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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그리고 사랑 - 89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8:16 629회 0건
예리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컵을 주방의 제 위치에 올려놓지 못하고 떨어트려서 발등을 다쳤단다.
이것도 병의 증상이다.
현석은 가슴이 아팟지만, 주기적으로 병원엘 가고, 약을 타오고, 그 약을 먹고, 가능하면 통증이 많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

몇일전에는 현석이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가 한웅큼씩 빠지는 것을 보고,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동안 소리없이 울었다.
이렇게 눈물이 흔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예리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이 이런 정도밖에 없다는 것 가슴이 아파서 그런지 자꾸 눈물이 난다.

대체, 누가 남자는 세상에 태어나서 단 세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건 사람이 아닐것이다.
어찌 강철의 심장을 가진것도 아닌데,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세번이라는 것이 남들앞에 대 놓고 통곡을 할 수 있는 아픔이라면, 남들 앞에 내놓고 통곡할 수 없는 마음속 깊은 곳의 그 크다란 슬픔의 크기를 어느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현석이 입 안으로 울음소리를 삼키며 소리죽여 오열을 하자, 오히려 예리가 현석을 달래 주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지수도 숨을 죽이고 울었다.

* * *

몸이 점점 더 나빠지면서 예리는 피에르체에 나가는 것을 그만 두었다.
피에르체를 직원들에게 넘겼지만, 그래도 자주 나가서 디자인도 하고,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었다.
그곳이 삶의 터전 이었으니.
그러나 피에르체에서 한번 기절한 뒤로는,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 하고는 집에만 있었다.
그리고 힘도 점점 없어져서 혼자 걷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석은 휴일에는 그런 예리를 위해서 가능하면 청평 별장에 가거나, 경치 좋은곳으로 데리고 놀러라도 가고 싶었지만, 집 밖에서 휠체어를 타는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기도 하고, 날씨가 너무 더워서 예리가 싫어하기도 했다.
그리고 힘이 없어서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너무 짧다.

* * *

시간이 갈수록, 건강상태가 극심하게 나빠지면서, 요즈음의 예리는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보낸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예리는 현석이 퇴근하고 들어와서 예리의 방으로 가면, 침대에 누운채로 자신이 오늘 낮에 스케치한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과, 현아가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을 현석에게 말해 주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현아가 아직 말을 할 단계는 아닌데도, 예리는 말을 하고 있는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간혹은 현아의 얼굴이 잘 안보일 때가 있거나, 현아가 있는 위치가 대중이 안되서 손으로 더듬는 일이 많단다.
거리 측정이 안되는 것 같다.

지수의 말로는 간혹, 언니 조금전에 내가 뭐하고 있었던지 알아요? 하고 물어 본단다.
이제 힘도 없고, 기억도 사라지고, 사람을 구분 하지도 못하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고, 깨어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몇일 전에는 극심한 경련증상이 있었는데, 그것을 현석도 보았다.
그녀의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바들바들 떠는 것을 현석이 품안에 꼭 붙잡고 한참을 있었었다.
현석은 몸속 깊은곳에서부터 입 밖으로 밀려 넘어오는 울음을 참으려고 정말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경련이 잠잠해 졌을 때,, 그녀는 죽은듯이 늘어졌었고, 온몸에 힘이 빠진듯 부축을 해 주어도, 일어나 앉지도 팔을 짚지도 못했다.

예리의 몸이 많이 수척해 진것을 현석도 느끼고 있다.
이제는 침실에서 셋이 함께 자지도 못한다.
예리는 이미 예리의 방으로 옮겼다.
거의 매일밤을 현석이 그녀를 품속에 안고 잠을 자지만, 현석의 품안에 안긴 예리의 몸은 점점 더 말라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온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 * *

8월의 무더위가 하순으로 넘어가면서 아침저녁 기온은 제법 썰렁한 느낌이 든다.
예리가 그렇게 경련을 일으키거나, 자주 기억을 일어버리던 어느 일요일.
휠체어에 앉은 예리의 표정이 마치 아이처럼 안절부절해 하더니 휠체어에 앉은채로 오줌을 쌌다.
그리고 현석과 지수를 향해 멍한 표정으로 웃었다.
또, 눈물이 왈칵 났다.
어찌하면 좋니. 어찌하면 좋겠니 예리야.
예리야.

