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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41 584회 0건
서로의 거리가 많이 줄어들자, 여자 친구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나도 여자 친구의 인사에 답해 주었다.
“응, 승희야.”
지금 난 승희와 사귀고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승희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학교는 어때?”
“친구들이 다 휴학해서 심심해.”
“너도 휴학하지 그랬어.”
“집에서 취직하든 못 하든 얼른 졸업하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집에서 그렇게 하라면 어쩔 수가 없다. 학생 입장에서는 취직이 확실히 결정될 때까지 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아직 취직 못했어요’와 ‘아직 학생이에요’라는 말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명절에 온가족이 모였을 때 특히 그 부담감은 크다. 나는 그래도 빠르게 취직했지만, 장남이다 보니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여자의 입장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아직 가부장적인 생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 어른들에게 있어선 여자가 취직하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할 수 있는데, 그 취직조차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나라면 명절에 집에 안 들어간다.
명동은 다양한 볼거리가 많다. 길거리 공연도 많이 펼쳐지고, 쇼핑거리도 많다. 데이트를 하기에 최고의 장소다. 게다가 지금은 3월. 아직 초라 추운 기운이 남아 있긴 하지만, 따사롭게 해가 비치는 적당한 날씨다.
오늘 오전은 승희와 함께 쇼핑을 하기로 했다. 대부분 여자의 쇼핑을 따라가는 남자는 매우 힘들어하는 모양이지만, 다행히 난 안 그렇다. 나도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물건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얼마간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파왔다.
“오빠, 나 배고파.”
승희의 말에 오전 쇼핑을 멈췄다. 오늘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별로 마음에 든 옷이 없는 모양이다. 그 다음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해결하고, 소화를 시킬 겸 카페에 갔다. 카페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회사에서 겪었던 이야기. 승희가 일상에서 겪었던 이야기. 승희는 취업준비가 코앞에 닥쳐 요즘 압박을 받고 있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으니 쉽게 말할 수 없다.
얘기를 하다가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4시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응.”
나와 승희는 카페에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밥도 표도 오빠가 샀으니까, 이건 내가 낼게.”
계산은 승희가 했다. 오늘 근처에서 뮤지컬 공연을 한다 예매는 내가 했다. 언젠가 승희가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예매했다. 이미 매진이 되었었기 때문에 양도를 받았다. 은근히 애를 먹었지만 승희가 기뻐하는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됐다.
“춥다.”
승희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팔짱을 꼈다. 3월이지만 아직 쌀쌀하다. 오히려 작년 12월이 더 따뜻했던 것 같다. 얼굴을 지나는 차가운 바람은 싱그러운 봄바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다.
“재밌을 것 같지?”
승희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
“응.”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나 뮤지컬, 연극 같은 것을 좋아한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영화에 비해 매우 비싸서 쉽게 보기 힘들지만, 기회가 되면 보려고 한다.





우린 공연이 끝나고 다소 들떠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재밌었지?”
승희가 내 옆에 꼭 붙어서 말했다.
“응. 마지막 진짜 멋있었어.”
무대에 압도 되는 건 처음이다. 이렇게 웅장한 뮤지컬은 처음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오페라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까. 아까도 말했지만, 비용문제 때문에 뮤지컬이라고 해도 오늘만큼 규모가 큰 것을 본 적이 없다.
잘사는 집도 아닌, 평범한 가정의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10만원이 넘어가는 공연을 자주 보러 올까. 그나마 5만원 이내의 소극장 공연이라도 보는 게 다다. 그것도 사실 힘들었다고.
오후 8시 30분. 밤이라기엔 조금 이르고, 저녁이라기엔 늦은 시간. 그러나 아직 해가 짧아 밤처럼 어둡다. 나와 승희는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 탔다. 사람이 많아서 앉을 자리는 없었다. 전철 구석으로 가 서 있기로 했다.
“오빠, 오늘 재미있었어.”
“나도.”
승희의 말에 대답했다.
“다음주에도 시간 나?”
“아직 모르겠어. 그때가 되어 봐야 알 것 같아.”
아직 신입 사원이라서, 오히려 일이 많지 않다. 좀 더 일에 익숙해지면 아마 할당되는 일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일하기 힘들지?”
