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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2:58 736회 0건
007 삽입면허-6부-



“여보세요”



“네, 저...... 안녕하셨는지요? 저, 박경호입니다.”



“박경호?......”



“네, 영진 기획실장입니다.”



“아, 아...... 그래, 그래...... 무슨 일이요?”



“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말씀 드린 돈이 마련돼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 그...... 오천만 원 말입니까?”



“네, 네......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지......”



미라의 일로 연계가 되었던 영진의 기획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으나, 기찬은 곧 박상사라는 인물을 만나보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어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은 입장이었다. 전혀 새로운 바닥에서의 출발에 있어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에게 첫인상을 좋게 가져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음...... 당신 어차피 곧 퇴근시간일 텐데 이쪽으로 좀 오슈. 내가 손님을 만나기로 돼 있어서 지금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입장이라......”



“아! 그러시죠. 그럼 어디로......”



“여기 당신 회사와 가까운 곳이요. 종로에 있는 ‘카이로’라는 룸인데 알고 있는지......”



“아! 네, 네...... 알고 있습니다.”



“음...... 그럼 내가 입구에 말을 해 둘 테니까 와서 안내를 받는 것으로 합시다.”



기찬은 여진과 정을 나누고 밖으로 나왔지만, 오전 내내 아파트 문제로 뛰어 다니느라 아직 점심조차 먹지 못한 터라 길가에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겨 군것질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기찬의 전화통화를 들은 여진은 고개를 끄덕임으로 자신이 조치를 취해 두겠다는 뜻을 전해 온다. 침대 위에서는 오직 기찬만을 위해 존재하는 여자처럼 숨이 넘어가더니, 이제 밖으로 나옴과 함께 달뜬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평정을 유지한다.



어쩔 수 없는 화류계의 생활이 몸에 익어 버린 여진의 사무적인 태도가 일견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아직 어지럽혀 둔 침상의 훈기마저 사라지지 않았을 시간에 저리 쉽게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여진을 보니, 오히려 기찬의 입장에서 순정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인지 왠지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모양이었다.



“여진이, 너 먼저 들어가라. 아무래도 불안해서 안 되겠다. 공연히 나 때문에 네가 잔소리 들을까 봐 마음도 쓰이고......”



“푸훗...... 괜찮다니까...... 그래, 알았어. 그럼 입구에는 내가 얘기해 둘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색의 옷에 화려한 장신구를 한 늘씬한 미녀들이 택시에서 내려 카이로로 들어서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까지 전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박상사라는 사람은 오지 않은 모양이지만, 이 바닥에서 신세를 져야 할 입장이니 기다릴 요량으로 멀찍이 아가씨들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선다.



“아! 지금 사장님께서 기다리시는데요. 이리 오시죠.”



“네?......”



오늘의 당번 웨이터라도 되는지 낮에 본 그 웨이터가 들어서는 기찬을 보고 다가와서 안내를 하고 그 모습을 본 데스크의 다른 웨이터는 어디론가 인터폰을 하는 모습이었다.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있었는지 안내되어 간 곳은 내실이 아니라 어느 룸의 앞이었다.

웨이터가 기척을 한 후에 먼저 들어서서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문을 열어 기찬에게 들어가라는 눈짓을 한다.



“실례하겠습니다.”



룸 안에는 벙거지를 눌러 쓴 남자 곁에 예의 그 마담이 자리하고 있었고, 양주와 몇 가지 안주 따위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미 면식을 튼 마담이라도 있어 기찬은 다소 덜 쑥스러운 분위기가 될 것 같아 내심 안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저는...... 강기...... 허억!”



소개를 하다말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기찬은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고, 마주 앉은 사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기찬의 얼굴을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야, 야...... 너...... 강 병장 아니냐?”



“사, 상사님...... 네, 강기찬 맞습니다. 추, 충...... 성!”



두 사람이 서로 아는 듯 보이니 가운데에 자리 잡은 마담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희한한 일이라며 박장대소를 한다.



“어머! 정말 우리나라가 좁긴 좁은 모양이네...... 호호호......”



