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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53 864회 0건

가만히 있어도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말복은 지나서 인지 해만 떨어지면 그나마 견딜만 했지만 여전히 낮에 움직이는 것은 힘든 날이었다. 희주는 사촌 언니인 미경을 만나러 할0스 커피점에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희주는 어서 자리에 앉아서 시원한 아이스 커피 한잔 마시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주야, 여기

사촌언니인 미경이 손짓을 하며 희주를 불렀다. 구석자리에 앉아서 이미 한잔 시켜놓고 있는 미경에게로 희주는 다가갔다.

-어머, 언니, 잘 지냈어? 준비는 다 한거야?
-준비라고 할게 뭐 있나. 너도 하나 주문해. 언니가 사줄게.
-아니야, 언니. 오히려 내가 언니 밥한끼 샀어야 했는데 시간이 촉박해서 어떻게 해.

주문대에서 아이스 카페라떼를 주문한 희주는 커피를 들고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미경은 다음주에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간다. 기본 6개월에 그곳에서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하면 최장 1년, 즉 두 학기를 교환학생으로 간다고 하니 1년동안은 못 볼 사촌 언니였다. 어렸을 때 같은 도시에 살아서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는데 희주네 집이 이사를 가면서 학창시절에는 그다지 교류를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희주도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다시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는데 다시 언니가 외국으로 간다고 하니 희주도 나름 서운했었다.

-그런데 너 짐은 옮길 것도 없잖아? 이모랑 전화해보니깐 따로 준비할건 없다던데? 기숙사에서 뺀 짐들은 지금 다 내 방에 있는거지?
-응, 별거 없어. 언니가 가구는 다 놓고 갈거라니깐... 내가 고맙지. 잘 쓸게.

미경은 자신이 살던 집이 아직 전세기간이 끝나지 않아 처리가 곤란하던 차에 어른들끼리 희주를 그곳에서 살게 하도록 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희주의 부모님은 여자 혼자 살게 하는게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기숙사에 살게 했다. 그러나 미경은 현재 룸메이트와 살고 있었고 희주의 부모님도 여자 혼자 사는 것보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이 그나마 안전할 것 같아 미경 부모님의 제의를 승낙한 것이었다.

-그래도 언니 때문에 진짜 돈 많이 굳었어. 하던 알바도 정리하려구.
-아직도 학원 다녀? 큰 학원이라 그런가 돈 많이 주지? 에이,, 웬만하면 그냥 다녀. 앞으로 돈 쓸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 너 그리고 연애한다며? ㅋㅋㅋㅋ

미경이 연애한다고 놀릴때 커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는지 켁켁 기침을 하더니 희주가 손사래를 쳤다.

-연애는 무슨... 놀리고 있어. ㅋㅋ 소개팅 한번 한거 갖고.
-우리 희주가 얼마나 예쁜데.. 너만 맘에 들면 남자 마음은 볼 것도 없지 않아? ㅋㅋ
-또 왜 이러실까 ㅋㅋ 난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지금 몇 번 만나기는 하는데 남자애가 별 말이 없네.
-뭐하는 친군데?
-학생이지 뭐.
-너 아직 연애 안해봤지? 이런저런 생각 깊게 하지 말고 나쁜놈 아니다 싶으면 일단 계속 만나봐. 이것저것 재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고 청춘 다 간다. ㅋㅋ 어? 채경이 왔나부다.

미경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여보세요? 응? 응.. 거기로 들어와. 문 반대쪽으로 구석에 우리 있어.

미경이 전화를 끊고 내려놓았다. 잠시 뒤에 커피점 문을 열고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희주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눈길을 끌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 하얀 피부, 글래머러스 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꽃무늬 미니스커트 밑으로 쭉뻗은 긴다리는 모델과도 같았다. 그리 높지 않은 슈즈를 신고 있었음에도 여자의 비율은 한번쯤 부럽다는 느낌이 들게끔 완벽했다. 여자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미경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할0스가 저쪽에도 하나 있어서 좀 헤맸어.
-채경아 인사해, 내 사촌동생 희주야.
-안녕. 난 채경이야, 현채경.

여자의 이름은 채경이었다. 약간 낮은 톤의 묘한 목소리였다. 외모만 보면 콜센터나 승무원같은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졌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차분하고 사람을 빨아들이는 보이스였다. 희주는 그 목소리가 섹시하게 들렸다.

