. 여신이시여."*12
"예. 마신이시여."*12

스물 네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장내를 울린다.
으음, 저 목소리 꽤 듣기 좋은데. 천사랑 마족의 목소리는 은근히 잘 어울린다니까. 대강 섞어서 합창단이라도 만들면 정말 멋진 화음을 낼 것 같지만... 무리지, 아무래도.
살짝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열두 대천사와 열두 마왕이 모두 나갔다.
자아, 그러면 이제 주문을 외울 시간인가? 소리는 렌이 막을 테니 난 문을 막아야겠군.
슬쩍 들어 올린 손에는 강대한 마력이 맺힌다. 그 손에 맺힌 검은 마력의 양은 실로 거대하다.
이거 참, 마왕 애들이 이정도 마력을 끌어내려면 죽을 똥 싸야하는데 이렇게 쉽다니. 새삼 내가 신이라는 게 실감나네.
이크, 얼른 주문을 외워야겠다.

"절대 침묵의 봉인!"
"차원의 차단!"

구구구궁―

검은 빛과 흰 빛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마구 얽히며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언제 봐도 신기해. 마력과 신력이 부딪히면 폭발해야 정상인데, 우리 둘의 힘은 잘 섞인단 말이지. 자매라 그런가?
...그럴 리가 없지. 친자매도 아닌데. ....쓸데없는 생각을 했군.
입가에 맺힌 씁쓸한 미소를 애써 지워버린다.
자, 나와 렌의 주문은 완벽하게 걸렸다. 그렇단 말은 여기서 뭘 하든 밖의 천사들과 마족들에겐 닿지 않는단 말. 그럼 결국....!
자유다!!

"푸하~"
"후에에~"

풀썩

우와~ 이 탁자 진짜 폭신해. 아티팩트(Artifact), 아니 이 경우엔 성물(聖物)인가? 아무튼 이거 진짜 신기해. 외관은 완벽한 탁자고, 실제로 파인 부분도 하나 없는데 느낌은 폭신하다니.
렌이 가져온 거였지, 이거? 렌도 참 좋은 걸 가지고 왔네. 나는 아무래도 제작 쪽에는 좀 미숙한데... 이런 거 설계하기 어렵단 말이야. 이런 건 "감"으로 되는 게 아니라서... 칫. 조금은 부럽네.
렌이 가져온 탁자의 느낌을 마음껏 만끽하며 렌에게 말을 건넨다.

"후우~ 진짜 자세 잡고 있기도 힘들다. 걔들은 뭔 말이 그리 길다니?"
"그러게 말이야. 좀 적당히 하고 끝낼 것이지... 그깟 조약 뭐 중요하다고."

쿡쿡.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거 애들이 들으면 기겁한다. 뭐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야. 애들 앞에선 말조심 하는 게 좋을걸?
그건 그렇고,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거네. 이번이... 몇 십 년 만이더라. 별일은 없겠지만...

"렌, 잘 지냈니? 벌써 이게 몇 십 년 만인지."
"그러게 말이야. 언니도 잘 지냈어? 하기사 넨 언니가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후훗. 자주 보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아쉽지만, 이런 귀여운 동생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렌아, 렌아, 이 귀여운 녀석아. 날 정말 잘 따르는 게 조금은 신기할 정도다. 몇 십 년에 한번 보는 언니인데도 이렇게 따라 주다니. 조금은 고맙고, 조금은... 미안하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후엥~ 진짜 신 노릇하기도 힘들어. 뭐 이거야 다 위엄, 점잔, 조심... 무슨 신이 이렇게 어려워? 조금만 흐트려져도 애들이 얼마나 뭐라고 하는지. 밑에 애들은 물론이고 특히 마계 쪽 앞에서는 조심하라고 아주 신신 당부를 하더만."
"신이니까 그렇지 뭐.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야지 뭐 있겠니."
"우이잉... 그래도 힘든걸. 나도 놀러가고 싶단 말이야. 밑에 애들은 인간계에도 막 놀러가고 그러던데."

