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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3 891회 0건
유미 누나는 갑자기 말이 없고, 광식 군은 원래 말이 없었다. 술 마시며 떠드는 사람은 선미 누나와 나 둘 뿐이었다. 광식 군이 졸리다며 먼저 들어가 자고, 둘이 양주 한 병을 훌쩍 비우고 나자, 화제도 동시에 바닥이 났다.

“이제 치우고 자자.”
“우리... 그냥 집에 갈게, 언니.”

“지금이 몇 신데 유미야... 자고 가지?”
“그러자, 누나. 너무 늦었잖아. 아침에 해장국도 얻어 먹고...”

하지만 유미 누나는 단호했다.

“아빠하고 엄마만 집에 계시잖아. 아침은 챙겨 드려야지.”
“......”

“그래... 수호 너는?”
“수호도!”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유미 누나가 먼저 대답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돌아본 유미 누나의 표정에서 고집이 엿보였다. 그게 유미 누나가 대답할 질문이 아니라는 건,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한 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 그렇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갈래, 누나. 어차피 유미 누나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그렇구나. 아, 섭섭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유미 누나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고집을 피워본 경험이 없을 테니, 자신이 조금 심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을 게 분명했다. 누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괜찮아, 누나 말이 맞아.”

집에 도착할 때 즈음엔 기분이 좀 나아 보였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술도 좀 깨고, 졸음도 오지 않았다. 유미 누나는 선미 누나와 나 사이를 차단하고 싶은 것일 게다. 선미 누나네 집에서 잔다고 해서, 광식 군과 유미 누나까지 있는데 나와 선미 누나가 별다른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비슷한 상황마저 피하고 싶은 것일 게다. 어쩌면 앞으로 유미 누나가 선미 누나와 나 사이를 감시하려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된 거지. 어차피 더 길어져야 좋을 게 없다...’

그런데 그때, 똑똑....!

“수호야.”
“누나?”

“응. 아직 안 자지?”
“그래.. 잠깐만.”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유미 누나의 옷차림이 놀라웠다. 언제 구했는지, 평소에 즐겨 입던 트렁크 형의 줄무늬 잠옷 대신, 얇은 흰색의 나이트 가운을 입고 있는 그녀가 한층 더 성숙한 느낌을 줬다. 그런 자신의 차림이 스스로 쑥스러운지, 내가 쳐다보자 수줍게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아이.. 뭘 그렇게 봐?”
“이쁘다, 누나. 들어와.”

되돌아서서 침대로 가서 앉았는데, 누나는 예전처럼 책상 앞의 의자에 앉는 대신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앉아.”
“나...”

“응?”
“옆에 좀 누워 있으면 안 될까?”

내가 망설인다는 것을 누나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 당연하지, 누나. 얼른 옆에 와서 누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욕심이고, ‘절대 안돼... 앞으로도...’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내 이성이었다. 머리 속에서는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데, 정적을 참지 못한 내 입은 이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누나가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다가와 침대에 몸을 실었다. 베개를 베는 대신, 내 한쪽 팔을 당겨 그 위에 머리를 올려 놓았다. 뭘 뿌린 듯... 코를 찌르는 아찔한 향기...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고 안아야 자연스러운 거지만, 막연한 불안 같은 게 그걸 못하게 막고 있어서 그냥 잠자코 천정을 보고 누워 있었다. 유미 누나가 코를 내 몸에 바짝 붙여 왔다. 그렇게 한 10여 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너 찾으러 수퍼랑, 놀이터랑 갔다가... 설마 하고 뒷산에 갔었어...”

듣기 싫은 화제를 유미 누나가 꺼내려는 걸 알았지만, 잠자코 듣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이 뭐하는 지, 멀리서 보고 짐작했어. 제발...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기를... 그런데 수호 너였어... 그 길로 다시 돌아 내려왔지만, 그래도 뭔가 사정이 있는 거라고... 아마 싫어도 수호 네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둘이 너무 다정하게 오는 거야... 꼭... 연인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 내가 잘못 봤을 거라고... 근데, 집에 와서 또 둘이 나가는 거야... 언니 차로...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어?”

