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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8:48 574회 0건
아침 7시에 눈을 뜬 것은 내가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 시간에 알람을 맞춰두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주워 알람을 껐다. 핸드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다. 충전기에 꽂아야 되는데 너무 귀찮다. 아직 몸이 나른하고 졸리다. 그냥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잤다.
졸렸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정혜에 대한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어제 결국 전화를 안 받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자버렸지.
아니 왜 전화를 안 받는 건데?
다시 생각하니까 또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니까 잠이 깼다. 몸은 나른한데 정신은 아주 말끔히 깨어 있는 이상한 상황.
그런 와중에 승희에게 생각이 미쳤다. 어제 바로 뻗는 바람에 문자 한 통 하지 않았다. 최소한 잘 들어갔냐라고라도 보내봤어야 했는데 지금은 아침이니 전화는 그렇고 문자라도 보내봐야겠다.
『어제 잘 들어갔어?』
문자를 보내고 다시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웠다. 멍하니 있으려니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승희에게 온 답장이다.
『네, 잘 들어갔어요.』
생각보다 답장이 빨라서 놀랐다.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 그렇게 취했으니.
『일찍 일어났네.』
『문자 오는 소리에 깼어요.』
『아, 그래? 미안.』
『괜찮아요. 어차피 곧 알람 때문에 깼을 거니까요.』
『평소에 일찍 일어나나보네.』
『요즘 학원에 다니거든요.』
방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학원에 등록했나보다.
『부지런하네.』
『오빠야말로 입사 전까지 별일 없으실 텐데 일찍 일어나시네요.』
『알람 맞춰놓은 것 때문에 깼지.』
아직 하품이 나오고 피곤도 풀리지 않았는데 잠을 못 자겠으니 미칠 지경이다. 어쩌다보니 승희와의 문자 대화가 아주 길어졌다. 문자에 집중하다보니 답답하고 짜증났던 감정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그저 영양가도 없는 문답으로 30분은 보낸 것 같다. 간당간당하던 배터리 잔량이 결국 1%가 되었다.
승희와 적당히 대화를 끝내고 책상 위에 충전기를 핸드폰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승희와 문자를 하면서 계속 참고 있었다. 집안이 조용하다. 아버지는 이미 출근을 하셨을 거고. 어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 아침을 준비하느라 지금 주무시는 모양이다. 동생은 여유로운 대학생의 겨울방학을 만끽하느라 아직 열심히 자고 있겠지. 아니, 밤을 새느라 아직도 안 자고 있을 수도 있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처리하고 부엌 냉장고에서 물을 마셨다. 술 마시고 일어나면 오줌이 무지 마려우면서 목은 마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연락이 온 곳이 없다. 내심 부재중 통화를 기다렸는데 그건 헛된 바람이었나보다.
다시 전화를 해볼까. 근데 정말 전화해서 뭐라고 말할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아니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면 뭐가 미안하지? 아니 애초에 전화를 받아야 무슨 말을 하든 말든 하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결국 핸드폰은 침대에 던져버리고 방을 나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추운 겨울엔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게 최고다.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래봤자 아주 조금이다.
부엌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찬장에서 컵을 꺼내 주스를 따랐다. 시원하고 신 맛이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오렌지 주스 병의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동생이 부엌으로 나왔다. 김세연. 21살. 현재 대학교 2학년이다. 다 큰 처녀가 나시티에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고 있다. 아무리 집 안이라도 겨울이라 추울 텐데 365일 저러고 다닌다. 저런 주제에 밖에 나갈 일만 생기면 변신을 해가지고 나가니, 여자를 요물이라 부르는 거겠지.
“일찍 일어났네.”
“안 잔 거야.”
내 말에 동생이 대답했다. 과연 방학을 맞은 대학생답다.
“뭐 하느라 안 잤냐?”
“게임.”
“그래 열심히 해라.”
내 동생은 여자 치고는 드물게 FPS나 전략 시뮬레이션 같은 게임을 좋아한다. 보통 여자들이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미니게임 따위는 쳐다보지 않는다.
“오빠는 취직도 됐다면서 뭐 이리 일찍 일어났어?”
“알람 맞춰 놓은 거 깜빡하고 있다가 깼다. 아, 오렌지 주스 줄까?”
“엉.”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셨던 컵에 주스를 가득 채워주었다. 동생이 나에게 컵을 받아 주스를 시원하게 원샷했다.
“입사가 언제라고 했지?”
주스를 다 마신 동생이 물었다.
“1월 며칠이더라. 한 이주일 정도 남았어.”
“그래? 그럼 남은 기간 동안 여유도 좀 부리고 그래봐. 맨날 학원 다니고 도서관만 다니면서 공부했잖아. 입사 전까지가 오빠 인생 최대의 휴식기간일지도 몰라.”