제대 후, 처음으로 만난 군부대의 상관이었고, 부대 특성 상 보안유지를 위한 서약을 하고 나오는 관계로 제대 후에 하사관 급이나 장교들을 만나는 예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적잖이 놀란 듯 한참이나 마주보고 있었다.



어느덧 자리를 옮겨 기찬의 곁에는 미라가 예쁘게 차리고 앉아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래, 나도 이 사람한테 말을 듣고서는 나이도 어린 친구가 대단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만, 그게 너였다니...... 그럼 들으나 마나한 소리였구먼. 하하하...... 역시......”



기찬은 박상사의 말에 쑥스러운 듯 그저 웃으며 뒷머리만 매만질 뿐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박상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보직의 권한을 이용해 마담으로 하여금 이곳을 관리하게 하면서 나름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비밀 경호부대 실무책임자로서 자주 서울을 오가는 입장인데다가 그에 따르는 청와대 관계자들의 연줄 등 막강한 권한이 있으니 술집 하나 운영하는 데에 자칫 귀찮을 수도 있는 관공서의 행정지도 따위는 거칠 것도 없다는 말이었고, 그 말을 들은 후여서인지 낮에 본 멀티비전이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다.



“하긴...... 술집에 그런 시설이 되어있다는 게......”



“그럼, 너...... 이 애 주변을 정리할 때, 무슨 수사관 행세를 했다면서....... 그거 혹시 우리 수사관 신분증을 갖고 있는 거냐?”



“아! 네...... 제가 제대하기 전에 기념으로 하나 갖고 있으려고, 분실신고해서 다시 발급을 받아 둔 게 있었거든요. 그 때...... 아주 죽도록 두들겨 맞았잖습니까? 부대 비표 모두 바뀌고...... 전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건 줄 몰랐거든요. 하하하......”



“으흠...... 역시......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가끔 너 같은 녀석들이 하나씩 있거든. 하하하......”



“하하...... 나중엔 기합이 너무 괴로워서 사실 대로 불고 반납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버티고 말았죠.”



“허허...... 그래, 그래...... 그건 잘 했다. 뒤에 가서 불면 괘씸죄까지 엎어서 더 두들겨 맞게 마련이지. 그나저나...... 이렇게 강병장하고 내가 다시 인연을 이어가게 됐는데...... 뭐라도 선물을 하나 해야 할 텐데......”



박상사는 마담을 슬쩍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고, 미소를 짓는다. 이내 다시 기찬과 미라를 번갈아 보면서 기찬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 윤여진이도 네 친구라면서......”



“아! 네...... 대학 동기동창입니다.”



“너...... 지금 딱히 하고 있는 다른 일도 없지?”



“네, 그야 그렇지만 왜 그러시는지......”



“으흠...... 그러면 너, 당분간 여기에 자주 와서 분위기도 익히고 내 일도 좀 거들어라. 마담은 이 친구 쉴 수 있도록 내실에다가 방이라도 한 칸 마련해 주고......”



“아, 아...... 네에......”



마담은 무슨 일인지 몰라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박상사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마담뿐만이 아니었으니 모두가 시선을 박상사에게로 향한다.



“뭐, 부담은 갖지 말고...... 그냥 오가다 언제라도 잠시 쉴 수 있는 네 방이 하나 생긴다고 생각해. 그게 내 첫째 선물이고...... 그 다음은...... 윤여진이를 넘겨 줄 테니까, 그 애도 네가 관리하는 것으로 해 봐.”



그 때였다. 룸의 출입문에서 인기척이 있은 후에 웨이터가 들어서며 손님을 안내한다.

기찬의 눈치를 읽은 박상사가 눈짓으로 허락을 하고, 기찬은 예의 의뭉스러운 짓을 넉살좋게 풀어낸다.



“아! 박실장. 이리 들어 오슈......”



“네, 네......”



영진의 기획실장은 허리를 조아리고 기찬의 곁으로 다가오다가 미라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미라는 표독스런 눈빛으로 싸늘하게 바라보고, 그 눈치를 읽은 박상사도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저...... 여기 있습니다.”



