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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9 553회 0건
[31부]



적막이 흘렀다. 간간이 커피숍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주문을 하고, 주문을 받는 소리만이 두 사나이의 사이에 울려온다. 금강은 두 눈을 꾹 감은 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태현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째깍...째깍...

쥐죽은 듯한 고요함은 벽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그들의 귓가로 들려오게 만들었다. 끊겨버린 대화가 가져다주는 침묵은 태현의 인내심을 순식간에 바닥나게 해버렸다.

"자네는 날 몰라."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음성이었다. 태현의 그 한마디에 마침내 굳게 감기었던 금강의 두 눈이 서서히 뜨였다.

"자네를 걱정하는 내 마음은 아네."
"걱정?"

눈살을 찌푸리는 태현. 금강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

금강의 입가에 난지 얼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칼로 베인 듯한 깊숙한 상처가 태현의 눈에 들어왔다.

"......자네는 속이지 못하겠군."
"자네가 속이지 못하는 것이겠지."

금강은 천천히 커피 한모금을 마셨다. 그 짧은 시간이 답답한 때문일까, 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길수와 우철이의 부탁을 외면했을 리가 없어. 녀석들은 내 이름을 자네에게 말했을 테니까."
"......"

금강은 고요한 눈빛으로 태현을 응시했다. 열리지 않는 그의 입술을 쳐다보며 태현이 말을 이었다.

"...삼합회는 아니었겠지. 자네가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위험하네."

태현의 말을 끊으며 금강이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태현은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야마구치구미가 이 일에 연관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그쪽에서 자객을 보냈으니까."

금강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자네에게 자객이 왔었나?"

그러나 태현은 대답 대신 담배 하나를 피워물었다.

...칙!...치익..!...쓰..읍......

"야마구치구미가 연관되어 있다면 김형필도 관련되어 있겠지. 아니, 순서대로 하자면 김형필이 먼저고, 야마구치구미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태현의 입 속에서 희뿌연 연기와 함께 말소리들이 마구 흘러나왔다.

"...태현아."

금강이 조용히 태현을 불렀다. 그러나 태현은 금강을 시선에 두지 않은 채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자네와 길수 녀석들은 같이 인천에 갔을 거야.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겠지. 김형필이 판 함정이라면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위험하다."

금강이 태현의 말 속에 끼어들었지만 태현은 금강의 음성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강남 연합은 전멸했을 거야. 김형필 그 녀석의 성격으로 볼 때 살리는 쪽은 자네였겠지. 녀석의 목적은 길수와 우철이였을 테니까."

금강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태현을 부른다.

"태현아...!"
"어째서 거짓말을 한 거지?!!"

마치 금강의 부름에 반발이라도 하듯 태현이 버럭 고함 질렀다. 그 고함소리에 커피숍 안의 다른 손님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태현들 쪽을 힐끗거렸다. 하지만 다른 손님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현은 금강을 사나운 눈길로 노려만 보고 있었고, 금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위험하네."
"내가 포기할 줄 알았나?"
"......"
"자네가 그렇게 진실은 덮고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고 해서 내가 포기할 줄 알았어?"
"......"

금강이 안타까운 눈길로 태현을 바라본다. 태현은 금강의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를 뻑뻑 빨다가 대뜸 말을 내뱉었다.

"말해라. 김형필이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해왔는지."
"......"

금강은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태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태현은 속을 알 수 없이 깊은 금강의 눈동자를 지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고,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금강이 천천히 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어 어떤 말들을 적기 시작했다.





<역시 유리는 속일 수 없어. 아빠 정도로는 속일 수 없을 만큼 유리는 총명하니까. 사랑한다 유리야.>

짧은 메모였다. 하지만 가슴을 저며드는 감동은 너무나 깊은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쪽지를 다시 남겨놓는 섬세함...잊지 않고 말해주는 사랑한다는 말... 유리는 눈물이 아른거리는 눈망울로 몇 번이고 더 아빠가 담뱃갑 안에 남겨둔 쪽지를 읽었다.
아까 왔던 연예기획사의 픽업 제의를 유리는 단박에 거절했었다. 누구라도 연예기획사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귀가 솔깃해지겠지만, 아니 적어도 기분은 좋아겠지만 유리는 오히려 불쾌했었다. 상품이 된다 싶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돈 뿐이다.

