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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선을 넘은 것은 누나 쪽이었다 - 2부7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05 643회 0건
집에 도착했다. 막상 집으로 오니 조금 더 지은이네 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은이와 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던 주제에, 지금은 잠시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 아쉽다니, 이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확신한다. 나는 지은이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난 그런 모습까지 좋아한 거니까.”

지은이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를 인정받은 것 같았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더러운 부분, 가끔은 혐오스럽기까지 한 나의 마음속 어둡고 깊은 곳까지 받아들여준 것 같다. 지은이는 그렇게까지 깊은 뜻을 담아 이야기한 게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 감동이었다.

사람과 깊은 사이가 되려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얼마 전까지의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이렇게도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마음은 더욱 쌓여갈 것 같다. 지금만 해도 이 정도인데, 일주일 후, 한 달 후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대문을 지나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평소에는 본 적이 없는 구두가 놓여진 것을 발견했다. 빨간색에 5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힐이 달린 구두다. 대체로 내가 집안 청소를 거의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에 신발장 정리도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누나의 신발은 다 알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 본다.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샤워를 한 건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누나가 방에서 나온다. 커다란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다.

“다녀왔어?”
“응. 누나 일찍 왔네.”
“오늘은 공부가 잘 안 돼서. 너는 조금 늦었네.”
“들를 때가 있어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말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누나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근데, 이 구두 언제 산 거야?”
“오늘 사 왔어.”
“학교 끝나고 시간이 됐어?”
“오늘 56교시가 휴강이 났거든. 그래서 친구랑 같이 시내에 나가서 사왔어. 이쁘지.”
“그러네.”

확실히 이쁜 디자인이다. 하지만 조금 의외다. 누나는 발이 아프다는 이유로 힐이 붙은 구두를 잘 신지 않는 편인데.

“웬일로 구두를 산 거야?”
“글쎄.”

누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표정이다. 별로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그냥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누나 오늘 저녁 뭐가 먹고 싶어?”
“뭐든지 좋은데. 내 동생은 요리를 잘하니까.”
“그래도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야.”

누나는 잠시 고민하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로 할지 고민 되네. 오늘 장 보러 가는 거야?”
“응.”
“그러면 같이 가자. 거기서 정할래.”
“그래, 그러면 그러자.”
“기다려 얼른 준비할 테니까.”

누나가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쩐지 신이 난 것처럼 보인다. 하긴, 누나와 함께 장을 보러 가는 일은 거의 한 달만이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한 달간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는 일이 많아서 그랬다. 원래는 주말에 누나와 함께 일주일 단위의 장을 보러 갔다 오곤 했다. 한 달 전에 누나가 시험기간이라서 수고를 덜어줄 겸 평일에 혼자서 갔다 왔는데, 그 이후로는 장을 볼 날이 계속 평일이 되다보니 한 달간 혼자서 장을 보게 되었다.

나도 오랜만에 누나와 외출을 하는 것이 기쁘다.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귀찮지만, 일단 집에 왔으니까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교복의 단추를 끌렀다. 그리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땀이 조금 났다. 이따가 다녀와서 샤워라도 해야겠다.

청바지와 파란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거실에 나가서 소파에 앉았다. 리모콘을 집어 텔레비전을 틀었다. 채널을 돌려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고, 원래 텔레비전과는 맞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지 관심을 끄는 방송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케이블 채널 하나를 골라서 영화라도 보기로 했다. 액션영화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니 클라이막스인 듯하다.

주인공은 용케도 총알을 맞지 않으며, 적들을 물리친다. 아, 맞았다. 팔에 맞았다. 하지만 아파하는 것은 부상을 입은 순간 잠깐이고 그 다음부터는 고통을 잊어버린 건지 열심히 다친 팔을 휘두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적들이라면 한 방이면 죽어버리는 위험한 무기가 주인공에게는 단지 길을 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상처는 오히려 훈장 같은 것이다. 예의상 다쳐준다.