기찬은 봉투를 뺏듯이 받아 갈무리하며 숙이고 있는 박실장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자, 이제 뒷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이만 가 보슈.”



“네, 네...... 고, 고맙습니다.”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내빼는 사내 뒤로 박상사의 말이 떨어진다.



“으흠...... 저 놈이 그 놈인 모양이지?”



“아하...... 네...... 잡아 쳐 넣어 봐야 미라만 귀찮게 오라 가라 할 것이고, 따로 생기는 것도 없잖아요. 어차피 앞으로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니 거마비라도 챙겨야지요.”



“하하하...... 그래, 맞다. 맞아......”



한참을 웃어 대던 박상사가 마침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테이블에 바싹 다가앉아 기찬에게 넌지시 말을 던진다.



“기찬이, 너...... 그럴 게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자리를 잡아라. 어차피 지금 놀고 있다면 앞으로 명함도 있어야 할 거 아니냐?”



기찬은 박상사가 자신의 술집에 기도로 앉히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절할 명분을 찾기 위해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게 되고, 그 표정을 읽은 박상사는 고개로 도리질을 치며 말을 이어간다.



“아, 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고...... 며칠 전에 여기 사령부에서 군무원 시험이 있었어. 이미 시험이야 지나가 버렸지만, 그까짓 거야 손을 쓰면 그만이고...... 네가 정식으로 응시한 것으로 처리한 뒤, 네 주특기가 있으니까 우리정보장교한테 부탁해서 우리 부대로 파견을 받는 거야.”



“아! 네...... 그래서요?”



“군무원이지만, 네 병적부에 우리 부대 근무실적이나 기타 수사특기가 기록에 남아있으니까 그걸 살려서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 줄게. 너도 당직근무 설 때 받아봐서 알겠지만 매 번 청와대 주변의 상황보고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잖아?”



“아, 아...... 네...... 그랬죠.”



“바로 그게 우리 파견요원들이 보내는 첩보라는 말이야. 청와대 안에서는 경호실에서 보내고, 외부는 우리 요원들이 사대문 안을 분할해서 각각 맡은 지역의 첩보를 보내고 있지. 그러니까 네가 이 지역을 맡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게 처리되지 않겠어?”



“아...... 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처리가 되겠습니까? 여러 사람을 거쳐야 할 텐데, 돈도 적잖이 들 테고......”



“자, 이렇게 생각 해. 네가 몇 급 군무원으로 처리가 될 것인지는 나도 장담을 못하겠지만, 일단 국방부 예산으로 봉급을 받게 되고, 그 업무성격 상 특기를 살려서 정식 수사관 신분증이 발급될 거야. 일 년이든, 이년이든...... 봉급을 통째로 털어 준다고 해도 해 볼만 하지 않아? 그까짓 거...... 몇 천만 원...... 만들려고 작정만 하면 네 머리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 아냐?”



“허허...... 그거야 그렇지요.”



“내가 너 스카우트하는 셈 치고 오천이 들든...... 일억이 들든...... 처리해 줄 테니까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너, 어차피 가짜 신분증 가지고 횡행하다가 신세 망치는 수도 있는 거야. 내가 지금 너한테 권하는 보직은 너도 알다시피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너는 어차피 그 계통은 군 시절 달통한 놈이니까 가능한 제의야.”



“하지만..... 상사님이 저에게 그렇게까지......”



“그래, 이제 설명해 주지. 나는 어차피 자주 나올 수 없는 사람이잖아. 여기도 밑에서 일하는 녀석들이 뭐...... 이른바 박상사파라는 걸 만들었는지 나름대로 이 사람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고 있긴 한데...... 깔끔하질 못해. 그냥 녀석들이 하는 건 그대로 두더라도 네가 마담하고 힘을 합쳐서 나를 좀 도와달라는 말이다. 네 마스터 일은 네 일대로 처리하면서...... 내가 없는 동안에도 틈틈이 들러서 마담에게 힘을 실어달라는 말이지.”