“너도... 언니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 그리고 너무 추잡했어. 둘이 가족이잖아...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사이잖아...? 그리고 언니는 이제 막 결혼했잖아... 형부랑...”

달도 밝네, 참. 누나 심정 이해해... 근데 나는 그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내가 이상한 거겠지. 나도 처음에 힘들었으니까... 근데 정말 몰라. 그게 잘못이라는 거...

“나... 정말... 죽을 것 같았어. 그러고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네가 미웠어. 그래서 널 잊으려고 했어. 너 피하고... 진규 오빠 사랑해 보려 했어...”

그게 맞아, 누나. 누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내가 아니고 진규 형이니까. 나는 누나의 앞날에 해줄 게 아무 것도 없어.

“무주 가서... 너랑 언니랑 그러는 거 봤을 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어... 네가 나를 가졌을 때하고, 선미 언니랑 그걸 하는 거는 분명히 달랐어... 그건 그냥 유희일 뿐이니까, 사랑이 없는 거니까... 그 때까지 널 잊지 못했어.”

그래 유미야. 그건 사랑 때문에 하는 행위가 아니야. 그저... 쾌락이지... 유미 네가 볼 땐 그저 추악한 행위일 뿐이지. 하지만 왜 그게 추악하지? 그런다고 세상 누구도 다치지 않아.

“네가 어떤 여자랑 같이 자더라도 다 이해할 수 있어. 넌 내 것이 아니니까... 네가 그걸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나도 그럴 수 있어... 지금은... 나를 다 줄 수 있어...네가 원하면... 난... 믿으니까. 그때 네가 나를 안았을 때... 그 때처럼... 유희가 아니라 사랑으로 나를 안을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

나도 널 사랑해, 유미야. 하지만,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거야. 물론, 내가 잘못한 거지만... 세상 여자 다 안아도 너만은 안지 않았어야 했어.

“나... 노력할 거야. 네가 누굴 만나든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냥 너한테 김 유미의 모든 걸 다 보여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그래도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안 돼, 유미야. 네가 나한테 아무리 잘한다고 하고, 내가 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래도 안돼....

“그래도, 언니는 만나지 마, 수호야. 가족이잖아. 그건 죄악이잖아. 난 너하고 다른 핏줄이지만, 언니랑 너랑은... 같은 핏줄이잖아.”

그러니까 안 돼, 유미야. 너하고 나도... 절반 뿐이지만 같은 핏줄이거든... 그걸 나는 알고 너는 모르고 있거든. 네가 그걸 알면 너는 견디지 못하잖아.

“나 안아줘, 수호야.”

몸을 절반 돌려 유미 누나를 품에 안았다. 누나가 글썽이는 눈물을 내 잠옷에 닦았다. 달이 구름 속에 들어가서인지, 갑자기 침실이 캄캄해졌다. 내 마음은 그보다 더 캄캄했다. 분명히 잘못했구나... 작은 아빠한테 거짓말을 강요할 때부터... 유미 누나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가질 때부터...

그 때 유미 누나에게 이야기했어야 했다. 우린 절대 맺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월요일...



유진이 집에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계집애의 핸드폰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방학하자마자 기합이 빠진 거라 생각되었다. 하루쯤 빼 줄 수도 있었지만, 긴 방학 동안 흐트러질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조여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속 시간이 되자마자 성수 새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수호.]
[수호 씨...]

[유진이가 아직 안 왔어요. 전화도 안 받고... 혹시 무슨 영문인지 알고 계신가 해서...]
[......]

그냥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침묵이 더 이상했다. 분명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예요?]
[수호 씨... 저기...]

[말씀하세요.]
[유진이 며칠 쉴 거예요. 잠깐 어디 좀 가느라고...]

[거짓말이잖아요, 소영 씨. 사실대로 얘기해 주세요.]
[......]

[어서요!]
[수호 씨.]

