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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2:40 777회 0건
시크릿 타임나경은 연희의 뻔뻔스런 말에 더욱 화가 났다. 용서를 해달라고해도 시원치 않은데 도리어 독기를 품고 대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쥐어뜯고 싶은 마음에 잡아 당겼으나 연희는 전혀 대들지 않고 끌려와 엎드려 있었다. 나경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마동안 연희를 내려다보았다. 연희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연희는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난 꽃뱀이 다 됐어. 어릴 적부터 그런 년이었으니까.”



섬뜩한 느낌이든 나경이 연희의 턱을 치켜 올려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경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상황이 거울의 단면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연희도 피해자였다. 나경은 같은 여자의 심정으로 돌아가 동정심과 아울러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연희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경 아버지와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고백하듯이 말을 하는 연희의 얼굴에는 두려웠던 시간과 낙심의 감정들이 엇갈려 있었다. 꿈을 동경하고 감미로워야 할 추억이 난도질당한 시간들이었다. 연희는 충격적인 비밀을 지뢰처럼 가슴에 묻고 살아온 것이다. 나경은 그 지뢰의 뇌관을 밟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왜 우리 아버지를 피하지 않은 거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할 나이가 되고 보니 이미 늦었어. 그 인간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었어.”

“왜 그렇지?”



연희는 친구가 있는데도 친구의 아버지를 그 인간이라고 불렀다. 나경은 자신보다 연희가 더 강하다고 느꼈다. 나경이 자신 같으면 기나긴 시간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 올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심코 연희는 자신의 배를 오른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어.”

“임신까지........!?”



나경이 신음을 흘리듯이 혼잣말을 흘렸다. 평상시에 나경으로서는 멀게만 들렸든 말이지만 연희의 입에서 나온 임신이라는 말에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들었다. 배다른 동생이 친구의 뱃속에서 잉태되었다는 말은 상상도 못했던 충격이었다. 연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니까. 그 인간은 이상하게 기뻐하면서도 낙태를 시키라고 했어. 그 인간을 따라 산부인과로 가서 낙태를 할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여관에서 한 달가량 있다가 이 아파트로 옮겨 오게 되었지. 물론 그 인간이 모든 비용을 부담했고, 솔직히 그 인간의 보살펴 주는 마음은 인정해.”



나경은 연희가 겪은 시간들이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아버지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한 분노와 아울러 피해자인 연희의 지난 시간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연희가 어렸을 적에는 사리판단을 못해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나이 들어서는 여건상 벗어나지 못한 연희가 안타까웠다.



“연희야! 너, 정말 우리 아버지와 헤어질 수 있지? 아니면 내가 알게 되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거니?”

“왜 자꾸 물어? 난 솔직히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고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뭐를 준비한다는 거야?”

“내 인생을 누구에게 보상 받아. 너무 불공평해.”

“어떻게 보상 받고 싶은데, 우리 아버지를 감옥에 넣고 싶어?”

“감옥에!? 차라리 내가 그 인간을 죽이고 감옥에 갈 거야.”



연희의 갈등을 나경은 자신의 일처럼 느껴졌다.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분노의 독기가 끓어올랐다. 그동안 몸을 섞어온 여자의 마음일까, 갈팡질팡하는 연희 대신 나경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연희도 우리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거지. 그래! 연희하고 같이 그 인간을 죽여 버리자고.”

“정말 너희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거야?”

“죽이는 방법도 많지.”



연희의 되묻는 말에 나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경은 구체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경의 지금 심정은 꼭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연희의 마음 한편에는 나경에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나경 아버지의 숨겨놓은 여자로 살아온 그녀의 심경이었다. 나경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나경아버지의 고독한 비밀을 애틋하게 느끼고 있다. 어쩌면 나경아버지는 연희의 인생에 영원한 후원자일수도 있다.



“나경아!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니? 너란 나랑, 왜 이렇게 만나야 하는 거지.”

