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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7 881회 0건
그 날 저녁 우리 집에선 훈훈한 봄바람과 함께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그 경사스러운 조짐의 중심엔 얹혀사는 객식구처럼 굴면서 좀처럼 정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던 유리 누나가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엄마 곁에서 저녁준비를 거드는.... 뭐, 어찌 보면 미약한 출발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진짜 김유리를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청신호를 대신하기엔 그만한 것도 없었다. 이 전례가 없던 누나의 부엌일은 가사분담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소통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남다른 것이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새로운 이정표였고 빙하기를 벗어던진 해빙기의 신호와도 일맥상통했다. 올해 고1인 유진이만은 누나가 이상하다며 조용히 1인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전국시대의 개막을 알리듯 저녁식사 풍경도 오색빛깔이었다. 밥을 삼키면서까지 내내 생글거리시는 엄마와 영문을 모르고 엄마만 게슴츠레 쳐다보시는 아버지. 자기가 몰고 온 파도위에서 새침하게 밥만 탐하던 누나와 그런 누나를 관찰하듯 힐끔거리는 유진이. 이 광경을 두루 살피며 구경에 여념이 없던 나는 춘추5패를 떠올리며 비교해보고 있었다. 다른 가족은 모르겠고, 엄마가 이 과업의 선봉장인 것은 확실하니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였던 제의 환공에 어울렸고, 유리 누나는 19년간 유랑하며 떠돌다 고국으로 돌아온 진의 문공에 제격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공은 가족에게 핍박받았지만 누나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다.

표정까지는 아직 무린지 유리 누나는 태연하게 감추고 있었지만, 누나 쪽을 탐구하던 유진이 옆구리에 눈치를 주면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우릴 보며 몰래 웃던 누나의 기온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 표정들도 이제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초읽기에 불과하겠지.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서는 장녀를 보시고 휘둥그레진 아버지 용안을 사진으로 담아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애석하기만 했다.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흐뭇한 기분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노크소리가 들린 건 시계바늘이 열한 시를 막 기어 넘고 있을 때였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오늘의 히어로. 김유리양이었다.

“들어가도 돼?”
“아이~ 그럼. 대환영이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개선문을 통과하는 누나를 위해 박수라도 처 줄려고 했더니.... 복장이 그럴 복장이 아니시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잠옷을 입고 방으로 들어서는데 그 허술함에 잠시 얼떨떨해져서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있던 책상 가까운 쪽으로 다가오자 함께 오는 상큼한 냄새가 코끝을 적셔왔다. 무슨 냄새기에 이렇게 좋은 걸까? 누나는 거부반응 없이 익숙하게도 침대에 걸터앉으며 책상 위를 훑어본다.

하얀 피부를 가린 잠옷 천을 밀어내고 있는 가슴윤곽. 속옷을 벗었는지 솟아있는 정상이 뾰족해 보이고, 올려놓은 손에 눌려서 드러나는 허벅지의 매끈한 곡선까지 더해져서 시선을 자극해왔다. 내가 벌써 이만큼 편한 걸까? 남동생 손에 발가벗겨지고 비록 수건이긴 했지만 자기 몸 여기저기가 더듬어졌던 그 날의 수치심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그때 내 얘기를 누나가 곧이들어 주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 사이엔 그만한 믿음이 없었을 텐데도 누나는 내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이렇게 담백한 차림새로 허물없이 나를 대하는 누나의 순수한 태도가 달리 보면 신뢰감처럼 느껴져서 뿌듯한 희열을 안겨준다. 그러니 그런 누나를 대상으로 어찌 감히 다른 엉큼한 생각을 할 수 있으랴.

“내가 방해하는 거 아냐?”
“전혀~”

푸석하게 내뱉던 얼마 전과 달리 누나만의 낮은 어조와 차분한 말투는 이제 그윽한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얼굴에 도는 생기가 보태져서 한결 더 뽀얗고 부드러운 표정은 또 어떻고...

“많이 바쁘니?”
“바쁘긴, 병아리 주제에.”

“리포트 쓰는구나. 잘되?”
“어. 그럭저럭. 누나는 어때?”

“나야 뭐....”
“누나가 더 바쁠 것 같은데?”

“아니야. 실습이 좀 늘어서 그렇지, 이젠 익숙해서.... 4학년이잖아.”
“누나!”

“응?”
“오늘 보기 좋더라.”

“.... 그랬니?”

쑥스러웠는지 고개까지 숙이고 허벅지를 문지르는 유리 누나. 그동안 모나게 굴었던 부위를 마모시키려는 손짓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차라리 화내고 승질이라도 부리는 못된 성격이었다면 미운 정이라도 들었을 텐데, 누나는 정말이지 말도 붙이기 어렵게 자신을 닫고 살았었다. 그랬던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는데.... 부족함을 인정하면 비로소 강해진다는 말처럼 단단한 얼음 같았던 김유리보다 감정에 정직해져서 내 눈앞에 있는 지금의 누나가 훨씬 더 강하고 성숙해져 보였다.

“좀 이상해 보이지 않았을까?”
“뭐가 이상해? 딸이 엄마 거드는데.”