-네, 안녕하세요, 저 미경언니 사촌 서희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냐, 나야말로 부탁하지. 우리 이제 같이 살 거잖아. ㅋㅋㅋ 그럼 미경이 방에 있던 짐들이 다 니꺼였구나.
-네, 이번주말에 부모님 서울로 오시면 이사할게요. 뭐 이사랄것도 없지만요 ㅎㅎ

자리에 앉아서 길거리에서 받은 팸플랫으로 부채질을 하던 채경을 바라보았다. 목선에서 이어진 젖가슴 윗 언저리까지 촉촉이 땀이 맺혀있었다. 약속에 늦은 줄 알고 급히 온 모양이었다. 희주의 시선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내려가보였다. 채경의 티셔츠는 프린팅 된 글자가 어그러질만큼 풍만한 유방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들끼는 보정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희주는 유심히 쳐다보았다.

-지금 희주의 연애스토리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앗, 언니....
-희주야, 여기 채경이한테 모르는거 있으면 물어봐. 박사님 이셔 ㅋㅋㅋ

땀을 식히고 있던 채경은 따로 음료를 시키지 않고 희주의 컵에 있는 얼음 두조각을 입에 물며 말했다.

-연애해? 언니한테 물어봐. 남자에 대해서 다 알려줄게 ㅋㅋ
-아니에요, 소개팅 한번 한 거 갖고 미경언니가 놀리는거에요.
-소개팅을 해야 연애를 하는거지. 그럼 이제 연애 한다고 보는게 맞네. 희주처럼 예쁜 아이를 거절할 남자가 어딨다구.
-아니에요, ㅎㅎ 오히려 언니가 정말 예쁘신데요? 처음 들어오실 때 너무 예쁘셔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희주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채경은 분명 자신에게 의례상 예쁘다고 해주었을 것인데, 자신은 너무 솔직한 심정을 말해버린건 아닌가 싶어 순간 당황을 했다.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건 아닐까 싶어 눈치만 보고 있었지만 채경과 미경은 별 반응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집을 아예 지금 보고 갈래? 나 어차피 교수님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시간이 잠깐 뜨는데. 우리 셋이 택시타고 가면 기본요금 밖에 안나갈거야. 채경아 너 오늘 약속있어?

미경이 채경과 희주에게 제안을 했다.

-아니,, 없는데. 그럼 난 희주랑 저녁먹으면 되겠다. 가자.

셋은 커피점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10여분 만에 도착해서 내렸다. 밖에서 보기에는 원룸처럼 보였으나 들어가서 보니 제법 큰 집이었다. 투룸과 욕실, 주방이 있었다. 채경이 큰 방을 쓰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변기와 세면대가 있는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미경은 반대편에 작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희주가 앞으로 쓸 방이었다. 미경이 두고가는 침대와 책상, 화장대는 희주가 그대로 쓰기로 했다. 주방에 있는 간이 테이블과 아기자기한 예쁜 그릇들이 있었다. 거실에도 같은 쇼파와 티비 서랍들이 있었다. 희주는 미경을 취향을 알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집이 정말 깔끔했다. 거실에는 창문이 이중으로 나 있었는데 창문을 열고 나가 두 번째 창문으로 나가는 사이 공간은 베란다처럼 이용했다. 빨래 건조대와 드럼세탁기, 안쓰는 계절 용품이 쌓여있었다.

-집 너무 좋아요. 언니. 여기 얼마에요?
-5천에 30이야. 원래 전세였는데 전세비용 깎고 월세를 조금 내기로 했어. 내가 2천내고 채경이가 3천 냈어. 그래서 큰방은 채경이가 내기로 했고. 월세는 반반식 내고 있지.

미경은 구석구석 보여주며 희주에게 집을 소개했다. 채경은 옷을 갈아입었는지 편안한 옷차림으로 거실로 나왔다.

-큰방이라고 딱히 더 좋을 것도 없어. 청소할것도 더 많고 화장실은 잘 사용하지도 않아. 그냥 아침에 바쁠 때 다행인정도?

채경은 글래스에 오렌지주스를 따라주며 희주에게 건냈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서 보니 채경의 키는 훨씬 더 커보였다. 희주는 자신의 키가 62정도 였는데 채경은 67~68은 되보였다.

