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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55 1,089회 0건

부대로 복귀하는 지하철 안에서 지난 밤 윤진과의 통화를 곰곰이 되씹었다. 별 내용도 없는 정말 단순한 통화였다. 잘지내냐고 묻고 잘지낸다고 대답하고, 자신의 근황을 간단히 소개하고 시간되면 언제 한번 보자는 지극히 무미건조한 대화였다. 그러나 안한것보다는 일단 전화라도 한 것이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수화기 너머 속 윤진은 항상 그랬듯이 밝고 건강해보였다. 민성은 그 5분도 안되는 짧은 통화 중에 고등학생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좀더 나아진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잊어버린채, 그 시절로만 돌아가야 윤진과 마주할 수 있을거라는 착각에 빠져서였다. 지금 자신이 그리는 것이 윤진이 자체인건지 아련하게 잡히지 않아 더 간절한 고등학생 윤진인지 헷갈렸다. 자신에겐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한편으로는 가련하고 불쌍한 동정심인지 여전히 자신이 윤진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민성은 명확히 하고 싶었다. 윤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휴가때 윤진은 만나러 자신이 대구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윤진은 흔쾌히 허락을 했다.


-어땠어?

두식이 부대에 복귀한 민성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그냥 그랬지. 별거 없어. 에0랜드 갔다온거 말고는 달리 한게 없다. ㅋㅋㅋ

민성은 분대원들에게 J읍에서 몰래 사온 빵을 돌렸다. 휴가복귀자를 태운 버스 또한 민성의 수송부가 운전병이었기 때문에 수송부 인원들은 항상 그렇게 외부음식을 숨겨 들어올 수 있었다.

점호가 끝나고 민성은 당직사관에게 허락을 구한 뒤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그 며칠 집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서 인지 얼음장같이 차가운 군대 물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매번 운동을 하고 샤워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차가운 물을 끼얹다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사람이 이렇게 환경에 적응 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전역을 한 후에도 밖에 나가서 이곳에서 겪었던 힘들었던 순간들을 절대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컨테이너에 돌아오니 이제는 두식이 형이 티비 리모콘을 잡고 티비를 보고 있었다. 두식의 위치에는 민규가 엎드려 티비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흘러가는구나라고 생각한 민성은 두식과 민규 사이에 어정쩡한 위치에 앉았다. 이제 이 곳에서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수건도 속옷도 세면도구도 다 후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줘서 두식의 것을 빌려서 씻었다.

민성은 두식과 민규에게 휴가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지연과의 하룻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신분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말년병장은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한다고 했는데 괜히 입을 나불댔다가 후환이 생기면 어쩌나 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무렵에 원찬이 위병소 근무를 마치고 복귀했다.

-원찬. 너 상황 터졌을 때 8호차 몰았다며?
-응... 어디 간건 아니고 CP앞에서 대기만 하다 바로 복귀했어.

원찬은 장구류를 해체하면서 민성에게 말했다. 그날 민성에게 무릎 꿇은 이후 말은 다시 편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말을 놓을 때마다 두식과 민규의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민성에게도 눈치를 보면서 말을 놓았다. 민성이 자신에게 손 한번 안댔지만 얼마나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찍어눌러왔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민성의 계획하나 손짓하나에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알고 소름이 돋았었다. 그 이후는 원찬은 민규에게 완전히 복종했다. 원찬이 잠잠해지는 걸 느낀 민규도 원찬을 다시 받아주었다.

-너도 다음 주에 휴가 나가지? 나 이번에 갔다온 4박 5일도 졸라 짧았는데, 넌 신병 휴가 ㅋㅋㅋ 4.5초일거야.
-으응... 그렇다고 하더라고. 난 소라만 보고 오면 되니깐 상관없어. ㅋㅋ
-그때가서 어리버리 까지 말고 지금 빨리 먹고 싶은거 적어놔. ㅋ

민성이 웃으면서 말하니 옆에서 두식이 거들었다.

-그니까 소라를 먹고 싶대잖아. 민성,, 말귀를 왜 이렇게 못알아들어. ㅋㅋㅋㅋ

두식과 민규가 낄낄대면서 웃었다. 원찬은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누웠다.