“그래도 갑자기 그러면....”
“자신감을 가져 누나!”

“.... 후~ 그래야겠지?”
“그러엄~! 업어주고 싶더라니까?”

“흣~ 말이라도 고맙네요?”
“그럼, 고마운 말 하나 더 해줄까?”

“응?”
“누나, 인동초라는 꽃 알아?”

“인동초? 음.... 그 겨울에도 잎이 얼지 않는다는 그거? 그건 왜?”
“으응. 아까 누나 보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데? 둘이 닮은 거 같아서.”

보통은 어디가 닮았는지 곧바로 되묻기 십상인데, 김유리는 보통에 머물진 않는가 보다. 공통점을 찾아서 누나 눈꺼풀이 반쯤 감겨 내려가며 초점이 흐려졌다. 잠시 그러고 있더니 피식 웃는데 말뜻을 파악한 모양이다. 다소곳하게 모았던 손으로 잠옷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미루고 있었다. 너무 로맨틱하게 칭찬을 해버렸나? 물론 혹독한 겨울을 나면서도 마르지 않는 인동초에 빗대어 생각한 건 사실이지만.... 내 다음 대사는 그게 아닌데.... 저 소녀 같은 표정을 계속 유지해 주려나 하고 효과를 궁금해 하는데 입술이 열린다.

“너무 띄워주는 거 같네. 저녁 한번 거든 거 가지고....”
“응? 무슨 소리야?”

“어?”
“뭘 너무 띄워줘?”

“.....”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 무슨?”

“난 그냥 붉은 인동초가 누나 입술이랑 닮아서 그런 건데, 이게 그렇게 띄워준 거야?”

“뭐? 붉은.... 입술?”
“왜 그래? 어디가 닮은 줄 알았는데?”

“하아~~! 우진이 너.... 너 이리와.!”
“왜, 왜~?”

베개를 들어 올리고는 때릴 것처럼 겁을 주기에 나도 곧 죽을 놈처럼 책상에 납작 엎드려 비는 시늉을 해주었다. 많이 민망했는지 얼굴에 진한 노을이 내려 앉아 있었고, 당연히 안 때릴 거라는 확신도 있었지만 이럴 땐 꿍짝을 맞춰줘야 시너지 효과가 있는 법이다.... 맞는다 한들 솜 망치 수준일 테고.... 근데 비행기를 잘못 탄 것 까지는 내 책임이 아닌 것 같은데.... 흐흐.

한편의 콩트가 지나간 자리에 길게 콧바람을 내면서 뿔난 척 앉아 있는 유리 누나, 그러나 눈치는 그게 아니었다. 베개를 내려놓고 이번엔 매섭게 흘겨보고 싶은데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나 보다. 눈이랑 입이 바르르 떨리며 자꾸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좀 가벼워졌는지 들떠 보이는 얼굴로 보송보송한 미소를 흘려주시는데 내가 녹는다. 녹아.

“미안~미안~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웬수는 꼭 갚을 거야. 두고 봐. 너~”
“에이~ 농담이래두~ 누나가 첨에 생각한 거, 그거 맞아. 진짜야!”

“너 지금 아부하는 거지?”
“어! 나 지금 아부하는 거야.”

“김우진! 너 진짜~아”
“잠깐, 잠깐! 누나 그럼 남존여비라는 말도 알아?”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더라고. 누나도 그럴 것 같은데?”

“치, 여자보다 남자가 높다는 말이잖아. 근데 너... 왜 말 돌려?”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거봐~ 역시 누나도 잘못 알고 있네. 바로잡아 줄 테니까 운 좀 띄워 줄래?”

“뭐? 남존여비?”
“응.”

“너~ 또 무슨 이상한 소리하려고 그러지?”
“그럼 베개 들고 운 띄워주면 되잖아?”

“이번에도 엉뚱한 소리하면 진짜 각오해~?
“그래. 그래.”

“알았어. 남!”
“음! 음! 남자의”

“존!”
“존재는”

“여!”
“여자의”

“비?”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풉~”
“난 내 존재 목적에 충실한 죄 밖에 없다고~”

“엉뚱한 소리 맞잖아~”
“아니 이게 왜 엉뚱한 소리야?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건데.”

“나 참... 후훗”
“아까 엄마랑 아버지 얼굴 봤지? 하하하~”

“푸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웃어대면서 굽어진 등이 들썩거려댄다.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더니 어디서 저렇게 즐거운 소리를 찾아가지고 왔는지.... 그런 모습을 눈에 담고 있자니 가슴이 스멀스멀 뜨거워지는 게, 그 기운이 수증기라도 만드는지 눈시울까지 슬쩍 젖어 온다. 사나이 가슴이 뜨거우면 눈이 젖는구나. 천하를 논할 때 누군가 그랬었다. 울지 않는 앵무새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그 말을 새기고 보니 지금껏 엄마가 그러고 계셨던 거다. 나는 그저 작은 계기였을 뿐이다.

“우진아.”
“응!”

“너 혹시.... 일요일에 시간 좀 있니?”
“일요일이라.... 이거 어떡하지? 나 일요일에 시간 많은데?”