“넌 어쨌든지 새 인생을 출발해야 돼. 꼭 행복한 미래를 보상 받아야 돼.”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연희가 눈물을 흘렸다. 나경은 연희에 대하 연민의 정이 칼날처럼 솟아올라 명치끝을 저며 드는 것을 느꼈다. 나경과 연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껴 울었다. 위로의 말을 남긴 나경은 연희의 아파트를 나왔다. 나경으로서는 더 이상 친구를 탓할 수만도 없고 다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깊어갔다.



나경의 위로의 말이 예언처럼 연희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결혼을 했다. 연희는 같은 고향의 대학선배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한 것이다. 나경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피아노 학원 강사를 했다. 결혼을 한 연희도 고향으로 내려와서 가정을 꾸몄다.



고향에 먼저 내려와 있던 나경은 연희가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도 연희는 일 년에 한 두 번씩 바람처럼 찾아오는 나경아버지를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나경아버지는 연희의 결혼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행동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약속대로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희는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연립주택들 사이의 골목길을 걸어 내려왔다. 골목길을 벗어난 도로에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립 건물 너머 신등성이의 윤곽이 보였다. 어젯밤 어느 지점에서 강간을 당했는지 가늠해 본다. 그녀는 다시 산등성이를 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유치원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연희는 자주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어제저녁의 사내들의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불안했다.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고 연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치원 봉고차 안의 운전석에는 밝은 표정을 지은 정민의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날 때 마다 그녀의 출근을 도와주던 정민이 벌써 유치원 문을 열어 놓고 그녀를 마중 나온 것이다. 연희는 두려웠던 마음을 잠시 잊고 다가서는 봉고차 조수석에 올라앉았다.



“고마워. 일찍 나왔네.”

“오늘은 늦었네. 어디 아파?”

“아니, 어제 저녁에 넘어졌어.”

“조심하지.”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정민의 모습은 순박한 소년 같았다. 연희는 유치원을 향해 운전하며 이따금 바라보는 정민의 시선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부담 없는 정민의 시선은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유치원에 도착하니 아르바이트생과 직원 미스 정이 아침 일찍 들어온 원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작은 동네라서 고정적인 인원의 원생들은 가족 같았다.



저녁 늦도록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연주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은지의 울음소리가 들려서 깨어난 것이다. 우유를 먹일 시간이 지난 것을 알고 부랴부랴 일어나서 안방으로 갔다. 형부는 세상모르게 잠이 들어 있고 작은 침대에서 은지는 깨어나 울고 있었다. 연주는 얼른 은지를 가슴에 껴안고 방을 나왔다.



“애구! 우리 은지 배고팠구나!”



울고 있는 은지를 가슴에 안고 달래면서 연주는 한손으로 분유를 타서 우유병을 흔들었다. 울음을 그친 은지가 입술을 벌리면서 연주의 앞가슴을 파고들었다. 흔들고 있던 우유병 꼭지를 은지에게 물렸다. 분유를 빨기 시작한 은지를 안고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연주는 아기 분유도 주지 않고 나간 언니가 밉살스러웠다. 연주에게 연희는 항상 비밀에 쌓인 언니였다. 단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도 연희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만 해도 연주는 언니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싸움을 하고 온 사람처럼 멍이든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활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치원 운영에 매달린다고 하지만 언니는 너무한 것 같다. 가정살림도 등한시하고 은지나 형부도 보살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물론 유치원 운영에 관심 없는 형부도 문제가 있지만, 연주가 보기에는 형부를 탓할 바도 아닌 것 같다. 유치원 운영과는 전혀 다른 IT관계 대기업의 프로그래머였던 형부를 졸라서 고향으로 내려 온 것은 사회복지과를 졸업한 언니였다. 처음부터 형부는 탐탁지 않았지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언니의 요구를 들어 준 것이다. 언니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형부가 연주에게 IT계열의 회사를 창업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



형부의 의지를 꺾으면서도 형부를 무시하는 언니의 심정을 연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으로서가 아니고 언니는 형부를 경쟁상대로 질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언니가 남다른 미모를 지녔지만, 형부도 언니 못지않았다. 검도로 단련된 균형 잡힌 체격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형부였다. 형부는 유치원을 운영이 적성에 맞지 않아도 짜증은커녕 눈살 한번 찌푸리지도 않았다.