박상사 본인이 필요해서 그러는 모양이니, 자신을 군무원으로 채용하게 하는데 얼마가 드는지는 상관할 바도 아니지만, 항상 몸이 매여 있어야 하는 일도 아니고, 또한 이미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별로 걱정스러운 일도 아니다. 게다가 정식으로 채용되어서 급여 생활자로 생활 할 수 있다는 것은 늘 엄마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걱정거리를 덜어드릴 수 있는 일이기도 하였으니 기찬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정식 군 수사관 신분증을 손에 쥐게 된다는 것은 최근의 경험으로 비추어 기찬의 입장에서 용이 구름을 얻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박상사가 자신을 곁에 두려는 것은 자신 역시 군인 신분으로서 떳떳치 못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 일이 잘못되어 전개가 엉뚱한 곳으로 흐른다면 신분 박탈에 영창은 물론 그간의 공든 탑도 모조리 추징당할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연한 일로 군 시절 부하를 만나게 되니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알게 되었고, 한 배를 탄 입장으로 방향을 선회하자는 것이니 굳이 사양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 일을 사양한다면 박상사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기찬에게 해코지를 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음...... 하하...... 그렇다면 제가 사양할 일이 아니군요. 감사합니다. 상사님.”



“그래, 잘 생각했다. 하지만 너...... 스카우트 비용은 그렇게 군무원 자격을 얻어주는 것으로 갈음하고 다른 돈은 일체 지불되지 않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마담하고 협조해서 네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뭐...... 물론 군무원 월급만 해도 먹고는 산다만 너도 얼른 일어서야지.”



“아! 그래야죠.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미라는 자신의 일로 인해 박상사와 기찬의 중요한 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고무된다. 어차피 기찬을 인생의 반려자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은근히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 걸음 뒤에 서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그동안은 떨칠 수 없었다. 사장과 기찬이 군 시절 상하 관계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제 다시 사장과 연계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공간에서 자신의 마스터가 곧 숨은 이인자라는 뜻도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찬씨...... 너무 잘 된 거 같아요.”



“그러게...... 저 양반을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인데...... 나는 박상사라고 하기에 그저 불량배들이 갖다 붙인 이름이라고만 생각했지 뭐야? 하하하......”



기찬은 마담이 새로 지정해 준 내실의 한 쪽 방에 미라와 함께 쉬고 있었다. 바로 곁은 계집애들이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이어서 간간이 소란스런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쾌적한 환경이었다.



박상사는 자신도 예견할 수 없었던 일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마담을 통해 들은 애기로는 쓸 만하다 싶었고, 마스터 일을 처음 하는 친구라니, 일단 만나본 후 자신이 없는 동안 대리인으로 삼아도 좋을지 검토만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강기찬이라면 테스트를 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일견하기에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위험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측근에 두어 부릴 수만 있다면 그만큼의 실전훈련을 겪어낸 자신의 옛 부하였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자리를 파하자 속히 전화를 넣어 강기찬의 기록을 정리하도록 지시하고 어디론가 바삐 나가 버린다.



“참! 마침 돈도 생겼는데...... 미라, 너 이사한다고 했잖아? 이 돈으로 방을 구하면 되겠네.”



“어머! 아니에요. 그 돈은 기찬씨가 노력한 수입인데...... 제가 왜...... 그리고 저 벌써 내일 이사하기로 약속해서 그리 들어가야 돼요.”



“어디로?...... 그리고 이 돈은 너 때문에 생긴 돈인데...... 네가 써도 돼.”



“아니에요. 저도 앞으로 벌면 되잖아요. 아까 사장님 말씀 들어 보니까 기찬씨도 일하게 되면 갑자기 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던데요. 그리고 이사는 여진이 있는 곳으로 하기로 했어요.”



“하...... 이것 참......”



“호호...... 정 그러면 저 이사하는 거...... 도와주신다고 했으니까, 내일 맛있는 거나 사 줘요.”



“그래, 알았다. 하여튼 나중에라도 급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내 친구야. 내 여자고...... 알았지?”



“나중에 늙어서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호호호......”



