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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1 596회 0건
원형 탁자가 놓인 대형 회의실 안에는 한 용우감독을 필두로 ‘그림자향기’를 제작할 작가와 스텝들이 첫 만남을 하고 있었다. 홍보 영상 제작을 앞두고 주연배우까지도 참석한 미팅이었다. 연락을 받은 소희도 긴장한 모습으로 참석해 있었다. 뒤늦게 소희의 상대배역을 맡을 강 준식이 미팅장소로 들어왔다.

이미 연극무대에서 뛰어난 연기로 시선을 받고 있는 그는 훤칠한 키에 뚜렷한 윤곽을 지닌 미남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그는 한국의 톰크루즈라는 명성을 받을 만큼 개성 있는 외모였다. 그의 외모에 감탄하는 사람들의 표정, 그를 칭송하며 제각기 수군거리는 소리에 소희는 주눅이 들었다.

“정말 잘 생겼는데.......”
“실제로 보니 더 멋있네.”
“연기력도 좋다면서.......”
“역시.........!”

강 준식은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소희는 그가 자신과 다른 로 사람처럼 느껴져 주눅이 들었다. 강 준식이 한 감독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소희는 문득 두 사람이 모두 남자배우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한 감독의 외모도 빠지지 않았다. 한 감독이 강 준식의 손을 잡고 와서 소희를 소개했다.

“두 사람은 초면이지! 이쪽은 같이 일하게 된 민 소희.”
“강 준식입니다. 아름다우시네요.”

“민 소희예요. 말씀은 들었습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같이 일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눈 강 준식과 민 소희는 나란히 앉았다. 비밀리에 갖는 미팅인데도 입구로 밀려든 언론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플래시가 터지며 불빛이 번쩍거리고 잠시 후 직원들이 기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한 감독이 일어나서 미팅 장소에 참석한 배우들과 스텝들을 소개했다. 한 감독의 옆에 앉아있는 작가와 카메라감독이 소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작에 관한 서류를 나누어 주는 동안 카메라 감독 곽 정호가 한 감독에게 귓속말을 했다.

“여자 주연으로는 연기력도 알 수없는 신인이라 모험 아닌가요?”
“그렇기도 하지만,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곽 감독이 보기에는 어때요?”
“글쎄요. 강렬한 눈빛과 독특한 이미지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귓속말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소곤거리는 대화는 마주하고 있는 소희에게도 들렸다. 긍정적으로 받아 드리는 곽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고 있는 소희가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리는 여자가 있었다. 배우 못지않은 미모를 지닌 그녀는 ‘그림자향기’의 각본을 맡고 있는 이 지애 작가였다. 이 지애가 소희를 향해 퉁명스런 말투를 던졌다.

“영화는 처음이라면서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으로 될 문제가 아니고. 우선 연기력이 문제니까.”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연극을 했다는데, 연극과 영화는 개념이 달라요.”
“.........!?”

이 지애 작가의 톡 쏘듯이 내뱉는 말에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희도 명성을 알고 있는 이 지애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녀의 소설은 대부분 베스트셀라였고 그녀가 각본 했던 영화는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을 정도로 실력파였다.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느라고 그녀는 서른 살이 넘도록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소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이 작가가 한 감독에게 귓속말을 했다.

“감독님! 너무 무모한 도전 아닌가요?”
“왜요.......!?”

“민 소희, 연기력도 알 수 없고, 너무 이미지가 강렬한 것 같아서요.”
“잘 보셨네. 그러니까 내가 캐스팅 한 거지.”

“하지만 왠지 너무 튀는 이미지 같아서, 내가 보긴 위험한데........다른 배우를 고려해 보는 것도.......”
“하하하.........! 이 작가 말도 참작을 하지.”

이 지애의 귓속말을 듣고 있는 소희는 매우 불쾌했다. 마치 듣기를 바라는 고의적인 말투! 물론 그녀가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지애의 말과 표정은 작가로서가 아니고, 여자로서 경쟁의식을 느낀 소희는 발끈 화가 치밀었다. 소희는 왠지 한 감독과 이 지애가 무척 친밀한 사이같이 느껴졌다. 어쨌든 소희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는 한 감독의 신임을 확고하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팅이 끝나고 한 감독이 소희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희는 한 감독이 이 지애의 말에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는 한 감독과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지애의 모습을 관심 있게 바라봤다. 그녀는 한 감독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이 지애의 미소에 질투를 느꼈다.