결국 주인공은 수많은 적들을 혼자서 쓸어버렸다. 마지막에 적의 두목과 한창 대결을 펼치지만, 그건 적에 대한 예의로 잠시 상대해주는 것뿐이다. 결국 악당 두목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악당 두목, 저 정도 나이면 가정을 꾸리고 있을 텐데 젊은 주인공 녀석은 가차 없이 끝장을 내버린다. 공중도덕을 모르는 나쁜 놈이다. 아무리 적들이라지만 대량 살상을 마친 이후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주인공과 사랑의 키스를 나눈다. 여주인공도 여주인공이다. 살인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의 눈빛을 보낸다. 사이코패스 커플인가보다.

사실 알고 보면, 주인공이 적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적들도 물론 대량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주인공이 막아낸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은 주인공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만약에 지금 이 영화에 속편이 있다면, 속편의 악당은 전편의 주인공이어야 마땅하다.

쓸데없는 시간에 매진하는 동안 누나가 겨우 방에서 나왔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6시가 거의 다 됐다. 내가 5시 20분쯤에 집에 도착했으니까, 30분 이상이 걸린 셈이다.

“누나, 왜 그렇게 꾸몄어?”
“그냥.”

누나가 혀를 내밀며 귀엽게 웃는다.

여자는 본디 외출 준비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법이라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 겨우 장 보러 가는데 많이도 꾸몄다. 누나는 분홍색의 라운드넥 티셔츠 위에 더 연한 분홍색의 나시를 걸쳤다. 그리고는 청색 계열의 스커트를 입었다. 그보다 스커트가 너무 짧다. 허벅지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잖아. 그렇다고 그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누나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누나, 옷 잘 어울린다.”
“그래? 다행이다. 아까 구두 사러 간 김에 사봤어. 구두랑도 잘 어울린다.”

누나가 어린애 같이 좋아하며 웃는다. 누나의 미소를 보면, 가끔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만큼 누나의 미소는 때묻지 않았다. 3년 전, 이 미소를 되찾는데 1년 이상의 시간을 소비했다. 다시는 이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출발할까?”
“응.”

누나와 함께 외출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내가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온 구두를 신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할인마트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짐 때문에 택시를 타고 오지만, 마트 내부를 돌아다녀야 하니 1시간 가까이 걷게 될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구두를 신다니. 거기다 새로 산 구두는 길이 들지 않아서 특히 더 힘들 것이다. 갈 때도 택시를 타자고 누나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쓸모없는 가방을 꺼내서 누나가 신을 운동화를 넣어 메고 가는 중이다.

“오랜만에 둘이 나오니까 좋다, 그치?”
“응.”
“한동안 혼자서만 장 보러 갔다 오고.”
“누나가 시험기간이라서 그랬지. 그 다음에는 타이밍이 안 맞았고.”
“그래도.”
“미안, 다음부터는 꼭 같이 갈게.”
“응!”

누나가 갑자기 내 옆으로 붙어 팔짱을 꼈다.

“윽!”
“왜 그래?”
“아니야.”

하필 왼쪽에서 팔짱을 껴서 어깨가 아팠다. 오른쪽 어깨에는 가방을 멨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왼쪽 어깨에 가방을 메는 건데.

“혹시 어디 아파?”
“아니야. 누나 팔꿈치에 옆구리 부딪혀서 놀라서 그랬어.”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는 누나. 왼쪽 어깨가 아프니까 팔짱을 풀어달라는 소리를 못하겠다. 아무래도 걸을 때마다 잡힌 팔이 당겨지니 통증이 계속 느껴졌다. 그래도 계속해서 통증이 나다보니 익숙해져서 참을만 했다.

“누나, 발 안 아파?”
“응, 안 아파.”

표정은 조금 괴로워 보이지만 누나가 괜찮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줘야겠다.

누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길을 가다보니 핸드폰 판매점이 보였다. 핸드폰이나 맞춰볼까. 슬슬 핸드폰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공짜로 나오는 핸드폰도 많으니 부담도 적을 것이다.

“누나, 나 핸드폰 사도 될까?”
“응. 필요해졌어?”
“응.”
“그래 당장 하나 사자.”