-월세는 내가 한 번에 내니까 희주 너는 그냥 나한테 주면 돼. 그리고 넌 동생이니깐 10만원만 받을게. ㅋㅋ
-아니에요, 언니. 그래도 똑같이 사는데 어떻게 그래요
-아니야.. 내가 너 청소든 밥이든 부려먹으려고 그래 ㅋㅋㅋ 그냥 10만원만 줘. 그래야 나도 더 편해.
-알았어요. ㅋㅋㅋ 언니. 밥은 몰라도 청소는 진짜 자신 있어요

집을 쭉 둘러보고는 셋은 쇼파에 앉아 쉬었다. 채경은 에어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체질이었지만 미경이 더위를 못참는 성격이라 에어컨을 가동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미경이 핸드폰을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 그럼 둘이 저녁 맛있게 먹고 나 출발하기 전에 셋이 시간내서 한번 더 보자.
-응 잘 갔다와.

미경은 건물에서 나갔다. 희주는 미경이 나가면 채경과 단둘이 있는 것이 낯설고 어색할줄 알았는데 막상 닥쳐보니 그렇지 않았다. 채경은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를 하면서 희주를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 희주도 이제 갓 3시간 본 채경이 3년은 알았던 사이인것 처럼 편안했다.

-희주야, 저녁 뭐 먹을까? 요 앞에 나가서 칼국수 먹을래? 괜찮은 곳 있는데..
-네 그래요. 저 칼국수 좋아해요.

채경은 방금 이용한 컵과 접시를 가져가 바로 설거지를 했다. 채경도 미경만큼이나 깔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집정리를 간단히 마친 후에 채경과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국수 집에 갔다. 바지락 칼국수를 2인분을 시켰더니, 버너위에 큰 냄비를 얹어주었다. 둘은 칼국수를 다 먹고 나니 주인아저씨가 밥과 계란 등을 넣고 밥을 볶아 주셨다.

-아저씨, 고마워요
-응, 이 아가씨는 누구야?

채경은 단골답게 아저씨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경이 아시죠? 미경이 유학가고 대신 같이 살게된 친구에요.
-안녕하세요. ㅋㅋ 자주 올게요

희주는 아저씨한테 인사를 했다.

-그래, 자주와. 여기 학생은 칼국수 먹으러 자주 오니깐 같이 오면 되겠네
-네.

희주는 아저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밥을 먹었다.

-편의점은 오면서 봤지? 조금 더 걸어나가면 마트하나 있거든. 급하거나 간단한건 편의점에서 사고 과일이나 많이 사야 할 것들 장보러 갈 때는 미경이랑 마트로 다녔었어. 너 이사오면 우리도 마트 한번 가자. 약국은 저쪽 초등학교 보이지? 그 초등학교 꺽으면 병원하나 있거든. 그 건물 옆에 큰 약국 하나 있어. 큰 길 나가는 곳에 다0소 같은거 몇 개 있고.
-네. 그래요. 살면서 천천히 물어볼게요.
-Y대 다닌다고 그랬나? 공부 열심히 했나부네. 이곳에서 한 2,30분 걸리지? 그래도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으니깐 그렇게 힘들진 않을거야.
-저도 빨리 이사오고 싶어요. 기숙사 살았어서 한번도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기대되요.
-연애하는거 맞네. ㅋㅋㅋ 이렇게 나와서 사는 걸 기대하는 거 보니. ㅋㅋㅋ
-아니에요, 언니. 놀리지 마세요 ㅋㅋㅋ

채경이 계산을 하고 칼국수 집에서 나왔다. 희주는 미경의 방에 있는 짐들을 보려고 집으로 가려고 했다. 채경도 희주와 후식을 하기 위해 같이 가자고 했다. 희주는 건물 앞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벤츠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채경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은 후에 희주에게 말했다.

-희주야, 나 친구가 급히 보자네.. 차라도 한잔 하려고 했는데 어쩌지?
-괜찮아요. 언니. 이번 주에 이사 오는데요 뭘. 앞으로 매일 볼텐데.. 얼른 가서 일봐요. 그럼 주말에 봐요. 안녕
-그래, 조심히 가.