소희가 한 감독과 자리를 마주한 곳은 회의장 근처 건물의 커피숍이었다. 그녀는 다른 여배우를 고려해 보라는 이 지애 작가의 말을 참작한다고 했던 그의 마음을 알고 싶어 궁금했으나 자존심 때문에 섣불리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은 한 감독이 넌지시 말했다.

“소희 씨에게만 말하지만, 이제 머리 아픈 일만 남았네.”
“왜요?”

“촬영할 스튜디오와 세트를 설치할 장소가 문제가 돼서.......”
“그럼, 홍보 영상 제작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해진 소희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연기를 시작할 수 있는 꿈이 무너질 수 있다는 실망감이 엄습했다. 그녀로서는 미래가 걸린 일이기에 결코 물러 설수도 실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깊은 눈동자를 껌벅거린 한 감독이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까지 염려할 문제는 아니고.........”
“그렇다면.......?”

“홍보 영상은 N방송국 제작시스템을 이용하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크랭크인 하고나서 일정이 조금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왜요........!?”

“스타 제작소 사용 일정이 GS와 겹쳐져서.”
“.........!?”

소희는 남편의 기획사와 문제가 되었다는 말에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리 그녀의 미래가 달린 영화지만 한 감독도 해결하지 못한 일에 그녀가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양보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남편이 양보할 리도 없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던 한 감독이 쓴 웃음을 지며 푸념을 하는 말투를 흘렸다.

“제작소를 건립하던지, 아니면 GS가 제작을 포기 하지 않으면 계속 문제가 되겠는데........"
“다른....... 방법은 없나요?”

“하하~! 그러나 소희 씨는 염려하지 말아요.”
“감독님을 믿지만, 이 영화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건데.........”

한 감독을 바라보는 소희의 눈빛은 간절함이었다. 안심을 시키려는 한 감독의 말에도 그녀의 불안한 표정은 역력했다. 한 감독 역시 순탄치 않은 제작과정을 떠올리지만 영화를 성공시키고 싶은 욕구는 강렬했다. 어쩌면 이제 와서 그의 마음속에는 영화보다 그녀에 대한 집념이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그가 쑥스러워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난........! 내 동반자를 최고의 스타로 만든........세계적인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네! 무슨......!?”

소희는 예기치 않은 한 감독의 말에 당황하였다. 물론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감독과 여배우의 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언론의 시선을 받고 있는 감독이면서 미혼이고 그녀는 결혼한 여자이기에 받아 드릴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한 감독이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만큼........ 소희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소희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하지만, 저는........”

“압니다. 소희 씨가 홀로 서기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인생은 영화 같은 것이고, 나는 사랑을 시간과 사회적인 관념에 억매이고 싶지 않아요.”

소희는 한 감독의 표정이나 말에 진심이 담긴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한 감독이 싫지 않았고 더욱이나 그의 지원을 받아 연기자로서 미래를 보장받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가슴속에는 찬규의 모습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잠시 혼란함 틈에 한 감독은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드리고 있는지 헤아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한 감독이 말했다.

“너무 독단적인 내 감정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
“.........”
“홍보영상 각본부터 잘 익혀야 하는데........ ”

소희는 그때서야 정신이 들어 손가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손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각본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참. 각본을 한 감독님 사무실에 두고 왔네요.”
“그럼, 사무실로 갑시다.”

한 감독은 자신의 말에 대한 소희의 반응을 알 수 없으나 자신의 감정을 소희에게 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소희도 한 감독의 신임뿐만 아니라 감정의 고백을 들음으로서 이 지애 작가에게서 느꼈던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다. 한 감독이 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인 소희도 그를 따라 커피숍을 나왔다.

그들은 다시 한 감독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늦은 시간이라서 직원들이 퇴근한 사무실은 썰렁하고 어두웠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올린 한 감독이 뒤따라 들어오는 소희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알고 싶다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 소희가 탁자 위에 놓인 각본을 집어 들었다. 한 감독이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양 어깨를 슬며시 붙잡았다.

“소희 씨! 내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요? 사랑합니다.”
“저는 아직........”

소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감독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입술을 포갰다. 그의 감정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나 그녀로서는 예상치 못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아픔 때문인가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거절할 수 없었다. 더욱이나 그는 그녀의 꿈을 실현시켜 줄 남자였다.