[네?]
[그냥 모른 척 하고 계세요. 저도 더 이상은 말해드릴 수 없어요. 그럼 이만...]

나 이런... 내 전화를 이렇게 멋대로 끊어버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분명 유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고, 그걸 새엄마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집에서 나와 그녀의 아파트를 향했다. 올라 가겠다고 전화할 겨를도 없이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벨을 눌렀다.

“어, 수호 씨!”

성수 새엄마는 놀란 듯 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까만 정장의 떡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뭐야, 넌!”
“유진이 과외 선생님이세요, 곽 부장님. 오늘 수업하는 날이라서...”

성수 새엄마가 둘러댔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을 내게 돌리며,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유진이 며칠 놀러 갔는데... 죄송해요.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서...”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속임수 놀이에 참여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무슨 일 생겼죠, 그렇죠?”
“일이라뇨... 선생님한테 연락하고 가라고 했는데, 얘가 까먹었나 봐요.”

성수 새엄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쯤에서 그녀의 연기에 호응을 해 줘야 마땅했지만, 나는 세상 누구도 성수보다 더 유진에 대해 책임감이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성수의 부탁을 받았으니... 최소한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요일 날 저 만난 다음에, 집에 들어왔어요?”
“......”

곽 부장이라 불렸던 자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짝 째진 눈이 나를 노려 봤다.

“금요일 날 아가씨 만났어?”

최소한 사라졌구나... 유진이. 자의든, 타의든 아빠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금요일 저녁 내가 마지막으로 본 이후에... 집까지 배웅해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곽 부장이 ‘둘 만 올려 보내.’하고 전화한 지 얼마 안 있어, 덩치 두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 친구, 실장님한테 데리고 가.”
“누구 맘대로 데리고 간단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내 반항에 곽 부장의 눈꼬리가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별 일 아니니까 걱정 마. 유진이 부친 되시는 분이니까... 가서, 몇 가지만 대답하면 돼.”
“무슨 일인지 알려 주시면, 따라 가죠.”

“이 새끼가...!”
“그 사람 성수 친구예요, 곽 부장님. 성수가 군대 가며 동생을 부탁해서 그러는 거예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성수 새엄마가 나섰다. 곽 부장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같이 좀 가 주게. 가면 그 분이 결정할 거야. 이야기해 줄 건지...”

그가 부른 두 사람과 함께 1층으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걸 좀 차야겠다.” 누군가 내미는 수면용 안대를 순순히 걸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모르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를 데려간 사내가 방에 들어가기 주의를 주었다.

“질문은 안 돼. 대답만 하는 거야,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낸 다음, 내 눈의 안대를 제거해 주었다. 커다란 사무실로 보이는 방에 중년 정도의 남자들이 다섯 앉아 있었다. 그의 바로 뒤 책상 명패에 있는 기획관리실장 임 정식이라는 이름과, 성수와 닮은 외모로 보아, 맨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유진의 아빠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좌우에 각각 두 명씩... 모두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미리 연락을 받은 듯...

“이름이 김 수호랬지? 거기 앉아.”

그의 맞은 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나이는 마흔 대여섯쯤 되어 보였다. 우리 아빠보다는 훨씬 젊은 외모... 예전에 아파트 아래에서 실루엣만 봤던 그의 외모를 세밀하게 살필 수 있었다. 인상은 날카로웠지만, 누가 봐도 그저 평범해 보이는 중년... 저 사람이 자식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고, 아내를 창녀로 만들어 놓은 그 사람이란 말인가?

“성수하고는 어떻게 알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2학년,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성수하고 유진이 아비되는 사람인데... 이런 자리에서 만나 유감이구만...”
“처음 뵙겠습니다. 유진이 연락이 되지 않아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댁에 갔었습니다. 건방지게 굴어 죄송합니다.”

“유진이하고 금요일에 같이 있었다고 했지?”
“네. 저희 집 모임에 오고 싶다고 해서... 마치고 집에 데려다 주질 못했습니다. 그것도... 죄송합니다.”