“어? 흣~”
“왜?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저기.... 유진이 데리고...”
“데리고?”

“.... 놀러 갈래?”
“셋이서?”

“응.”
“이야~ 그거 좋은데.... 유진이한테도 얘기했어?”

“너 곧 시험인데 괜찮아?”
“나 곧 시험이라서 괜찮아! 2주나 남았는데 뭐~? 얘기 못했구나?”

“아직....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얘기 할래?”
“왜? 누나가 하지?”

“내가 말하면.... 싫어할까봐....”

저렇게 자꾸 문지르다 잠옷도, 지문도 헐겠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한 누나와 유진이 사이에 감정의 앙금 같은 게 따로 존재할 일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정작 누나가 자신이 없는 건 거절보다 마주대할 태도가 막막해서다. 그건 무관심으로 일관해 온 누나의 개인주의가 누군가와 마찰을 빚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기 때문이다. 유진이는 원체가 밝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저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 더해 어리고 서툴 뿐이지... 누나가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들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기왕에 같이 놀러가려면 조금이라도 서먹한 감정을 미리 털어내고 단란해져서 가는 편이 서로에게도 좋을 터였다. 이건 꼭 다리를 놓아줘야 할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그럴 거 같애.”

“아닐지도 모르잖아?”
“.... 내가 한 게 있잖아.”

“누나가 뭘 어쨌는데?”
“......”

“흐음.... 누나!
무어라는 양반이 말했지. 인생의 어려움은 선택에 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얘기했어. 너는 자유다. 스스로 선택하라.
노만 메일러가 정리했지. 역사를 바꾸는 것은 말보다 사람들의 행동이다.
김우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누나가 얘기하면 유진이가 정~말 기뻐할 거라고.”
“.... 그래도 그냥 네가 얘ㄱ”

“아냐! 아냐! 나만 믿어 누나. 유진이 다른 약속 잡기 전에 얼른 말해야지? 그리고 걔 또 팬티 벗고 자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들어갔다간 내일 아침 한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르고... 거 왜 있잖아!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막 한강에서 수습된 사체의 신원을 확인한 결ㄱ”

“야아~ 그런 소릴 해?”
“좀 심했나? 그럼 뭐 응급실로 해두고. 자! 자! 이러고 있지 말고 쇠뿔도 당김에 빼랬다고, 가서 유진이 엉덩이에 이불도 좀 덮어 주고, 그러라고. 응?”

“우진아~ ....”
“자! 일어나봐.”

다가가서 누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가 거둬줄 손길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여서 그랬나? 그 하얀 볼 위에 발그레한 홍조가 꼭 그것 같아 보였다. 오늘 하루 누나는 가족들이 거부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면서, 또 그걸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충분히 가상한 용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스스로 거부하고 주변을 밀어내며 살았던 당사자로써 자기만 내켜서 하는 염치없는 짓이라고 누나 자신인들 왜 갈등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무슨 일이든 시작은 항상 어렵고 고단하기 나름이다. 그러니 누나가 보이고 있는 용기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넘어야 될 사람처럼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막연한 불안이 애처롭고 안타까워 보였다. 문득,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걸, 내가 누나를 정말로 지지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때로 말이란 건 표현의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이번엔 다시 내 차례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엉뚱한 소리로 빙빙 돌려 내뱉는 버릇은 어디 가지 않는다.

“누나. 헤모글로빈은 심장이랑 이.. 뇌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주거든?”
“....어?”

“이.. 신체접촉을 하면 헤모글로빈이 많이 생성된데. 신선한 산소가 사람을 안정시켜주는 건 알지?
그게... 전문용어로 치료적 접촉이라던가... 지금 누나한테도 그 신선한 산소가 좀 필요해 보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격려차원의 포옹 한번 해주고 싶다는 소리지. 자~”

십자가처럼 팔을 벌렸다. 말투가 투박하고 거칠어 보여서 분위기는 꽝이었지만, 누나랑 포옹하면서 무드 잡을 것까진 없으니까. 이건 정말 순수하게 격려 차원이었고 하늘을 우러러 사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다. 다소 느끼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어색하긴 했지만 창피하지도 않았다. 내가 엉뚱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아는데.... 하지만 누나는 그런 내색 없이 가만히 서서 내 가슴만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안에 든 진심의 크기라도 확인하는 걸까? 그저 난 담담한 눈으로 그런 누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음에 꺼릴 것이 없었으니까.... 거절해도 괜찮았다. 그게 내 진심을 밀어내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이다. 마음만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유리 누나 몸이 흔들렸다. 그러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은 발에 뒤따라온 상체가 살며시 내 가슴에 포개졌다. 향긋한 샴푸냄새를 맡을 즈음엔 누나의 두 팔이 아기를 안 듯 내 등을 둘러왔고, 어깨에 누나 얼굴이 바깥쪽을 보며 기대어졌다. 순간 가슴이 타오르듯 뭉클하고 한없이 고마웠다. 노력해 주는 누나가 고마웠고,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누나가 뭉클했다. 조심스럽지만 부드럽게 누나 어깨 뒤를 감싸 안았다. 억세게 안고 있진 않았지만 우리 몸은 완전히 밀착해 있었다. 품에 안고 보니 바람도 싣고 갈 정도로 가냘프고 작게 느껴지는 유리 누나. 가슴이 약하게 짓눌려 있었지만 내 신경은 그 곳에 쏠리지 않았다. 동생 품안에 자신을 맡기고 위로받는 사람 몸에서 자극을 받을 만큼 추잡한 내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내 누이였다.

