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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26 582회 0건
포비아 - 공포증

성림씨가 점점 더 궁금해졌지만, 애써 관심을 끊었다. 난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고, 지금의 내 삶을 변화시킬만한 성림씨와의 인연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종북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되는 이념 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인신매매 경험이 있고, 탈북인인 성림씨와 만나서 내가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의 벽이 나와 성림씨 사이엔 있는 셈이었다.

이틀 정도를 지내면서, 난 다시 내 생활에 익숙해져 갔고,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말도 안되는 경험이 그저 잠시 일어난 꿈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경험은 그 자체적으로 비현실적이어서 믿기지 않는다는 생각이 믿을 수 없다. 믿어서는 안된다로 발전해 나가서 곧 내 원래의 생활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면에는 내 주위에서 성림씨를 떠올릴만한 물건이나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심란한 마음에 레나를 보는 것이 불편해져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잠시 레나를 맡겼던 것이다.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으셨던 어머니는 학대받은 흔적이 몸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잘 따르는 레나를 엄청 좋아하셨는데, 그래서 이번에 내가 일이 바쁘다며 레나를 데리고 시골집에 내려갔을 때에도 나보다 먼저 레나를 반기셨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레나가 없는 빈 공간은 너무나 적막했고, 내가 집에 돌아와서 처음 하는 일은 컴퓨터를 켜고, 노래를 틀어놓는 것이었다. 텅 빈 공간에 쓸쓸히 노래가 울리는 것도 쓸쓸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혼자 지내온 삶에 들어온 레나의 존재는 내게는 너무나 컸고, 비어있는 레나의 자리는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커져 있었던 것이다.

다비치의 노래를 곰 오디오로 틀어놓고는 며칠 전에 사온 넬레 노이하우스의 책을 읽으려 찾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지원이였다.

"응, 나, 왜?"
"어디야?"
"집이지. 왜?"
"집 앞이야. 잠깐 들어가도 돼?"
"그러던가. 무슨 일이라도 있어?"

문을 열었더니, 안나를 안고 있는 서 있었다. 아픈 표정이었는데, 살이 좀 빠져 있어서 본격적인 결혼준비로 다이어트를 시작한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안나는 오랜만에 보는 내가 낯이 선지 전처럼 뛰어들어서 내게 안기지 않았는데, 지원이는 방의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레나가 없음을 알고는 피식 웃었다.

"레나는? 버렸니? 나랑 헤어져서?"
"아니. 요즘 일이 많아서 시골집에 데려다 놨어. 엄마가 레나를 보고 싶어 하시기도 해서."
"어머님은 안녕하시지?"
"뭐, 늘 좋으시지. 무슨 일인데? 결혼한다며?"
"누구한테 들었어?"
"어. 여민 선생님께."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도 했었는데, 그렇게 됐어. 좋아보인다. 오빠, 잘 지내지?"
"나야. 언제나 비슷하지. 그래, 무슨 일인데?"

갑자기 지원이가 몹시 기분이 나빠지더니, 뚜벅뚜벅 걸어가서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더니 컵에 따라 마시고는 컵을 탁하고 식탁에 내려놓았다.

"왜? 내가 결혼하니까, 나랑은 잠시도 있기 싫어? 꼭 그렇게 무슨 일인지 꼬치꼬치 물어야겠어?"
"좀 부담이 되지. 나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여자랑 한 공간에 있는 게 당연히 부담스럽지. 내가 널 이 방에 들이고,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네가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서지, 너랑 무슨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야."
"훗, 무슨 일? 뭐? 섹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게 화를 내다가 또 엉뚱하게 화를 푼 지원이가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오줌을 싸려는 안나를 데리고 화장실로 데려갔다가 나와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몸을 기댔다. 컴퓨터로 가서 노래를 끄고, 돌아온 내게 지원이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혹시 김재환이라고 알아?"
"김재환?"
"오빠를 알던데. 오빠보다 한 살 어려. 대전지법에서 판사로 일하고."
"아. 알아. 재환이. 알지."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해. 그 사람은 오빠랑 내 사이를 모르고. 그런데, 정식이 오빠가..."
"알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래. 오빠는 말을 중언부언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아. 믿어도 되는 거지?"
"그래. 굳이 알아서 좋은 일도 아니고."

