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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54 892회 0건
나는 복학 직전까지 강 중위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자동응답으로 넘어갈 때까지 통화음을 듣기도 하고 문자메시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부대에 전화를 걸어 그의 소재가 파악되었는지를 물었다. 처음엔 같이 걱정하던 행정병들도 조금씩 무딘 감정으로 답을 주기 시작했다.

이 즈음 나는 복학과 함께 같은 과 여자 후배와 남자 대 여자로 만나기 시작하였다. 우연찮게 다른 과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는데, 우린 친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섞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긴생머리와 길게 뻗은 다리가 매력적인 그녀였다. 얼굴에는 청순미가 열매처럼 그렁그렁 맺혀있었지만 섹스에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처음 잠자리를 청한 것도 그녀였다. 나는 그저 그녀와 학교에 남아 과제를 하다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끌린 것뿐이었다. 늘씬하게 큰 키와는 다르게 가슴이 밋밋했지만 나는 그걸로 좋았다.

그녀를 만나면서 나는 지난 2년 동안의 기억과 인연을 조금씩 내 밖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몸 안 깊숙이 내 몸을 밀어 넣고 있으면, 페니스 끝에서 전해져 오는 아득함이 지난 2년 동안의 일들을 기억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사고 순간 들었던 굉음과, 그 순간 내가 내려다봤던 철책 너머의 선명한 풍광, 피투성이가 된 채 강 중위의 등에 업혀 팔다리를 덜렁 거리던 기억 따위는 내 이전 생에 있었던 일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사랑한다느니, 정식으로 사귀고 싶다느니, 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가 주저 하고 있는 것이라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녀에게 군대 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내 귀에 들어왔다.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를 수군거리기 시작한 주변은, 나에게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귀띔했고, 나는 내가 저지른 창피한 행동에 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가 들은 것들을 그녀 앞에서 펼쳐놓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맺힌 청순미를 따먹는 것이 너무도 달콤하여 내가 저지르는 불륜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달콤함에 나를 업고 뛰던 강 중위를 조금씩 잊고 있었다.


9. 예지몽


김상택의 꿈을 꾼 건 근 몇 달만의 일이었다.

사고 직후 죽은 전우들이 꿈에 나온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모두들 사고 이전의 온전한 모습 그대로 나와 함께 어울리는 꿈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후에는 그들과의 좋았던 기억 때문에 우울한 마음은 있었지만, 결코 무섭다거나 악몽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몸이 이리저리 찢기고 튀었던 그 모습을 직접 보진 못했기에, 그들은 언제나 내 꿈속에서는 건강한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김상택은 허리 아래가 날아가 버린 몰골이었다. 그의 몸은 화염에 그을린 듯 검붉었고, 그 검붉은 피부 위에는 점도 높은 끈적한 피가 광을 낸 듯 덮혀 있었다. 하반신을 잃은 그는 엎드린 자세에서 가느다란 두 팔로 자신의 상체를 일으키려 몇 번을 노력하더니, 이내 체념했는지, 포복 자세로 내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가 팔로 바닥을 짚으면 ‘탁’소리가 났고, 그가 상체를 끌면 ‘스윽’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다녀간 자리에는 그림자처럼 검은 점액질 액체가 질질 묻어나왔다.

탁, 스윽-, 탁, 스윽-.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를 이 꿈을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성한 두 다리로 아무리 내달려도 뒤를 돌아보면 김상택의 상반신이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끌며 내 발뒤꿈치 아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탁, 스윽-, 탁, 스윽-.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탁, 스윽-, 탁, 스윽-.

