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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1 985회 0건
휴가 갑니다. 다음 주 말에 뵐 것 같습니다.
제목이 원래 "운명"이었다가, "수레바퀴"로 바뀐 것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결말은 비극으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무슨 대단한 글 쓴다고 칙칙한 결말을 내겠습니까?
만약 다음에 글을 또 쓰게 된다면, 그 때는 비극으로 가렵니다.
수레바퀴는 앞으로도 꽤 많은 부수가 남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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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지?’
‘응.’

‘지금 말할 테니까...... 꼭 들어줘야 해!’
‘응.’

‘네 기억 속에서 날 지워줘!’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오빠 또 자?”
“으응? 아니......”

“왜 그렇게 맨 날 자울 자울 하고 있어? 춘곤증이야?”
“아니래도...”

“어제 또 술 마셨어?”
“어지간히 좀 해라.”

봄 햇살이 차창을 너머 온 몸을 뜨뜻하게 감쌌다. 신의 축복을 받고 있는 기분이랄까?

앞좌석에 앉은 여자는 볕이 싫은 듯 자꾸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주었지만, 나는 차양을 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울긋불긋한 산과 이제 막 모를 옮겨 놓은 들판도 보기 좋고, 과분할 만큼 내려쬐는 햇볕이 피부를 간질이는 느낌도 좋았다.

세 달째구나......

문득 통로 쪽으로 눈을 돌리자, 짧은 스커트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유진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햇볕을 유난히 하얗게 반사하는 그 다리를 보자 익숙한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더니... 남들 다 힘들어하는 고 3생활이 유진에게는 편하기만 한 듯, 유진의 몸은 적당히 살이 붙어 갈수록 완연한 처녀티가 났다. 처음 봤을 때 그 말라깽이 독가시 같던 이미지는 이제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본인도 그런 신체의 변화를 느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듯, 점점 고딩으로 봐주기 어려운 옷차림을 즐겨 입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너무 뜨거워, 오빠.”
“차양 쳐줄까?”

“아니, 오빠 시선 때문에... 히히.”
“좀 긴 치마를 입지 그랬어, 청바지나...”

“예쁘잖아, 그치?”
“군인 아저씨들 고문이겠다. 여자 보기 힘든 동넨데...”

유진이 삶은 계란을 오물거리고 있던 입술을 귀 가까이 가져왔다.

“스커트 좀 올려줄까, 오빠? 보고 싶지?”
“계집애가... 돌았구만.”

역사에서 나가자 화사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우리를 쳐다 보았다. 생김새로 보아 성수가 말한 변호사가 틀림없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눈이 유진의 몸을 재빠르게 한 번 훑었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래 그게 정상적이지.

“혹시 김 수호 씨?”
“네. 정 변호사님?”

“네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돈은 좋은 것이다. 저 사람이 한참 나이가 어린 우리를 깍듯이 모시는 건, 의뢰비 때문이겠지. 그 전까지는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거나, 걸어가야만 했던 길을 변호사의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서 갔다.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다른 면회객들 사이에 끼어 부대 입구를 지나자, 언제 봐도 촌스러운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성수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귀공자 같이 하얗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까무잡잡하게 변해 있었다. 나도, 유진도 엄청 반가운 척, 오버 액션...

“이혼 의사를 밝히는 내용 증명 서신을 발송했습니다. 답장이 오던, 오지 않던 해야할 절찹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내 일 인양 신경을 기울였을 그 대화를 그냥 옆에서 흘려들었다. 귀찮았다... 그보다는 유진의 허벅지를 힐끗거리는 병사들과 뭇 남정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성수가 다가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끝났냐?”
“어.”

성수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내 담배에도 붙여 주었다. 후~~~! 그렇게 한다고 가슴이 후련해지는 건 아닌데, 꼭 첫모금은 길게 내뿜는 버릇이 생겨 있었다.

“나도 하나 줘.”

유진이 다가오자,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연병장 둔덕에 셋이서 나란히 앉아 담배 하나씩 물고 있는 꼴이란...

“우리 엄마는 잘 있던?”

면회 오기 전 마지막에 봤던 성수 새엄마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할머니를 도와 요리와 서빙을 하던 모습... 그녀 덕분에 대학생 손님들이 다시 늘었다는 할머니의 우스개 소리... 그녀를 마치 엄마인 양 따르는 다혜...

“응, 전보다 훨씬...”
“이제 몇 주 있으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 집 절반은 소유권이 있는 셈이니까...”