“아냐, 그렇게 힘들지 않아.”
사실이다. 취직 전에 느꼈던 대기업에 대한 두려움에 비해 일은 힘들지 않았다.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라서 모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할 만했다. 나중에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오빤 진짜 대단한 거 같애. 어떻게 거기에 취직을 했지?”
“그러게.”
승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정말 신기하다. 내가 취직한 기업은, S사처럼 세계적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지는 않아도, 이름을 들으면 알 정도의 큰 기업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 수준의 기업은 원래 이력서를 넣을 생각도 없었다. 준비하고 있던 다른 기업과 우연히 시기가 맞아떨어져 이력서를 집어넣었던 것뿐이다.
요즘 정말 취업 쉽지 않다. 난 군입대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 번의 휴학도 없이 곧바로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을 늦추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인턴쉽을 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스펙을 쌓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을 제치고 내가 취직을 한 것이다.
입사를 해서 연수를 받기 전까진 신종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한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어떻게 붙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혹시나 인사관리팀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어쨌든 갑자기 해고를 당하지도 않았고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있으니, 이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 진짜 유학 갔다와야 하나봐.”
“왜?”
“영어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아가는데 왜 영어를 잘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제대로 대답해줄 수 없다. 그러나, 글로벌 세계를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왜 영어를 해야 하냐고 물어본다면, 아주 해줄 말이 많다. 일단 취직하고 싶으면 해야 하거든.
“너 영어 잘하잖아.”
토익 점수도 높은 걸로 알고 있다.
“회화가 안 되잖아.”
“회화는 두려워 하지만 않으면 되는데.”
“오빠는 잘하니까 안 두려운 거야. 누가 영어는 자신감이라고 한 거야. 자신감도 실력이 있어야 생기는 거 아냐.”
승희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유학 갔다 온 적 없지.”
“응.”
“근데 영어를 어떻게 잘해?”
“아니, 그닥 잘하지는 않는데.”
그냥 일상회화 정도나 가능한 수준이다. 지금 입사한 회사만 해도 영어를 현지인처럼, 아니 어릴 때부터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온 완전 현지인 같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수두룩하단 건 조금 과장한 거고, 그래도 학교에서 보는 것보단 많이 본다.
“그 정도면 잘하는 거야.”
“음, 그래도 미국에서 몇 년 있어봐서 그런 게 아닐까?”
“뭐야, 오빠 미국에서 살았어?”
“아, 그건 아냐. 우리 이모가 미국에 계시거든. 그래서 어릴 때 가끔 이모네서 몇 달간 머문 적이 있어.”
“얼마나?”
“음, 7살 때 2개월 정도, 9살 때 1개월, 그렇게 몇 년에 한 번 몇 개월 정도씩 다녀왔으니까 다 합치면 1년 조금 넘지 않을까?”
“그러니까 영어를 잘하지!”
“그래봤자 맨날 집에서만 틀어박혀 있었어.”
다만, 이모의 아들과 딸, 네이트와 뎁이 영어밖에 못해서 자연히 내가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아니, 한국어밖에 못하던 나도 사실 네이트나 뎁과 차이가 없었지만, 그 당시 너무 어렸던 뎁이나, 주위가 너무 산만해서 ADHD 직전이었던 네이트에게 한국말을 요구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영어를 공부했다. 아무래도 정말로 필요해서 공부를 하다보니 더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잘하는 건 또 아니다. 그냥 디즈니 만화 정도는 자막 없이 볼 수 있을 정도. 어려운 말이 나오는 건 못 알아듣는다. 우리말로 하는 영화도 어려운 말 나오면 못 알아듣는데 영어로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냐.
“역시 외국에서 살다 와야 하는구나.”
“그건 산 것도 아니라니까.”
그냥 잠깐 체류한 거지.
“교환학생 신청해볼까?”
승희가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교환학생?”
“응. 얼마 전에 학교 공고 확인하니까, 모집하더라. 미국도 있고, 호주도 있고, 캐나다에 일본, 중국도 있었어.”
“어디에 가고 싶은데?”