일어나보니 아이보리 이불 안에서 그녀가 알몸으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둘러보니 그녀의 자취방이었다. 까닭 모르게 목이 탔다. 내 몸에 흐르는 피의 밀도가 끈적일 정도로 높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 안의 수분이 모두 증발해버려 혈액 역시 수분 부족으로 응고된 건 아닌가 싶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쯤 남은 우유팩이 보였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양이 찰 때까지 벌컥이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가볍게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필름이 끊겨 버렸다. 아마도 중간고사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을 놓아 버린 탓이라 생각했다. 10월의 밤바람이 그녀의 자취방 어디선가에서 새어 들어와, 이불 속에 폭 안긴 그녀의 몸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자는 그녀를 “수진아.”하며 불러보았다. 그녀는 제대로 된 대답 대신 옹알이 같은 웅얼거림과 함께 몇 번 뒤척이더니, 이내 팔을 뻗어 내 몸을 감았다. 따뜻한 체온과 군살 없이 마른 그녀의 기다란 팔이 내 가슴과 어깨를 실크 스카프처럼 감아왔다. 그녀의 다리가 내 허리를 감아오자 골반 언저리에서 그녀의 음모가 느껴졌다. 그녀가 다리가 성하게 달린 몸뚱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감사했다.

그녀 얼굴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 대니 그녀가 잠들기 전에 찍어 바르는 크림향이 그녀 특유의 젖내와 어우러져 나를 안도케 했다.

이건 현실이구나. 이게 현실이야. 이게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가 딛고 서 있는 순도 100%의 현실이야.

나는 발기했다. 더 이상 내 발뒤꿈치 밑에서 검붉은 육신을 쓴 채 기어 다니는 김상택 따위 없다는 안도감이 성욕으로 이어졌다. 내 입 안에는 우유의 큼큼한 뒷맛이 남아 있었다. 나는 크게 침을 꼴깍 삼켜 그 큼큼함을 덜어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종이 우유팩이 열리고 닫히는 그 입구가 마치 여자의 꽃잎이 오므린 것과 비슷한 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입구가 오므려져 있지만 한 번 열리고 나면 허연 액체에 촉촉하게 젖어 버리는.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옹알이 하는 수진이를 보채자 그녀는 반항 한 번 못하고 나에게 가랑이를 벌려주었다. 역시나 오므리고 있는 그녀의 꽃잎은 반쯤 마시다 만 우유팩의 입구와 유사했다. 지난밤의 정사 때문인지 아직 점액질이 묻어 있었지만, 오럴을 해주는 방법이 그녀의 꽃잎을 촉촉하게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내 오럴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옹알이는 조금씩 신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득함이 느껴졌다. 이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나는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녀의 신음을 살피며 어떤 포인트를 찔러줘야 할지, 혹은 안쪽 어디를 긁어줘야 할지를 가늠했다. 그녀 특유의 하이톤이 좁은 자취방 안에서 이리저리 튕겨 다녔다. 방음이 안 되는 얇은 벽은 그 소리를 제대로 튕겨내지 못하고 더러는 흡수 되고, 더러는 통과하여 왼쪽 방 법대 신입생의 몽정을 부를 거라 상상했다. 혹은 오른쪽 방 스물네 살 신입여사원의 한밤중 자위를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수진이의 청순한 얼굴을 보며 그녀의 배 위에 사정했다. 내 정액이 그녀의 배꼽을 중심으로 세로로 뿌려지는 순간, 그녀는 “따뜻해.”라고 말하며 숨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꿈속에서 나는 다시금 악몽을 꿨다. 언제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모를 꿈속의 배경은 사고가 났던 그날의 선명한 풍광이었다. 나는 팔다리가 덜렁 거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강 중위의 등에 업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던 강 중위의 느낌이 아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풍채가 당당한 강 중위의 등판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나는, 우지현의 등에 업힌 채 팔다리가 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업은 사람이 강 중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우지현은 나를 업고 달리며 깔깔깔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가만 보니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달리고 있었다. 세 번째 만나던 날 봤던 하늘색 원피스 차림 그대로였다. 그녀가 나를 업고 달리던 풍경은 사고를 당했던 그 풍경이 아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모를, 검붉은 배경의 어딘가에서 그녀는 고개를 쳐든 채 짖어대듯,

깔깔깔,

웃고 있었다.