강림... 이라. 글쎄, 대천사나 마왕만 강림해도 인간계가 발칵 뒤집히는 판에 천신이나 마신이 강림하면 대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역사에 남아 영원히 회자되는 건 기본으로 들어갈 텐데. 그리고 거기에 드는 힘은 물론이고, 제약도 장난이 아니다. 이런 건 말려야지. 렌 녀석은 은근히 엉뚱해서, 한번 해봐~ 했다간 진짜 하는 수가 있으니까.
...너무 잘 따라주는 것도 때는 난감하다. 농담은 구분해 줘야지.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신이 강림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니?"
"우씨이~"

볼을 부풀리는 렌이 왜 이리 귀여울까.
마치 호빵처럼 볼록 부풀어 오른 렌의 옆으로 의자를 끌고 이동, 볼을 콕 찔러 본다.
아우~ 부드러워. 새하얀 피부가 살짝 찔리는 게 더없이 귀엽다. 또 볼은 얼마나 부드러운지. 렌같은 인형이 있으면 매일 껴안고 자려고 할지도 몰라. 음, 그러고 보면 옛날엔 자주 안고 잤는데...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얘기지. 하하, 이걸 추억이라 생각할 수 있다니....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씨이! 하지 마!"
"쿡쿡. 이렇게 귀여운걸? 이렇게 콕 찔러주고 싶은 볼을 두고 어떻게 안 그러겠니."
"칫칫. 언니 너무해."
"후훗."

발끈하는 렌도 귀엽다.
떠올랐던 과거의 기억은 다시 기억의 저 편으로 밀어버리고, 렌과 눈을 맞춘다.
한 점의 잡티도 없는 맑은 눈. 과연 천신인가. 아니, 렌의 눈은 옛날부터 맑았지.... 내 눈은 어떠려나.
슬쩍 손을 뻗어 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치는 그 가벼운 느낌이 견딜 수 없이 상쾌하다. 능숙한 애무보다도,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렌의 머리카락이 주는 감촉이 더 즐겁다.
렌아, 렌아, 내 소중한 동생아...
엎드려있는 채로 내 손길을 느끼던 렌이 갑자기 머리를 든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언니, 그러고 보니 요즘은 뭐하고 지내?"
"나? 글쎄... 저번이랑 그렇게 다른 건 없는데. 뭐 마왕 애들이랑 놀거나, 마계 여기저기 둘러보거나... 요리 연구하거나?"

뭐 하냐고 물어도, 사실 신이란 게 왕국의 왕이랑은 달라서 직무 따위가 있지는 않다.
다만 즐기는 것은 유희와 취미. 그리고 내 애들을 돌보는 정도겠지. 딱히 렌도 다르진 않을 텐데... 뭐 하러 물어보는지. 취미를 물어보는 건가?

"요리? 그거 아직도 해? 할 게 아직 남았어?"
"그럼. 요리의 세계는 끝이 없단다."

요리는 확실히 좋은 취미다. 식재료란 게 정말이지 끝도 없이 널려있고, 또 조합에 따라 그 잠재력은 무궁무진. 게다가 맛있는 요리를 하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 거지.
나는 별로 섬세한 설계는 무리지만 요리는 어느 정도 감각이 중요한 거라서 괜찮다. 그러고 보면 언제 천계의 식재료도 구해봤으면 하는데 말이다. 어떻게 못 구하나?
잠깐 머리를 굴릴 때 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으응, 확실히 다음엔 렌 줄 요리도 챙겨와야겠다. 열과 성을 다해서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하렴.

"흐응... 언제 나도 요리한번 해 주라. 다음에 만날 때는 좀 가지고 와. 아, 그러고 보면 마왕 애들 꽤 바뀌었던데."
"응. 저들끼리 싸우다가 좀 죽은 애들도 있고, 이번 전쟁에서도 넷 죽었거든."
"으응... 안 슬퍼?"