희주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주말까지 쓸 것들만 내놓고 나머지 짐들은 정리했다. 같이 방을 쓰던 친구들도 다음학기부터는 원룸으로 간다고 했다. 한 학기동안 이야기도 많이 하고 야식도 먹던 친구들 이었다. 학기가 시작하면 시간내서 밥한끼 먹기로 했다.

<희주야, 학교야? 나도 지금 학교 가는 길인데 잠깐 볼래?>

얼마전 소개팅으로 만난 김준기였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소개해준 친구인데 같은 학교 다른 과 동갑 남자애였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자상함이 매력이었다. 준기도 아직 연애경험이 없는지 희주를 만날때마다 수줍어했다. 희주는 남자가 자신을 확 휘어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준기는 항상 결정적인 타이밍에 머뭇거렸다. 소개팅을 한 후에 영화한번 보고 밥한번 먹었지만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래. 중도 1층에서 보자.>

희주는 중도 1층의 라운지에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준기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저녁 먹었어?
-응. 친구랑 벌써 먹었어. 넌 아직 안먹은거야?
-난 집에 있다가 학교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

저녁을 먹기에는 약간 늦은 시간이었다. 준기는 서울에 살았다. 집에서 통학하는 관계로 주로 학교에서 만났다. 중앙도서관에서 앉아 숨을 돌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주는 칼국수를 먹었기 때문에 별다른 허기를 느끼지 않았다. 준기는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희주가 밥을 먹었다고 하길래 자신도 간단히 끼니를 챙겼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희주는 준기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문을 나서고 대학가로 들어서자 준기가 간단히 병맥주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나 안주 하나 시킬게.
-응 알았어.

희주는 준기가 저녁을 먹지 않은 것을 알고 조금 넉넉하게 안주를 시켰다. 맥주집 안주라 식사대용으로 할만한게 그다지 없었다. 감자튀김과 소세지를 시켰다. 역시나 희주는 안주를 맛만 보는 수준으로 먹었고, 대부분을 준기가 다 먹었다.

-집은 어떻게 됐어? 얘기가 잘 된거야?
-응 아까전에 보고 왔어. 살기로 했고 주말에 이사할거야.
-내가 도와주러 갈까?
-ㅋㅋㅋ 아니야. 됐어. 짐이라고 해봐야 별로 옮길 것도 없고 부모님도 오시기로 했어.

준기는 냉장고에서 맥주 두병을 더 꺼내왔다. 처음 만났을 때 희주가 자신은 술을 거의 안하지만 가끔씩 수입맥주는 즐긴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희주는 그 마음씨가 살짝 고마웠다. 준기는 처음 들어본 맥주병을 따서 입구를 휴지로 닦아 준 후 희주에게 건넸다.

-이거 한번 마셔봐. 나도 처음에는 맛이 신기해서 입에 조금 댔다가 지금은 맛있어졌어.
-응, 고마워.
-그나저나 같이 살기로 한 사람은 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데.
-오늘 같이 만나서 차마시고 밥먹었는데 정말 괜찮은 사람인거 같아. 나보다 한 살 많고 정말 예뻐. 성격도 털털한 거 같고...
-다행이다. 근데 너만큼 예뻐?
-머래. ㅎㅎ 나보다 훨씬 예뻐 ㅋ
-거짓말. 그런 사람은 없어.

희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지만 준기의 그런 하얀 거짓말이 싫지는 않았다. 준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참으로 답답했다. 남자친구로서 참 괜찮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여자가 먼저 고백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고백을 이끌어낼만한 노하우나 나름의 필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준기는 각 2병씩의 맥주를 마시고 늦었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학교에 일이 있어 온 것이 아니고 희주를 보러 왔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는 자신을 해보려 하지 않고 이렇게 절도를 지켜주는 준기가 믿음직 스러웠다. 기숙사까지 바래다 준 다음 준기는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다. 희주는 준기가 집으로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게 계속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다음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주말에 희주의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기숙사에서 아버지의 승용차에 간단한 물품들을 싣고 채경의 집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길이 막혔음에도 자가용으로 한 20분 가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같이 산다는 채경이 친구가 이름이 선우야?

희주의 어머니가 조수석에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조명 스탠드와 책등이 시트에서 넘어지지 않게 잡고 있던 희주가 대답했다.