---

예지몽이였을까? 강 중위에게 전화가 온 건 그 다음날이었다. 수업시간 중 모르는 번호가 뜨길래 애써 무시했는데, 같은 번호로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01*번의 모르는 휴대전화 번호였다. 전화는 쉬는 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여보세요?”

“나다, 강현택!”

“중위님??”

나는 반가움을, 강 중위는 다급함을 토했다.

“지승아, 잘 들어!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많은 말은 못해. 좀 있다 지현 씨가 너한테 전화를 걸 거야. 그거 받아! 그리고 지현 씨랑 이야기 좀 해! 알았지?”

차마 내가 무어라 질문할 수도,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일렬로 자신의 다급함을 늘어놓았다.

“알았어요, 근데 형, 괜찮은.......”

“미안! 나 지금 끊어야해.”

“괜찮은.......”

뚜우- 전화가 끊겼다.

지현 씨의 전화를 기다리며 나는 지난 3개월 동안 그를 찾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생각해보았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에 대한 걱정에 받지도 않는 그의 전화기에 부지런히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남겼으며, 전역 후에도 꼬박꼬박 부대 행정실에 전화를 걸어 그의 행방을 물었었다. 하지만 전역 후 복학을 하면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대 간 남자친구를 두고 나와 섹스를 하는 수진이의 달콤함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 나는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조금씩 놓고 있었다.

미안하고도 부끄러웠다.

그러다 김얼벌이 마지막에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지현 씨를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는 그의 짐작. 어쩌면 내가 그의 안위를 필요 이상으로 걱정했던 것은, 강 중위가 지현 씨 같은 여자와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내가 생각보다 빨리 그에 대한 걱정을 지워버린 것도 지현 씨 따위의 여자와 함께 있는 그에게 실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날 종일 강 중위가 일러준 지현 씨의 전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 자정이 넘도록 지현 씨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지현 씨에게서 전화가 온 건 꼬박 24시간을 넘긴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그냥 강 중위가 걸어왔던 번호로 내가 걸어볼까, 싶은 생각에 전화기를 들여다보던 그때였다.

그녀는 매우 차분한 목소리였다. 메모할 수 있냐고 묻더니 종로의 어느 거리 주소를 불러주며, 자신과 만날 수 있냐고 물어왔다. 가급적 빠르면 좋다는 말에 지금 당장 나갈 수도 있다고 하자, 그녀는 지금 이후 다른 스케줄이 없냐고 물어왔다.

네 번째 만남. 지현 씨는 역시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쓸면 두껍게 묻어나올 것 같이 진한 화장을 하였기에, 그녀가 일러준 지하 커피숍(말이 커피숍이지, 김 빠진 생맥주를 파는 인기 없는 호프집 분위였고 우린 실제로 병맥주를 주문했다)에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 혹시나 내가 사람을 잘못 찾은 건 아닌지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떨어져 앉았지만 분칠냄새와 향수냄새가 내 코끝에서 나는 듯 선명했다.

궁금하고 애가 타는 나와는 다르게 지현 씨는 그동안의 나의 안부를 먼저 물었고, 전역하고 머리를 기르니 다른 사람인 거 같다며 말을 돌렸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우리 중위님 때문에 만난 거 아니에요?”라고 묻자, 그제야 “그 사람은 잘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뭐에 쫓기는 사람 같은 목소리던데, 정말 잘 있는 거 맞아요?”라고 내가 따지듯 묻자 그녀는 “어머, 지승 씨는 내가 그 사람 숨긴 거처럼 말하네요?”라면서 “가만 보면 지승 씨는 항상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봐? 처음부터 쭈욱?”이라며 눈을 깜빡였다. 무거워 보일 정도로 두꺼운 속눈썹이 그녀의 진짜 속눈썹 위에 붙어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우리 지난번에 만난 이후 중위님이 부대에 안 들어갔대요. 그리고 지금까지 3개월 동안. 당장 대통령 표창 받고 진급해야 할 사람이 3개월 동안 없어진 건데, 어떻게 태연할 수 있어요? 나는 중위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

“그래서, 지승 씨는 오빠 찾아봤어요?