"...아빠......"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아빠만 달랐다.
유리는 아빠가 남겨 놓은 메모 아래쪽 여백에 다시 아빠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글자들을 적어놓곤 담뱃갑 안에 쪽지를 넣어 그걸 도로 침대 밑에 놓아두었다. 유리는 그리곤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눈물을 닦으며 아빠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삭히곤 계속해서 사진앨범을 찾기 시작했다.
어째선인지 모르게 아빠의 과거가 너무나 궁금해졌었다. 그렇게나 싸움을 잘하는 것도 이상하고, 생전 처음 보는(아빠 입장에서도 당연히 그래야 할) 사람들이 아빠를 "사신"이라 부르며 알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것으로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자신의 생일 날에 아빠에게 쳐들어 온 그 수십 명의 패거리들도 그렇고 아빠에게 무릎을 털썩 꿇던 그 무서운 인상의 아저씨 두 명도 왠지 아빠랑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실은 일본인이었던 지현 언니가 아빠와 나누었던 대화...그리고 아빠를 죽이려고 했던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지금 유리는 한참 동안 집 구석구석을 뒤지며 옛날에 봤던 것으로 기억나는, 자주색 빛바랜 표지의 사진앨범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그 앨범에서 아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봤던 것 같았다. 심심하면 들춰보는, 아빠와 둘만 살게 되고 난 다음부터 찍은 사진들이 빼곡이 꼿혀 있는 앨범 말고, 분명이 그 이전의 사진들이 간직되어 있는 앨범이 집 안 어디엔가 있었다. 거기엔 아빠와 엄마가 함께 있는 사진이 들어 있어서 의식적으로 그런 앨범 따위 어디에 있는지 생각도 하지 않으며 무시를 해왔었는데, 막상 그걸 찾으려 하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유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아빠의 방이며 2층 구석에서 연결되는 다락방이며 집을 샅샅이 뒤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태현은 현관문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타사부로의 딸은 분명 길수와 우철이를 이용해서 삼합회를 처리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금강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삼합회는 오지 않았다. 금강이 그렇게 말했다면 삼합회는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야마구치 카나코는 삼합회를 들먹인 것이지? 일부러 그 자리에서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었나?"

태현은 카나코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눈빛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었다. 태현은 현관문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여름 해질무렵의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바람은 피부를 상냥하게 스쳐지나갔지만, 태현은 바람의 그런 어루만짐을 즐길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진 않았다.

"......그렇다면 한가지 가설을 세울 필요가 있겠군. 야마구치 카나코도 타사부로로부터 거짓 정보를 들었다...라고 해보자. ...어째서? 왜 굳이 타사부로는 자신의 딸에게마저 거짓정보를 흘린 것이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가 얻게 되는 이익은?"

"씁-후우우..."

태현은 한숨을 내쉬듯 담배 연기를 푹 뿜어내었다. 역시 자신은 머리를 굴리는 데는 재능이 없다. 과거에 조직에 있을 때 머리를 굴리는 것은 언제나 김형필 녀석이었다. 그는 머리가 매우 좋았었다. 주먹 실력은 현석에는 비할 바도 못되고 길수나 우철에게도 현저히 밀렸지만, 그래도 그는 비상한 머리로 인해 뒤늦게 조직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승진을 거듭해 야마구치구미와 전쟁을 치룰 무렵에는 길수나 우철과 동일한 라인에까지 성장했었다. 그런 만큼 태현은 형필을 신뢰했었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敵). 물론 태현이 형필의 눈 속에 꿈틀거리는 야망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과, 예기치 못한 조직 생활의 종결은 태현이 형필에 대한 견제 장치를 아무 것도 만들어 놓치 못하게 만들었다.
태현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그래도 괜시리 자신이 너무나 서둘러 그 세계에서 발을 빼내었던 것을 후회했다. 물론, 그때는 서두른다는 자각조차 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었지만......

"......"

태현은 문득 담배가 다 타들어 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태현은 잠시 멍하니 서서히 사그라드는 붉고 검은 잿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피식 웃는다. 자신이 담배를 피는 모습을 유리가 보면 노발대발 할 텐데 간도 크게 현관문 밖에서 대놓고 이렇게 버젓이 담배를 피우다니. 태현은 담배를 바닥에 눌러 끄곤 쓰레기통에 튕겨 버렸다. 그리곤 열쇠를 꺼내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는 태현. 그런데 갑자기 태현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나..진짜 잘할 수 있어. 그..그러니까아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아빠. 응?"