동생이 아주 불길한 소리를 입 밖에 냈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직하기 전까지도 꽤나 고생을 하긴 했지만, 취직한 이후라고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아마 더 힘들 거다. 그러니 동생 말대로 지금이 내 인생 최대의 휴식 기간일지도. 갑자기 이렇게 집에서 빈둥빈둥 있는 것이 너무 아까워졌다.
“그럼 뭐하는 게 좋을까?”
“나랑 같이 게임 하자.”
“그건 고민 좀 해봐야겠다.”
정말 지금이 인생 최대의 휴식기간이라면 게임으로 보낼 수는 없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뭘 할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고민했다. 일단 잠이나 잘까. 그러나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여행이라도 해볼까. 아냐 추워서 여행은커녕 집 앞 슈퍼 가는 것도 힘들다.
“그래놓고 또 공부할 거지?”
“안 해.”
공부는 한동안 하고 싶지 않다.
“오빠는 인생을 너무 재미없게 살아. 좀 즐거운 일 좀 해보라고.”
재미없다라.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나는 내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들이 밖에 나가서 뛰어다닐 때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생각에 빠졌다. 그게 나에겐 노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외향적이고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동생을 보면 확실히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특히 만나는 사람의 수에 있어서 동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뭘 하면 즐거울까?”
“나가서 사람 만나.”
“너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충분히 사람 잘 만나서 살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애인을 만들라고. 오빠 애인이랑 헤어졌지?”
동생의 말에 조금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귀신같은 동생이다.
“어떻게 알았어?”
“요즘 인터넷이 얼마나 무서운데. 얼굴만 알아도 그 사람 누구고 직업이 뭔지 다 알아. 그 언니 블로그고 미니홈피고 다 닫았드만.”
조금 안심했다. 난 또 동생이 신기라도 있는 줄 알고 식겁했다.
“언제 검색해본 거야?”
“그냥 최근 오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한번 검색해봤지.”
어쨌든 동생이 눈치가 빠르긴 하다.
“근데, 여자친구 없으니까 새 여자친구 만들라고?”
“응.”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뭐가 말도 안 돼.”
“헤어지고 바로 애인 만드는 건 매너가 없지.”
매너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매너를 안 지켰을 뿐이다. 왜,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길바닥에 버리는 게 나쁜 짓인 걸 알고 있지만 다들 버리잖아.
“아니 왜? 어차피 안 맞으니까 헤어진 거고. 헤어졌으면 이제 끝난 거잖아. 그럼 누구를 만나든 자유지. 사귀던 도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잘못이지. 끝났는데 다른 사람 찾는 게 뭐가 나빠.”
동생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동의는 해도 공감은 못 하겠다.
“너 뭐 헤어지자마자 새 애인 만들어서 욕먹어봤어? 왜 그래?”
“아니 뭐.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동생이 어물거리며 말했다. 니가 그래봤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헤어지고 나서 잠시 동안은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 게 매너라고 생각한다. 물론 매너를 지키지 않았지만. 생각은 그렇다고.
“어쨌든, 네 말대로 진짜 입사하기 전까지 펑펑 놀아봐야겠다.”
“나랑 같이 게임 하자. 재밌어.”
“진짜 그럴까.”
어차피 딱히 할 일도 생각나지 않는데 동생의 말에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방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정혜일까. 난 얼른 방으로 달려갔다.
“뛰어가는 거 보니까 여자 있네.”
동생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정혜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승희도 아니었다. 이문태. 나의 대학동기. 액정에는 그 녀석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야 너 취직했다면서.』
“어, 어.”
『왜 나한테 말 안 했냐.』
“아, 어……. 여러 사람한테 말하다가 까먹었나보다.”
문태 녀석이 아직 취직을 못해서 미안해서 말 못했다.
『됐고. 오늘 나와라 술이나 한 잔 하자.』
“오늘?”
『왜 뭐 약속 있어?』
약속을 잡으려던 사람이 지금 연락이 안 되고 있지.
“아니 약속은 없는데.”
『그럼 나와.』
“어어…….”
할 말을 찾고 있는데 문태 녀석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자는 아닌가 보네.”
동생이 어느새 내 방 앞까지 와서 말했다.
“시끄러.”





그래서 저녁 6시. 지금. 문태를 만나기 위해 어느 술집에 들어와 있다.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5분이 지났다. 자기가 불러놓고 늦다니. 술집 구석에 앉아 입구가 열리고 닫히는 것을 계속 지켜보았다. 문태 녀석이 드디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물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때우던 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시큰둥하게 손을 흔드는 문태.