예리는 이제 완전히 아이가 된 것 같다.
그나마 얼마의 시간이라도 저리 평화로운 표정으로 있는 시간이 고맙게 느껴질 뿐이다.
이제는 병의 진단을 받고, 예리가 말한 호스피스 병원으로 보내야 할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수는 못 보내겠다고 하면서 그 사이에 계속 막아 왔었다.
어찌 보내느냐고?
어찌 보낼수 있느냐고?
자기가 보살필 수 있는데까지 보살피겠다고.
현석도 지수와 마찬가지 심정이었기에 그래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지수의 임신도 10개월째에 접어 들었다.
출산 예정일이 3주도 남지 않았다.
지수의 몸이 그런 상태이니, 현석이 예리의 옆에 항상 있어주지 못하는 한, 병원으로 가가야 상황인 것 같다.
이제는 지수가 원하는것처럼, 마지막을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것 같다.
그나마 낮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옆에 있기라도 하지만, 밤에는 현석이 있다고 해도 잠을 안잘 수는 없는 상황이니 더욱 힘이 든다.

* * *

회사에서 울먹이는 지수의 전화 연락을 받고, 현석이 병원으로 달려갔을때는 예리는 코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잠들어 있었다.
팔에는 주사바늘이 꽂히고 여러 개의 줄들이 얽혀 있다.
지수가 부른배를 잡고 병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수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다.

“엘리.”
“너무 놀랬어요. 예리가 죽는줄 알고.”
오늘 집에서 코피를 한사발을 쏟았단다.
너무 놀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단다.
그대로 죽는줄 알았단다.

코피를 쏟았다는건 신경이 끊어져서 몸의 어딘가가 괴사를 해서 그러리라.
몸이 괴사하기 시작했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염원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이러다가 엘리까지 앓아 눕겠다.”
“난 괜찮아요. 예리가 너무 불쌍해, 얼마나 아플까 싶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연지 여사와 한지원이 달려 왔다.
“언니.”
“그래 지수야. 괜찮아?”
“응. 난 괜찮아. 예리가 죽는줄 알고 너무 놀랬을 뿐이야.”

이연지여사는 지수 앞에서 지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예리에게로 몸을 돌렸다.


현석은 마음속에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현석이 알아본 호스피스병원은 드라마나 영화 속의 병원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드라마 속의 그런 호스피스 병원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호스피스 병원이 아직 초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응급환자로 왔으니, 그냥 여기 입원을 시키고, 여기서 남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지수가 저리 슬퍼하니 지수도 출산때까지 병원에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마침 지수가 다닌 산부인과 병원이 같이 있는 종합병원이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지수가 집에 있으면, 집과 병원을 왔다갔다 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현석이 그것을 결정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차피 지수의 출산 예정일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현석은 산부인과 진료 신청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옆에서 환자를 돌보느라 몸이 많이 약해져 있으니, 출산때까지 남은기간을 입원할테니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 * *

“언니.”
모처럼 예리가 정신이 돌아와서 모두를 알아보았다.
“그래 예리야.”
“울지마, 언니. 나 때문에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었어.”
“그래, 울지 않을께.”
“언니, 난 괜찮아.”
“…”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석달이었어 언니.”
예리가 지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리야.”
지수는 예리의 이름만 부를 뿐이었다.
“언니, 남편도 있고, 딸도 있고, 그리고 몇 달동안이지만,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사랑해 주고,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또 행복한 시간 이었어.”
“…”
“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 언니.”
“그래, 그래, 알았다 예리야.”
지수는 눈물을 닦으면서 예리에게 대답을 했다.