이틀후 민성은 다시 휴가 출발을 하였다. 첫 번째 휴가가 너무 짧았기 때문에 다시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이번 휴가는 특급전사 포상휴가이기 때문에 이전 휴가보다 조금 길었다. 민성은 집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집에 아무도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금방 약속을 잡고 나갔다. 부모님이 민성에게 이번 휴가 때 학교 주변에 방을 알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민성은 집에서 하루종일 쉰다음 다음날 일찍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소라야, 나 지금 서울 올라가. 나 소개팅 언제 해줄거야?>
<어? 휴가 나왔어? 소개팅 ㅋㅋㅋ 니가 어떤 여자 좋아하는지 말 안했잖아.>
<너같은 여자 좋아한다니깐...>
<나같이 예쁜 여자는 흔치 않단다 ㅎㅎ>

기차 안에서 민성은 소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소라는 시간이 되면 오늘 보기로 했다. 민성은 어제 인터넷 학교 커뮤니티에서 검색한 방 중 몇 곳을 둘러봤다. 1학년때는 기숙사에서 살다가 입대를 한 거라 방 시세를 알고 깜짝 놀랐다. 자신도 전역 후에 알바를 하면서 책값이랑 밥값정도는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룸을 세 군데 정도 압축하고서 부모님이랑 다시 와서 계약을 하겠다고 했다. 햇살이 잘드는 방이 좋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진짜 깨끗하고 멋있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어디야? 아직도 학교 근처야?

소라에게 전화가 왔다.

-응 이제 방 알아보고 한숨 돌리고 있어.
-지금 볼래? 내 친구가 너 만나고 싶대 ㅋㅋㅋ
-오~ 콜!! 나 그리로 갈게. 어디로 가면 돼?
-우리 학교 근처에는 볼거 없으니깐 대학로에서 보자.

민성은 대학로에 갔다. 많이 변한듯 하면서 10분정도 둘러보니 익숙해졌다. 이제 정말 민간인이 된것 같은 기분에 전율까지 느껴졌다. 아직까지는 태양이 작열했지만 그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라와 친구는 인도 음식점에서 만났다. 소라는 처음볼때는 단화를 신었는데 이번에는 힐을 신고 나왔다. 160대 후반의 키인 소라가 힐을 신고 나오니 174인 민성과 키가 거의 비슷해졌다. 엷게 색조화장도 하고 온 소라는 처음 봤을때보다 훨씬 예뻐보였다.

-내 친구 진영이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최민성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 저 소라 친구 이진영이에요ㅋㅋ

어색한 인사가 오고가고 식사를 하였다. 진영은 소라보다 더 활발하고 대화가 많이 오고 갔다. 소라는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소라는 조용히 둘이 대화를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성은 1학년 초반 때 미팅 몇 번 한거 말고는 학교친구 이외의 여자와는 그다지 대화한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민성은 모든걸 내려놓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대로 이런말 저런말 했다. 최대한 군대 이야기는 안하려고 했지만 그동안 자신에게 관련된 스토리는 모두 군대에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진영은 그저그런 반응을 보이며 그래도 민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소라야, 민성이처럼 괜찮은 애를 왜 니가 안만나고 소개해주니? ㅋㅋ

진영의 말에 소라가 당황한듯 놀란 눈으로 민성을 쳐다보았다. 아~ 소라의 주변 친구들은 이미 소라가 남자친구가 없는 줄 알고 있구나. 민성은 생각했다. 소라는 이미 마음속으로 원찬을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원찬이 불쌍해지기까지 했다. 원찬은 소라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았고 한 수 아래로 봤던 자신에게까지 무릎을 꿇고 울기까지 했는데 원찬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여자라는 종족이 참으로 무섭다고 생각했다. 불과 몇 주전까지는 그 멀리 Y군까지 와서 1박2일동안 놀다갔는데 이렇게 칼로 무자르듯이 정리한 것을 보고 소라가 무서운건지 여자가 무서운건지 생각했다.
진영과는 번호를 주고받고 그렇게 헤어졌다. 집에서 자신을 찾는 다는 것이었다. 아마 민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여자 경험이 별로 없는 민성도 그것은 눈치 챌 수 있었다. 진영이 황급히 떠나고 소라와 민성이 남았다. 소라는 진영의 행동이 약간 머쓱했는지

-커피한잔 할래?