사실 누나는 그동안 계속 나에게 핸드폰을 사라고 말해왔다. 나는 어차피 사용하지도 않을 거 돈이 아깝다고 거절해왔지만, 이제는 필요성이 느껴진다.

“누나, 그런데 보호자 신분증이나 등본 같은 거 있어야 하지 않아?”
“괜찮아,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삼촌 민증이랑 등본 가지고 있어. 통장이나 그런 거 다 가지고 다니거든. 그리고 보통 그런 거 없어도 그냥 만들어줘. 신규고객을 늘려서 어떻게든 실적을 늘리려고 하거든.”

그렇게 말하며 누나가 해맑게 웃는다. 분명 평소와 똑같은 미소일 텐데 어딘가 어둠이 느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더러운 이동통신사.”

……기분 탓이겠지.

누나가 핸드백을 뒤져 곱게 접힌 종이를 보여준다. 정말 철저한 준비성이다. 누나가 건네는 주민등록증과 등본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우리 남매의 현재 보호자는 삼촌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삼촌이 보호자를 자처해주셨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평범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이유도 삼촌 덕분이다. 가까운 미래에 꼭 보답을 할 것이다.

그나저나, 삼촌의 주민등록등을 누나가 가지고 있으면, 삼촌은 어떻게 하지?

“어서오세요.”

친절한 여성분이 우리 남매를 맞아준다.

“핸드폰을 새로 맞추려고 하는데요.”

점원 누나의 속사포 같은 설명이 이어졌다. 싸게 맞추고 싶다는 얘기를 하니까, 알아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해준다. 신중이 점원의 설명을 들었다. 이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누나의 설명도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복잡하게만 핸드폰 가입 절차에 대한 것도 설명을 듣고 차근차근 진행하다 보니, 금방 끝났다.

점원 누나가 추천해주는 핸드폰 중 마음에 드는 기종을 골랐다. 어차피 통화 이외에는 사용할 것 같지 않아서, 굳이 새로운 기종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고장 날 것 같지 않은 기종으로 골랐다.

대략 10 분만에 내 핸드폰이 생겼다. 생각보다 핸드폰을 사고 가입하는 게 어렵지 않구나. 점원 누나가 몇 시간 후부터 정식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핸드폰의 설명서와 박스 등의 다른 부품들이 들어있는 박스를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가져오길 잘했다.

“두 분, 커플이세요?”

이제 볼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가려는데, 점원 누나가 물었다.

“네, 커플이에요.”
“잘 어울리세요.”

가게를 나왔다.

“이제 마트에 가자.”

대답이 없었다. 나를 따라오려는 기색도 없었다. 옆을 돌아보자, 누나의 얼굴이 굉장한 기세로 빨갛게 되어 있었다.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왜 그래, 누나?”
“너,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커, 커, 커,”
“커플이라고?”

누나가 더욱더 당황한다.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려면 얼마나 당황해야 할까.

“그, 그, 그렇게 말조심 안 하고 말하면!”
“괜찮아, 다시 볼 사람 아니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사실 나도 조금 경솔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그런 식으로 말을 했을까. 하지만, 역시 다시 볼일이 없을 사람이니까.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뭐, 그런 사소한 일을 거치며 최종 목적지 마트에 도착했다. 마트에 들어갔다. 이곳에 할인마트가 생긴 지는 대략 6개월 정도가 되었다. 그전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트를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야했다. 은근히 번거로웠는데 가까운 곳에 마트가 생겨서 편리해졌다.

이 마트의 구조는 대략 이렇다. 1층은 식품, 가공생활. 2층은 패션, 잡화, 미용, 아동, 문화. 3층은 자연주의, 가전, 건강, 스포츠, 홈인테리어. 외운 것은 아니고 들어가면서 입구에 그려진 구조도에 써 있었다. 이곳에 오는 주된 이유가 집에서 먹을 식사이기 때문에, 2층이나 3층은 별로 가본 적이 없다. 오늘도 1층에서만 돌아다닐 예정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쇼핑카트가 몇 줄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자물쇠에 100원을 넣고, 오늘 끌고 다닐 쇼핑카트를 하나 잡았다.