“언니, 나 아빠주사 맞고싶은데, 이젠 안되겠지?”
예리가 그 말을 하면서 현석을 쳐다보았다.
물론 저 말은 우스개 소리이다.
지수가 임신한지 열달이 되면서 지수와도 가급적 섹스를 피해 왔고, 예리와는 그 전부터 이미 섹스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석이 자신을 꼭 안고 함께 자면서 간혹, 당신, 하고싶지 않아요? 라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럴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현석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헨리랑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고 중얼거리듯 말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사랑받고 있지만, 함께 섹스를 하면, 훨씬 더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럼, 여기선 곤란하니, 잠시 집에 다녀올까?”
지수가 역시 우스개 소리처럼 물었다.
“그럴까?”
저리 아픈상태에서도 농담이 나오다니.
현석은 피식 웃었다.

* * *

현석은 병원의 텔레비전에서 은행들의 인수합병 발표 이후의 소식을 들었다.
지난주에 하나은행에서 보람은행을 합병한다고 했고, 국민은행에서 장기신용은행의 합병을 발표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지나간다.
은행도 꽤 여러곳이 무너졌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은행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착찹해 지기는 한다.

* * *

“사장님.”
지수의 병실을 다녀 오는데 예리를 돕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복도에서 불렀다.
산부인과 병동과 신경외과 병동이 달라서 왔다갔다 해야 한다.
양쪽으로 움직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지만, 같이 입원할 수는 없다.
“네, 아주머니.”
“사모님이 찾았어요. 아까부터.”
“아, 네.”

“예리야 왜?”
이렇게 정신이 말짱하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중에 몇번, 그리고 몇 분이 되지 않는데, 조금 늦었으면 이야기를 못할뻔 했다.
“헨리.”
“응. 왜?”
“언니, 애기 낳았어요?”
“아니, 어제가 출산 예정일인데, 조금 늦어지나봐, 아까 진통이 조금 있어서 오늘을 낳지 않을까 생각 돼.”
어제가 지수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그럼, 오늘은 언니곁에서 지켜주세요, 아기 낳을때, 남편이 옆에 없으면 정말 서러워요.”
그녀의 느리고 힘 없는 말, 느린 말투, 졸리운것처럼 한번씩 말을 끊을 듯 이었다.
“그래 알았어.”

“꼭요.”
“그래, 꼭.”
현석은 덤성덤성 빠져서 어떤쪽은 맨살이 훤하게 보이는 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요구를 조금 더 큰 소리로 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아픈 몸으로도 지수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니.
“그럼 됫어요.”
“예리가 현아 낳을 때 많이 서러웠던 모양이네.”
“그럼요. 그땐, 얼마나 서러웠는데.”
여전히 그녀의 말은 느리고 낮았지만, 현석에겐 또렸하게 들렸다.
그래, 부모라고 있으나 마나 이니 가족은 곁에 없었을 것이다.
정말 얼마나 서러웠을까?
“언니는 내가 지켜줄께.”

“나, 언니가 낳은 애기 꼭 보고 싶은데, 볼 수 있을까요?”
예리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볼 수 있고 말고.”
“언니 애기, 딸이랬죠?”
“응.”
초음파검사인가 뭔가로 태중에서 아들인지 딸인지 구분이 되고 있고, 현석은 태어날 아기가 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헨리.”
“응?”
“내가 죽으면, 언니의 딸로 태어나면 안될까요?”
“그래, 그러면 좋겠다. 그러면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 수 있잖아 그지?”
“응, 그러고 싶어.”
“그럼, 내가 언니한테도 전해 줄께.”
“꼭 보고 싶은데.”
“예리야. 볼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한숨 자, 자고 일어나면 볼 수 있을거야.”
“헨리.”
“응?”
“사랑해.”
“그래, 예리야 나도 사랑해.”
가슴속에 싸아하게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현석은 예리가 눈을 감는것을 보고,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잘 좀 부탁한다고 다시한번 당부를 하고 산부인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낮에는 회사일을 보고 밤에는 병원에서 보내기 시작한지, 벌써 2주나 되었다.
간혹 집에 들려서 옷가지도 챙겨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낮잠을 조금씩 잘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처가에 데려다 둔 현아는 여전히 방글방글 웃으면서 잘 지내고 있고, 이젠 한두 단어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것도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어제는 잠시 현아를 데려와서 예리에게 보여 주었었다.
예리는 너무 좋아라 했지만, 의사는 지금 눈이 안보일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녀가 마음의 눈으로라도 사랑하는 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 * *