둘은 근처 스0벅스로 들어갔다. 진영이 떠나자 민성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소라보다 예쁘지도 키가 크지도 심지어 가슴이 크지도 않은 주제에 잘난척만 하다가 집에 간 진영이 별꼴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너 별로 맘에 안든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소라의 얼굴을 보고 참았다. 그렇다. 그렇게 소라의 얼굴을 보았다.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는 그 고양이눈매를 내리깔고 머그잔을 호호 불었다. 사회에서 둘이 앉아 커피를 마시니 소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퀸카 여대생 처럼 보였다.

-원찬이는 잘 지내?

침묵을 깨고 소라가 말했다. 소라는 아까 진영이 한말이 걸렸다.

-둘이 헤어진거야?
-응.. 그렇게 됐어.

민성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엊그제만 해도 원찬은 휴가를 나가려고 휴가 날만 손꼽았다. 아마 원찬의 휴가가 오늘인가 그랬었다.

-원찬이 오늘 휴가 나오지 않았어? 이번주 언제 나온다고 했는데...
-아니야, 오늘 맞아. 오늘 나왔어.

소라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민성은 그제서야 상황이 정리됐다. 소라는 이미 원찬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원찬은 받아들일 수 없어 휴가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있으니 민성이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기가 애매했다. 외박 때 펜션 정자에서 힘들다고 민성에게 기대 울었을때 이미 소라는 마음 정리가 되었었다.

-너 오늘 안내려가? 지금 가도 차 못탈텐데...

소라가 원찬의 이야기를 하는게 내내 불편했던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응? 괜찮아. 천막치고 땅파고도 잤는데 설마 잘데 없겠어? 정 없으면 찜찔방에서 자면 돼. ㅋㅋㅋㅋ
-천막 줄테니깐 땅파고 자봐. 내가 구경해줄게. ㅎㅎㅎ
-천막부터 줘.
-천막은 없고 집에가서 이불 하나줄게 ㅋㅋ
-너 집은 어디야?
-나 효창공원 뒤야.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민성은 소라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S여대 뒤 원룸촌으로 갔다.

-오늘 방 알아보니깐 정말 비싸더라. 여기도 비싸?
-여기가 더 비쌀걸. 여긴 용산이잖아. 내가 왜 알바 하는지 알겠지?

민성은 그동안 으레 소라가 서울 여자인지 알았지만 오늘 소라가 울산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소라가 자취하는지는 생각도 못했지만 혼자 산다는 것을 알고부터 바지가운데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집앞까지 오자 민성이 장난식으로 말했다.

-기다릴테니깐 천막이든 이불이든 가져와 ㅋㅋ
-뭐야 ㅋㅋㅋ 한여름인데 그냥 자면 안돼?
-에이.. 말복도 지났는데 한여름은 아니지. 이따가 새벽때 엄청 추울거야.
-군인정신 다 없어졌네. ㅋㅋ 엄살은 ㅋㅋ

집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소라가 마음 먹은 듯 민성에게 수줍은 듯이 말했다.

-그럼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






원찬은 중대장실에서 휴가 신고를 몇 번이나 틀린 후에야 휴가증을 받았다. 소요산에서 서울역까지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몰랐었다. 군장점인 호국의 집에서 휴대폰을 찾은 뒤로 소라에게 계속 문자와 통화를 걸었다. 소라는 받지 않았다. 애가 탄 원찬은 소라의 집이 어디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 근처만 생각이 나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워낙 빡빡한 원룸촌이라 거기가 거기 같아보였다. 원찬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것 같았다. 시간을 보려고 전자시계를 보았다. 입대직전에 소라가 선물해준것이었다. 서울 방을 정리하고 집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소라가 택배로 선물했었다. 시계 상자를 고이 간직했는데 거기에 소라의 집주소가 적혀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원찬은 서울역에서 소라에게 가려고 했지만 주소를 알기 위해서 집으로 내려갔다.
부모님이 원찬을 반겨주었다. 바로 점심을 먹으러 외식을 갔다. 원찬은 오랜만에 뵌 부모님을 뿌리치고 소라에게 갈 수 없었다. 일단은 외식을 하였다. 어머니는 원찬의 얼굴이 쌔까맣게 타고 홀쭉해졌다며 안쓰러워 하셨다. 원찬도 이런 어머니와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소라만 생각하는 자신이 죄송스러웠다. 밥을 충분히 먹고 나와서 원찬은 곧바로 서울로 출발했다. 소라에게 한번만 만나달라고 몇 번이고 문자를 보냈지만 소라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적어온 주소를 들고 무작정 소라의 동네로 찾아갔다.