“으응? 하하하...... 물론이지......”



미라의 가는 허리에 손을 얹어 끌어당기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한다. 눈길이 마주치자 눈을 내려감는 미라는 아직도 기찬에게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모양인지 마주 닿는 입술의 잔 경련마저도 떨림으로 전해준다.



“흐읍...... 쭈우웁......”



“자, 내가 여기 오래 있으면 미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이만 가 볼게...... 너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는 게 어때? 내일 이사하려면 일찍 쉬어야 하지 않겠어?”



“네, 그럴게요.”



“그럼 아침에 전화 할 테니까 집도 자세하게 알려주고......”



“네, 마스터님. 호호......”



입가에 남는 사과향이 미라의 여운을 전해준다. 미라를 대기실로 돌려보낸 후, 밖으로 나가려다가 멀티비전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마담과 눈이 마주치지만,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나누고 몸을 돌린다. 저 여자도 사연이 있어서 기찬을 모른 척 할 터이니 굳이 아는 척 해서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몇 걸음 걷던 기찬이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몸을 돌려 마담 곁으로 다가서서 냉큼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는 그 중 한 곳에 잭을 꽂아 실내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본다.



“오호! 이거 상당히 감이 좋군요.”



“네, 그럴 거예요. 장비가 거의 방송국 수준의 고급 기기들이거든요. 저쪽에서 조작하면 녹화도 가능하지요.”



기찬이 구경을 하는 중에도 인터폰이 울려 아가씨들을 호출하고, 곧 마담과 미라도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바쁘게 움직인다.

헤드폰을 벗어두고 믹서 장비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 전화벨이 울리고, 기찬은 이것저것 기기를 만져가며 전화를 받는다.



“저...... 여보세요. 혹시 강기찬씨 맞으세요?”



“네, 그렇습니다만......”



“네, 저...... 여기 1505호예요. 오늘 이사 온 사람......”



“아! 네, 네...... 그래, 좀 알아 보셨습니까?”



“아유...... 우리는 어떻게 하죠? 허어엉......”



전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아마도 낮에 보았던 그 여자일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이삿짐을 정리할 정신도 없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알아보았을 테지만, 달리 대책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기찬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세를 주어야 할 아파트를 다른 이가 점거하고 있는 입장이니 어떻게든 해결을 보아야 할 문제였으므로 나중에 만나기로 시간을 정해 두고 전화를 끊는다.



“참...... 안됐지만 대책이 없는 일이니......”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미라나 여진이 들어가 있는 방을 찾아보려는데 이상한 모습이 눈에 띄어 기찬의 관심을 잡아끈다.



“뭐야? 저건...... 사내자식들끼리......”



무슨 밀담이라도 나누는지 계집애들 없이 술을 마시는 모양이 특이해 소리를 들어 볼 생각으로 헤드폰을 쓰며 잭을 꽂는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 하지 마. 이제 분위기도 무르익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서 몇 건 더 흡수되면 그 때 가서 정리해도 늦지 않아. 박사장은 나만 믿고 기다리면 돼. 내, 나중에 한 몫 톡톡히 챙겨 줄 테니까......”



“자, 자...... 그럼 합의 봤어. 이제 그만하고 아가씨들이나 부르자고......”



“푸훗......”



기찬은 실소를 흘리며 헤드폰 잭을 뽑아 버린다. 여진의 말로는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이 가끔 이런 곳에서 아가씨들을 스카우트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니 사기꾼, 도둑놈이라도 못 올 곳은 아닌지라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니, 새삼 미라와의 인연이 고마운 마음에 화면에 나타나는 미라의 모습에 다시 눈길을 주며 자리를 벗어난다.



내실을 벗어나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와 계단을 돌아 내려가니 오가는 웨이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실 복도에서는 이들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내실이 웨이터들에게는 제한구역인 모양이었다.



종로 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일 번지가 아닐 수 없다. 밤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주변 건물에서 비추고 있는 온갖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을 얼굴에 받아 저마다의 색깔을 뽐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택시......”