지수의 진통이 시작되어 몇시간이 흐르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간호사가 아이를 보여주었다.
아직 강보에 쌓이지도 않은, 엄마의 뱃속을 지나오면서 제 몸에 묻은것들을 닦아내지도 않은 딸을 보았다.
얼굴도 제대로 안보였지만, 아직은 예쁜지 아닌지 모르겠다.
간호사가 잠시 보여주고, 사라지자 현석은 바로 지수에게로 갔다.
“엘리, 고생했어. 아주 예쁜 딸이야.”
그리고 이마에,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봤어요.”
그녀의 얼굴에 잔잔하게 미소가 어렸다.

“어머니도 보셨어요?”
며느리의 출산이라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가 옆을 지켰고, 이연지 여사도 발을 동동구르면서 옆을 지켰었다.
아틀이 태어나면, 수현이로 딸이면 현지로 이름하기로 벌써 정해 두었다.
현아의 이름하고 운을 맞추기 위한 이름이다.

따르릉~
“여보세요.”
딸아이의 출산을 기뻐하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사장님, 여기 신경외과 병동인데요.’
“네. 예리 아프지는 않죠?”
조금 걱정이 되었다.
요즘 예리의 상태가 극심하게 나빠진 때문이다.
‘조금전, 사모님께서 운명하셨어요.’
“네?”
‘10분쯤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네, 곧 가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왜 늦게 연락을 주느냐는 말이지만 마져 나오지 않았다.
‘제가 연락처를 적어 준 쪽지를 잃어 버려서, 간호사실에가서 보호자 연락처를 찾느라, 연락이 좀 늦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아주머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예리가 입원해서부터 지금까지 예리를 보살펴 준 간병인 아주머니이다.
“네,”

“왜 무슨 전화인데 그러는가?”
현석의 접화기를 접으면서 힘없이 푹 주저 앉으며,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이연지여사가 물었다.
현석은 목구멍 너머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현지가 태어나자 말자 접하는 예리의 죽음 소식이라니.
아무리 참으려 해도 울음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으흐흐흥.”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로 통곡을 했다.
“김서방, 이사람아 왜 그러냐니까?”
“아범아, 무슨 전화기에 그러느냐?”
두분이 다 현석의 울음 소리를 듣고는 물었다.
“예리가, 흐윽, 예리가, 방금 떠났답니다 어머니.”
어머니도, 이연지 여사도, 지수도 현석의 외침을 들었다.

잠시 멍해 있던 지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두번째 며느리로 인정하신 어머니가, 그 두번째의 새 며느리가 돌아올 수 없는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흘리는 눈물이다.
이연지 여사도 흐느껴 울었다.
너도 이젠 내 딸이라고 말했던, 그 어머니가 딸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흘리는 눈물이다.

딸의 탄생을 보느라, 이렇게 젊은 나이에 떠나야 하는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데, 그래서는 안되는데, 이렇게 무심히도 떠나버리다니.
떠나기전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았어야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라도 날 보고싶지 않았다는 … “
마지막 말이 목에서 넘어오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생겨난 통증에 숨을 쉬기가 어렵다.
컥컥거리며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쥐었다.
“애비야. 정신 차려야 한다. 애비야.”
“김서방, 자네까지 이러면 어떡하는가, 정신차리게.”