“취직 축하한다.”
문태 녀석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
감사를 표했다. ‘왜 나한테 알리지 않았느냐’고 취조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문태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 시키자. 취직 성공했으니까 니가 쏴라.”
“알았어.”
직설적인 성격에 쓸데없이 고민하는 걸 싫어하는 문태 녀석이 망설임도 없이 소주와 모듬튀김 안주를 시켰다. 문태 녀석 술 마실 때 안주는 거의 먹지도 않는 주제에 제일 비싼 걸 시켰다.
문태 녀석은 원래 말이 그리 많지 않다. 필요한 말만 한다. 말이 없는 편인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안주를 시키고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딱히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와 문태는 원래부터 이런 편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취직하니까 좋냐?”
이따금 한마디씩 한다.
“좋지. 너도 지금 최종결과 기다리고 있지 않아? 어디 유통회사라고 했나.”
“다음주에 결과 발표다.”
“될 거 같아?”
“몰라. 면접은 그럭저럭 본 거 같은데, 같이 본 다른 사람도 잘하더라고.”
그 다음에는 또 대화가 없었다. 잠시 후 술 두 병과 안주가 도착했다. 각자의 소주병을 열어 각자의 잔에 따랐다. 문태와 난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신다.
“어차피 너나 나나 2병씩은 마시는데 각자 자기 자리에 병 두고 마시면 되지.” 라고, 대학교 신입생 때 술자리에서 문태가 말했었다. 문태는 술이 세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내가 2병을 마실 때 문태는 3병을 마신다. 나도 약한 편은 아닌데 문태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너 혜미랑 헤어졌냐?”
“어.”
“어쩌다가?”
“어쩌다 보니.”
“그래.”
문태 녀석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문태는 나와 잘 맞는다. 말하지 않으면 굳이 캐묻지 않는다. 말할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린다. 아, 기다리는지 안 기다리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그러나, 혜미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누구에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내 인간성을 까발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까.
“새 여자 친구 만들 생각은 있고?”
“아직은 없어.”
“그래? 아쉽겠네.”
문태 녀석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쉽겠다니?”
“너의 여자 친구 자리를 노리던 몇몇 친구들이 있지.”
“몇몇 친구들?”
“사실은 한 명이야.”
문태 녀석 승희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모르고 있던 다른 누가 또 있을까?
“혹시 승희 말하는 거야?”
“뭐야, 벌써 행동을 개시 했나?”
내 말에 문태 녀석이 놀란 듯했다.
“그래 아주 과감하게 행동하더라.”
“승희가 조금 무대뽀 기질이 있지.”
“조금이 아니던데.”
“어쨌든 그래서 사귀냐?”
“안 사귄다.”
“아직 새 여자 친구 만들 생각 없다 그랬지.”
문태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떻게 알았냐?”
내가 물었다.
“뭘?”
“승희가 나 좋아하는 거.”
“그냥 걔가 나한테 너에 대한 거 막 캐묻길래 눈치 깠지.”
“그랬어? 전혀 몰랐는데.”
아무런 낌새도 못 챘다.
“당연히 니가 눈치 못 채게 행동을 했지. 나나 승희가 그렇게 허술해 보이던? 그리고 너 여자 친구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티를 내겠냐. 그것도 승희한테는 자기 친구인데.”
“하긴.”
그리고 혹시나 눈치 채게 행동을 했더라도, 그때의 난 여유가 없어서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승희가 너한테 고백 했냐?”
“어? 어어…….”
“대답은?”
“아직 안 했어.”
“너 다른 여자 있냐?”
문태 녀석은 신기가 있는 게 아닐까.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푹푹 찌른다.
“없어.”
“그럼 왜 대답 안 했는데?”
“여자 친구랑 헤어지자마자 다른 여자 만들면 매너가 아니잖아.”
이건 나만의 작은 규칙 같은 것이다. 물론 난 규칙을 지키는 걸 잘 못하지만. 나와 문태는 승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로 내가 물어봤다. 승희가 언제부터 나에 대해 물어봤는가부터, 무슨 질문을 했는가까지.
별로 소득도 없이 시간이 흘러흘러 어느새 두 시간이나 이야기를 했다. 나와 문태가 이렇게 쉴새 없이 이야기해본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러던 중 벨소리가 들렸다. 오늘 문태에게 전화를 받은 이후 그렇게도 조용하던 핸드폰이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난 핸드폰을 꺼내 착신화면을 확인했다.
정혜다.
“잠깐만.”
그렇게 말하고 난 핸드폰을 집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밖을 향해 걸어갔다.
“새 여자 친구 만들 생각이 있구만.”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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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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