확실히 여자방은 냄새부터 달랐다. 은은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소라는 재빨리 Y자건조대와 침대위에 있는 속옷들을 치웠다. 이곳이 여성 전용 건물인 것을 알고 민성은 두리번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왔다. 소라가 방에 불을 켜자 아기자기한 여자의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침대위에 있는 핑크색 이불, 책상위에도 예쁜 필통과 연필꽂이가 놓여있었다. 간이 화장대 위에도 화장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소라는 책상의자를 민성에게 건냈다. 민성이 의자에 앉자 소라는 방금 마트에서 사온 물과 맥주를 냉장고에 넣었다. 그러고 나선 침대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보더니 소라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진영이가 너 군바리 같대. ㅋㅋㅋ 내가 군인이라고는 얘기 안했거든. 역시 군인은 뭘 해도 군인티가 난다니깐....

소라가 웃자 민성이 발끈 했다.

-군인이라고 하지... 아니, 지는 뭐 누굴 거절하고 그럴 입장이 아닌데 왜 그런다니. 웃긴다 진짜.
-왜? 진영이 얼마나 귀여운데?
-귀엽긴.. 이래서 여자한테 여자 소개받는거 아니라고 하더니만... ㅋㅋㅋ 내가 너같은 여자가 맘에 든다고 했잖아.
-내가 어디가 마음에 드는데?

평소 조용하고 도도한 소라가 갑작스럽게 돌발질문을 날리자 민성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소라는 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좀 씻자. 말복도 지났는데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 너부터 씻어. 나 그동안 방정리좀 하게.
-응 알겠어.

민성은 욕실로 들어갔다. 변기와 세면대의 타일을 매일 닦는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곳이 소라의 가장 은밀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입고 있던 옷가지를 모두 벗어 던지니 이미 물건은 딱딱하게 일어나 있었다. 오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소라를 좋아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윤진에 대한 감정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다른 변수를 두고 싶지 않았다. 원찬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면 더더욱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수차례 다짐했다. 게다가 이미 소라는 원찬을 정리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 못할 짓이었다. 원찬은 일부러 찬 물로 자신의 몸에 끼얹었다. 불타는 자신의 감정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차가운 물이 몸에 닿자 자지는 더더욱 딱딱해져서 뿌리 끝이 아플 지경이었다.

<똑똑>

밖에서 소라가 노크를 했다.

-수건이랑 간단히 입을거 가져왔어. 문앞에 놓을 테니까 가져가. 그리고 빨래 줘.

문을 살짝 연 민성은 수건과 옷을 가져가고 팬티와 양말을 꺼내놨다. 반바지는 여자것인지 남자것인지 모르정도로 길이가 짧았다. 자신의 허벅지가 전부 드러났다. 박스티는 대충 맞았다. 노팬티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의 발기된 자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민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에서 자지를 잡고 나갔다.

-어차피 버릴 옷들이니깐 불편하면 약간 늘어나게 입어도 돼.
-으응...

민성은 재빨리 책상의자에 가서 앉았다. 민성이 샤워를 할동안 소라가 에어컨을 틀어놨는지 매우 시원했다. 찬물로 샤워한대다가 에어컨 바람까지 맞으니 추울 정도였다. 소라가 욕실에 들어가고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펜션에서 몰래 샤워소리를 엿들었던 자신이 생각났다. 오늘은 왠지 그때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성은 팔굽혀펴기를 하기 시작했다. 추워서 그런 것도 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펌핑을 하기 위해서였다. 소라와의 동침은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만약 소라가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너무나 순수한 호의인데 자신이 선을 넘어버리는 행동을 해서 친구로서의 소라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자의 마음을 판독하는 바코드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라는 수건뭉치를 들고 나왔다. 그 안에 오늘 입었던 속옷이 있으리라. 자신보다 더 짧은 트레이닝 반바지에 민소매 탱크톱을 입고 나왔다. 민소매티의 길이가 허리선에서 끝났다. 살짝살짝 허리살이 보였다. 민성의 빨래와 자신의 빨래를 넣고 드럼세탁기를 작동시켰다. 소라는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 허리를 약간 숙였는데 탱크탑 밖으로 가슴이 쏟아지듯이 일렁거렸다. 민성은 아찔해지기 까지 했다.
소라는 맥주 두 캔을 들고 침대에 앉아 민성에게 하나를 주었다. 가뜩이나 갈증을 느꼈던 민성은 캔을 따서 벌컥 마셨다. 맥주가 원래 이렇게 달고 맛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지? 우리 요 앞 마트에서 외국맥주 세일 하는데 한번 사와봤어. 사대주의까지는 아닌데 수입맥주 먹으면 국산꺼 못먹겠더라. 국산꺼는 소맥용?

