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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선을 넘은 것은 누나 쪽이었다 - 3부8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5:25 788회 0건
이번 공부가 많은 도움이 됐는지 지은이의 성적은 문과에서 50등 이내에 들어갔다. 무려 40등 이상을 올렸다. 이과와 합쳐도 60등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나는 이번에 전교에서 1등을 했다.

시험이 끝나 결과도 나왔지만, 나와 지은이는 여전히 방과후에 함게 공부를 한다. 기말고사는 결국 대학이란 목표를 위한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난 당일과 다음날은 머리도 식힐 겸 쉬었지만, 그 뒤로는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지은이나 누나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가벼운 키스 외에는 별다른 스킨십은 일절 하지 않았다. 윤리도덕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아직 미성년자인데, 가족인데, 라는 그런 거부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선을 넘어버린 나에게는 이제 희미한 티끌 정도의 저항감밖에 없었다. 그저, 계속 그런 것에 빠져들다간 헤어 나오지 못 할까 두려웠다. 확실히 방심했다간 야한 생각밖에 안 했다. 다른 때보다 일부러 공부에 시간을 더 투자하며 그런 생각을 애써 지웠다.

“운하야, 오늘 나 친구랑 약속이 있거든. 그러니까 오늘만 공부 쉬어도 될까?”
“알았어.”

지은이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동안 거의 매일 나와 만나느라 다른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을 거다. 오히려 시간을 너무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가방을 챙기고, 교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여름방학이 일주일밖에 안 남아서 보충 및 야간자율학습이 없다. 그래서 다른 녀석들도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간다. 대신 방학을 하자마자 다음날부터 등교를 해야 한다. 불쌍한 녀석들. 물론 난 방

만날 방과후에는 지은이네 집에 가거나, 우리 집에 와서 함께 공부를 했기 때문에 최근 혼자 하교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어색했다. 분명 혼자 있는 날이 훨씬 많았는데, 어느새 누구와 같이 있는 것에 익숙해졌나보다.

“왔어, 운하야?”
“어, 누나.”

요즘 누나는 학원을 다니느라 저녁이 되어서 오곤 하는데 오늘은 어쩐지 일찍 왔다. 없을 시간에 있으니 의아했다.

“오늘은 학원 쉬기로 했어.”
“어, 왜? 혹시 아파?”
“아니.”

내 걱정스러운 말에 누나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지 들떠 보인다.

“운하야 얼른 일로와.”

내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누나는 내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런 누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저항 없이 끌려가주었다.

“이건.”

누나에게 부엌까지 끌려갔다. 식탁 위에 웬 케이크에 초가 꽂혀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누나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가 끝나고 내가 촛불을 끄자, 누나가 폭죽을 터뜨렸다. 누나는 옛날부터 폭죽 터뜨리는 걸 참 좋아했다. 그래서 늘 내 폭죽까지 같이 터뜨렸다.

“여기, 생일 선물이야.”
“고마워, 누나.”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누나에게 축하를 받기 전까지 생일이란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저께인가 곧 내 생일이네, 라고 생각한 뒤로는 머릿속에 생일은커녕 그냥 ‘생’이란 말이 들어가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만들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론, 제대로 된 생일을 맞은 적이 없다. 부모님의 기일이 내 생일 일주일 후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면 침울해졌기 생일은 그저 지나가는 다른 날과 같았다. 누군가 내가 태어난 날을 기억해준다는 건 정말 기쁘다. 오랜만에 그걸 깨달았다.

누나를 끌어안았다.

“엄마!”
“킥킥.”

갑자기 끌어 안겨서 놀랐는지 누나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웃음이 나왔다. 누나가 내 웃음에 심통이 났는지 가볍게 내 가슴을 때렸다. 아담한 체구의 누나가 내 품에 쏙 안겼다. 요새 내 키가 더 큰 것 같다. 누나가 내가 기억하는 눈높이보다 더 아래에 있다. 누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주었다.

“고마워 누나.”
“응…….”
“사랑해.”
“으응…….”