안 슬프냐... 고?
글쎄, 전혀 안 슬프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다들 내 아들들이고, 특히 마왕들은 정말이지 아들 같은 녀석들이니까. 같이 자기도 하고 하니 더더욱 가깝지.
....잠깐, 그러면 나 아들이랑 섹스하는 건가? 으으, 임신하지는 않는다지만, 뭐 혈육 관계는 아니라지만 근친은 좀 아닌데.... 끙. 이거 이런 생각은 처음 해보네.
뭐 쓸데없는 생각은 제쳐놓고서라고도, 내 자식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만은 아니다.
다만, 벌써 많이 경험해본 데다가 그 대가가 렌과의 만남이니 감수할 뿐.
...만들어낸 자식들 따위, 렌에 비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 마족과 마계 전체와 비교해도 렌이 더 소중한걸.
......그리고 아마, 렌도 비슷한 생각이겠지. 조금은 다른 의미겠지만 말이야.
최대한 렌이 죄책감 따윌 느끼지 않게 둘러서 대답한다. 아니, 둘러대는 게 아니라 사실인가.

"후후. 물론 기쁜 건 아니지만... 널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 이렇게 예쁜 동생을 어떻게 원망하겠니."
"우웅... 그래도 조금 미안한걸. 앞으로도 계속 할 테니까."
".....어떻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안타깝지만, 그러면 또 별수 없지. 마왕 애들이 아무리 아끼는 애들이라고 해도 너만 하겠니."
"헤헤..."

웃음소리긴 하지만, 그 웃음엔 조금 어두운 기색이 묻어난다.
내 품에 안겨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지만, 렌의 표정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아마 미안함과 슬픔이 담긴 표정이겠지.
...렌은 무척이나 여린 아이니까. 렌은 어린애 취급을 싫어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도 턱없이 여린 동생일 뿐이다.
.....그래, 동생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그것 뿐.
렌아, 렌아, 소중한 내 동생아. 이제는 생각을 바꿔볼 때도 되지 않았니. 이런 힘든 것을, 이런 괴로운 것을 언제까지 끌어가려는 거니....

"그런데 네 대천사들은 전부 다 여자들이던데... 아직도 남자는 생각이 없니?"
"우우, 남자 따위 필요 없어. 여자가 더 좋다구. 그 부드럽고 따듯한 게 얼마나 좋은데."
"흐응... 너도 남자를 경험해 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진짜 짜릿한데."
"싫어! 남자 품에서 허덕이는 건 싫어. 난 여자랑만 할 거야."

후우... 절로 한숨이 나온다.
렌이 왜 저렇게 단호한 채도를 유지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나... 때문이겠지. 그 보답 받지 못할 감정을, 보상받지 못할 갈망을 어찌 해소하지 못하는지...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은 알지만, 너무나 안타까워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언니로서, 한 여자로서, 그리고 렌이 사랑하는... 대상으로서.
애써 무거운 태도를 숨기며 가볍게 다시 말을 건넨다.

"에휴... 왜 이리 남자를 싫어하는지. 렌 너는 내가 남자가 얼마나 좋은지 벌써 그렇게 말했는데도 어째 변화가 없니."
"남자는 싫다니까? 난 여자가 좋아. ...언니처럼."
"이그... 널 모시는 신도들이 네 실체를 알면 얼마나 기겁할까? 설마 고결하고 순결한 천신 샤이렌이 레즈비언이라니."
"흥흥. 남말하긴. 마신의 사도들이 마신 카리넨이 사실은 남자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색녀라는 걸 알면 기겁할 텐데?"
"그래그래, 내가 졌다."