몇 초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나 팔이 스르르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나도 팔을 거둬들였다. 세상 둘도 없이 가까워진 기분. 누나를 위한 일이면 나를 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감상에 온 몸이 젖어드는 느낌. 누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고 아직도 볼이 발그레했다. 이 여세를 몰아서 다시 누나 손을 잡고 문을 열고 나갔다. 유진이 방문 앞까지 오는 동안 누나는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사뭇 긴장돼 보이긴 했지만 아까 같은 두려운 빛은 아닌 듯 했다. 손잡이에 누나 손을 얹어주면서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며 작게 말했다.

“결말이 비극이면 위로 받으러 오시고, 희극이면 가서 달게 주무셔.”
“......”

“빠이띵~”

문고리와 악수하고 있는 누나를 뒤로하고 의젓하게 방으로 돌아왔지만 가슴은 어느새 방망이질치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후다닥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복도의 소음에 촉각을 곤두 세웠다. 이윽고 들렸던 소리의 근원지가 누나 방문인지 유진이 방문인지는 분간해내기 어려웠다.









“얘~ 우진아! 김우진!!!”
“.... 으응?”

“아니, 무슨 애가 아침 먹고 또 이렇게 자는 거야?”
“음냐... 잠은 별세계야... 음냐.... 감촉의 천국보다 더한 별세계.... 음냐...”

“잠꼬대 고만 하고 얼른 일어나. 전화 받어!”
“아이..헉슬리가.. 그랬단 말야... 으흥.... 좀 봐줘 엄마, 나 새벽까지 리포ㅌ”

“헉이고 뭐고, 전화 받으래두? 자! 동철이랜다.”

포옹의 힘이었는지 어제 저녁 유리 누나는 위로받으러 오지 않았다. 내가 방으로 들어온 후에 2층에서만 방문이 총 다섯 번 닫히는 소리가 났었다. 누나가 유진이 방을 들어갔다가 자기 방으로 가면서 세 번. 유진이가 자기 방문을 열어 놓고 내 방으로 노크도 없이 들어와 ‘거봐! 이상하다고 했지?’ 하면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는, 지 말만 하고 돌아가면서 두 번. 아침을 먹으면서 두 여인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한쪽은 키득거리고, 한쪽은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광경으로 다시 한 번 협상결과가 희극이었음을 암시해주었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목소리에는 가시지 않은 졸음이 묻어나왔다.

[여봐라~]
[씨 밸 놈!]

[하~암, 쩝! 용건만 간단히... 형 졸리다]
[너, 이씨! 혜미씨랑 잤어? 안 잤어?]

[난 김씬데.... 잤어. 왜?]
[푸하하하하~]

[지금 몇 시냐?]
[몰라, 씨발! 왜?]

[너 약 먹을 시간 지난 것 같ㅇ]
[닥쳐 씨발! 혜미씨가 네 연락처 물어보던데, 뭔 짓을 한 거야?]

[그래서? 알려줬냐?]
[더~럽게 보채야 말이지. 씨~발 공자가 떡치는 기술도 알려 주냐?]

[알려줬냐고, 인간아?]
[그것도 물어볼까 해서 전화한 거다. 씨~탱아]

[하~암... 잘했다 잘했어. 나랑 더 안볼 거면 알려줘라. 응?]
[좇~도, 내 그럴 줄 알았지. 이 미련한 새끼... 그건 그거고 오늘 좀 보자!]

[오늘은 안 돼]
[이러언~ 씨....]

[본론만 말해라. 응?]
[내일은?]

[약속 있어]
[야이~ 씨....]

[왜 그러는데?]
[월요일은?]

[점심땐 괜찮아... 야, 본론 좀 말해달라고]

결국 본론은 듣지 못하고 어제 그 아가씨와 갔던 카페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고 월요일에 약속을 잡았다. 고픈 잠을 더 채우고 일어나 책을 좀 보는 둥 마는 둥하다 점심까지 먹고 나니 또 나른해지는 청춘의 몸. 별세계 탐험은 미루고 오랜만에 산책이나 해볼까하고 씻지도 않은 몸뚱이에 추리닝만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외출을 끝내고 현관으로 유리 누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일찍 들어오네?”
“어. 학교에 잠깐 갔다 오는 길.”

“점심은 먹었어? 엄마 유진이 데리고 이모네 갔는데.”
“그래? 아직 생각 없어.”

“그래 그럼. 난 요 앞에 바람 좀 쐬고 올게.”


“우진아~”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는데 2층 계단 앞에서 누나가 불렀다.

“어, 왜?”
“잠시만 기다릴래? 나 가방만 두고 같이 가게.”