소희는 아주버니 찬규와 또 다른 달콤함에 빠져 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어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나른해진 그녀의 손에 들렸던 각본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 감독은 입술을 허락하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 드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부둥켜안은 한 감독은 그녀의 혀를 입속으로 강하게 빨아 당겼다. 적막이 깃든 사무실 책상위에서 볼펜 하나가 떨어져 굴렀다. 그러나 감정의 포로가 된 그들의 귀에는 서로의 심장 뛰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한 감독의 사무실 유리창에 실루엣처럼 들어난 남자가 있었다. 유리창 틈바구니로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는 눈빛의 주인공은 박 찬규였다. 방송국 일로 미팅에 참석하지 못한 찬규는 혹시나 한 감독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들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모습에 현기증을 느낀 찬규는 책상을 붙들었다.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던 그는 그림자처럼 천천히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한 감독의 손이 소희의 둔부를 끌어 당겼다. 그녀는 하복부에 잇닿은 남성에게서 전달되는 뜨거움을 의식했다. 그때서야 그녀는 이성을 되찾고 그의 가슴에서 벗어났다. 뜨거운 숨결을 뿜어내는 그가 그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희 씨와 술 한 잔 하고 싶은데요?”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요.”

소희는 감정을 억누르며 바닥에 떨어진 각본을 들고 돌아섰다. 사무실 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본 그녀는 한 감독의 간절한 눈빛을 의식했다. 그녀는 다서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승용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한 감독의 갈망하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 감독을 만나고 돌아온 소희는 번민 속에 빠졌다. 사랑을 고백하는 한 감독의 말은 그녀의 연기에 대한 집념을 더욱 불태우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슴에 뿌리박힌 찬규의 열정으로 가득한 눈빛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변명하듯이 사랑이란 순간의 감정이라는 이기적인 사고에 빠져들었다.

사랑! 사랑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갈래의 방향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에게 남편의 형인 찬규의 사랑은 안개 속의 미로 같은 것이지만 한 감독의 사랑은 현실적이었다. 한 감독의 사랑을 선택하면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순탄한 미래를 보장 받을지도 모른다고 소희는 생각했다. 어떤 선택이든 그녀가 선택해야하는 책임은 불확실한 미래를 만들어준 남편이라고 변명을 해 본다.

상욱은 서울변두리 하남시 지역에 있는 아버지의 저택에 있었다. 남한산성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아버지 박 태환 회장의 저택은 대지 규모가 천 평이 넘고 아름드리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십여 평이 넘는 넓은 거실 소파에서 그는 부동산을 매입한 아버지의 말에 긴장하고 있었다.

“이번에 구입한 안양시 토지는 물류센터와 하역 창고를 건축할 것이다.”
“여주 임야 십 만평도 구입하셨다면서요?”

“그래! 골프장을 만들 생각인데, 형 앞으로 등기를 했다.”
“형 앞으로요.......!?”

상욱은 예상치 않던 아버지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사업에 손을 때고 있는 형보다 많이 그룹 일에 헌신하며 아버지의 충견 노릇을 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형보다 자신의 신뢰가 못하다는 말인가. 그의 심정을 알아채듯이 태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찬규를 사업에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네!”

마지못해 대답을 하지만 상욱의 속은 불편하기만 했다. 그는 그곳에 영화촬영 및 스튜디오를 갖춘 영화제작소를 건립하고 싶은 욕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야산으로 둘러싸인 여주 땅은 그의 욕구를 채우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했다.

“저는 그곳에 영화 제작소를 건립할 생각이었습니다.”
“스타 필름 영화제작소를 대여하기로 했다면서?”

“네. 하지만 한 프로덕션과 일정이 겹쳐서........”
“한 프로덕션!? 아! 한 용우 감독!”
“네.”
“제작하려는 영화가 한 감독과 비슷한 콘텐츠라고 했잖아?”

“네. 그러나 그쪽에 투자하려는 기업이 많지 않아 크게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경쟁하려면 힘들 거다. 한 감독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데, 처음부터 제작비도 많이 들 것이고 과욕은 금물이야.”

