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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24 579회 0건
권력가

깨어났을 때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은 성림씨가 아니고, 정식이였다. 정식이는 내가 깨어나자, 몹시 반가운 표정을 지었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이 다 되어 있었다. 공무원인 녀석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었는데, 정식이는 살짝 내 뺨을 툭툭 치면서 내 처지가 불쌍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짜식, 불쌍하게 됐다. 니 인생도 이제 황이네."
"왜?"
"너 협심증이라더라."
"그래? 성림씨는?"
"내내 울다가, 교회 다녀온다더라.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가보더라."
"그래."
"아까, 성림씨가 꼬치꼬치 물어서. 나도 옆에서 들었는데, 너 심한 것은 아닌데, 그래도 이제 아무 것도 못한다던데. 살도 빼고, 운동도 해야하고, 고기도 거의 못먹고, 그렇게 스님처럼 살아야 한다더라."
"그렇지 않아도 서른 다섯이 되면 그렇게 살려고 했었어."
"왜?"
"우리 집 모두 가족력이 있잖아. 혈압이 모두 높아. 엄마는 약을 매일 드시고, 아버지도 그러시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거든."
"그래? 간호사 불러올게. 난 가봐야겠다."
"그래. 고맙다. 먼저 가지 그랬냐?"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친구새끼 깨어나는 것은 보고 가야지. 그런데, 너 오줌은 마렵지 않냐? 난 수액만 맞으면 오줌이 마렵던데."
"그러고 보니 그러네. 화장실 좀 같이 가자."
"알았어."

화장실을 다녀와서, 정식이가 가고, 간호사와 의사를 만나서 지금의 내 상태를 들었는데, 수술이나 스탠드 시술 같은 것은 필요없지만, 약물요법은 필요하고, 약물요법과 함께 생활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일 아침에 퇴원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병실은 2인실이었지만, 옆 베드가 비어 있어서 간호사와 의사가 나가버리고 나자 혼자 있는 병원의 고요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난 원래 혼자서도 언제나 심심한 사람이 아닌데, 지원이가 떠나고, 성림씨를 만나고 나서는 혼자 있는 것이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스마트 폰으로 협심증에 대한 것을 검색하다가 내가 겪었던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아픔이 협심증의 일반적인 증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성림씨의 마음이 들여다 보일 때만 발현되는 고통,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확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면 몹시 위안이 됐다. 고통의 원인이 성림씨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너무나 안심이 됐던 것이다. 평생을 이런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없었는데, 협심증의 증상이라면 내가 생활태도를 바꿔서 성실히 살아가기만 한다면 좋아질 수 있는 것이어서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건강검진을 받았고, 초기의 진단을 받아서 약물요법과 식이요법, 운동을 하면서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과 함께, 주말에 집에 내려갈테니 잡곡밥을 해먹을 수 있게 준비를 좀 해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몹시 걱정을 하시면서도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검은 콩과 깨로 선식도 만들어 둘테니 성림씨와 같이 내려오라는 말을 하셨다.

수액에는 수면제 성분은 없다고 했는데도 자꾸만 졸려서 설핏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 내 손을 잡고 뭔가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는 성림씨가 옆에 있었다. 성림씨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눈을 감고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몰래 들으려고 했는데, 집중을 하자 마치 성림씨가 내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성림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림씨는 기도를 하는 듯 했는데, 일반적인 형식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무슨 대화를 하는 것처럼 조용하게 이야기를 하듯 기도를 하고 있었다.

"너무 하잖아요. 나 이만큼 고생했으면 됐잖아요. 나는요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같이 그렇게 살 수는 없어요. 오라버니 좋은 사람이잖아요. 내 목숨을 덜어가세요. 나 오라버니가 죽으면 같이 갈 거예요. 이미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요. 내 목숨을 덜어가세요. 대신 살아가는 동안에는 오라버니 옆에 있게 해주세요.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기 목숨을 덜어 내게 주라는 말, 내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는 말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평소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거부감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환경, 고통 속에서 알게된 병력, 성림씨에 대해 가지고 있던 원래부터의 호감은 이 여자밖에는 없다라는 확신이 들게 했다.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성림씨는 흠칫 놀랐는데, 나는 눈을 뜨면서 놀라는 성림씨에게 뜬금없이 고백을 하고 말았다.

"좋아해요. 아주 오래 기다려서 성림씨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다행이에요. 성림씨를 알게 돼서."

성림씨는 말이 없이 고개를 푹 떨궜는데, 긴머리가 앞으로 쏠리면서 얼굴을 모두 가렸다.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어 가려진 머리칼을 치으려는데, 신기하게도 겹겹이 가로막혀 있는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의 미세한 공간들로 성림씨의 얼굴이 보였는데,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인지 되뇌고 있었고, 난 그런 그녀가 또 사랑스러워져서 그만 안고 안고 말았다. 알싸한 냄새가 났다.

퇴원을 하고 나와서 가게로 향하는데, 마치 성림씨가 내 보호자라도 된 양 옆에 들러붙어 있었는데, 그게 싫지가 않았다. 가게로 와서 주간 알바인 화영이에게 미안한데, 이번 달 말까지만 일을 하고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오히려 반색을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공모전이 있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거였다. 화영이는 성림씨에게 인수인계를 하고서는 자기 짐을 챙겨서 가버렸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이 있는 성림씨는 익숙하게 포스-계산대-를 다루면서 가게일을 보기 시작했다. 뭔가 안정감이 들었다. 냉장고를 챙기고, 발주작업을 모두 마치고 나서 매일 하는 일인 냉동식품 유통기한을 조사하는데, 성림씨가 역시 익숙한 듯, 신선식품과 햄류의 유통기한을 보는 것이 보여서 마치 오래 일한 부부같은 생각이 들어서 흐뭇한 마음과 장난스러운 심경이 되었다.

딸랑 하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예상치못한 얼굴이 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는 사람이었다.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김주임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아팠다면서? 괜찮은가?"
"네."
"아무리 봐도 복있게 생긴 얼굴은 아닌데 말이야. 자네는 운이 좋아. 좋아. 언제가 좋겠나. 올 가을은 좀 빠르고,
내년 봄이 좋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원이 말일세. 자네가 데려가도 좋아. 지원이가 자네 아니면 안되겠다니 어쩌겠는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별 수 없는 일이지."
"지원이랑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흰 헤어졌고, 다시 만날 생각도 없습니다. 전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지난 주까지도 만나는 여자가 없었다는 걸 아는데."
"네?"
"자네 동향보고를 받고 있지."

뭔가 몹시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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