그러자고 했다. 누나와 나란히 산책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겠구나 싶으니, 같이 살면서 보낸 시간에 비해 함께 나눈 기억은 삭막할 정도로 초라했다는 실감. 그 무게중심을 맞추려고 저렇게 애쓰는구나 싶고, 그러니 지금은 잠자코 누나 페이스에 맞춰 주는 게 가장 현명할거라 생각했다. 꽃은 인내가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피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누나는 기다린 가족들을 위해 충분히 무리하고 있었다. 근데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라도 좀 감고 나오는 건데....

내일 어디로 놀러 갈지를 의논하면서 걷다보니 자연스레 걸음이 공원으로 향했다. 기분만큼이나 날은 따뜻했고, 날이 따뜻한 만큼 공원도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너저분한 추리닝차림의 부스스한 사내놈 옆에서 함께 걷는 미인에게 시선이 쏠려 다닌다. 차려입고 걸어도 나는 지워지고 안보일 텐데, 너무 극과 극이라 모양새가 죽는다. 어떤 그림으로 무슨 관계처럼 보일까나. 평강공주 따라 다니던 바보온달을 사람들이 저런 눈으로 봤을 것 같기도 하다.

“그거 누가 한 얘긴지 알려줄래?”
“응?”

“지난번에 네가 한 얘기 있잖아. 강한 사람이란 가장 훌륭하게 고독을 견딘 사람이다.”
“아~ 실러?”

“실러?”
“응. 풀 네임은 모르겠네.”

“실러.... 혹시, 독일작가 그 실러?”
“오~ 역시 알고 있네? 어, 맞아.”

“아~ 그랬구나... 근데 넌 어디서 들은 얘기야? 난 처음 듣는 말인데?”
“으응~ 은사님께서 종종하시던 말씀 중에 하나였지. 독일의 작가 실러가~ 하시면서.... 그래서 나도 이름이랑 직업밖에 몰라. 흐흐~”

“그럼... 이건 너도 모르겠구나? 실러가 괴테랑 가까운 사이였다는 거.”
“괴테랑? 실러가?”

“응.”
“이야~ 그 실러라는 양반 노는 급수가 있었구나?”

“있는 정도가 아니지. 베토벤이 그 두 사람의 열렬한 독자였는데.”
“토벤이 형님이?”

“토벤이 형님? 푸후~”
“헤헤~”

“베토벤이 실러가 쓴 희곡에 곡도 만들고 그랬어.”
“오호~ 당대의 천재들과 친구라.... 이 무슨 동화 같네?”

“음! 실러가 괴테 파우스트 쓰는 것도 도와줬는데.”
“아으~ 그 놈의 파우스트....”

“파우스트가 왜?”
“휴우~ 말도 마셔. 내 원, 지루해서 1권반도 못 읽었다니까? 내 취향 아니야. 으으~”

“으음~ 그래? 우진아, 파우스트란 말이야.... ”

회심의 미소와 함께 눈빛을 한번 반짝거린 유리 누나는 그 후로 공원을 몇 바퀴 돌고 집으로 올 때까지 그 망할 파우스트에 관한 줄거리와 자신의 감상평을 쉬지 않고 쏟아냈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절대 집중하지 못하는 내 체질상 듣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노동일 수밖에 없었지만, 상대가 유리 누나인 만큼 그래도 적절히 호응해 주면서 경청하는 착한 남동생의 자세를 유지했다. 듣다보니 이거 어째 전날 밤의 ‘웬수’를 품위 있게 갚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누나가 깜찍해 보이기도 하고, 배우를 꿈꾸는 사람답게 심도 있는 고찰과 열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 깊기도 했다. 파우스트에 관한 노상에서의 무료강의가 끝나자 우린 집 마당에 도착해 있었다.

“어때? 읽고 싶어지지?”
“어? 어..어.”

“흐음~ 아닌 것 같은데? 훗~”
“흐흐~”

“너랑 있으면 이상하게 말이 많아져.... 넌 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거 같애.”
“......”

“왜 그렇게 봐?”
“.... 말 보다 고운 게 없다는 속담이 생각나서... 여러모로 누나 참~ 고우셔?”

“안되겠다. 들어가자. 너 또 이상한 소리할 거 같애.”

“어어~? 이거 좀 놓고 가요~ 나 아무 죄 없어요~”

또 포옹하자고 할까봐 저러나? 고운 손에 끌려 들어가면서 오붓했던 누나와의 첫 산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저녁밥을 먹고, 빈둥거리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장에서 운동까지 마치고 나왔을 땐 토요일 꼬리가 발끝에 걸려 이제 막 벗어나기 직전이었다. 원하는 뭔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시간은 예외 없이 바삐 달아난다. 그리고 땀과 함께 흘려보낸 에너지들은 몸을 지치게 하는 것보다 왠지 더 가볍게 해주는 기분. 그 상쾌함이 좋았다. 원래 운동을 하는 시간보다 좀 더 뒤로 미뤄서 다녀온 목적은 역시나 현주 누님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서였다. 미루어 짐작컨대 자정쯤에 나오는 것 같았다. 예측불허의 재미를 선사해줄 것 같은 신비의 베일을 두른 여자. 그 집 대문이 가까워질수록 보물찾기하는 것처럼 묘하게 설레었다.