어머니가 현석의 등을 두드리고, 장모님이 팔을 주물렀다.
그리고 무언가 소리를 치는데, 웅얼거리는 소리같아서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안돼, 예리야. 예리야 안돼.
기억이 까물, 사라지려 했다.
아니야, 이러면 안돼, 정신을 차려야 해.
아무리 슬프더라도 정신을 차려야 해.

눈을 껌벅이고 앞을 보자 이현지여사의 얼굴이 보이고, 현석의 뺨을 만지고 있었다.
등을 두드리는 손길은 어머니의 손인 것 같다.
짧은시간 정신을 잃어버렸나 싶었지만, 크게 숨을 내 쉬었다.

이연지여사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이제,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정신차리게.”
“네, 저 좀 일어나겠습니다.”
털석 주저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몸에 힘이 다 어디로 갔는지, 한줌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범아, 떠난 며늘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새 식구가 태어난 날이니 우리가 다 갈수는 없다.
애기가 세이레가 되기 전에 흉사에는 안 가는 것이 좋지만, 며늘아기로 받아들인 이상 내가 안갈 수는 없다.”
어머니는 옜날 분이다.
생각을 전혀 못하긴 했지만,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사부인께서 손녀와 며늘아기를 돌봐 주세요. 세상 떠난 며늘아기는 아범이랑 제가 가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말이다.
“네, 사부인, 제 딸로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든고보니 사부인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가야, 너도 가슴이 아프겠지만, 너도 가면 안된다. 그리 알거라.”
어머니는 울고있는 지수에게 말했다.
듣기에 따라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제 두분 어머니는 태어난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먼저인 것 같다.

지수는 이제 목놓아 울고 있었다.
불과 조금전에 현지를 얻고 그렇게 기뻐하였는데, 시간이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닥쳐온 슬픔이라니.

“갔다 올 테니 당신도 몸 조리 잘 하고.”
“네.”
현석은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어머니와 함께 지수가 있는곳을 나섰다.
지수는 겨우 고개만 들어서 답을 했다.

현지가 태어난 시간과 비슷한 시간대에 예리가 떠나다니.
정말 예리는 오늘 아침에 현석에게 소원했던 것처럼, 자신이 죽어서 지수의 딸로 태어난것일까?
예리가 떠난 신경외과 병동으로 뛰어 가면서, 아침에 잠시 정신이 돌아와서 현석에게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 * *

예리의 장례식장에는, 지수도 오지 못했고, 장모님도 오지 못했다.
사실상 상주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현석과 어머니가 자리를 늘 지켰고, 현석의 친구들이 와서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켰다.
예리의 친구들과 피에르체의 모든 직원들이 내내 곁을 지켜서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나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예성이도 오랬동안 통곡을 하다가 정신을 수습하고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날에는 친부가, 그리고 그 뒤애는 친모가 다녀갔다.
그들은 울지도 않았지만, 마치 객으로 온것처럼 잠시 있다가 갔다.
아니, 더 있고 싶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예성에게 쫓겨났다.
낳아만 주면 부모냐?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 왔느냐며, 고함을 지른 서슬퍼런 호통에 쫓겨나다시피 나갔다.
예리의 부모라 그냥 보낼 수 없었지만, 예성이 그들을 쫓아내고 현석에게는 그들을 만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 * *

현석은 고향 선산에 예리를 묻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묻었다.
누가 뭐라해도, 현석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비록 화장을 해서 작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지만, 자그마하게 봉분도 썼다.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서류상 그 어느곳에서도 현석의 아내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아내이다.
스물 다섯의 짧디 짧은 인생을 살다간, 가엽고도 어여쁜 아내이다.

지수는 전화로 계속 통화를 하면서, 마지막 가는길에 자신이 예리를 보살펴 주어야 하는데, 너무나 미안하다고 했다.
현석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가슴이 아프다.


(계속)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떠나보낸 그 사랑을 떠올리기만 해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사랑의 이름만 들어도 숨죽여 울게 된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정도 초연해 지기 전까지는……
------- 뜨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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