“와, 수박 맛있겠다.”
“여름이라서 수박이 많이 나와 있구나. 하나 사갈까?”
“그래.”

들어오면서 집어온 팸플릿을 보니, 아침에는 세일도 했다. 조금 아깝다. 다음에 올 때는 주말에 세일 시간에 맞춰서 와야겠다.

장을 볼 때 먹을 것은 보통 눈에 보이는 대로 고르곤 한다. 오늘은 돼지고기가 눈에 띈다. 이번 주에는 앞다리 살을 사서 김치돼지찜이라도 만들어 먹을까. 100g에 830원이다. 싸다. 만원어치 사면 며칠 동안 먹을 수 있겠다. 만원어치를 직원에게 포장 받아 카트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계란도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우유도 사야지. 생각보다 살게 많구나. 오늘 짐이 꽤나 무겁겠다. 어깨도 아픈데 잘 들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쇼핑을 마치고 나니, 정말로 짐이 많았다. 부상당한 어깨로는 정말 고생할 것 같은 무게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끝내고 두툼한 봉투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왼쪽 어깨가 아프다. 그나마 가벼운 것을 왼쪽 팔로 들려고 했는데, 둘 다 무게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래도 핸드폰과 신발이 든 가방을 누나에게 맡겨서 좀 낫다.

“누나, 얼른 택시 타자.”
“내가 안 도와줘도 돼?”
“그럼 왼쪽에 있는 봉투 손잡이 하나 잡아줘. 같이 들자.

누나가 조금 거들어줘서 한결 편하게 마트 밖으로 나왔다. 마트 밖에는 택시들이 많다. 오는 길이 가까워서 걸어서 왔더라도 돌아갈 때는 무거운 짐을 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가용으로 오는 사람도 많지만 대중교통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 비교적 쉽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대문 앞에서 택시가 멈췄다. 나는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누나는 택시비를 지불했다.

“안녕히 가세요.”

누나가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친절히 인사를 한다. 나도 택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나가 이미 택시의 문을 닫아서 목소리가 안 들릴 것 같아서 인사말을 하지는 않았다.

“누나, 무거워. 얼른 들어가자.”
“응.”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얼른 거실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무겁다. 신발을 벗고 방바닥 위로 올라와서 비닐봉투 하나를 끌어다 부엌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누나가 끌고 온다. 부엌으로 옮긴 봉투에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건 김치 냉장고에 넣어야지. 이건 냉동칸에. 이건 냉장칸에.

“벌써 8시네.”
“응.”

누나의 말에 밖을 바라보니 밖에 노을이 지고 있다.

“저녁은 어떻게 할까?”
“오늘은 조금 늦었으니까, 간단하게 먹자.”

오늘 사온 식재료는 내일 사용하기로 하고, 아침에 해놨던 음식을 끝내기로 했다. 누나가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 준비는 금방 끝났다. 아침에 해놨던 요리를 데우는 걸로 끝났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시작했다.

“근데, 지금 시간에 밥 먹으면 살 찌지 않을까?”
“어차피 한 두 시간 차인데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살 안쪘는데 뭐.”
“그럴까?”

누나는 조금 걸리는 듯 했지만, 이내 식사를 시작했다. 저녁을 늦게 먹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 늦은 밤에 또 먹는 게 문제지.

“운하야.”
“응?”
“이번 주 일요일에 어디 놀러 가지 않을래?”
“응.”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오랜만에 누나와 외출을 하는 것은 꽤나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응, 응? 응? 어?”
“왜 그래?”

큰일이다. 무심결에 누나의 부탁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누나.”
“응.”
“저기, 사실 주말에 약속이 있거든.”
“그래? 누구랑?”
”어, 성진이랑.”
“아, 그 같은 반 친구?”
“응.”

누나가 성진이 녀석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누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종종 성진이의 이름이 나오다보니, 이름은 외우게 되었다.

“무슨 약속인데?”
“아, 그냥 뭐, 시내 돌아다니면서 놀려고.”
“진짜? 네가? 의외다. 밖에서 친구들이랑 노는 거 오랜만인 거 같애.”
“응. 가끔은 친구들이랑 놀기도 해야 된다 싶어서.”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다행이다. 자연스럽게 넘긴 것 같다. 누나는 이해는 하는 눈치였지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표정으로 다 드러난다.