품에 안긴 렌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렌아... 네가 말한 대로 난 남자가 좋아.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연애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남자를 원하는 것은 단지 취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일 뿐. 여자건 남자건 아무 상관없지. 내가 여자를 거부하는 건 오로지 널 위해서야...
내가 여자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다면, 너는 거기에서 희망을 찾을 테니까. 포기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너에게 거짓으로라도 사랑을 속삭일까 생각해 봤지만, 그것이 너에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건 오히려 너를 더욱 괴롭고, 힘들게 만들 테니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된다면야 내 마음 따위 얼마든지 네게 내어줄 텐데. 정말 미안하다. 렌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사과를 반복하며 조용히 렌의 머리만을 쓰다듬는다. 사과를, 미안함을 가득 담아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니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잠시 렌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렌이 나를 돌아보며 웃어 보인다.
...그 웃음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언니 언니. 우리 애들 있잖아, 진짜 귀여운 거 알아?"
"응? 귀엽다니?"
"천사는 말야, 엄청나게 감각이 예민하거든. 그리고 대천사는 더하다? 그래서 침대에서 보면 살짝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을 막 글썽거리면서 샤, 샤이렌 님... 그러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흐응~"
"살짝 살짝 쓰다듬기만 해도 높은 소릴 내고, 몸을 막 휘면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거 있지. 날개를 활짝 펴고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진짜 귀여워."

즐겁다는 듯이 떠드는 렌의 얼굴이 왜 이리 슬퍼 보일까.
손짓발짓하며 유쾌하게 내뱉는 렌의 목소리가 왜 이리 우울하게만 느껴질까.
...이건, 전적으로 내 착각인 것만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언니, 언니도 여자 쪽으로 돌아서면 안 될까?"
"글쎄... 우리 쪽 애들은 그렇게 민감하진 않아서 말이야."

미안, 정말 미안해...
나는 네 마음을 받아주지 못해. 네 사랑에 보답해주지 못해. 그러니 제발... 이제 그만 그 슬픈 사랑은 그만 하렴.
속으로 연신 사과하고, 타이른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내 입은 다만 핑계를 내뱉을 뿐.

"우리 쪽 애들은 어떤 쪽인가 하면 둔감한 편이지. 그리고 나는 말이야, 들어오는 쪽이 더 좋거든... 나는 남자가 아무래도 좋아. 남자랑 하는 쪽이 얼마나 기분 좋은데. 마왕 애들은 다 정력도 강하고 해서 말이야."
"......."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저 핑계일 뿐인 말. 마계에도 서큐버스가 있고, 여자 마족들이 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둘러댈 수밖에 없네.
하아...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린 건지, 우리의 운명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던 렌이 갑자기 뭔가를 꺼내든다.
뭐지, 이건...? 막대기? 아니, 이 느낌은 신기인가?

"이거 봐봐, 언니."
"뭐니? ...딜도?"
"언닛!"

렌이 살짝 발끈한다.
이런 작은 농담으로 우울함이 아주 조금이나마 가셨으면 좋겠는데... 무리려나.
살짝 웃어넘기며 렌이 건네는 흰 배경에 금빛 선이 수놓인 막대기를 받아든다.

"아하하, 농담이야. 어떻게 쓰는 거니?"
"거기 밑에 눌러봐. 아, 이쪽으로 겨누진 말고?"
"겨눠? 뭔가 나가는 거니? 어디..."

음, 확실히 한쪽 밑에 살짝 동그랗게 들어간 부분이 있다. 딱 봐도 눌러야 할 것 같은 모양새네. 자, 그럼 어디...
오오오? 이거 신기한데? 분명 한뼘 조금 넘던 막대기가 1m의 검신을 지닌 빛의 검으로 변했다. 헤에, 신기해라...
확실히 나와 다르게 렌은 세세한 설계에 능했지. 렌의 취미생활이 제작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꽤 대단한걸.

"오오? 뭐니, 이거?"
"히힛. 요즘 내가 만든 거야. 어때, 멋지지?"
"헤에... 뭐니 이건? 신성법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내 권능을 담은 거야. 빛 그 자체를 집약시켜 만든 거지. 이름은 일단 간단하게 광검."
"오오..."
"마법이 아니라서 마법 무효화나 그런 것도 전혀 타격 없고, 그 어떤 것에도 베이지 않지만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지. 사용자의 의지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검이야. 검 날 길이도 맘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고. 조금만 다듬으면 신기로도 쓸 수 있을 거 같애."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살짝 무시하고 검을 들여다본다. 이런 건 만져보면 아는 거라구.
이름은 조금 썰렁하지만... 뭐, 일단이라고 했으니 정식 명칭은 따로 있으려나. 이름이란 게 은근히 중요하니까.
그런데 권능이라... 그럼 이 가운데 구슬에 권능이 담긴 건가 보지? 우웅, 그럼 내 마력으로도 만들수 있으려나... 렌한테 설계도를 얻어 볼까?
....아니지, 받아 봤자 좀 보고 던져버릴 것 같네. 근데 권능이라 그런지 신기하긴 신기하다. 이거 마법으로는 엄두도 못 내겠는걸. 과연 신의 권능! 이구나.
흐응, 그런데 빛의 권능이면.... 마력에는 어떻게 반응하려나? 어디, 살짝....