-아니, 채경이라는 이름인데? 선우는 또 누구야?
-니 이모가 준 계약서에 보니깐 이름이 김선우라고 되어 있더라고. 그럼 누구지? 미경이 친구 아빠이름인가?
-아닐걸. 그 언니 현씨야, 현채경. 아마 엄마이름인가 부지.
-그렇구나. 보증금이 한 두푼이 아니라 확실하게 알건 알아야지. 니 이모부가 건물에는 빚진게 없다고는 하더라. 미경이가 주소이전 하고 들어간 거니깐 뭐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에이.,, 엄마. 설마 1년안에 별 문제 있겠어?
-망할때는 순식간에 망하는 법이야. 돈 문제는 확실할 수록 좋은 법이야.

자가용으로 이동하니 길이 약간 막혔음에도 20분안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희주가 살 곳은 6층 건물에 3층이었다. 6층에는 주인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가벼운 물건들은 희주가 들고 계단으로 올라갔고 약간 무게가 나가는 가전제품이나 책들은 부모님이 엘리베이터로 날랐다.

-안녕하세요. 현채경이라고 해요. 미경이 이모님 되시죠?

희주는 미리 연락을 해놨기 때문에 채경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다 옮겨 놓고 희주는 방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채경은 글래스에 오렌지주스를 따라 쟁반에 올려놓고 희주의 아버지께 대접했다. 희주의 아버지는 주스를 받아마시면서 순간 움찔 했다. 티셔츠 안을 가득채운 채경의 바스트 중심이 뾰쪽 튀어나와 있었다. 희주의 아버지는 순간 눈길을 고정시키고 채경이 노브라인것을 눈치챘다. 희주의 아버지는 무안한지 이내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희주의 짐정리를 도와주고 있던 어머니는 거실과 욕실, 주방을 돌아보았다.

-어린 애들이 참 깔끔히 해놓고 사네. 학생은 시집가도 되겠어.

희주의 어머니가 채경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학교 다니다 보니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래요. 미경이도 되게 깔끔한 성격이었구요.
-그럼 밥은 어떻게 해먹는거야?
-아침에만 전기밥솥으로 해놓구요. 집에서 주는 밑반찬 놓고 먹어요.
-학생은 집이 어디야?
-저는 대구에서 왔어요.
-우리는 전주에서 왔는데... 둘다 참 서울와서 고생이 많다. 반찬 챙겨주러 종종 올게.
-네 고맙습니다.
-우리 희주 잘 부탁할게. 저게 몸만 컸지, 아직 애야.

희주의 부모님은 채경과 희주를 데리고 나가 소고기를 사주었다. 채경은 희주가 인식하기도 전에 수저 세팅과 물컵에 물따르기를 했다. 채경은 어른들 한테도 싹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가식적으로는 하기 힘든, 평소에 몸에 벤 성격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은 그대로 집으로 가셨다. 희주와 채경은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께서 참 좋은 분들이시네. 너 전주 살아? 난 미경이가 천안이어서 당연히 너도 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원래 미경언니네도 전주 살았었는데 저 중1때 천안으로 이사갔어요.
-응 그렇구나.

채경은 방으로 잠깐 들어가더니 다시 나왔다. 희주는 방으로 들어가 책을 책꽂이에 꽂아넣고 있었다. 채경이 희주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좀 도와줄게.

채경은 몸을 숙여 책을 집어 들었다. 채경이 몸을 수그릴때 티셔츠 사이로 큰 가슴골이 보였다. 희주는 순간 채경이 브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 집에서는 편안히 있어요?

희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 챈 채경이 빙긋 웃었다.

-으응? 응... 집에서는 편하게 있으려구. 너도 편하게 있어.
-저는... 괜찮아요. 언니는 불편하실거 같아요. ㅋㅋㅋㅋ 언니는 진정 가진자에요. ㅋㅋ

희주의 뜬금없는 발언에 채경은 웃고말았다.

-집에서는 편안하게 있자. 사실 아까 아버지 오시고 나서야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알았어. 급하게 입었으니까 아마 모르셨을거야.
-저희 아빠 그런거 잘 모르실거에요 ㅋㅋ 아, 그런데 계약서 보니깐 미경언니 이름이랑 김선우씨라고 이름이 있던데, 언니 어머님이세요?
-아니... 아니야.

희주의 질문에 채경이 잠깐 멈칫했다. 그 이후에 다시 말을 했다.

-나 도와주시는 분이야.

희주는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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