“역시 미국이 제일 가고 싶은데, 비용이 세서. 호주나 캐나다가 제일 낫지 않을까 싶어.”
“으응.”
미적지근하게 대답해버렸다. 여자 친구의 유학 이야기는 마음 편히 할 수가 없다. 누가 연인이 멀리 떠나갈 일을 기분 좋게 떠들까. 싫어하거나,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는 한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오빠? 나 유학 안 갔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왜?”
“그런 건 물어보지 마.”
닭살 돋는 이야기는 그다지 잘 못한다.
“오빠, 너무 귀엽다.”
그렇게 말하며 승희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머리를 흔들려 승희의 손을 피했다.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뭔가 지는 기분이라서 그랬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승희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글쎄, 그렇게 귀엽지만은 않을 텐데?”
내 말에 승희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오빠, 그 말 무지 야한 거 알아?”
“몰라.”
생각 없이 했던 말인데 승희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내 말이 야한가?
“아, 다 왔다.”
그때 전철이 점차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다. 전철 창밖으로 플랫폼과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다 조금씩 속도가 느려졌다. 휙휙 지나가서 형체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전철이 완전히 멈추고 우리는 역에서 내렸다. 전철에서 내리자 다시 차가운 공기에 둘러싸였다. 역시 춥구나.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오랜만의 데이트다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 게다가 이제 9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20세가 넘은 성인에게는 너무나 이른 시간.
“치맥 먹자, 치맥. 요즘 기름이 별로 들어간 적이 없어.”
“그러자.”
승희의 말에 동의했다. 생각해보니 뮤지컬을 보느라 저녁을 먹지 않았다. 이 시간쯤 되니 배가 고팠다.
치킨과 맥주. 줄여서 치맥. 삼겹살에 소주가 있다면, 치킨에는 맥주가 있다. 살이 찌는 지름길이라고도 하지만, 그만큼 맛이 있다. 날이 꽤 추워서 가까운데 보이는 맥주집에 들어갔다. 맥주 2,000cc와 치킨을 시켰다. 잠시 후 메뉴가 나왔다.
“아,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승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 먹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맥주는 도수가 세지는 않지만, 그래도 1,000cc씩 먹다보면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온다. 개인차가 있지만, 나와 승희에겐 아주 적당한 취기다. 이만큼 먹다보면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너무 많이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간다는 단점이 있지만 1,000cc 정도라면 무난하다.
술과 안주와 이야기가 있으면,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이제 슬슬 나가자.”
계산을 하고, 술집에서 나왔다. 술집에서 나오며, 승희가 내 옆에 꼭 붙어 팔짱을 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
“응.”
“걸어서 갈까?”
“응. 춥지도 않고.”
나와 승희는 천천히 걸었다. 승희네 집은 역에서 2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승희도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함께 걸으며 산책하는 경우도 많다. 얼마 전까지는 추워서 못했지만, 오늘 같은 날씨라면 괜찮다. 밤이 늦어 기온은 더 낮아졌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오히려 아까보다 낫다.
“그러고 보면, 작년 2학기 때 오빠랑 나랑 많이도 걸어 다녔지.”
“그러게.”
승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우연히 함께 듣는 교양수업이 겹쳐서 한 학기 동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 다녔다. 강의실이 다른 건물, 그것도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같이 걸어 다니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승희랑 조금 친해질 수 있었다.
“너랑 같이 들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애. 듣고 싶은 과목이라 넣긴 했는데, 혼자서 듣는 거라서 좀 걱정했거든.”
“나도. 그래서 오빠랑 친해졌잖아.”
“으응.”
“뭐야, 그 이상한 대답은.”
내 어물쩍한 대답에 승희가 눈을 흘긴다. 하지만 마냥 친해졌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 당시 승희가 어쩐지 나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이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내 말에 다소 차가운 반응을 보이거나, 가끔은 나를 노려보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나 그때 너 좀 무서웠어.”
“왜?”
“뭔가 날 싫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
“에이, 오빠 착각이야. 내가 낯을 가려서 그런 거야.”
그런가? 하긴, 아직 잘 친해지지 못한 상대에게 어색하게 대한 것이 나에겐 화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예전 일이고, 지금의 승희는 나의 연인이고, 나를 사랑해주며, 나에게 달콤하다.