갑작스레 아침에 유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거기에 이어서 떠오르는, 도저히 아빠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기억들...
태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길수들의 일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이 오늘 아침 어떤 끔찍한 짓을 유리에게 저질러 버렸던 것인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태현의 고개가 힘없이 수그려져, 그의 이마가 서늘한 현관문에 천천히 기대어진다.





아빠에게 말했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낫다고. 그래서 지금 유리는 후회하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은 것일까.
유리는 지금 습한 냄새가 자욱한 다락방에 주저앉아 멍하니 빛바랜 사진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사진 속에는 온통 검은 양복 일색의 백여 명을 헤아리는 남자들이 열을 맞춰 아빠의 뒤에 서 있었다. 장소는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큰 규모의 호텔로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의 입구 계단에 층층이 남자들이 하나 같이 긴장된 얼굴로 서 있었고, 아빠는 그 제일 아래, 그리고 혼자. 고급스런 의자에 홀로 새하얀 양복을 입고 시가를 피워문 채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이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진이었다.

"이게...정말 아빠인 거야....?"

유리는 다시 떨리는 눈빛으로 아빠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빠다. 아빠야 워낙 나이를 안 먹으니 지금이나 이 사진이나 비슷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때가 약간 더 젊은 느낌이다. 그리고 아빠의 바로 뒤에는 명백히 세월을 거스른 느낌이 나는 현석 아저씨가 빡빡 머리를 하고 험상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게다가 현석 아저씨의 양옆에는 저번에 생일날 봤던 아저씨 두 명도 서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 남자는 아빠가 분명하다.
그러나 유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아냐. 내가 뭔가 착각을 한 걸 거야. 아빠가 그런 사람일 리 없어. 이 사진도 뭔가 좀 더 다른..."

그러며 사진을 천천히 뒤집어 보는 유리. 그녀의 눈동자에 사진 뒤편에 적힌 글자가 들어왔다.

"......!"

흠칫 떨리는 유리의 눈동자. 가느다랗게 유리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태현파...간부..총회합...1987년...10월...17일......"

또르르...

유리의 보드라운 볼을 타고 한줄기 눈물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태현..파......"

신기할 정도의 싸움 실력.
무서운 인상의 남자들을 이끌고 달려온 두 아저씨가 아빠에게 무릎을 꿇은 것.
아빠를 형님이라 부르는 현석 아저씨.
그리고 여객선 테러범들 조차 알고 있던 아빠. ...사신.

"거짓말..."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는 유리. 하지만, 여기 이 사람들. 딱 봐도 직업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현석 아저씨. 혼자 하얀 양복 입고 시가를 피우고 있는 아빠.

"아냐..그만..."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는 1987년. 태현파. 간부 총회합.

"그만해..아냐..."

아빠를 죽이려 했던 지현 언니. 그녀와 아빠의 이해를 할 수 없는 대화. ...과거를 물을 때마다 대답을 피하는 아빠. 그리고 아빠의 생일...10월 17일......

"아니라구...!!"

바락 고함지른 유리.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개를 폭 수그렸다. 그리곤 입술을 꼬옥 깨문다.

똑...

한때 대한민국의 음지를 지배했던 사나이, 정태현의 웃는 얼굴 위로 그의 딸이 떨어뜨린 눈물이 서서히 번져나간다.





"유리야...?"

태현은 조심스런 음성으로 딸을 불렀다. 저녁의 아스라한 그을음에 잠긴 집은 고요했다. 태현은 너무나 고요한, 조그만 기척조차 없는 분위기에 갑작스레 겁이 덜컥 들었다.

"유리야. 유리야...?"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애타게 딸을 찾는 태현. 그의 걱정은 다른 색깔로 변질되었다. 집에 들어올 때만 해도 유리를 어떻게 대할까 하는 걱정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좀 더 심각한 불안감이 태현을 에워싼 것이다. 물론 집에만 있는 게 심심해서 친구랑 어디로 놀러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태현이 두 번째의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는 딸의 행방에 신경이 새하얗게 변하려는 찰나, 갑작스레 그의 귓가로 너무나 곱고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아~~."
"......!"