“내가 보기엔... 그냥 할머니랑 계시는 게 더 나아. 야! 임 유진! 다리 오므리지 못해?”
“피이! 앞에 아무도 없잖아.”

“그래도 계집애야. 항상 조신하게 있으라니까.”
“푸후후후, 꼭 니가 유진이 오빠 같다.”

“너도 말 좀 해라. 니 동생이지 내 동생이냐?”
“흐흐흐, 니 마누라 감이지, 내 마누라 될 애는 아니잖아.”

“마누라? 그런 게 나한테 생기려나...”

깔깔한 잡초가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하는 바닥에 드러 누웠다. 하늘이 유난히 퍼랬다. 저 하늘에 선을 주욱 그으면 유미 누나가 보는 하늘하고 연결되겠지?

“수호야, 나가서 소주 한 잔 할까?”
“나갈 수 있냐?”

“응, 여섯 시 이전에만 들어오면 돼.”
“그래? 그럼 당장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나와! 임 성수 일병.”

술만 입에 대면 정신이 나갈 때까지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던 때였다. 그 전날 같은 과의 놈팽이 몇몇을 모아 새벽까지 마신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도, 소주가 입에 쩍쩍 달라붙었다. 복귀할 때 티가 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소극적인 성수의 몫까지 다 마셨더니, 헤어져야 할 때쯤엔 석양이 아름답게 보일 만큼 술이 올라 있었다.

“이유가 뭐냐?”
“무슨 이유?”

“좀 변했잖아, 너.”
“......”

이유를 알고 있는 유진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얘기를 꺼내면 그 다음에 내가 무척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 다음에 말해 주라. 너 말하고 싶을 때...”
“성수 너는... 어머니 일에 집중해.”

굳이 그런 말까지 할 필요 없었는데... 아마 성수에겐 쓸데없는 참견 말라는 뜻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귀찮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부대 안에 꾹 박혀서 그물같이 얽힌 인간관계에 무관심해도 되는 성수의 처지가 부러웠던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잠깐 졸았다. 눈을 떠보니 창 쪽에 앉아 있던 유진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말려 올라간 스커트 자락 아래로 헤프게 벌어져 있는 허벅지의 출발점이 보일 듯 말듯 했다. 그런 옷차림을 하고도 유진은 자주 허술한 면을 보이곤 했다. 습관이 되질 않아서일까... 아니면 나랑 있어 그런 것일까?

‘풋~!’

어느 샌가 바지 앞섶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인간 김 수호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사타구니가 가장 정직하고 꾸밈이 없었다. 일부러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차창으로 옮겼다. 유리 너머에는 낮에 보았던 산과 들 대신, 또 다른 김수호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힘들지?
어... 그래.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러게... 잘 안되네...

뭐가 아쉬워 그래?
아무것도... 근데 정말, 마지막으로 얼굴 딱 한 번만 보면 좋겠다...


사타구니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이, 유진의 손이 내 사타구니 위에 얹혀 있었다. 잠결임을 주장하듯 벌어진 입술...

짜식 참...!

내버려 두었다. 유진에게까지 성인군자인 척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유진에게 어떤 공작을 펴서 그 애의 뭔가를 바꿔 놓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유진 뿐 아니라, 나를 아는 누구에게도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기가 귀찮았다. 유진의 하체가 앞으로 밀리고 그 바람에 더 밀려 올라간 스커트 아래로 치골을 덮고 있는 하얀 팬티가 드러났다.

나 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얘는 꼭 배우나 탤런트를 해야 해... 유진의 의도대로 바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살덩이가 빳빳하게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진의 손이 조금씩 달싹 거리며 기둥의 윤곽을 더듬어 왔다. 눈을 감았다. 유진이 손바닥으로 사타구니를 탁탁 두드렸다.

“에... 안 말리니까 재미없다.”
“왜... 펠라치오라도 하지?”

“큭큭...”

어깨에 놓여 있던 유진의 고개가 들쳐지고, 장난기 어린 두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잠결에 그런 거야. 히히.”

이젠 누가 봐도 미인 축에 속하는 구나. 이러다 얘하고 정말 뭐라도 하게 되는 거 아냐?

“알아. 이제 눈 떴으니까 치마나 좀 내려.”

왜 유진에게서 자꾸 유미 누나의 느낌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생긴 것은 물론, 성격도 판이하게 차이가 나는데... 그 애와 함께 있을 때 유독 더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애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유진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떨어지고, 팬티가 스커트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집에 있는 언니하고는 잘 지내?”
“서희 언니? 그냥 그럭저럭.”