그녀가 내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순간 더운 기운의 공기가 내 얼굴로 밀어닥치면서 나는 창피함을 느꼈다. 과연 나는 사라진 강 중위를 찾기 위해 정말이지 끝까지 노력했던가? 그녀의 물음에 답할 수 없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그녀는 잠시 자리를 고쳐 앉았는데, 그때 보니 그녀는 마치 상가에라도 다녀온 듯 검은색 정장 재킷에 검은 스커트, 그리고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굽이 다소 높아 보이는 구두만이 짙은 남색이었지만, 이 역시 검은색으로 봐도 될 것 같았다. 검은 옷차림 때문인지 그녀의 짙은 화장은 마치 입관하기 위해 염을 한 듯한 화장으로 보였다. 그녀 중 무채색이 아닌 것은 붉게 칠한 입술뿐이었다. 그나마도 검붉은 색이었다. 예지몽이 맞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날 지승 씨가 일어나고 나서, 사고가 좀 있었어요.”

사고?

“현택 오빠가 도박하던 거 알고 있었어요?”

나는 깜짝 놀라 “도박이라뇨?”라고 되물었다.

“몰랐나 보네.”

지현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입맛이 쓰다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중증이었어요. 도저히 말릴 수 없을 만큼.”이라고 답했다.

너무 뜻밖이라 뭐라 말해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체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나? 그러자 그녀가 내 의중을 알겠다는 듯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폭발사고가 난 다음, 현택 오빠는 공황장애 같은 것을 겪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혼자 있는 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밤에 혼자 못잘 정도로 심해졌나 봐요. 혼자 자더라도 술 안 마시면 안 될 정도로. 들어보니까 예전에 지승 씨 부대 복귀 못하게 취한 척 했던 적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의 숙소에서 잠을 청했던 가을날을 기억해냈다. 1년 전 즈음, 귀뚜라미가 요란하게 울어대던 밤이었다.

“물론 장교인데다가 진급도 가까워지니 대놓고 치료도 못 받았겠죠. 그래서 밤마다 밖에 돌아다녔나 봐요. 될수록 사람들이 많은 곳들로. 주말에는 나랑 있으니까 괜찮았지만 평일에는 거의 매일 그러고 다닌 거 같았어요. 그러다가 오락실까지 들어간 거죠.”

그녀의 이야기는 이음새가 단단했다.

“오락실이라면......?”

“그 왜 있잖아요? ‘바다나라’라고. 지승 씨도 들어봤죠? 횟집처럼 생겨서 밤새 오락하는.”

나는 김얼벌이 이야기 해줬던 ‘오락실’이라는 곳을 떠올렸다. 그리고 예전 강 중위와 지현 씨의 변태적 성행위를 훔쳐본 날 보았던 횟집을 기억해냈다.

“나도 오빠 따라가서 몇 번 구경해봤어요. 돈 넣고 막대기만 당겨서 그림 맞추는 거.(그러면서 지현 씨는 레버를 당기는 시늉을 보였다) 재밌더라고요. 확실히 중독성도 심한 거 같고.”

“그래서 중위님이 그 도박에 중독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요.”

“그거랑 중위님 없어진 거랑 무슨 연관인거죠?”

그제야 그녀는 잊고 있었다는 듯 표정을 짓더니 “그날도 우린 오락실에 갔어요. 지승 씨가 먼저 일어난 날. 그날 기억나죠?”라고 물었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날이었다. 그날 강 중위는 위스키 다섯 잔에 만취상태가 되었다. 원래 술이 약한 사람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조금 의아했지만, 술에 취한 채 지현 씨를 더듬어대기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까지 기억해냈다.