여고시절에 연주도 육체관계까지 가졌던 남자가 있었다. 지금은 헤어지고 군대에 입대한 친구 오빠였다. 연주는 사귀었던 남자에 비하면 형부는 매너 있고 자상하기도 하여 남편감으로 부족한 면이 없다고 여긴다. 더욱이나 형부는 경제적으로도 풍족하고 인품 있는 교육자 부모의 둘째아들이었다. 유치원 운영하게 된 자금도 형부가 마련해 준 것이다.



연주는 형부 같은 남편과 결혼한 언니가 부러웠다. 형부는 연주에게도 오빠처럼 자상하고 상냥하게 대해준다. 연주도 형부 같은 이상형의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예전부터 형부에게 호감을 가졌었지만 언니 집에서 같이 생활하다보니 은연중에 형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언니 집에 머물게 된 것은 은지를 돌봐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은지를 돌볼 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을 하고 형부를 보살피는 일까지 연주 몫이 되어 버렸다.



분유를 다 먹은 은지가 방끗방끗 연주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리고 은지가 연주의 앞가슴의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은지가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은지에게 젖가슴을 만지게 했던 연주는 얼굴을 붉혔다. 셔츠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들추고 은지의 손을 젖가슴에 가져다 댔다. 고사리 같은 은지의 손이 젖가슴을 조몰락거렸다.



혹시 형부가 나올지 모르기에 안방 문을 바라본 연주는 상체를 숙여 은지의 입술에 젖꼭지를 물려주었다. 은지가 입술로 젖꼭지를 덥석 물고 빨기 시작했다. 젖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은지가 잇몸으로 젖꼭지를 잘근거리며 깊게 빨아 당겼다. 연주는 간지러움과 함께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짜릿한 감촉을 느껴 은지를 바짝 끌어안았다. 남자에게 젖꼭지를 빨리는 기분이었다.



‘덜 컥~!’



안방 문의 손잡이가 열리는 소리에 연주는 얼른 셔츠를 끌어 내렸다. 방문이 열린 사이로 부스스한 형부의 모습이 들어났다. 연주는 젖꼭지를 빨리던 모습이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연주의 시선이 형부의 불룩한 하복부를 향했다. 방문을 나선 지훈은 기지개를 켜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처제! 힘들지?”

“괜찮아요. 형부! 식사해야지요?”

“어제 술을 마셨더니........”



공연히 처제에게 미안한 지훈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주는 자잘한 미소를 띠우며 세면장으로 들어가는 형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형부에게 젖꼭지를 빨린 기분이었다. 얼굴을 붉힌 연주는 은지를 안방으로 안고 들어가 눕혔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부지런히 형부의 식사준비를 했다. 세면을 하고 나온 지훈이 식탁 앞에 앉았다.



“처제는 식사 안 해?”

“저는 좀 있다가 먹을게요.”

“공부하기도 힘든 처제한테 집안 살림까지 하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은지도 잘 따르고, 시간이 잘 가서 좋아요.”



눕혀 놓았던 은지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주가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은지를 달래놓고 형부가 일어난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연주는 은지를 안고 다시 거실 소파에 나와 앉았다. 형부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설거지와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 연주는 손가락으로 은지의 턱밑을 살살 간지럽게 하였다.



“까꿍!”



은지가 까르르 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훈을 닮아 눈썹이 짙은 은지의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연주가 은지와 놀고 있는 사이에 지훈은 식사를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훈이 연주의 가슴에 안긴 은지를 내려다 봤다.



“이모 고생시키지 말고 잘 놀아라.”

“은지가 순해서 힘들게 하지 않아요.”



지훈을 올려다보는 연주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흘렀다. 지훈의 손이 은지의 볼을 쓰다듬었다. 눈앞에 다가오는 형부의 손이 앞가슴을 향하는 것만 같아서 연주는 흠칫하였다. 지훈이 진열장 아래의 문을 열고 낚시 가방을 꺼내들었다.



“형부! 어디가려고요?”

“사업을 같이 할 친구하고 낚시하기로 약속해서.......”