유리창 너머의 정원을 주시하며 녹차를 마시는 박 회장은 찬규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록 사업추진에 대한 근본적인 의견이 상반되어 장남을 사업에 배제시키고 있지만 박 회장의 장남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차남인 상욱은 그를 닮아 추진력은 있어도 무모하기도 하고 경솔했다. 그에 비해 감성적인 것이 때로는 흠이지만 섬세한 면이 돋보이는 찬규를 더 신뢰하고 있었다.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던 박 회장이 상욱에게 한마디 했다.

“넌, 네 아내와 어떻게 할 생각이니?”
“쉽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을 것 같지 않아서요.......그렇다고 이혼소송을 하면 언론이 시끄러울 것 같고........”

“직접 얘기 해 봤어? 위자료를 많이 요구해?”
“아뇨! 그런 얘기들은 안 해 봤습니다.”
“바보 같은 놈! 그것도 빨리 정리하지 못하고.”

박 회장은 파이프 담배의 재를 재떨이에 떨어내며 입맛을 다셨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를 외면하는 상욱은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는 것만 같아 울화가 치밀었다. 박 회장이 다시 상욱에게 물었다.

“요즘, 이 건우 회장 딸을 만나니?”
“가끔 만나지만, 아직은........”

상욱은 아버지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를 갖고 있는 건우 그룹 이 회장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회장을 대신해서 무남독녀인 이 하경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박 회장은 이 하경을 며느리로 받아 들여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백화점과 마트를 대영그룹으로 흡수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빨리 네 아내와 매듭져라! 난 건우 회장 딸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으니까.”
“네........”

상욱은 아내에 비해 뒤쳐지는 평범한 미모의 이 하경이 탐탁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는 상욱은 여러 가지 불만스러움을 꿀꺽 삼켜 버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 회장은 슬며시 일어나서 정원으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상욱은 소나무 가지를 전지하고 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욱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형을 더 신임하는 것 같아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아버지의 신임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물론 아내와의 이별마저도 감수하고 있는 그였다.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오락가락하던 그는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방 문이 열리고 그의 어머니 임 정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가려고? 저녁 먹고 가지, 그러니.”
“아뇨! 볼일이 있어서요.”

“너, 요즘 집에는 자주 들어가니? 불쌍한 네 아내를 잘 보살펴 줘야 한다.”
“.........”

상욱은 대답도 안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임 여사는 박 회장의 가족 중에서 그래도 소희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오직 재산 문제에 신경이 날카로운 상욱에게 소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김 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올라 차에 시동을 걸어 놓은 김 기사가 백미러로 뒷좌석에 몸을 뭍은 상욱을 바라봤다. 상욱은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행선지를 모르는 김 기사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음! 천호동.”

“천호동요!? 집을........ 말씀하시나요?”
“그래.”

김 기사는 상욱의 퉁명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큼 그가 집을 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형의 약점을 잡아서 아버지의 신임을 잃게 할 수 있을지 골똘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천호동 집 앞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상욱은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욱은 우선 형 찬규를 만나서 동태를 살펴 봐야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내가 있는 베란다와 위층을 올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건물 입구를 향했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민지의 보모 강 연경이 건물 입구로 나오고 있었다. 사십대에 가까워지는 여자이지만 젊었을 때는 제법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욱이 차 문을 열면서 김 기사에게 말했다.

“을지로 사무실에 가 있어.”
“..........!?”

상욱은 부리나케 승용차에서 내려섰다. 김 기사는 상욱의 돌연한 행동에 넋 놓고 있다가 승용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상욱은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걷고 있는 연경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의 출현에 연경은 흠칫 놀라며 눈동자를 크게 떴다. 상욱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민지 보모시죠? 저 아시겠어요?”
“아! 네. 사장님이 웬일로........”

연경은 자주 보지 못하지만 상욱이 민지의 작은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민지 아빠를 대신해서 그가 그룹의 총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렇기에 매일 같이 대하는 민지 아빠 찬규가 그녀에게 별다른 부담이 없었으나 그룹의 후계자인 그는 그녀가 감히 마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상욱은 아내를 의식하고 건물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위층의 찬규 집 베란다에는 굳게 닫힌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래층 베란다 창문에 벌어진 커튼이 흔들렸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소희가 그를 발견하고 커튼 뒤로 몸을 숨긴 것이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민지 보모 연경을 불러 세우는 남편의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그러지.......?’