정식이는 나와 지원이의 사이를 이어준 친구였고, 김재환은 내 일년 후배였다. 헤어졌지만, 그 정도의 의리는 지켜줄 생각이 있었다. 용건을 모두 마친 지원이가 안나를 안고 일어서려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내게 물었다.

"오빠, 혹시 시장에서 그 개장수 만난 적 있어? 오빠를 찾던데?"
"응? 누구? 레나 팔았던 사람?"
"어."
"아니. 난 원래 동물 냄새를 싫어해서 시장을 가더라도 그 블럭은 돌아가거든. 본 적 없어. 그런데, 왜 날 찾는데?"
"모르겠어. 어쩌면 레나를 찾는 건지도. 그냥 그 때 사간 개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지내는 지 물어서. 그때는 오빠랑 헤어지고 바로여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었거든. 오빠, 뭘 좀 해먹고 살아.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 어떻게 냉장고에 김치 쪼가리가 하나 없냐?"
"됐어. 정식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넌 그만 가 봐라. 남말하지 말고 너도 좀 뭘 먹고 지내. 드레스 발 세우려다가 말라 죽겠다. 뭔 놈의 다이어트를 그렇게 하냐. 뼈밖에 안 남겠다."

지원이가 문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했는데, 내 대신 문을 연 지원이 앞에 성림씨가 작은 접시에 유부초밥 같은 것을 들고 서 있었다. 지원이는 좀 기가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난 성림씨가 당황하지 않도록 그녀를 배려했다.

"성림씨, 어쩐 일이세요?"
"레나가 보고 싶어서요. 저기 이건 두부밥이에요. 맛이나 좀 보시라고."
"어쩌죠? 레나는 시골집에 잠깐 보냈거든요. 엄마가 레나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셔서요."
"네에.."

순간, 성림씨의 생각이 다시 머리로 전송되듯 전해졌다. 탈북을 하다가 북송을 당하는 과정에서 열차에서 뛰어내리다 목숨을 잃은 성림씨의 엄마는 굶고 또 굶어서 마치 마른 북어처럼 말랐지만, 형형한 눈빛을 가진 강골이셨다. 지원이는 재빨리 힐을 신고는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는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면서 내 방을 나가버렸고, 그런 지원이의 반응에 성림씨는 몹시 당황했다. 성림씨의 마음이 조금씩 더 분명하게 내게 전해지고 있어서, 성림씨가 무슨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내가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원이가 가 버린 후, 난 성림씨에게 오해하고 있음을 알려줬다.

"저 애, 성림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번에 밥 먹다가 원장님이 말한 그 아이에요. 나랑 헤어지고 결혼한다는, 알고 봤더니 내 후배랑 결혼을 하는 모양이에요. 저랑 친하지는 않은데, 혹시나 해서, 오해할수도 있는 일이 생길수도 있잖아요. 그거 막아달라고 부탁하러 왔나봐요. 잠깐 들어오실래요?"

성림씨는 흠칫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나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익숙한 듯 전에 앉았던 식탁의 그 의자에 앉고서는 예의 그 두부밥을 내려놓았는데, 북한음식을 평양냉면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는 내겐 소박한 비주얼의 두부밥이 꽤 맛있어 보였다.

"차를 드릴까요?"
"아니요. 냉수가 있으면 냉수를 주세요."
"생수는 없고, 보리차를 식혀놓은게 있는데, 드시겠어요?"
"네. 식기전에 이걸 먼저.."
"네."

유부초밥 비슷하게 생겼지만, 두부밥은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양념이 아래쪽에 미리 발려져 있는 것이 특이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제사때 두부전을 양념에 찍어먹는 맛이 났다. 기독교 집안인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따뜻한 두부전을 먹어본 일이 없어서 따뜻할 때 먹는 두부전은 각별한 맛이 있었다.

"맛있네요."
"네, 저번에는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아서. 그런데, 고향이 여기서 멉니까?"
"아니요. 차로 한 시간 정도요. 자주 찾아뵈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부럽습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지 않겠어요. 온 민족의 소원인데요.?"
"예? 어찌 아셨습니까?"

몹시 놀라는 성림씨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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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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