낚시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지훈이 현관문을 나섰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연주는 왠지 쓸쓸함에 젖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혼자 식사를 하고, 집안 청소를 끝내면 은지를 보살피면서 대학입시를 위해 책과 씨름을 해야 한다. 벽시계가 벌써 열시를 알리고 있었다.



지훈이 나서고 있는 연립주택 단지가 내려다보이는 상등성이 큼직한 바위위에는 두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광주에 살고 있는 친구 사이로 며칠간 시간을 내어 며칠간 등산을 하고 있었다. 큰 바위 주위에는 둥치가 굵은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두 남자의 입에 문 담배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수염이 자라고 있는 두 사내는 조금은 초조한 표정이었다.



“민욱아! 네 생각에는 여자가 경찰에 신고 했을 것 같아?”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네가 그렇게 협박까지 했는데 신고는 못하지.”

“내가 무슨 협박을 했지?”

“형준인 머리만 크지 기억력이 없구나. 경찰에 신고하면 딸도 무사하지 못한다고 했잖아.”

“내가 그런 말 했나!? 사실 어젯밤엔 정신이 없어서.”



멋쩍은 표정을 한 형준이 안경을 고쳐 쓰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민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여자 올라탄 기억은 나고?”

“그거야 기억나고말고. 네가 먼저 그 여자 보지 속에 그걸 집어넣을 때 바지에다 쌀 번했어. 아주 자극적이었는데. 그래서 한 여자를 상대로 그 짓을 하나?”

“촌놈은 달라. 마누라하고만 해서 모르지? 내가 싸놓은 구멍에 그걸 넣으니 찝찝했지?”

“그런 기분 느낄 틈이 없었어. 박지도 않고 쌀 뻔했어.”



민욱은 꽁초를 바위에 비벼 끄고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끼더니 천천히 들어 누웠다. 형준도 따라서 뒤로 누웠다. 민욱이 공연히 휘파람을 날리고는 말했다.



“형준이. 너 마음 바꾸면 안 돼. 이 판에 한 건 하자고.”

“유치원을 하는 모양인데, 푼돈밖에 없을 것 같은데. 집에 가서 마누라 장사하는 거나 도와주는 게 도움 되는 거 아냐?”

“밑져야 본전이지 뭐. 우리 마누라는 문제만 일으킨다고 장사에 간섭하지 말래.”

“언제 집에 갈래?”

“집에 가야 마누라는 뉘 집 개보듯 하고, 하여튼 이번 건 마무리하고! 일단 그 여자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아. 지금당장 우리를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덜컥 신고를 하면 엉망이 돼 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러고 있을 게 아니고, 산에 가던지 술이나 마시러 가자.”

“그럼 막걸리나 마시러 갈까.”



민욱이 슬며시 일어났다. 그리고 산 밑을 향해 걸어갔다. 형준도 따라서 일어나 민욱의 뒤를 쫓아갔다. 어디선가 들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들먹거리며 산등성이를 내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지훈이 사라진 도로를 향해 멀어져 갔다.



원장실의 칸막이 공간에 앉아있는 연희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놈들에게 당한지 닷새가 지났으나 연희는 끈적거리는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연희는 마치 오물통에 빠졌던 사람처럼 몸과 마음의 상태를 관찰하게 되었다. 작은 통증까지도 세심하게 주의하며 살피고 앙금처럼 떠오른 생각과 감정들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하였다.



연희는 우선 성병에 대비하여 나흘 동안 복용하였다. 다행히 성병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어도 사타구니를 송두리째 걷어내고 싶은 불쾌감을 지울 수 없었다. 생리가 터져서 임신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리가 시작되자마자 멈추었기에 기분이 찝찝했다. 이런 경우를 당하고 보니 연희는 자신이 복강경 수술을 받았으면 안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연희는 나경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임신을 한 경험이 노이로제가 되었다. 그래서 은지를 낳고 남편과 상의하였다. 아들을 낳기를 원하는 남편이 정관수술을 받았다. 아들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남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 예비군 훈련을 나갔다가 보건소 직원을 따라 비뇨기과에서 수술을 받은 것이다. 남자는 다시 정관을 다시 풀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남편이 용기를 보인 것이다.