그리고 이번엔 심장에 무리를 받지도, 피부에 자극을 받지도 않았다. 한 집 넘어서부터 매캐한 담배 냄새를 약간 맡아서이기도 했지만, 나와 있다면 먼저 인사를 해올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도 있었다. 그래서 물속을 걷는 것처럼 속도를 더디게 해서 가로등 불빛을 밟으며 걸었다. 행인이 누군지 알아보기 좋은 위치까지 염두 해가며,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누님!”

예쁜 목소리가 인사를 싣고 오자 뜻밖이라는 듯 능청을 떨며 현주 누님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구면의 힘은 그녀를 물러서게 하지 않았고, 오늘은 시뻘건 가운이 아니라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조경에 투과된 실루엣 속으로 지탱하고 있던 다리의 각선미와 벌어진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었는데, 그 점을 안배하려고 골라 입은 건 아니겠지?

“담배 하나 줄까요?”
“아닙니다. 근데 안에서는 담배 못 피우시나 봐요?”

“네. 안에선 못 피워요.”

담배를 갈아서 물고, 피우던 담뱃불로 옮겨서 불을 붙인다. 몸을 낮추고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꽁초를 문질러 끄는 사이 그녀가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생머리가 허리까지 덮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려고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야무지게 조여 맨 가운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립스틱 안 바르셨네요?”
“네. 왜요? 바를까요?”

립스틱을 지우고 있으니 좀 더 어려 보여서 한 말인데, 내가 바르라고 하면 바를 듯이 물어온다. 표정을 봐선 그냥 해보는 말 같지가 않았다. 어디 발라보라고 하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긴 했지만, 행여 남편이라도 깨면 다시 못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술인지 천성인지 아무튼 간파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은 여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농담도 잘 하십니다. 누님.”
“농담 아닌데....”

“늘 이 시간에 나와서 담배 피우시나 봐요?”
“......”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허리 쪽 가운자락을 거머쥐고는 인상까지 구겨진다.

“왜 그러세요?
“......”

“어디 불편하세요?”
“...배가 좀...”

“배가 왜요?”
“...배..탈....”

“그럼 들어가서 일 보세요. 다음에 뵐게요.”
“네...”

정말이지 이런 ‘변’이 있나.... 피우던 담배를 끌 여유도 없는지 땅에 그냥 던져버리고 현관으로 달려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뛰어가는 뒷모습이 좀 섬뜩하게 보였고 하얀 가운은 소복의 효과를 대신하고 있었다. 얼어 죽을 파란색 조경이 그런 분위기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기도 했고.... 나중에 친분이 좀 쌓이면 조경 색깔 좀 바꿔보라고 구슬려 봐야겠다는 오지랖이 자라난다. 여하튼, 야밤에 저런 차림으로 담배나 피워대니 배탈이 나는 거지. 저 집 욕실에선 지금쯤 요란한 합주소리가 울려 퍼지겠구나, 하는 메슥거리는 상상을 하며 아쉬운 걸음을 돌려 세웠다. 현란한 정신세계를 파헤쳐보고 싶었던 호기심은 물거품이 되 버렸고, 유리 누나 애프터서비스는 언제 완수 할 수 있으려나....









아침부터 들떠서 부산스럽게 외출채비를 하던 유진이는 기대와 긴장으로 나사하나를 흘린 어린 아이 모습이었고, 가족 전체가 외출할 때 보다 예민하고 화려하게 꾸며댔다. 플라워로 장식된 밝은 톤의 플레어스커트에 카디건을 두르고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까지 챙겨 들고서 마지막까지 고심하며 구두를 고르는, 영락없이 소풍 나가는 저택의 꼬마숙녀였다. 거기에 비해 유리 누나는 늘 입던 차림으로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상태로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의 하프코트에 평범하게 입는다고 했겠지만, 단화를 신었음에도 길고 날씬한 다리가 부각되는 청바지에, 숨길 수 없는 볼륨감이 드러나는 티셔츠. 하나로 묶음 처리한 꽁지 헤어로 마무리한 모습은, 영락없이 소풍 나가는 저택의 꼬마숙녀를 돌보는 보모의 자태였다. 옷이 날개란 말이 무색해진다. 엄마에게 카드를 구걸하러 갔더니 유진이만큼 들뜬 엄마가 카드에 현금까지 얹어서 주시는 과용에 나는 그저 성은이 망극했다.

“오랜만에 아버지랑 오붓하게 보내. 엄마. 유진이도 동생하나 있어야지?”
“망측하게 별 소릴 다하네. 얘가. 효자흉내는 다 내고 나갈 참이니?”