태현은 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유리가 2층에서 우당탕탕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아아..."

사랑스런 모습은 언제나와 똑같고, 해맑은 미소는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녹인다. 태현은 달려와 와락 안겨드는 유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어째서일까, 너무나 다행스런 기분이 들었다. 여행에서 그런 일을 겪어서인지는 몰라도 이젠 유리가 눈에 보이지만 않아도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아빠아..."

그런데 유리도 뭔가 좀 이상했다. 유리 입장에서는 아빠가 단지 외출을 하고 돌아온 것일 뿐인데 이상하게 자신을 꼭 끌어 안고 놓아주려 하지를 않는다. 태현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응..아빠 다녀왔어. 심심했지? 뭐하고 있었니?"
"......"

하지만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리의 이런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 태현은 천천히 유리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유리는 소파에 앉아서도 태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을 하려들지 않았고, 태현은 유리가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어 그저 부드럽게 조심스레 유리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가만히 말했다.

"유리야. 무슨 일..있었어? 누가 집에 찾아왔다던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젓는 유리. 태현은 일단은 안심했다. 금강의 전언에 따르면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 녀석들이 유리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닌지 태현으로서는 걱정이 드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태현은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유리에게 말했다.

"저녁은 먹었어?"

다시 아무런 대답없이 고개만 가로젓는 유리. 태현은 빙긋이 웃으며 유리의 머리에 살짝 입술을 맞춰주었다.

"그럼 아빠랑 같이 먹자. 배 많이 고프지...?"

유리는 계속해서 고개만 가로젓는다. 결국 태현은 답답함을 느꼈다. 왜 유리는 그 예쁜 음성을 자신에게 들려주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태현이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그의 뇌릿속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젠장..그러고 보니..."

또 깜빡 잊었다. 유리가 집에 없는 줄 알고 그 때문에 든 걱정 때문에 그 일을 다시 깜빡 했던 것이다. 워낙에 중대한 일들이 겹쳐서 터지니 정신이 없었다. 태현은 유리가 지금 자신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저 자신을 끌어 안고만 있는 것이 아침에 아빠가 그런 일을 한 자길 내버려두고 집을 나가버려서, 그래서 그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유리로서는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까. 자긴 그렇게 용기를 내어 아빠를 기쁘게 해주려 했는데, 아빠는 그런 자길 내버려두고 휑하니 집을 나가버리다니. 태현은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있으며 가슴 앓이 했을 유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유리야......"

태현은 유리를 꼬옥 감싸 안으며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까,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될까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은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단 것이었다. 자신은 유람선에서 그런 일이 있고 돌아온 다음, 아직도 서로가 여전히 연인 사이임을 확인하길 원하는 유리의 마음에 망설임을 보여줬었다. 그때문일까, 유리는 혹시라도 아빠의 마음이 변할까 그게 두려워 오늘 아침에 그렇게 용기를 내어 자신을 기분 좋게 해주려 했었다. 유리의 순진한 마음으로는 자기가 아빠를 기분 좋게 해주면 아빠가 자길 좀 더 여자로 바라봐줄까 하는 그런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그런데 자신은 그런 유리의 순수한 마음을 욕정을 채우는 데 이용했었다. 유리의 애틋한 마음은 달래주지 않고, 딸의 입속으로 더러운 물건을 들이 밀었었다. 딸은 목이 막혀 칵칵거리고 있는데도.

"하아...유리야..."

태현은 오늘 아침의 일을 하나하나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자신이 유리에게 잘못했던 것인가 하는 마음이 떠올라 정말이지 후회가 되고 유리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될까. 아니, 유리가 미안하다는 말을 듣길 원할까. 태현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결코 변하지 않는, 자신이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말, 그 한마디를 애타는 마음을 담아 유리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유리야. 우리 유리도 알지...? 아빠가 우리 유리 얼마나 사랑하는지......"
"......"

유리는 이번에는 고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마다 보여주던 그 사랑스런 미소도 자신의 품이 가둬버려 볼 수 없었다. 태현은 애타는 마음에 살며시 유리의 얼굴을 감싸잡아 자신의 품속에서 떼어내었다. 힘없이 태현의 손길에 이끌려 아빠의 따스한 품에서 떨어뜨려진 유리의 얼굴. 그리고 그런 유리의 얼굴을 바라본 태현의 눈동자가 흠칫 떨린다.