“언니가 나아, 아니면 엄마?”
“잘 모르겠어. 근데, 오빠 제대하고 나면... 엄마랑 셋이 함께 살면 좋겠어.”

유진도 그 때 쯤엔 엄마라는 호칭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외로워?”
“조금...그래......”

“좋아질거야.”
“오빠...”

“응?”
“화내지 마... 나... 너무 보고 싶어... 유미 언니.”

유진도 나 때문에 생긴 또 한 명의 피해자라는 걸 알았다. 뭐... 달리 해줄 말도 없고, 그저 안아줄 수 밖에...

아빠에게서 유미 누나가 우리나라를 떠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누나는 교사가 되고 싶어했던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 학교를 자퇴하고, 광식 군의 회사에 입사해서 미국 지사로 발령 나는 일이 너무도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나는 유미 누나의 모습을 딱 한 번, 그저 몇 분 간 볼 수 있었다. 누나의 얼굴에는 내게 대한 어떤 감정도 없어 보였다. 그저 표정 없이 단 한마디 말로 나를 차가운 링 바닥에 나뒹구는 패배자로 만들어 버렸다.

‘네 기억 속에서 날 지워줘!’

그리고는 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흔적을 모두 없앤 후 떠나 버렸다.




월요일 오후, 나는 분자생물학 민 주희 교수님의 방에 앉아 있었다. 과 친구들이 하도 등을 떠밀어 가긴 했지만, 사실 교수님을 찾아뵙고 사과할 만큼 잘못한 것 같지 않아, 방에 계시지 않으면 그 핑계로 그냥 없었던 일로 해버릴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방에 있었을 뿐 아니라, 내 얼굴까지 알고 있었다.

통화를 마친 그녀가 내가 앉은 맞은 편 소파에 앉더니, 팔을 가슴에서 교차시켰다. 그 팔위로 터질 듯한 유방의 볼륨이 얹혀졌다. 대학에서 그녀를 끌어오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을 정도로 똑똑한 여자라고 들었지만, 교수를 미모 순으로 뽑아도 첫 번째로 뽑힐 만큼 예뻤다. 그래서 남학생들이 좀체 그녀의 강의는 빼먹지 않았다. 나처럼 좀 특수한 경우를 빼 놓고는...

“내 강의에 벌써 세 번째 결강이지?”
“죄송합니다.”

“진급을 포기한 거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나름대로 급한 사정이 겹치다 보니까...”

“그 급한 사정이 낮잠이니? 강의 마치고 오다 잔디밭에 누가 흉하게 널부러져 있길래 봤더니, 내 강의실에 있어야할 너던데?”

아... 그랬구나. 유명한 교수님께서 내 얼굴을 알고 있다는 걸 내가 어찌 눈치챘겠는가?

“그게... 몸이 좋지 않아서...”
“점심 때 술 먹었니?”

놈팽이 대학생의 일상을 꿰뚫고 있었다. 온화한 표정의 얼굴에, 부드러운 목소리의 그녀 앞에서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 죄송해봤자야. 난 너한테 학점 줘서 진급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어.”

어쩜 저렇게 상냥한 목소리로 저렇게 심한 선언을 할 수 있을까?

“......”
“기회를 줄까?”

“네! 그렇게 해주시면 세상에서 제일 모범적인 대학생으로 변신하겠습니다.”
“대신 그것마저 못해내면 각오해야 해.”

“당연히 그래야죠. 근데... 뭘 해야 하는데요?”
“실험실에서 한 달간 봉사. 일주일에 세 번씩!”

“네? 강의는 어찌하고요?”
“강의 끝나고 다섯시부터 여덟시까지.. 괜찮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얍삽하게 협상을 시도했다.

“이주 정도로는 안 될까요?”
“한 달. 싫으면 안해도 되고...”

“할게요.”
“오늘부터다. 알았지?”

“축제 끝나고 시작하면 안 될까요?”
“안 할 거야?”

“할께요, 하죠 뭐. 근데 절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김유석 교수하고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있거든... 조카가 우리 학교 다닌다길래 봤더니, 삼촌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놈팽이더라.”

아참! 전공이 같구나. 같은 학문을 하니, 자연히 만날 기회도 많을 수 밖에...