“그럼 방해꾼들은 이만 사라지겠습니다. 마마!”
“조심해서 다니고, 너무 늦지만 마... 아들! 아가씨들 잘 챙기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구두를 신었다 벗었다 쇼를 하고 있는 유진이를 겨우 끌고 나와 우린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유리누나와 내 가운데 껴서 손을 하나씩 잡고 노 젓듯 휘저어가며 어찌나 쾌활하신지.... 놀이공원에 도착해 빙글 턴까지 돌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유진이를 바라보는 누나. 이름 그대로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아보였다. 묵은 한이라도 풀려는지 누나 손을 잡고 다니며 탈 수 있는 모든 놀이기구를 섭렵하려드는 우리 막내는 가능하면 함께 앉아서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를 더 선호했고, 그런 놀이기구는 특성상 대단히(?) 무서운 것들이었다.

로마속담에 미녀를 얻으려면 권투경기를 함께 보라는 말처럼, 거기까지 고려해서 그랬을 리 만무하지만 유진이의 선택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유진이 성화에 못 이겨 자이드롭을 타고 또 귀신의 집을 나왔을 때 두 사람의 허울은 함성과 비명에 씻겨 나갔고, 씻겨 나간 빈자리에 서로를 보며 안도하고 서로가 있어서 안심하는 동지애와 전우애가 싹트고 있었다. 여느 여자의 모습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았다는 몸짓으로 안도하는 유리 누나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혀까지 내밀며 무사귀환을 자축하는 표정을 볼 때는 내 가슴이 왜 간질간질 거리는지....

그리고 역시! 유리 누나는 미인이었다. 그 미모를 확인 할 수 있는 반경의 남자들은 방앗간의 참새처럼 시선이 돌았고, 주위를 의식해 태연하려 해도 쉽지 않은지 그들의 틈을 지나가는 우리, 정확히 유리 누나에 대한 감상을 거두지 못했다. 예전의 얼음 같은 얼굴로도 시선을 받던 누난데, 이렇게 밝게 웃어버리면 초토화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정도로 시선을 받아 본 경험이 없다보니 누나가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런 누나의 일행이자 가족이라니.... 아마도 머지않아 적당한 시기가 왔을 때 유리 누나는 높이 비상하게 될지 모른다. 타고난 외모에 노력으로 일군 실력들로 브라운관이나 극장 스크린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명실상부한 스타로 발돋움할 날이 올 수 있겠지. 그 시절이 되면 나만의 누나가 아닌 만인의 연인으로 부상해 넘치도록 사랑받으며 살아가게 될 테고.... 그리고 그 옆에선 꿈을 이룬 누나를 축복해주고 앞으로의 건투를 빌어주는 게 내 역할이겠지.... 쯧, 하지만 그쯤에는 함께 사는 것도 어려워지겠구나, 싶으니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은 뭐람. 요즘 느끼는 특별한 교감이 아득해져 버릴까봐 벌써부터 서운한 걸 보면 걱정도 팔자란 말이 남의 말이 아니다. 이렇게 옹졸해서야....

아무튼 내가 동행하지 않았다면 무수한 헌팅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누나만 못해서 그렇지 본인도 제법 예쁘다는 걸 자각하고 사는 유진이는 같은 여자로써 받는 섭섭함 따위는 없어 보였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언니가 있다는 게 오히려 자극제가 되는지 더 친밀한 모습을 과시하며 누나에게 매달려 다녔다. 놀이에 빠져 뒤늦게 먹은 점심자리에서 급기야 입에 떠먹여 주는 과도한 애교까지 부렸고, 누나는 사양하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받아먹었다. 그 감격을 나누려는 듯 누나도 유진이를 같이 살폈고, 두 사람이 서로를 챙겨가며 돈독해지는 와중에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허허허.

그런 자매들을 지켜보는 내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떠다니는 걸 나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유진이의 적응력과 친화력이 그 정도 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터라 조금 닭살스럽긴 했지만, 그 넉살 앞에 망설임 따위 가루처럼 부서진 사람처럼 누나도 자신을 보여주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의 지구력은 운동으로 단련된 내 체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비웃는 시간이었다. 다른 매장에 가면 새로운 활력을 충전 받은 사람처럼 우리의 막내는 혈기가 왕성했고, 유진이만큼 격하게 반응하고 다니진 않았지만 누나의 체력 역시 유진이 못지않았다. 액세서리 매장에서 의기투합한 자매님들은 나란히 같은 디자인의 팔찌를 골라 끼고는 나한테도 할 것을 요구했지만.... 흥! 나는 자랑스러운 이 땅에 고추 달린 사내로 태어나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단조로운 색상으로 바꿔달라고 읍소했을 뿐.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늦어진 저녁식사까지 해결하고,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등을 기대고서야 유진이는 방전되었다. 버스 뒷좌석 창가에 앉아 졸고 있는 유진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어 놓고, 누나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머릿속은 꿈 같이 즐거웠던 하루를 회상하거나 혹은 더 멀리 있는 기억까지 반추하며 일시에 일어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누나를 감상하고 있었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구경꺼리를 잃어버린 나는 허탈하게 웃어보였다.