연희는 강간으로 인한 충격배란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임신이 되지 않겠지만 만약 임신이 된다면 먼저 강간을 한 사내의 정자일 것 같았다. 아득한 기억 속에 첫 번째 남자의 남성이 자궁 깊숙이 들어와서 사정한 것 같았다. 어쨌든 임신을 하고 남편 몰래 유산을 시키는 상황까지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연희는 시간이 지나도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어 이따금 유리창 밖을 쳐다본다. 사내들이 주소와 휴대폰 번호도 입력해 갔기에 혹시 유치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사내들이 유치원 주변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로를 내려다보며 비슷한 인상의 남자들을 봐도 연희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딩동댕, 딩동댕, 딩동댕.........’



별안간 책상위의 전화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대부분 원생의 보호자이거나 집에서 은지를 보살피고 있는 동생 연주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연희는 이 시간쯤에 걸려오는 연주의 전화라고 예측을 하고 무심코 수화기를 들었다.



“네, 천사 유치원입니다.”

“.........”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음침한 동굴에서 들리는 바람소리같이 숨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전화기가 고장이라도 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상대의 말소를 듣지 못했는지 마음이 급해졌다. 연희는 수화기를 고쳐들고 다시 떨리는 음성을 흘렸다.



“여보세요. 천사 유치원입니다. 말씀하세요.”

“오연희 씨죠?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는데, 닷새 전에 만났던 사람입니다.”



연희는 숨이 칵칵 막히고 수화기를 떨어트릴 뻔 했다. 어둠속의 산등성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안개 저편의 미로 속에서 들려오는 은밀하게 들리는 탁한 저음이었다. 현기증을 느끼는 연희는 냉정하게 마음을 고쳐먹으며 어금니를 물었다.



“난, 기억이 없는데요.”

“후후후~! 너무 충격적인 순간이라 혼란스러운 모양이군요.”

“잘못 거신 거 같으니 이만 끊겠어요.”

“신상에 좋지 않을........”



연희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듯이 양손으로 전화기를 누르고 숨을 들이켰다. 결국은 남자들이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계획들을 예상하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강간을 당한 것만도 분통한 연희는 협박까지 하는 남자들의 전화에 공포를 느꼈다.



“딩동댕, 딩동댕, 딩동댕.......”



양손으로 누르고 있는 전화기에서 다시 연속해서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연희는 통화를 하지 않으면 남자들이 들이 닥치고 어떤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다시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 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자고. 우린 당신 가정을 파괴하고 싶지도 않아.”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자는 거야?”



남자의 반말에 연희도 반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무슨 대화는! 우리말만 잘 들으면 서로 조용하게 끝낼 수 있어.”

“무슨 말을 들으라는 거지?”

“만나서 말을 할게.”

“만나고 싶지 않은데!”

“우리 방법대로 하려다가 알려주는 거야. 만나지 않겠다면 당신 남편을 만나는 수밖에.”

“협박에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

“후후~! 협박이라고! 우리 문제 만들지 말고, 이성적으로 처리하자고.”

“이게 이성적인 사람이 하는 짓이야? 인간답게 살아.”



연희는 악이 받쳐 버럭 고함을 질렀다. 통화하는 말투로 보아서는 남자는 불량배가 아니라 제법 배운 사람 같았다. 연희의 고함소리를 듣고 상대는 잠시 있다가 단호한 어투로 말을 뱉었다.



“당신과 인간의 심리를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야. 내일 오후 7시에 버스터미널 뒤편의 장미 레스토랑으로 나오십시오.”

“난, 아기 돌볼 시간도 없이 바빠서, 그런 요구에 응할 생각 없습니다.”



남자의 존대 말에 연희도 존대를 하여 단호히 거부하였다.



“아기를 돌볼 시간이 없다고 하시는데. 은지는 연주 동생이 보고 있잖습니까.”



연희는 딸 이름과 여동생 이름까지 들먹이는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은지의 생명까지 노리는 것 같고, 연주까지 사내들에게 더렵혀지는 치욕에 분노를 일으켰다. 사내들은 어떻게 가족사항까지 파악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기는 동사무소에서 얼마든지 알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연희는 어쨌든지 남자들이 가족들 주위를 얼씬거리는 것은 싫었다. 결국 연희는 남자의 제의를 받아 드릴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만나겠어요.”