"아, 근데 아직 미완성이라 약하니까 조심..."

쾅!

"...어머나."
"......."

...헉! 사고 쳤다!
이, 이게 왜 부서져? 이거 왜 이렇게 연약한 거야?! 진짜 살짝, 아주 살~ 짝 갖다 댔는데!
나는 손에 잡힌, 반쪽밖에 남지 않은 렌의 광검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으윽, 이거 꽤 열심히 만든 거 같은데 완전히 날아가 버렸네... 이걸 어쩌지?

"그, 그거..."
"미, 미안. 내구도 좀 실험하려다가..."

내 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들부들 떠는 렌의 모습이 보인다.
에구에구, 진짜 이걸 어쩌지? 이건 내가 만들어줄 수도 없는데.... 꺅?!

"이, 이 망할 언니야!"

퍽!

"꺅! 너 지금 언니한테 무슨...! ...우, 우니?"

머리를 갑자기 맞자 순간 발끈해서 렌을 쳐다봤지만, 렌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글썽거리고 있다.
자, 잠깐 설마 우는 거야? 아니 물론 잘못하긴 했는데, 그래도 울지는...

"흑, 훌쩍..."
"레, 렌 울지..."
"우에에엥~"

우왁! 터졌다! 레, 렌아! 울지 마!
어우, 진짜 많이 아끼는 거였나 보네. 이걸 어쩜 좋아...
나는 어쩔 줄을 모르며 필사적으로 렌을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으으, 렌 한번 터지면 잘 안 그치는데.

"우에엥~ 그게 얼마나 어렵게 만든 건데... 언니 미워~ 우에엥~"
"이, 이게... 어우,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라, 응? 렌 착하지?"
"우엥~ 세상에 빛의 신기에 마력을 가져다 대면 어떻게 해! 언니 미워~ 우에엥~"
"그, 그게... 렌아, 제발 울지 마라. 응?"

렌 우는 것도 정말 오랜만에 보긴 하는데... 이런 건 쭉 안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나는 우는 애 달래는 대에는 별로 재주가 없단 말이야...
렌아, 제발 그만 울고 뚝, 응? 제발 그만 울어~

결국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렌은 어느 정도 진정을 되찾았다.
으휴, 역시 아직 애나 마찬가지구만.

"자, 코 풀어. 흥!"
"흥!"
"...좀 진정됐니?"
"응... 훌쩍."
"휴우."

대강 울음은 멈췄고, 감정은 좀 가라앉은 모양이지만 아직 감정의 여운이 남은 건지 렌은 계속 훌쩍인다.
....이렇게 렌을 돌봐주는 것, 정말 오랜만이네. 렌은 이제 나와는 다른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가니까, 앞으로 이럴 일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끔은, 나쁘지만은 않네.