누나의 얼굴이 붉다. 더운 날에 끌어안아서 그런가보다. 기상청에서 100년 동안 유례없던 더위가 올 거라고 했는데, 확실히 덥긴 덥다. 누나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정말로 고마워.”
“응.”

그리곤 누나를 안았던 손을 풀었다.

“어, 어?”

어지럼증이 덥쳐 왔다. 누나를 보고 있던 내 시선이 어느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누나가 나를 밀어 넘어뜨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체구가 작아도 방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힘껏 밀어버리니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쓰러진 내 위에 누나가 올라탔다. 천장만 보이던 내 시야에 누나의 얼굴이 잡혔다.

누나가 울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누나.”
“나, 계속 그런 생각만 들고, 계속 끌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나, 야한 앤가?”
“누나.”
“그렇게 부르지 마!”

누나가 비명 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나 약 올리는 거야?”

누나가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내리 눌렀다.

“이제 나 싫은 거야?”
“아니야, 누나. 좋아해.”
“거짓말. 근데 왜. 왜 키스해주지 않아? 왜 만져주지 않아?”
“그건…….”
“누나니까? 가족이라서? 무서우니까?”
“아니야.”

아니다. 단지, 만약에 원하는대로 해버리면,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닌가? 정말로 그런 이유인가? 핑계일 뿐 아닌가? 욕망에 져서 저질러 버리고는 갑자기 두려워져 도망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누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날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정말 나 좋아해?”

누나가 다시 물어보았다.

“응.”
“사랑해?”
“응. 정말로 사랑해.”
“역시 못 믿겠어. 그러니까.”

누나가 서서히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증명해봐.”

누나가 내게 키스를 했을 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동안 자제했던 만큼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저항 없이 누나에게 빠져들었다. 누나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몸을 경직시켰을 때도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누나에게 키스를 갈구했다.

“이게, 뭐야?”

누나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 들리는 곳을 확인했다. 현관문이 소리 없이 열려 있었고, 현관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무서워서 그게 누군지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확인할 필요도 없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운하야? 은하 언니?”

지은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해명을 요구하는 것 같았지만, 나도 누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건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은이 천천히 뒷걸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운하야, 생일 축하해.”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현관문이 조용히 닫혔다. 누나가 내 위에서 내려왔다. 몸을 일으킨 나는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기자기한 포장지에 분홍 리본이 묶여있는 네모난 상자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상자를 집어 올렸다. 두 손바닥에 꽉 차는 크기다. 상자 위에는 생일카드가 리본에 함께 묶여있었다. 카드 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Happy Birthday to 운하

상자는 감히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방으로 가져갔다. 누나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이때의 나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내 방 침대에 누웠다.

“결국 이렇게 됐네.”

나는 웃었다.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이 비정상적인 일상이 끝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 유지된 것만 해도 기적이다. 기적은 오래가지 못하니까 기적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건 전부 내가 자초한 거다. 내가 미적지근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지은이의 생일축하 메시지가 문자로 와 있었다. 문자가 온 것은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줄 생각이었나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자 때문에 핸드폰을 연 게 아니다. 핸드폰에서 저장된 번호목록을 뒤졌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삼촌.”
『어, 운하냐? 이거 얼마만에 듣는 목소리냐!』

지난번에 삼촌을 뵌 뒤로 한 번도 못 다. 많이 바쁘셨던 모양이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봤던 날도 아주 바빴을지 모른다.

“그냥, 전화해봤어요.”
『거짓말.』
“예, 거짓말이에요.”
『운하 네가 그냥 전화한 거였으면 가장 먼저 지금 바쁘냐고 물어봤겠지.』

정확하다. 그냥 용무없이 전화했다면 삼촌이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닌지부터 알아봤을 거다. 지금은 삼촌이 바쁘든 안 바쁘든 물어보고 싶은게 있다.