“지승 씨 나가고 나니까 그이가 오락실에 가자고 하더군요. 취한 사람을 어떻게 당하겠어요? 게다가 현택 오빠 힘도 세고 몸도 큰데. 그래서 오락실에서 같이 좀 놀다가 잠들게 할 생각으로 그러자고 했죠.”

이때 종업원이 다가와 맥주 두 병과 노랗게 튀긴 나쵸를 서빙하고 돌아갔다. 나쵸 위에는 주황색 치즈가 일정한 방향성을 띄며 지그재그로 뿌려져 있었다. 냐쵸의 고소한 향과 치즈의 노릿한 향이 내 코앞까지 올라왔지만 도무지 입맛이 돋지 않았다. 그걸 손으로 집어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현 씨는 치즈가 묻지 않은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집더니, 손톱에 닿을세라 조심스레 나쵸를 반으로 쪼개어 하나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붉게 칠한 입술에 나쵸 가루가 묻지 않도록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사고는 오락실에서 있었어요. 그날따라 운이 좋은지 오빠가 조금 따고 있자 그 오락실 주인인 듯한 사람이 와서 그러더군요. 좀 더 큰 자리가 있는데 껴볼 생각 없냐고. 저는 이제 우리 그만 일어날 거예요, 라고 말했지만 오빠는 기분이 좋은지 더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정말 나는 말렸어요. 왠지 더 큰 자리라는 곳이 꺼림칙하니까 그냥 집에 가자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해내겠어요?”

내가 아무것도 들지 않자 그녀는 맥주라도 좀 마셔보라며 맥주병을 들고 건배를 청했다. 나는 가볍게 병목을 부딪혀준 후 병에 입을 대는 시늉만 하고 그대로 내려놓았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정말 거기 들어가는 게 아닌데.......”라며 낙담한 표정을 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계속 잠자코 듣기로 했다.

“그 방에 들어가서 다 잃었어요. 그날 딴 돈이며, 원래 가지고 있던 돈도....... 그래도 처음에는 좀 땄는데....... 자기도 술에서 깨는지 마지막 한 판, 마지막 한 판 그러면서도 그만두질 못하더라고요.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 카드를 꺼내더니 현금 서비스 심부름까지 나한테 시켰어요.”

나는 그날 밤 그가 표창처럼 자랑스럽게 꺼내던 검은색 카드를 기억했다.

“현금 서비스 한도가 2000만원이었는데, 그걸 다 찾아오라고 비번까지 알려주더라고요. 정말 말렸어요. 이러면 안 된다고. 실은, 눈물까지 보이면서 그만 나가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오빠가 끝까지....... 결국 내가 심부름 가는 척 하면서 나왔다가 나중에 다시 들어가면 오빠가 좀 진정되어 있진 않을까 싶은 마음에 자리를 비웠는데.......”

여기까지 말한 지현 씨는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병이 가벼워질수록 그녀의 고개는 무겁다는 듯 뒤로 넘어갔다. 맥주를 넘기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나는 매번 그녀의 목덜미를 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그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목덜미가 탐스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 생각이 뜨거워지기 전에 식힐 요량으로 나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20분, 아니 15분? 잠시 나갔다 왔더니....... 오빠가 사고를 쳤던 거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고라면....... 어떤.......?”

내가 묻자 그녀는 끔찍하다는 듯 답했다.

“오빠가....... 사람을 찌른 거예요.”

나는 경악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잠시 “아니, 아니, 잠깐만,”이라며 몇 번 말을 더듬고 나서야 “뭐라고요? 사람을, 어떻게 했다고요?”라고 되물을 수 있었다.

“사람을 찔렀다고요. 이렇게.”라며 지현 씨는 주먹 쥔 손을 내 쪽으로 흠칫 내밀어 보였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
[IN THE CLUB] 9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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