“누나, 그러면 토요일에 놀러 가지 않을래?”
“어, 그럴래? 그러자!”

누나가 화색이 돌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놀러 가고 싶어?”
“어디든지 상관 없어. 아, 영화 볼까? 시내도 돌아다니고.”

누나가 밝은 표정으로 계획을 잡는다. 어느새 내일은 금요일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 것 같기도 하고, 빠르게 흐른 것 같기도 하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목욕을 했다. 이제 완연히 여름 날씨가 되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난다. 아직 7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날씨면 7월부터는 어느 정도일지 걱정된다. 하긴,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밖에 나가지 않으면 그 더위를 체감할 일이 많지 않다. 마찬가지로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밖에만 안 나가면 그리 춥지 않다.

욕조에 몸을 담군 채, 핸드폰으로 지은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운하야?”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보다 핸드폰 산 거야?”
“응. 이제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어떻게 된 건지 지은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인 걸 알았다. 참 대단하다.

“일부러 통화 많이 해도 되는 걸로 했어.”
“잘 됐다. 내일 핸드폰 좀 보여줘.”
“응.”

잠시 실수로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사자마자 핸드폰이 고장 날 뻔했다. 욕조 바깥쪽으로 상체를 내놓고 전화를 했다. 이러면 떨어뜨려도 물에 떨어질 걱정은 없다.

“지금 뭐하고 있어?”
“응, 샤워하고 나왔어.”
“나는 목욕 중인데.”
“지금 욕조에 들어가 있어?”
“응.”
“알몸으로?”
“뭐야, 야해.”

아까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전화로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게 조금 신기하다. 계속해서 소재가 떠오른다. 학교 이야기도 하고, 데이트 이야기도 했다. 우리 누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지은이의 동생 이야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1시간이나 지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욕조에서 나가야겠다.”
“그래, 그럼 이만 끊을게.”
“응. 내일 봐.”
“내일 봐.”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물이 완전히 미지근해졌다. 수분이 많이 빠져나갔는지 목이 많이 말랐다. 몸이 나른하다. 얼른 씻고 나가야겠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이 나른하니까 정신도 멍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필요 없어진 핸드폰을 욕실 밖에 내놨다. 나른함을 날려버릴겸 물을 조금 차갑게 했다.

목욕을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몸을 닦고 나서는 로션을 발랐다. 피부가 건조한 편이라 씻고 나면 얼굴이 하얗게 일어나곤 한다. 특히 겨울에는 그게 심하다. 어릴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해마다 점점 피부가 건조해져서 보다 못한 누나가 로션을 사줬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내가 사서 바르고 있다. 특히 겨울에는 입술이나 손이 갈라져 피가 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제는 걱정이 없다.

“오늘 따라 목욕을 오래 하네.”
“응. 멍하니 있다보니까.”

옷을 입고 거실로 나오니 누나가 쿠션을 안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그 옆에 가서 앉았다. 아, 하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목욕을 오래 했더니 몸이 나른해서 푹신한 소파가 평소보다 더 편하게 느껴진다.

“무슨 영화야?”
“몰라. 방금 틀었어.”

누나가 케이블 채널에서 하는 영화를 보고 있다. 무슨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남자랑 여자랑 같이 있으니 연애영화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연애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연애영화는 여성을 겨냥한 내용이 많은 만큼, 한 여자를 둘러싼 삼각관계를 주로 다루곤 한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나는 그런 내용이 싫다. 자꾸 방황하는 여자의 모습이 짜증이 날뿐더러, 여자가 결국 한 남자를 선택하면 다른 한 남자는 당연히 버림받는다. 영화 안에선 해피엔딩인 것처럼 끝내더라도 그건 진정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해피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져야 해피라고 생각한다. 뭐, 액션 영화 같은 경우는 적이 불행해져야 해피엔딩이 되지만.