소라도 한모금 홀짝 마시면서 말했다.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고 한쪽팔로 침대를 지탱하고 앉아있는 소라의 모습은 화보에서나 보던 연예인 같았다.

-소라 너는 술 좋아하나봐?
-취하는 건 별로 안좋고 이렇게 맛만 음미하는거 좋아해. 딱 알딸딸해질때까지만..

소라의 모습을 보면서 민성은 아까 소라의 질문, 내가 어디가 좋으냐?, 에 대해 날을 새서라도 말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소라는 묘한 여자였다. 도도한듯 보이면서 백치미도 살짝 있고 정숙한것 같으면서도 눈빛에서는 은근한 색기를 내뿜었다. 민성은 오늘 일을 치르게 된다면 그건 적어도 원찬에 대한 복수는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합리화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라의 모습을 본 남자라면 누구나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민성은 소라도 어느정도 생각이 있는지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소라가 어떠한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자신은 정말 오늘 침대 아래서 이불깔고 잘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웅~~~ 웅~~~~>

아까부터 울렸던 소라의 전화가 다시 한번 더 울렸다. 카페에서부터 소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민성은 발신인이 원찬이일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좀 뜸한 줄 알았는데 다시 전화가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소라는 핸드폰을 아예 배게 밑에다 두었다. 민성과 자신이 마신 맥주 빈 캔을 신발장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기 위해 가져갔다.
그순간

<쾅쾅쾅>

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라야, 소라야, 그 안에 있지.

원찬이 문을 두드리며 소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소라는 당황했는지 캔을 바닥에 놓치며 주저 앉았다. 민성은 반사적으로 에어컨과 불을 끄고 소라에게 다가가 입을 막아주었다.

-소라야 너 그 안에 있지. 응? 잠깐만 이야기 하자. 잠깐이면 돼. 나와봐~

원찬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불꺼진 방 안에서 철제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원찬과 소라, 민성이 서 있었다. 소라는 얼어붙었는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만 꿈뻑거렸다. 소라의 입을 가린다는 것이 민성은 저번 펜션 정자에서 처럼 소라를 안게 되었다. 민성 자신도 지금 이 상황이 숨이 막힌지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 상황을 들켜서도 안될뿐더러 만약 들키게 된다면 원찬이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 안에 있잖아... 씨발년아. 소리가 다 들렸구만 진짜 지랄떨래?

원찬의 애원은 울부짖음으로, 울부짖음은 욕설로 바뀌었다. 소라는 무서운지 놀랐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민성의 눈은 불을 끄고 얼마 후에 어둠에 익숙해져서 소라의 두려워하는 표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떨고 있는 소라를 아예 꽉 안아주었다. 뭉클한 소라의 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그대로 느껴졌다.

-괜찮아.. 조금 있으면 곧 갈거야. 괜찮아.

민성은 소라의 귀에 대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소라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다시 원찬의 욕설이 들렸다.

-개같은 년아. 안에 있는 거 다 안다고. 어떤 새끼 밑에서 다리벌리고 낑낑대냐고? 빨리 나와 씨벌년아. 찢어죽이기 전에.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만은 민성은 원찬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이지만 이해가 갔다. 소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것이다. 모두가 다 피해자이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소라가 안긴상태로 민성을 올려다 보았다. 만나는 내내 도도했던 고양이 눈매가 온데간데 없고 울음섞인 눈이 보였다. 민성은 소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입술에 소라의 눈물이 느껴졌다. 민성은 소라의 허리를 더욱 끌어 당겼다. 그러자 닫혀있던 소라의 입술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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