"유리..야?"

유리의 어여쁜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어깨의 떨림도 느낄 수 없었는데 언제 울었던 것일까..! 태현은 가슴이 답답하고 유리가 정말이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걱정이 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태현이 다시 한 번 유리를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려는 찰나, 마침내 유리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두...아빠를 사랑해."
"유리야..."
"그런데...아빠가 이거..알아줬으면 좋겠어..."

살며시 다가온 유리의 손이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큼지막한 아빠의 손에 올려진다. 유리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꼭 깨물며 아빠의 손만 꼭 잡고 있다가 간신히 애틋한 목소리를 꺼내었다.

"아빠가...누구라도...어떤 사람이더라도...내가 모르는 아빠의 모습이 얼마만큼 있다고 하더라도......"

천천히 얼굴에서 아빠의 손을 떼어내는 유리. 그녀는 태현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속삭인다.

"그래도...아빠를 사랑해. 언제까지나...나아...아빠를 사랑할 거야......"
"..유리..야..."

태현의 눈에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뭐라고 말해줘야 좋을까. 유리의 가슴을 저미는 음성에 태현은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에게는 유리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만한 정신적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딸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목이 메여왔으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고, 유리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 행복한 이유, 아니. 살아가는 이유. 태현에게는 오로지 유리밖에 없었다.

"유리야...?"

유리의 조그만 등을 따스한 손길로 어루만지는 태현.

"응..."

대답. 사랑스런 목소리. 태현이 속삭인다.

"아빠가 기분 좋게 해줄까...?"

어째서일까, 태현은 그렇게 말했다. 이것 저것 머리를 굴려서 뭔가 그럴싸한 것을 떠올릴 만한 재주따윈 태현에겐 애초부터 없었다. 더욱이 유리에 대한 사랑만이 태현의 머릿속을 가득히 지배하고 있는 지금. 그가 딸을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이정도가 한계였다. 유리는 자신이 만져주면 사랑스럽게도 행복해했고, 지금 태현은 유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한편,

"기분 좋게......"

아빠의 품 속에서 유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한숨어린 미소를 지었다. 아빠는 바보였다. 기분 좋게. 쾌감. 흥분...아빠의 손길이 자신의 육체에 가져다 주는 그 말초적인 느낌......
유리는 지금까지 그런 것을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 유리 자신이 원한 것은 오직 아빠의 사랑, 아빠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다는 그 느낌. 그것 하나 뿐이었다. 흥분을 느끼고 쾌감을 느끼고 절정을 느끼고. 그런 것은 그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아빠와 하나가 되고 싶은 것도 그런 행위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는 쾌락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더 아빠에게 사랑을 받고 싶으니까...조금만 더 많이 아빠가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좋겠으니까.
오늘 아침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빠가 알아주길 원했다. 자신을 통해서 어떤 기분을 즐길 수 있는지 아빠가 알게 되길 원했다. 그래서 힘들게 용기를 짜내어 아빠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아빠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야한 연기도 했었다. 그 전에 몰래 몇 번씩 훔쳐보고 만져보긴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나 커다래지는 물건에 유리는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익숙한 척, 잘하는 척 한 것은 아빠 때문에... 아빠가 부담 없이 즐겨주길 원했으니까. 그래서 자신을 더 사랑해주고 자신의 몸을 사랑해주고...모든 것을......
아빠를 위해서라면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었다.

"아빠."
"으..응?"

돌연 품에서 얼굴을 떼어내며 유리가 생긋이 웃어오자 태현은 당황해버렸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며 가슴 저미는 사랑고백을 하던 그 모습은 온데 간데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그런 아빠의 당황은 신경쓰지 않으며 애교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배 고프지? 내가 저녁 맛있게 차려줄게. 우리 같이 저녁 먹어."
"아...응."

태현은 자신의 말이 무시 당한 것에 민망함이 들었지만, 그의 그런 기분은 밝아진 유리의 모습 속에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그날 밤. 잠잘 준비를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온 유리는 아빠의 방이 아니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닫고 기대어 선 유리의 손에는 아까 앨범에서 찾아내었던 사진이 들려있었다.

주르르...