“그래서 네 얘기 했더니, 김 교수님이 사람 좀 만들어 달라고 그래서...”
“아... 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자, 여기서 나가서 복도를 따라서 실험실로 직행! 딴 데로 새지 말고.”
“잠깐 작은 아버지한테 항의 전화 한 통 하고 가겠습니다.”

불효가 이만저만이 아니던 시기였다. 유미 누나마저 없어져 적적해 하시는 부모님을 위해서는 강의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가야 했지만, 개강한 이후 학생회 간부를 맡아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잠들어 계시는 부모님 깨우지 않도록, 얼근히 취해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며 조용히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이 오히려 더 많았다.

사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집 자체가 내겐 유미 누나의 흔적이었다.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눴던 내 침대에 잠들지 않은 채 혼자 누워 있기가 힘들었다. 때로는 내 방에 들어가기 전에 비어있는 유미 누나의 방문을 열어보곤 했다. 책상이나 침대까지 다 치워버릴 필요까진 없었을 것 같은데... 텅 비어 유난히 넓어 보이는 그 방에 한 숨만 길게 늘어놓고 나오곤 했다.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내게 내려진 형량을 좀 줄여달라고 부탁하려다 그만 두었다. 실험실에 가지 않으면 그 시간에 캠퍼스 언저리를 방황하며 건수를 찾아다닐 게 뻔했다. 차라리 실험실에 조용히 쳐박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어느 실험실이나 왜 복도는 그렇게 어두운지 모르겠다. 복도에 형광등 몇 개 더 켠다고 해서, 전기요금 때문에 대학이 망하지는 않을 텐데... "분자생물학 II"라는 팻말이 붙은 문을 열자,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각보다 넓은데다 온통 이름도 모를 기계 천지인데 사람은 꼴도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업소용 냉장고처럼 생긴 커다란 네모 양철 상자 안에 코를 쳐 박고 있는 가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저기요.”
“.....”

“저기... 민 교수님이...”
“아유 짜증 나! 좀 조용히 있어.”

어쭈? 앙칼진 목소리의 여자가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신경질부터 부리니, 나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무슨 대단한 작업한다고... 그래도 일단 여건이 내가 불리하니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만에야 여자가 냉장고에서 머리를 빼내더니, 마스크를 벗고 나를 돌아보았다. 짜증나 죽겠다는 듯한 표정. 아... 근데, 이게 누구야! 그러고 보니...

“안녕하세요. 민 주희 교수님이 여기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나는 그녀를 모르는 체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감추지 못했다. 냉장고에서 자고 나와도 얼굴이 그렇게 얼어붙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저승사자를 보는 표정으로, 한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더니,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주눅이 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학생이... 너... 너였어?”
“네. 김수호라고 합니다.”

“어... 그... 그래...”
“무슨 일 하면 됩니까?”

“교수님이 너 오면... 청소부터 시키라고...”
“넵, 알겠습니다.”

그랬네. 민 주희 교수님 아래 지 수정 조교가 있었지. 방을 넓었지만 온통 기계가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 닦을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다 했는데요, 선생님.”
“응? 그... 그래. 어... 얼음 좀 가져다 줄래?”

곤혹스러워하는 그녀를 보자 못된 쾌감이 들었지만, 그걸 빌미로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다지 섹스어필하는 여자도 아니고... 그냥 모르는 체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았다. 복도에 있는 얼음통을 열어, 그녀가 건네준 스치로폼 상자에 가득 담은 후 다시 실험실로 돌아가니 민 주희 교수가 도착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얘들이 다 어디 갔어, 지 선생?”
“축제 전야제 데 기웃거리고 있을 거예요. 어휴~! 이것들이 아직도 학부생인 줄 알고...”

“오셨어요, 교수님?”
“그래, 김 수호. 여기 지 수정 선생이 내 대리니까 앞으로 말 잘 듣고... 지 선생!”

“네, 교수님.”
“얘가 혹시 조금이라도 삐딱거리면 즉시 나한테 와서 얘기해, 알았지?”

교수님이 돌아간 후에 지 수정 조교는 내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자신의 실험에만 몰두했다. 실험실 기계를 이것저것 둘러보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이 다 되었다.

“저 돌아갈게요. 수요일에 뵈요.”
“응? 응... 그... 그래.”

“선생님.”
“응?”

“아... 아니예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에게 그 날의 일로 인해 내게 부담을 가질 필요 없다는 말을 해 주려다 말았다. 부담을 가지던, 자유롭건 그건 지 수정의 문제일 뿐이었다. 더 이상 그런 참견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편한 대로 하면 될 뿐이고...