이 길을 걷다보면, 다양한 숙박업소가 보인다. 이렇게 많은 데도 장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저런 데는 스무 살 넘으면 가라.”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에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빠, 야해. 이상한 데만 쳐다봐.”
승희가 내 시선을 눈치 채고 말했다.
“뭐가 야해. 그냥 쳐다본 건데.”
“완전 음흉한 눈빛이었거든?”
“음흉하지 않아.”
“음흉해.”
별로 음흉하지 않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음흉하냐, 안 하냐라고 물어보면 음흉하다. 남자는 음흉하다. 가벼운 말다툼 때문에 승희와 얼굴이 꽤나 가까워 진 것을 깨달았다. 승희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늦은 밤이라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진작에 확인했다.
찬 공기 때문에 승희의 입술이 차갑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승희의 체온이 살아났다. 부드럽고 따뜻한 혀의 느낌.
“하아…….”
승희의 따뜻한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흩어졌다.
“네가 더 음흉한 것 같은데?”
승희가 말없이 내 팔뚝을 퍽 때렸다. 겉옷이 두꺼워서 느낌도 별로 없다.
“아파.”
“뭐가 아파.”
“무지 아파.”
“옷 위로 때렸는데 뭐가 아파.”
맞은 곳을 문지르면서 아픈 척을 했다.
“겨울이라 얼어서 아파.”
“거짓말쟁이.”
“진짜 아파. 잘 봐.”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손을 올렸다. 주먹을 쥐고 꿀밤을 먹이듯 승희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승희가 눈을 감으며 얼굴을 뒤로 뺐다. 눈을 감았을 때를 노려 키스했다.
“어이아애.”
승희가 뭐라고 말했지만, 내 혀가 방해하는 바람에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곧 입술과 입술이 떨어졌다.
“거짓말쟁이.”
“내가 뭘.”
승희가 가볍게 날 노려보았다. 그러나 전혀 무섭지 않다. 잠시 승희와 마주보고 있으니, 매서웠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오빠, 키스해줘.”
쌀쌀한 초봄의 늦은 밤. 나의 연인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는 게 정말 다행이다.
성인 남녀의 다음 수순은 매우 명백하다. 우린 근처의 모텔에 들어갔다. 승희가 먼저 샤워를 하는 것을 기다리고, 내가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니 조금 추웠지만 상관없다. 얼마 안 있어 더워질 테니까.
아담한 승희의 몸이 내 품 안에 가득 들어온다. 작은 체구와는 달리 풍만한 가슴이 내 가슴에 닿았다.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지만, 승희는 꽤나 가슴이 크다. 역시 여자는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흐릿한 조명에 비치는 승희의 나신이 아름답다. 침대 위의 하얀 시트가 도화지처럼 보였다. 도화지 위의 아름다운 그림이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승희의 부드러운 허리라인을 손으로 훑었다.
“흐응…….”
승희의 색기 있는 콧소리가 나를 자극한다. 허리라인을 타고 내려갔다. 엉덩이 근처에 도착하니 천조각의 느낌이 손 끝에 닿았다. 팬티와 엉덩이 골 안에 생긴 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승희의 엉덩이를 손으로 꽉 쥐웠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느낌이 손 안에 가득 찼다. 다음은 승희의 앞으로 손을 이동시켰다. 부슬부슬한 느낌이 손에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더 아래로 손을 옮겼다. 열이 올라 뜨거운 승희의 몸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곳.
“하악!”
승희의 몸이 뒤로 휘었다. 허리가 그리는 아치형 곡선을 손으로 느꼈다. 보지 않아도 그 아름다운 모습이 느껴졌다.
중학교 때까지 체조를 했다고 들었다. 고등학교도 체조 특기생으로 입학을 하려고 했지만, 발목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일반학생으로 입학을 한 모양이다. 그 이후 어찌어찌하여 결국 체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체조를 한 덕분인지 승희의 몸은 그동안 안았던 누구보다 탄력 있고, 유연하다. 달콤한 한숨을 내뱉으며 뒤로 꺽는 허리가 내 본능을 자극한다.