미끄러지듯 방바닥에 주저앉아 다시금 찬찬히 사진을 응시하는 유리. 이미 마음에 결정을 내렸었다. 아빠의 정체가 무엇이든 자신은 상관하지 않겠노라고. 아빠가 누구이든, 아빠는 아빠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빠의 정체가 정말로 이것일까? 물론 사진 한장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었다.

"...아니."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 유리. 섣부른 감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뿐인 것이겠지. 사진 한장 뿐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단서들의 의문을 풀어주는 결정적인 증거...

"하아..."

유리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문에 기대었다.

"...아빠는...정말로..."

나지막한 목소리. 그러나 유리는 차마 그 뒷말은 잇지 못하겠는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포옥 수그린다.

"...정말로 조직...폭력배의 보스..였던 거야......?"

마음 속으로나마 아빠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유리. 들려주지 않은 물음이기에 대답 또한 돌아오지 않는다. 유리는 피곤한 눈빛으로 다시금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직 폭력배. 최근 여러 영화 같은 걸로 그들의 정체가 상당히 미화되긴 했지만, 유리는 그것이 말 그대로 미화된 모습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논술 준비와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유리는 시사나 어떤 사회 현상 같은 것들에 대해서 자신이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도록 공부를 해왔고, 그것은 조폭과 같이 사소한,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쳐 유리는 영화를 통해 조폭을 접해서 그들에 대한 정확치 않은 선입견을 가지기보다는 따로 자료 검색을 통해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사회적 문제인 자들인지에 대해 공부를 했고, 지금은 그들이 말 그대로 정말로 무지하게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하아......"

유리는 다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아빠가 조직 폭력배의 보스......
솔직히, 당연히 상관이 없지 않았다. 자신은 아빠가 착실한 샐러리맨으로 성실히 일을 해서 모든 돈으로 레스토랑을 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빠가 저렇게 많은 부하들을 거느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대단하다라던지(물론 유리가 간부만 백여 명인 조직이 얼마만큼 거대한 규모인지를 알 리가 없었다) 뭐 그런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직 폭력배는 그저 나쁜 사람일뿐.
하지만, 그래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아빠를 사랑한다. 아니, 오히려 아빠에 대해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었을까. 조폭들은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고 의리따위는 조금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던데. 아빠는 그런 곳에서 하루하루를 얼마나 불안에 떨며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유리는 아빠가 가엽고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 유리가 아빠를 생각하며 미소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역시 아빠가 현재는 그런쪽에서는 완전히 손을 씻었고, 또 저렇듯 착실하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리는 그게 너무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또 아빠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런 세계에서 빠져나오기는 정말로 힘들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빠는 완전히 그쪽과는 연을 끊은데다 그런 사람들의 때묻은 모습은 조금도 보여주지 않으니까. ...물론 모든 것은 자신의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아빠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오해일 수도 있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아빠가 그런 쪽에서 손을 완전히 씻었다는 게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자신이 아빠를 사랑한다는 것. 아니, 바뀐 게 있다면 자신이 아빠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아빠의 모습을 하나 더 알게 되었고, 그래서 아빠를 사랑할 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유리는 조금 기뻤다. 새롭게 알게 된 아빠의 모습이 자신의 오해이든 진실이든 아빠의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하는 자신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은 아빠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나보다.

"음..."

유리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 속의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역시 우리 아빠는 멋지단 말야. 잘 생겨도 정도껏 잘 생겨야지. 헤헤..."

유리는 사진을 가슴에 꼭 품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아빠의 어떤 과거라도 그것이 아빠의 과거이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할 거라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유리는 그렇게 한참동안 아빠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 빠져 있었다. 오늘 유리는 아빠의 방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같이 자자고 하면 아빠가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유리는 왜인지 오늘만큼은 아빠에게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고 싶었다. 아빠가, 자신은 아빠를 위해서라면 아빠랑 같이 자는 것조차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이 자길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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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31부 어떠셨나요? 즐겁게 보셨다면 좋겠네요ㅎ~.

사실 조회수야 보스의 딸이 그닥 야하지도 않고 연중연중 근 3년 이상 올라왔다 사라졌다 했으니 높지 않은 게 당연해요 ㅋ

그러니까 더욱^~^ 그냥 가시지 마시구 댓글 추천으로 열심히 글쓰는 작가 기 좀 살려주세요~^^~

낼 뵙겠숨니당~~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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