내 불운을 축하(?)해 준답시고, 남아 있던 녀석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한 잔 걸친 상태였다. 걔네들도 나처럼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 귀가를 늦추려는 중생들이었으니, 그저 마시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저녁 시간을 넘긴 나는 녀석들이 먹고 남긴 삼겹살을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 지 수정 조교의 수중에 떨어져 버린 나를 위로한다며 건네는 술을 시원하게 한 잔씩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진도를 순식간에 맞출 수 있었다.

“수호 씨, 참 술도 멋있게 마신다.”

서정이라고 같은 과에 다니는 여학생이 발그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는 여기 웬일이지? 술자리에 간혹 여학생이 끼긴 했지만, 그 애와는 처음이었다. 같은 과이긴 해도, 신입생일 때는 다른 반이라 그다지 접촉이 없었고, 2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되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외모는 곱상하긴 하지만, 털털하게 입고 남학생들하고 돌아다니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실 그 동안 아는 체도 하지 않았던 애였다. 남자 선배들한테 오빠 대신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부터 내게는 곱지 않게 느껴졌었다. 그런 그 애가 그 날 예뻐 보이는 것 자체가 내가 맨 정신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럼 한 번 줄래?”
“어머, 세상에...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

“푸하하하! 한 번 줘라, 서정아. 네가 여자로 보인다니, 취했나 보다.”
“나 짧은 치마 입고, 화장하고 다니면 너네들 정신 못차릴 껄?”

“으윽! 참아줘. 그렇잖아도 속이 니글거리고 안 좋아, 지금.”

시끌벅적한 친구들의 농담을 외면하고 계속해서 소주를 들이켰다. 술에는 장사 없다고 어느 순간 잠깐 존 듯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내 세 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서정만 식탁에 괸 팔 위에 머리를 놓은 채 졸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 축제라, 강의가 없다는 것 때문에 다들 지나치게 마신 것이다.

이것들이 또 캠퍼스 어느 구석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겠지?

“가자, 장 서정! 일어나!”
“...어...어응...”

결국 들쳐 업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꼴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의예과 학생회 사무실로 향했다. 무겁지는 않았지만, 나도 상당히 취한 걸음이라 땀이 삐질삐질 나고, 짜증도 났다. 개쉐히들이 여자를 초대해 같이 마셨으면, 곱게 집까지 데려다 줄 것이지, 내버려 두고 튀어? 술값까지 덤터기 씌우고...

경비를 피해 이용하는 건물 뒷문이 있었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취한 친구들이 단골로 이용하던 허름한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평소 같으면 다시 나와 문을 잠그면 되지만, 그래도 여잔데... 조금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캠퍼스 여기저기서 술에 취한 학생들의 고함 소리가 더 크게 들려 왔다. 대학교가 아니라, 난장판이다, 젠장. 나도 가끔 저러고 다니긴 하지만...

선미 누나는 주말에 가끔 집에 들렀고, 나는 그 때마다 핑계를 만들어 집에서 나왔다. 가치관의 차이는 그 만큼 무서웠다. 유미 누나는 겨우 반쪽짜리 혈연으로 자살을 기도하고 머나먼 미국으로 떠나버렸지만, 선미 누나는 백 퍼센트 혈육과... 그것도 혈육인지 뻔히 아는 상태에서 섹스를 가지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둘 다 똑 같은 가치관이면 선미 누나는 지금쯤 지구상에 없어야 맞는데...

그러면서도 유미 누나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척하며, 미국으로 보내는 모든 일을 주관해 처리한 선미 누나를 은근히 미워하고 있었다. 나는 누나 둘을 다 잃은 것이다.

“음.. 물... 물 좀...”

컵에 물을 따라 서정의 옆으로 다가가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휴...! 가지가지 한다. 절반쯤 부축해 일으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정신 좀 드냐?”“응... 수호 씨?”

“똑바로 앉아. 못 먹는 술을 뭐하러 그렇게 마시냐!”

조금 전까지 그녀의 위장 속에서 소화액과 섞여져 있던 오물을 맨 손으로 헤치고, 미끈미끈한 티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자신의 상태를 아는 지, 내 추행에 대해 항변도, 반항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근데 왜 나한테 막말해. 수호 씨?”
“너도 해! 앞으로 구부려 봐.”

어렵게 티셔츠를 벗겨, 사무실에 딸린 화장실 세면대에 던져 놓고 바닥에 떨어진 오물을 청소하기 위해 밀걸레를 들고 나왔다. 서정이 소파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 하냐?”
“불 좀 켜봐, 수호 씨.”