“헤어진 데가 어딘가?”
“○○동 ○○호프 바로 앞에 있는 택시 정류장이었습니다. 택시에 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의 왼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참견하고 나섰다.

“그러면 계획적인 게 분명합니다. 동선 상 걔네들 구역하고 겹치는 데가 없으니까요.”
“......”

납치된 거구나. 젠장! 설마 죽거나 하진 않았겠지...!

소곤거리는 그들의 대화를 끊고 질문을 던졌다.

“죄송합니다만,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습니다.”

처음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싸늘한 냉기가 흘렀지만,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성수가 저한테 유진이 돌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도 책임이 있고... 그래서 꼭 알아야겠습니다.”
“유진이 내 딸이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게. 자네한테 뭐라고 책임 묻지 않아.”

알아서 한다고!! 지금까지 뭘 알아서 했는데? 그냥 내버려 둔 거 말고 아빠로서 한 게 뭐가 있길래! 배 아래쪽 어딘가에서 노기가 불끈하고 치솟아 가슴을 점령해 버렸다. 항상 그랬듯, 그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경솔해지는 치명적인 내 성격... 게다가 몇 년 격투기를 배웠다는 자만심이 나를 부추겼다. 내 말투에는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뭘 알아서 하시겠다는 겁니까? 납치된 겁니까?”
“저 자식이 근데...”

그의 왼편 아래쪽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가, 성수 아빠가 그에게 손을 젓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벌개져 있는 그의 얼굴...

“그래... 납치됐네. 누가 어디쯤에 데리고 있는지는 알고 있네. 자네는 이제 그만 돌아가.”
“누구한테 왜 납치 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가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만만치가 않구나... 표정이 바뀌니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다가왔다.

“입을 막는 게 원칙이지만, 성수 친구니까 그냥 보내 주는 거니까, 여기서 보고 들은 건 나가는 순간 다 잊게. 누가 물어보면 그냥 여행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고... 만약 허튼 짓을 하면 각오해야 할 거야. 자네 아니면 자네 가족이...”

다시 안대를 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그런 문제를 겪어보지 못한 나에게 별 뾰족한 방법은 없었지만, 도저히 유진의 아빠가 알아서 하겠지... 하며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성수에게는 연락할 수 없었다. 분명히 탈영할 녀석이니까...


“그래 결정 했어?”
“사실 그것 때문에 뵙자고 한 거 아니고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석이 형에게 연락해서 만나게 되었다. 그 간의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고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알아봐 줄 수는 있겠다.”
“정말요?”

“음... 근데. 이런 조건 달아 안됐다만... 정 수진 씨가 자꾸 네 연락 기다리는 눈치라서...”
“그거 할게요. 땡전 한 푼 안줘도 할게요. 이번 문제만 잘 해결되면...”

“좋다. 해결까진 장담 못해도, 어찌 돌아가는지 정도 확인해 보지 뭐. 근데 그 애 아버지 이름이 뭐냐?”
“명패에 임 정식이라고 써져 있었어요.”

“임 실장?”

그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수 밖에...


다음 날 약속이 되어 있어 하는 수 없이 박 은혜 선생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지만, 마지막 만남인 그 자리마저 그 때 기분으로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흘 밖에 남지 않은 출국 전에 여기저기 인사하느라 바쁜 그녀가 나를 위해 일부러 저녁 시간을 비워 둔 걸 무시할 수 없었다. 건성건성 근황을 여쭤 보는 내 태도를 그녀가 쉽사리 눈치 챘다.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눈치 채셨네요?”

“나 같은 미인을 앞에 두고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죄송해요.”

“네 자신에 관한 거니?”
“아니요.”

“그럴 줄 알았다. 네가 항상 그렇지. 쯔쯔... 남의 일은 잘 챙기면서, 정작 너한테 중요한 건 대충대충이잖아.”
“제가 그런가요?”

“그래... 넌 네 자신의 일은 쉽게 쉽게 결정해 버려. 어쩔 때는 충동적이다 싶을 정도로...”
“좋은 성격은 아니네... 쩝.”