그러나 연희는 남자의 위협에 굴복 당한다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다. 짤막하게 내뱉고는 수화기를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전화기를 내로 놓자마자 원장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유리창 너머로 보니 보모 역할을 하고 있는 미스 정이었다. 문이 열리고 앳되어 보이는 미스 정이 들어왔다.



“원장님! 원생들 간식꺼리가 모자라는데 어떡해요?”

“미스 정이 마트에 좀 다녀와요.”



연희는 책상 옆의 금고를 열어 만원권 지폐를 세어 미스 정에게 건네주었다. 미스 정이 나가고 자신만의 공간에 갇힌 연희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그놈은 틀림없이 돈을 요구할 것이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남편에게 다시 폭로하겠다고 위협할 것은 뻔하다. 그놈이 남편에게 강간했다고 말할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어떤 말로 협박을 할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연희는 놈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싶기도 했다. 차라리 남편과 이혼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밝히고 싶은 심정이다. 경제적인 도움도 주지 않고 빈둥거리는 남편과의 이혼을 떠올렸다. 물론 남편을 사랑해서 그녀가 먼저 프러포즈했지만 평범한 가정을 가지면 비밀스런 과거가 덮어지려니 생각해서 결혼한 것이다.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는 연희는 고민스러웠다. 놈들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말하면 남편이 사실로 믿을까. 놈들에게 윤간당한 아내를 예전처럼 대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 전의 짧은 만남에도 혼전의 순결 운운하며 몸을 오구하지 않았던 고지식한 남편이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혼전순결을 지킨 것은 아닌 것 같다.



버스터미널 근처는 항상 복잡했다.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과 행상인들이 뒤섞여서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연희는 남자보다 일찍 나가서 기다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시간이 임박하여 유치원에서 나왔다. 남자로 하여금 기다리도록 한 것이다. 연주에게는 동창생을 만나러 간다고 연락했다.



터미널 뒤편으로 돌아간 연희는 초저녁인데도 벌써 간판 불빛이 돌아가는 장미 레스토랑 앞에 섰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연희는 공연히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홀 안을 둘러본 연희는 유리창 옆의 구석진 테이블로 가서 엉거주춤 앉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거리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일상적인 풍경인데도 연희는 다른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다른 우주에서 오는 외계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먼저 와서 기다리기를 바랐는데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하기를 바라는 남자의 술책인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면 기다리다가 불안하여 나가버렸는지도 모르기에 연희는 예민해져서 주위를 살핀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카운터에서는 연신 전화벨소리가 울리고 종업원들이 손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젊은 청년이 카운터로 달려가 전화를 받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로 돌아간다. 연희는 아마도 애인을 기다리다가 실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종업원이 또 다른 손님의 이름을 불렀다.



“오연희씨 계시면 전화 받으세요.”



전화가 오리라고 생각도 못한 연희는 멍하니 카운터를 바라봤다. 또 다시 종업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서야 연희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침착해야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조금은 시간을 지체하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지금 그 레스토랑을 나와 흥륜사 입구로 오십쇼. 흥륜사 아시죠?”

“알아요.”

“혼자 나오신 거죠?”

“그래요.”

“지금 혼자 전화 받고 있는 건 알지만, 누가 뒤쫓아 오는 건 아니죠?”



연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디선가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홀 안의 손님들 중에는 그 남자라고 추정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두려워진 연희는 급하게 대답했다.



“정말 혼자 왔어요. 믿어도 돼요.”

“좋습니다. 지금 곧 흥륜사 입구로 오십쇼.”



냉정한 말투로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연희는 다시 홀 안을 둘러보고 달아나듯이 레스토랑을 빠져 나왔다. 여러 번 가본 경험이 있는 흥륜사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가야만 했다.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탔다. 흥륜사 입구에서 택시를 내리니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흥륜사 입구에 있는 나무 밑의 벤치에 앉은 연희는 만나기로 한 남자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산책로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였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띠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접근해오는 오는 사람이 전화를 한 남자 일 것이다. 오 분 가량 지났을까,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는 남자가 보였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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