“삼촌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물어봐.』
“삼촌은 우리 엄마 좋아했어요?”
『…….』

한동안 핸드폰 넘어 삼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 난 너희 엄마, 정희 누나를 좋아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삼촌이 내 질문에 대답해줄 줄 알았다. 왜냐하면 삼촌은 자신의 감정에 거짓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하나만 더 질문해도 돼요?”
『이번엔 또 뭔데? 무섭다.』

사실 앞의 질문은 다음 질문을 꺼내기 위해 했던 질문이다.

“그럼 다음 질문할게요. 엄마는 삼촌을 좋아했어요?”
『…….』

침묵이 길었다.

몇 분이 지나도록 삼촌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난 계속 기다렸다. 이윽고, 삼촌이 입을 열었다.

『한때는 누나와 서로 사랑하던 때도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럴 줄 몰랐다. 의외다. 짝사랑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걸 알았다고 해서, 무언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난 알고 싶었다. 엄마는, 아빠는, 삼촌은 과연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을까. 그저 그것을 조금 엿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삼촌의 전화를 끊고, 나는 방에서 나왔다. 누나는 어느새 거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방으로 가 있는 것 같다. 나는 현관에서 얼른 신발을 신고, 집을 나왔다. 선선한 집에 있다 나오니 바깥 공기가 후끈하고 습했다. 그러나 날씨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지금 지은이는 어디에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이 잡히는 곳이 없다. 좋아한다고 해놓고, 이 정도로 내 감정은 가벼웠던 거다.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할 말이 없다. 무작정 걸었다. 예상이 가는 곳이 없으니, 그동안 지은이와 갔던 곳을 하나하나 돌아보기로 했다. 지은이는 이곳저곳 산책하는 걸 좋아해서 이 동네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나도 덩달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가며 걸었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이 꺼져있다.

나는 왜 굳이 지은이를 찾으려고 하는 걸까.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지은이는 오늘 봤던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여기서 나도 지은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지은이를 찾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다.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그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아무런 신념 없이 행동할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냥’ 지은이를 찾는다.

나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지은이와 몇 번 갔던 라이브 카페를 찾아갔지만, 역시 없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 부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카페에서 나왔다.

시내로 나갈까 생각했지만, 거긴 사람도 많고 복잡해서 마지막 후보지로 정해뒀다. 내가 갈 만한 곳은 모두 가보았다. 혹시나 놓친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은 지은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지은이가 있을 만한 곳은 과연 또 어디에 있을까.

시계를 보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이제 하늘이 조금씩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한다. 뜨거웠던 태양이 많이 약해졌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5시가 안 됐으니까, 거의 2시간가량을 땡볕에서 돌아다닌 셈이다. 덕분에 내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다. 머리도 어지러운 게 일사병 직전인 것 같다.

결국 해가 거의 다 저물었다. 좀 전에 지나온 편의점에서 물이라도 하나 사서 마실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몸에 힘이 없는 게 가벼운 탈수증상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운동을 해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붙여놓지 않았으면 필시 쓰러졌을 것이다.

난 해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건물복도를 건넜다. 여긴 학교다. 평소라면 사람이 있었겠지만, 오늘은 보충도 야간자율학습도 없어서 다들 집에 돌아갔다. 선생님들도 모두 퇴근한 모양이다. 학교는 온갖 공포 이야기의 주된 장소다보니, 확실히 저녁엔 음침하고 무섭다. 걷는 소리도 터벅터벅 울려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무서워하고 있을 정신이 없다.

계단을 올랐다.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모르는 계단인데, 아무도 없는 어두운 학교는 느낌이 달랐다. 계속 계단을 올라,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옥상 입구가 있는, 안 쓰는 책상이나 의자를 쌓아두는 곳. 불량학생들이 몰래 담배를 피우러 올라오곤 하는 곳.

“찾았네.”

눈앞에 지은이가 있었다.