공들인 애무 덕분인지 승희의 그곳에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이쯤 되자 승희의 몸 일부를 가리고 있는 작은 천조각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벗겼다.
승희의 위에 올라타 키스를 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가 넓어지고, 승희의 얼굴과 몸을 관찰할 수 있었다. 긴 머리가 사방으로 퍼져 있다. 커다란 가슴은 중력으로 살짝 퍼져 있다. 군살이 없는 부드러운 허리라인이 보였다. 살짝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섹시하다.
승희가 양 다리를 들어 내 어깨에 걸쳤다. 역시 체조선수 출신. 무지하게 유연하다. 천천히 내 물건을 승희의 그곳에 삽입했다. 충분히 젖어 있어서 별다른 저항 없이 들어갔다.
“학!”
승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희의 숨소리가 조금씩 격해지기 시작했다. 숨을 내뱉으며 작은 신음이 나왔다. 승희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씩 속도를 높였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승희에게 다가갔다. 양손은 상체를 지탱한 채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승희가 몸을 일으켜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다리를 걸치고 몸을 끌어안는 자세. 보통 사람이라면 매우 힘들겠지만, 유연한 승희는 가볍게 해낸다.
시간이 지나자 작았던 신음이 커다란 비명으로 변했다. 승희가 엎드린 자세로 몸을 웅크렸다. 양손은 앞에 있는 베개를 세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승희의 하얗고 동그란 엉덩이를 잡고 앞뒤로 움직였다.
“아! 아! 오빠!”
승희가 뒤로 손을 내밀었다. 엉덩이를 잡고 있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느끼고 있다. 승희는 오르가즘을 느낄 때 내 손을 잡는다. 앞으로 하고 있었으면 손을 잡아 줄 텐데, 뒤로 하는 자세는 엉덩이에서 손을 빼면 격렬한 자세가 힘들다. 내가 여자의 몸을 지탱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엎어지기 때문이다. 느끼고 있는 여자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
운동을 했었기 때문인지 아귀힘이 세다. 여자 치고는 강한 아귀힘에 피가 안 통하는 손이 아플 지경이다. 그러나 이 고통도 좋았다. 내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자부심. 정복감. 성취감.
“승희야, 사랑해.”
“나도. 오빠.”
행위를 끝내고, 나와 승희는 나른한 몸을 침대에 누였다. 방의 온도가 그리 높지 않아선지 나도 승희도 땀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일으킬 생각도 않고 침대에서 딱 붙어 있다. 물론 행위 후 가벼운 뒷정리는 했다.
승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승희가 내게 다가와 목에 쪽 키스를 했다. 대답으로 승희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오빠 요새 일하느라 피곤하지?”
“그냥, 할만 해.”
아직은 일이 힘들다고 느낄 만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야근은 자주 하고 있지만, 밤을 샌 적은 없다. 이 정도 야근은 군대에서도 많이 해봤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 그다지 힘이 안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승희를 처음 품은지는 한 달 정도가 되어간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랜만에 승희를 만났을 때, 그러니까 2월에 승희와 처음으로 잤다. 딱히 노렸던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승희와 밤늦게까지 데이트를 했고, 어쩌다 보니 승희네 집에 아무도 없었을 뿐이다.
승희는 처녀였다. 내 인생의 첫 처녀다. 내 손끝 하나하나에 떨고. 내 목소리, 내 애무에 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한 달. 이제는 승희 쪽에서도 제법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마음을 열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몸이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마음을 열었기 때문인지 승희가 점점 더 나에게 길들여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승희의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느껴갈수록, 반대로 나는 차가워지고 있다. 나는 그렇다. 왜 나는 이렇지? 그러나 아무리 되물어도. 내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도 괴롭다.
어쩌면 벌일지도 모른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죄 때문에 얻은 벌. 이것이 벌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여자를 속이는 것이 벌이라면. 나는 그저 묵묵히 내 죄값을 받아야 하는 걸까.
승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승희의 호흡이 길고 조용하다. 잠이 들었는나보다. 나도 고민을 접고 잠을 청해야겠다. 어차피 결론이 나오지 않는 고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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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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