말없이 눈을 맞추고 있던 누나가 시선을 내리더니 내 왼손을 데려가서는 자신의 허벅지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포개어 잡았다. 그 접촉을 통해서 내 마음을 읽으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길고 흰 손. 손톱은 또 왜 그리 긴지.... 동생으로써도 이렇게 설레는데 다른 남자들은 어떨까.... 미녀의 적극적인 행동이 부러웠는지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우리를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유리 누나의 남자가 된 것 마냥 황홀해져서는 뽐내듯이 사내를 쳐다봤다. 일부러 누나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시선을 즐기면서.... 하하하.

그렇게 형제애로 충만했던 하루를 마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의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운동을 위해 다시 나가야 했고, 누나도 양보했기에 유진이가 먼저 욕실을 사용했다. 주머니에서 검은색 팔찌를 꺼내 발목에다 차면 체면도 살리고 형제의 의리도 지키겠지, 하고 고심하던 중에 누나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코트만 벗은 모습이었다.

“옷 안 갈아입고 왜 그러고 있어?”
“어~ 운동 갔다 오려고.... 누나는?”

“나는.... 씻으면서 갈아입으려구....”

그 말 하면서 부끄러워 할 것까지야 없는데, 그러니 내가 괜히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 아닌가. 만약 지난주 토요일에 누나 알몸을 뚫어져라 봤더라면, 내 눈은 지금쯤 공항검색대의 투시기능을 발휘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자의 도리를 지키길 잘했다는 자화자찬.

“피곤하지 누나?”
“아니. 괜찮아.”

“그래? 쩝, 피곤할 땐 신선한 산소가 참 좋은데...”
“으휴~ 엉큼하기는....”

“하하~”

그때까지도 문에 기대고 있던 유리 누나가 걸어 들어와 책상 의자를 빼며 앉는다. 내 시선은 그런 누나의 이동경로를 따라 얼굴에 정지해 있었다. 포근한 눈빛으로 잠시 보더니 누나가 입을 떼려고 하자 내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아~ 고마웠다고?”
“......”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또 입을 떼는데 이번에도 말을 가로챘다.

“아~ 덕분에 즐거웠다고?”
“훗~ 아니야!”

“응? 아니야? 하하하~”

이상하다? 딱 그 표정이었는데.... 민망해서 웃었다. 그런 날 지그시 바라보는 유리 누나. 분홍빛 입술이 야무지게 닫히더니 담아 온 말을 꺼낸다.

“잠깐 눈 좀 감아 볼래?”

그렇게 말하고는 뭔가 줄 게 있는 사람처럼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나 모르게 뭐 선물이라도 산건가 싶었다. 바지에 넣어 둘 부피면 뭐가 있나? 어릴 땐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손 욕을 꺼내곤 했는데, 유리 누나가 그럴 린 없고.... 뭐든 어떠랴. 날 위해 주는 것이라면 나는 기뻐할 소감만 준비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누나가 재촉해왔다.

“어서~ 눈 좀 감아봐.”
“우리사이에 뭐 그런 것까지 준비하고 그래. 에이~”

누나 같은 여자가 이렇게 다정하게 애걸하면 도대체 어떤 사내가 거절할 수 있을까? 눈을 감고는 선물을 올려놓으라는 용도로 두 손을 모으고 들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있는데 주머니를 뒤지는지 부스럭 소리가 들린다. 몸이 일어나고, 다가왔는지 체취가 가까워 졌다. 응?? 불을 껐나? 감고 있던 시야가 더 어두워 졌다고 느꼈다. 뭔가가 내 얼굴 상공에 떠 있는 느낌. 궁금해서 막 눈을 뜨려는데 이마에 뭔가 와서 닿았다. 와서 닿은 게 뭔지는 안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유리 누나의 매끄러운 입술. 그것이었다. 그 찰나의 감촉이 소리도 없이 멀어졌을 때 슬리퍼 소리가 들렸고 나는 눈을 떴다. 언제 저만큼 갔을까? 유리 누나는 방문 앞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누나가 방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 나와서야 평소보다 가슴이 크게 콩닥거리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사실 볼에는 지난번 동철이 가게에서 혜미씨가 훔쳐갔던 적이 있었다. 그땐 마냥 놀라고 경황이 없어서 립스틱자국을 지우기에만 바빴었다. 그저 누나가 남동생에게 해주는 애정의 표시로 봐야 되는데, 난 왜 지금 혜미씨 입맞춤과 느낌을 비교하려고 기억을 더듬어 대는지.... 어제는 포옹을 하고 오늘은 뽀뽀를 받아서 그런가.... 필요이상 오버해서 의미를 확대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가 보다.

망상을 경계하면서 좀 걷다보니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는 말이 생각났다. 행복을 나누기 위해선 입술을 주듯 먼저 행복을 줘야 한다는 의미였다. 유리 누나도, 내 포옹처럼 행복한 심정을 나누려는 마음으로 뽀뽀를 해준 것일 게다. 그 순수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다니.... 이렇게 엉뚱한 추측이나 하고 자빠진 혼탁한 내 마음의 수질이야말로 마실 수 없는 공업용수인 것이다.

이게 다 동정을 너무 오래 지켰거나 근래에 자위를 좀 등한시해서 생긴 욕구불만이 비극의 단초 같았다.

‘그래! 맞아.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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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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