“그래, 이번엔 누구니?”

며칠 후에는 우리 나라를 떠날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성수 동생이요.’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녀의 표정은 ‘또 성수야?’ 하는 표정이었다.

“성수가 너 인생에 득일까? 실일까?”
“아직까지는... 득인 듯 해요.”

“뭐가?”
“은사님하고 데이트할 수 있게 맺어 줬잖아요.”

“푸후후후. 그건 그렇네. 근데 성수 동생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죄송해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아이구 그래. 제자 하나 잘 키웠네. 이제 제법 비밀도 있고...”

예뻤다. 촛불 때문인지... 유난히 붉게 빛나는 그녀의 입술... 그리고 넓게 파진 티셔츠에 노출된 쇄골의 윤곽...

“뭘 그렇게 보니? 머리 속에 새겨두려고?”
“미국 놈하고 자지 마세요, 누나.”

“왜? 세계화 시댄데...”
“그래도 약 올라요.”

“그럼 밤마다 허벅지 찌르면서 ‘참아야 하느니라’ 이러라구?”
“히히히... 할 수 없죠, 뭐. 출국 기념으로 정조대 하나 선물 할까요?”

“어머, 정말 좋은 제자다. 선생님 성생활까지 보살펴 주시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요... 누나가 우리 반 담임 맡기 전에요... 이런 이야기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다 해놓구선... 말 해.”
“우리 반 남학생 전체가 다 선생님 성생활 보살펴 주고 싶어 했어요. 하하. 아니다... 전교 남학생이 다... 알고 계셨죠?”

“대충은... 내가 처음부터 독가시였겠어? 사춘기니까 그러려니 하고 다 참겠는데... 수업하고 있는데 주물럭거리고 있는 거는 도저히 못 참겠더라. 그래서 본때를 보여 준 건데, 한 번 하니까 자주 하게 되더라? 그니까 이것들이 나를 천하의 악덕교사로 여기고... 아무튼 교사는 내 적성이 아닌 게 분명해.”
“솔직히... 히히히... 지금이니까 드리는 말씀인데요.”

“너두 그랬다고?”
“아아~~! 귀신이시네요.”

“이해는 해. 화장실 가면 웃기지도 않은 낙서에 화살표로 박 은혜 해 놓고... 그 옆에는 어김없이 흐르는 물 자국... 그 정도는 애교지 뭐.”
“선생님이 나이트클럽 다닌다고... 그런 소문 때문에 더 그랬을 거예요.”

그녀가 고기 접시를 비우고 와인을 한 모금 꿀꺽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걸 비정상적이라 여기게 만드는 교육이 잘못이지... 교사는 전문가지, 공자는 아니거든? 내가 나이트클럽을 가든 남자를 만나 잠을 자든... 그건 내 사생활일 뿐이야. 내 교사의 소양하고는 상관없는 거야. 그렇지?”
“......”

“수호 너, 나중에 의사되면 알 거야. 의사는 환자를 돌보는 프로페셔널이지, 성인군자는 아니거든? 그런데 좀 허튼 짓을 하면, 항상 신문에 의사가 먼저 나와. 의사, 변호사, 교수... 대충 이런 순서지. 난... 그런 불합리가 싫어. 왜 내 또래의 다른 여자들은 나이트클럽 뻔질나게 드나드는데 나는 교사라서 안 되니? 그게... 아마 제일 큰 이유일거야.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은...”

“누나, 죄송해요.”
“뭐가?”

“사실 저도 누나 나이트클럽 다닌다는 소문에 더 쉽게 여겼거든요... 히히히.”
“어이구, 그 놈의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 가실래요?”
“푸후후후, 아니... 오래 다녔더니 그것두 질리더라. 그냥 내 아파트에 가서, 좀 도와주라. 가방 몇 개 꾸려야 되는데...”

“혹시 지금 저를 꼬시는 거예요?”
“오냐, 이놈아. 네 녀석이 선생님한테 어떤 못된 상상 하고 있었나 그거 확인하고 싶어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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