형광등이 들어오자, 나는 뚜렷하게 보이는 서정의 반나체에 놀라고 말았다. 항상 하는 짓이 털털하기만 한 사내 같은 그녀가 그런 몸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바지를 절반쯤 끌어내리고 있었고, 그걸 벗어버리면 몸에 걸친 것은 노란색의 브래져와 팬티 뿐이었다.

“그건 왜 벗어?”
“이것두 망쳤어.”

바닥의 오물을 닦으면서 나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셔츠와 바지를 빨고 있는 서정의 뒷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가느다란 허리를 경계로 삼각형 두 개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듯한 몸통... 긴 다리... 제대로 입고만 다니면, 남학생들이 정신 못 차릴 거라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빨래를 하느라 어깨 죽지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마저 육감적이었다. 자지가 꼿꼿하게 섰다. 마지막으로 섹스를 한 게 언제였더라?

“아침까지 마를까?”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브래져에 둘러싸인 가슴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녀 대신 내가 들어가 밀걸레를 빨아 세워 두었다. 세면대 앞 걸이에 티셔츠와 면바지가 나란히 걸려 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술 좀 깼냐?”
“응.. 조금 나아.”

회의 탁자 주변에 놓인 의자에 올라가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종아리로 가리기는 했지만, 그 사이로 팬티에 덮인 삼각지가 언뜻언뜻 눈에 띄었다. 욕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러다가 쟤를 덮치지...

“나 먼저 갈게.”
“가다니?”

“집에 가야지. 전철 끊어지기 전에...”
“나는?”

“아침까지 있을 거 아냐?”
“누구 오면 어떡해?”

“문 잠그고 있으면 돼.”
“너무하는 거 아냐? 수호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나 원래 이래. 그리고, 지금은 내가 제일 위험해. 아마 내가 널 덮치고 말거야.”
“알았어! 가! 나도 갈 거야.”

“뭘 입고?”
“내 옷! 비 맞은 셈 치면 되잖아.. 씨~.”

“나 원... 좀 기다려. 딴 방 가서 걸칠 거 있나 볼게.”

조심스럽게 학생회관 전체를 다 뒤졌지만, 문 열린 방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씨발... 이건 걔 사정일 뿐인데... 이런 데 관심 안 가지기로 했는데... 사무실에 돌아왔더니,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만 울어라. 안 갈 테니까...”

전등을 껐다. 경비 아저씨에게 걸리면, 그냥 쫓겨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도 오지 않고, 둘이 할 말도 없고, 애꿎은 담배만 연달아 물었다.

“수호 씨, 섹스 해봤어?”
“윽!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질문에 담배 연기를 잘못 삼켰다.

“뭘 그리 놀래?”
“그거 알아 뭐 하려고?”

“그냥... 궁금해.”
“많이 해 봤어.”

“그렇구나... 그 여자는 예뻐?”
“어떤 여자?”

“여자가... 많았구나.”

많았다. 모조리 연상이고, 유부녀고, 누나고, 선생님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적절한 관계...

“사실 나... 신입생 때부터 수호씨 좋아했었다?”
“......”

“2학년 돼서 같은 반 되니까 너무 좋았어. 오늘도 경민이가 수호씨 나온다고 해서 나간거야.”
“난... 솔직히 너 잘 몰라.”

“알아.”
“......”

“진작 예쁘게 입기라도 할 걸 그랬어. 그러면 수호씨 눈에 띄었을까?”
“......”

“아까 나 덮칠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응.”

“나랑 섹스 할래?”
“너 처음이지?”

“응.”
“안 해.”

“왜?”
“너 나 좋아한다며...”

“응.”
“그래서 못 해.”

“내가... 섹스하고 나서 책임지라고 할까 봐?”
“아니. 감정이든 뭐든 엮이는 게 싫어. 그냥 캐주얼한 게 좋아. 네가 딴 사람하고도 섹스할 수 있으면 그 다음에 할게.”

“나쁜 새끼!”
“소파에 가서 자. 새벽에 문 열기 전에 일찍 일어나 나가야 해.”

인간관계... 귀찮았다. 서정이 날 매몰차고 야비한 놈으로 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회의용 탁자 위에 올라가 책을 베개 삼아 몸을 눕혔다. 등짝에 딱딱하게 닫는 나무판의 느낌이 좋았다. 내가 나를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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