지은이를 찾을 때, 두 가지 가정을 했다. 지은이가 정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어 할 경우, 그리고 내가 찾아주길 바랄 경우. 처음에는 첫 번째를 가정하고 돌아다녔다. 힘들었다. 무작위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소득도 없이 힘만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가정으로 생각을 옮겼다. 지은이가 내가 찾아주기를 바란다면. 그렇다면 지은이는 어디로 갈까. 지은이는 분명 아래의 몇 가지 조건을 갖춘 곳을 찾을 것이다.

첫째로 사람이 없는 곳이다. 지은이는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가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 안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당황스러운 일이 있으면 일단 혼자 있을 곳을 찾는다. 둘째는 다른 사람이 찾아올 걱정이 없는 곳이다. 첫째와 마찬가지로, 계속 혼자 있을 곳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나에게도 지은이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내가 찾길 바란다면, 나에게도 지은이에게도 익숙한 곳을 선택할 게 분명하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유일한 곳은 학교뿐이다. 오늘 마침 보충이나 야자도 없어서 전부 일찍 하교했다. 학교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기숙생활을 하는 녀석들밖에 없다. 하지만 기숙사도 다른 건물에 있기에 엄밀히 따져 이 건물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니까 지은이는 분명히 학교에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왔네.”

지은이가 태연히 말했다.

“올 줄 알았어?”
“응.”
“거짓말.”
“어떻게 알았어?”

그냥 찍었다.

지은이는 처음 나에게 고백했던 날처럼 그 자리에 서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 안 올 줄 알았어. 아예 찾을 생각을 안 하거나, 찾으러 나왔어도 여기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지은이가 말했다. 지은이의 얼굴은 어두워서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건 지은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찾아오는 정성만큼은 나를 좋아했다고 멋대로 생각해도 되겠지?”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여기서 정말로 좋아했다고 말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은하 언니랑은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

대답할 수 없었다. 너와 사귀고 얼마 안 돼서, 라고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그랬어?”
“…….”
“얼마 안 됐나 보네.”
“…….”
“나랑 사귀기 전부터 그런 거야?”
“…….”
“사귀고 나서구나.”

어둠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지은이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 표정도 보이지 않겠지. 다행이다.

“날 속였어.”
“…….”

지은이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두렵다. 지은이의 표정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웠지만, 여전히 지은이의 표정은 보지 못 했다. 내가 고개를 숙여버렸기 때문이다. 지은이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다.

“날 속였어!”

난 계속 지은이를 속여 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선택도 미뤄왔다. 난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의 최후는 이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 흔한 “미안해.”라는 말도 꺼내지 못 했다. 입을 열기가 너무 무서웠다. 입을 여는 순간 변명을 쏟아낼 것 같았다.

지은이는 갔다. 지은이를 보기 전까지는 이런 저런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지은이 앞에 서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지은이가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난 어둠뿐인 학교에서 빠져나왔다. 곧장 집으로 왔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직도 삼촌과 마셨던 술이 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난 어느새 현관문을 열고 집에 발을 딛고 있었다. 집은 아주 어두웠다.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불이라곤 베란다를 통해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밖에 없다.

나는 곧장 누나 방으로 향했다. 누나 방도 불이 꺼져있다. 혹시 누나 외출한 걸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렴풋이 침대 위에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어두웠지만, 작은 체구를 보아 누나가 확실하다. 누나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옆으로 누워있다.

“누나, 자?”
“아니.”

누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전히 등을 보인 자세다.

“일찍 들어왔네. 안 들어올 줄 알았어.”

누나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 원래는 낭랑하고 밝은 목소리인데, 지금은 건조하고 탁하다.

“누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할 말?”

누나는 여전히 나에게 등올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나 역시 지은이가 좋아.”
“응. 그래.”
“미안해.”

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이제 잘래.”

그리고 누나는 침대에 누웠다.

나는 누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이제 됐다. 된 거다. 이제 고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없다. 모든 게 끝났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울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사람들을 울린 건 난데. 내가 상처 입혀놓고. 나는, 왜, 지금 울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과연 내 선택을 옳은가,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을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르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묻고 싶다. 과연 제 선택은 옳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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