소희는 남편이 연경을 만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책감으로 두려웠다. 혹시 아주버니와의 관계를 눈치 채고 의심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신을 감사하려는 것인지, 커튼 사이로 내려다보는 소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흔들리는 커튼을 놀려다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상욱이 부드러운 말투로 연경에게 말했다.

“고생이 많지요. 잠간 시간 좀 낼 수 있을까요?”
“아~! 네, 네.”

연경은 조금 당황스럽지만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현실과는 다르게 부와 권력을 가진 세상에서 사는 남자였다. 남편은 불구자가 되어 누워 있고 늙은 시부모와 홀로 되신 친정어머니와 친정 형제들까지 돌보고 있는 그녀는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궁핍한 생활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녀의 기대감이었다. 더욱이나 위로하듯이 다가서는 그의 친근감이 그녀의 감정을 여리게 했다.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연경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다행히 민지의 보모를 하면서 다른 보모들보다 많은 보수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많은 가족을 거느린 그녀의 생활비는 항상 부족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민지를 돌보는 시간외에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학력이 없지만 연경의 미모는 남자 취객들의 유혹을 받을 만했다. 그렇지만 남자들의 유혹에 휘말리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그녀는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려고 마지못해 남자들의 유혹에 이끌리기도 했다. 아니 오랫동안 독수공방하며 억제했던 성욕의 분출인지도 모른다.

상욱이 연경을 데리고 간 곳은 근처의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낯선 그녀는 위축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그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상욱은 형에 관한 약점들을 알아보려면 한 집안에 일하는 그녀가 제일 적합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상욱은 어떻게 연경을 이용해야할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만약에 거꾸로 자신의 계획이 형에게 탄로 난다면 오히려 그에게는 역효과가 되는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웨이터가 가져다 준 엽차를 훌쩍 거리고 마시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엄마가 없는 아이를 돌보기도 힘들고, 집안 살림까지 하려니 힘드시지요?”
“그렇지는 않아요. 파출부가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그래도 엄마가 없는 아이니 힘드시겠지요.”
“또, 작은 엄마가 도와주니까요.”

연경은 의외로 자신을 위로하려는 상욱의 말에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연경의 말에 상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내가 자주 형의 집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약점을 건드려 환심을 사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 형을 도울지 생각해서 시간을 내달라고 한 겁니다. 형이 생활에 힘들어 하지는 않나요?”
“별로 그런 것은 못 느끼겠어요.”

“아주머니 성함을 몰라서?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저, 강 연경이라고 해요.”

“생활이 힘들지 않으세요? 이를테면 보수가 적다든지.”
“보수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받고 있어요. 하지만........”
“네........!?”

연경은 자상하게 대하는 상욱이 고맙고 친근감을 느꼈다. 그러나 자존심상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들어내고 싶지 않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그룹의 막강한 권위를 가진 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상욱은 그녀가 결혼생활에 찌들은 만큼 농익은 몸매에 젊은 시절에는 꽤나 미인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그는 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을 재촉했다.

“괜찮으니, 어떤 말이라도 하세요?”
“저희 같은 사람이 보수만으로 넉넉한 생활비가 되겠어요.”

“그러시겠지요. 보기보다 미인이시네. 성실하고 매력 있어 보이고요.”
“제가 무슨........!”

상욱의 칭찬에 연경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은 앞가슴을 여미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결혼전만해도 여러 남자에게 구애를 받을 만큼 곱상한 미모였다. 그녀는 앞가슴을 향한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 앞가슴을 여미는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많은 여자를 상대해 본 상욱은 여자의 표정 변화에 민감했다.

“아뇨! 영화 조연급 배우들 중에는 연경 씨만도 못한 여자들이 많아요. 연경 씨 정도면 우리 기획사의 조연으로 캐스팅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정말 이세요?”

"그럼요. 괜찮으시다면 술 한 잔 하실래요?”
“저.......조금밖에 못 마셔요.”
“마실 줄은 아시죠?”
“네........”

머뭇거리던 연경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사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상욱의 말투로 보아 그녀는 무엇인가 희망적인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휴대폰을 들고 일어선 그녀는 웨이터를 불러 술과 안주를 시키는 상욱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죄송한데요.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아! 그러세요.”

상욱은 생각보다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그녀이기에 흡족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화장실 표지판이 있는 복도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궁리를 하는 그가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한 그녀가 농익은 둔부를 감싸고 있는 스커트 자락을 찰랑거리며 복도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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