"어휴, 다 큰 여자가 막 울기나 하고... 우리 렌은 언제나 크려나."
"우우! 나 다 컸다구! 내가 천신인데 뭘 더 커!"
"그래도 렌은 아직 어린애 같은걸. 세상에 샤이렌이 이렇게 울보에 응석받이라니, 누가 알까."
".....뿐인걸."
"응?"
"아, 아니야."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이 거리에서 안 들릴 정도면 속으로 생각한 게 살짝 묻어나온 정도겠지.
뭐, 굳이 안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지도 않고....
계속 렌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데, 렌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언니."
"왜 그러니?"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같다."
"....그러네.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아버지라...
우리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얼마 뒤에 떠나가 버렸지.
분명히 이 세상을 조율하는 건 주신인 아버지의 몫일 텐데 말야...
하아, 주신은 어디로 가고 천신과 마신이 세상을 조율하는지. 그리고 아버지가 있다면....
....이 녀석을 만나기도 좀더 쉬울 것 같은데. 아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려나....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렌은 나를 포기하려 들지 않겠지. 그 때문에 일부러 렌이 쳐들어오는 것 말고는 내가 마계 쪽에서 쳐들어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는 거니까...
렌은 보고 싶지만, 그 여파로 렌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쉽사리 결정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뭐, 일단은 아버지가 돌아와야 고민할 가치라도 있으려나. 아버지라면 내가 마음 놓고 상담할 수 있는 유일한, 내 위에 존재하는 존재니까....

"......언니. 언니는 지금이랑 그때랑 뭐가 더 좋아?"
"글쎄...."

그거야 옛날이 좋다.
부하들? 쾌락?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고, 동생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물질적 부와 강력한 권능, 그리고 수많은 부하들. 그래, "부하들" 이다. 내 옆에 있을 존재도 내 위에 있을 존재도 없지.
하지만, 그것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렌도 딱히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닌 모양이다.
.....아마, 렌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나와 렌의 처지는 거의 비슷하니까. 절대자의 고독이란 건가, 하....
절로 입가에 쓴 미소가 맺힌다.

"...사랑해, 언니."
"...나도 널 사랑한단다. 내 동생 렌아."
"......."
"......."

그래, 사랑한다, 내 "동생"아.
네 마음은 알아. 넌 나를 언니가 아닌, 한 사람의 여자로 보고 있겠지.
하지만 내게 넌 애정의 상대가 아니야. 너는 내 동생, 소중하고 귀여운, 내 동생 샤이렌일 뿐....
....미안하다, 렌아.

잠시 속으로 외치는 동안, 렌이 벌떡 품 안에서 일어났다.

"자! 슬슬 나가봐야겠네. 우리 애들이 걱정할 거야. 언니도 얼른 돌아가 봐야지?"
"그래, 그렇지..."
"자! 얼른 나가 보자구! 언니, 다음에 또 봐~ 보고 싶으면 또 마계로 쳐들어갈 테니까. 다음엔 우리가 이길 꺼라구! 마계를 점령해 보여주겠어!"

....힘들구나?
힘찬 척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 넘치는 듯한 목소릴 내뱉지만, 정작 그 목소리에는 하나도 힘이 실려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는 장단을 맞춰 줘야겠지. 렌을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렌에게 화답한다.

"그래그래. 나도 우리 애들을 열심히 키워야겠구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다음에는 요리도 꼭 챙겨 와! 그럼 안녕!"

후다닥, 뛰어나가는 렌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아, 가는구나. 다음 만남은 대체 몇 십 년 뒤일까.
다음 만남에서는 과연 나에 대한 마음을 잊어 줄까. 그저 언니동생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아픈 사랑을... 그만두어 줄까.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 그래, 아직 모르는 일이지...
.....사랑한다, 렌아. 내 사랑하는 동생아....
쓴 고소를 베어 물며 몸을 일으킨다. 향하는 것은 마계로 통하는 문.

자아, 이제 휴식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렌의 일과, 렌을 걱정하는 언니 넨은 다음의 만남까지 잠시 접어 두자.
나는 모든 마족의 어머니, 마계의 주인 마신 카리넨이다.

당당한 기세로 마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다.

--------------------

총 3편으로 이루어진 "천마대전" 이 끝났습니다.
이건 솔직히 말하면 "영웅&마왕&악당"을 본후 생각해낸 건데, 원래 3인칭을 즐겨쓰는 제가 1인칭의 두명의 시점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써본 실험적 단편입니다.

일단 주제는 "슬픈 사랑"이었는데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배경 스토리르 모르시는 분은 이해가 안 되시려나...
19금을 기대하신 분께는 죄송하게 楹六?;

그래도 이제 다음에 올릴 건 19금이니까요.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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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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