그래도 연애영화를 무조건 피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영화의 장르보다는 그 자체의 재미를 더 중요시한다.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라도 재미있다면 그냥 본다.

누나 옆으로 기대고 있다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 누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졸려?”
“응. 목욕을 너무 오래했나 봐.”
“그러면 방에 가서 자.”
“누나는?”
“이거 보고 잘래.”

누나는 연애영화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로맨틱 코미디영화를 좋아한다. 이 영화는 코미디한 부분은 없는 모양인데, 어쨌든 누나가 집중해서 보고 있다. 열심히 배우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보니 이제 마지막 부분인가 보다. 앞의 내용을 안 봐서 도무지 내용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대로는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방으로 향했다.

욕실 앞에 있는 핸드폰을 줍고 방으로 들어갔다. 샀을 때 충전이 끝까지 안 되어 있었고, 지은이와 통화도 길게 한 터라 배터리가 한 칸밖에 남지 않았다.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고 핸드폰과 연결했다. 충전기에 빨간불이 들어온다. 방 불을 껐다.

침대에 누웠다. 조금 전에 소파에 누워있을 때는 바로 꿈나라로 갈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정도로 졸리진 않는다. 최고로 졸린 때에 일어나면 졸음이 많이 가신다. 다시 잠이 쏟아질 때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그래봤자 대략 10분이면 다시 잘 것 같긴 하지만.

침대에 누우니 고민이 생긴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이대로 지내야할까. 계속 이대로 지내도 괜찮은 걸까.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상담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상담하고 싶어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을 통해 보편적인 해결책을 끌어낼 수 없다. 애초에 남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다.

잠이 달아나버렸다. 잠시 외면하고 있던 문제를 다시 고민하니 잠이 확 깼다. 그냥 소파에서 잠을 잘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고민이 싫다. 평생 고민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때 방 불이 켜졌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 옆에 누나가 서 있다.

“안 자고 있었어?”
“응. 영화는 끝난 거야?”
“응.”

누나가 무언가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인다.

“왜 그래, 누나?”
“응?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베개 가져가려고.”

그러고 보니, 어제 누나가 여기서 자느라 베개가 여전히 여기에 있다. 아, 누나가 왜 머뭇거리고 있는지 알았다.

“괜찮아, 누나. 여기서 자도.”
“으응.”

누나가 그제야 내 옆으로 와서 눕는다. 아무 말 없이 내 옆으로 눕기는 조금 부끄러웠나보다. 누나의 이런 점이 귀엽다.

“이젠 말 안 하고 그냥 옆에 와서 누워도 돼.”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누나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갑자기 잠이 오기 시작한다. 동시에 깨달았다. 아까까지 잠이 오다가 잠이 깬 이유. 그건 옆에 누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파에서 잠이 쏟아지던 이유는 내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저절로 미소가 나오며 눈이 감긴다.

“운하야, 자?”
“아니.”
“그래.”

잠에 빠지기 직전, 누나가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어?”
“아니야.”
“왜, 말해봐.”

누나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인다. 누나에게 있어 말하기 조금 부끄러운 말인가 보다.

“아까 있잖아.”
“아까?”
“커플이라고 말해준 거, 당황하긴 했는데, 사실 기뻤어.”

누나가 사랑스럽도록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누나가 굳이 방 불을 켜놓은 이유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구나.

“누나는 정말 귀여워.”

누나의 얼굴이 홍조를 띈다. 그 얼굴을 보니, 입맞춤을 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볍게 누나와 내가 닿았다. 누나가 놀랐는지 후딱 뒤로 떨어진다. 이런 반응도 사랑스럽다.

“너, 갑자기!”
“갑자기, 뭐?”
“그, 뽀, 뽀뽀를.”
“싫었어?”

대답이 없다. 아니 대답할 여력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누나는 여전히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운하가 웃는 표정은 색기가 있어.”

하고 누나가 말했다. 들어본 적 있다. 그것도 오늘. 아까 지은이에게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누나한테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보통 색기라는 건 여자한테 쓰는 말이지 않나? 내가 색기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누나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가 조금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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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얼른 열심히 써서 완결까지 달려야겠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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