다행히 아직은 시간이 썩 늦지 않아 그런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흑석동으로 갑시다.”



“네, 손님...... 어서 오십시오.”



“이거...... 차를 한 대 뽑아야 하려나?”



“네?”



“아! 하하...... 아닙니다. 그저 혼자 한 소리입니다.”



“네...... 차 잡기가 많이 힘드시죠?”



“네, 그러게 말입니다.”



택시 기사와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가다 보니 차는 어느새 한강을 지나고 있었고 곧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찬은 선뜻 아파트로 올라가지 않고 담배를 피워 물고는 마담이 세 들어 있는 맞은 편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본다.



“거 참...... 그렇다고 모른 척을 할 건 뭐야?”



카이로의 마담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를 복덕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은 그저 사장 부인의 약점을 잡아 정을 통한 양아치에 불과했었다. 복덕방 사장이 그녀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장탄식을 늘어놓던 것을 생각하면 불과 며칠 만임에도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이니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는 것이 결코 그냥 생긴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웃어 버린다.



“네, 아까 낮에 왔던 강기찬입니다.”



“네, 어서 오세요. 죄송해요. 이런 일이 생겨서......”



아파트에 들어서니 역시 짐도 채 정리를 못하고 인부들이 들여놓아 준 상태 그대로인 것 같았다. 거실 한 쪽에 위치한 소파도 새 것인 듯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저...... 혹시 짐작에 신혼부부 같던데 그러신가요?”



“네...... 흑......”



“그럼 남편께서는?”



“지금 밖에 나갔어요. 흑...... 저......우선 좀 앉으시겠어요?”



자꾸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리는 것이 의아해, 말하는 틈을 타 잠시 눈여겨보니 눈두덩이 약간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이 일로 인해 부부간에 다툰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이 부부에게는 달리 해법이 없는 일이니 기찬으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저...... 그럼 지금 전화를 한 번 해 보시죠? 아무래도 바깥 분과 상의를 해야 할 텐데......”



“그런데...... 전화를 안 받아요. 흐흑...... 지금까지 계속 했는데......”



“나..... 이것 참......”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가며 근근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기찬의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서 구해 준 아파트였는데, 이 철부지 부부는 혼수 장만과 친구들과의 총각파티에 들떠 등기이전 같은 중요한 일은 생각도 않은 채 신혼여행을 가 버렸고, 아마 계약 당시 그런 느낌을 전 주인에게 흘렸는지, 약삭빠른 전 주인이 눈치를 채고 이중으로 거래를 한 모양이었다.



기찬도 들은 바가 있으니 그 사람은 아마 국내에 있지는 않을 것이고, 국내에 있을 사람이라면 애당초 주민등록번호만으로도 수배가 가능한 그런 짓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 일에 대한 것을 수소문하러 다니던 중 이 새신랑은 화를 못 이겨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고 갈라선다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여자에 비해서 학력이 짧았던 모양인데, 평소에는 예쁘고 고학력인 여자를 차지한 것에 대해 좋아했지만, 막상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오히려 그 콤플렉스가 작용했는지 배운 티를 내고 잘난 척만 했지, 제대로 하는 것도 없다며 여자에게 분풀이를 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이제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갈라선다고요?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홧김에 그러는 거지. 그래서 이혼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제대로 된 부부가 몇이나 있겠어요?”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죠? 네?”



“글쎄요. 저로선 두 분이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으면 좋겠는데요. 아니면 제게 전세보증금을 빼 주시든지...... 일단 두 분이 해결을 못해 주시면 제가 어른들과 상의를 하겠습니다. 일단 시댁에 전화를 좀 넣어 보세요.”



“어머! 안돼요. 그럼 저, 정말 쫓겨날지도 몰라요. 시부모님도 고지식한 분들인데......”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기찬의 무릎을 짚어 온다. 난감한 상황에 잊고 있던 기찬의 컬렉션이 발동이 걸리고 새삼 여자의 고운 몸매며 단아한 향기, 늦은 시간에 단 둘뿐이라는 고즈넉한 상황이 만들어 주는 미묘한 분위기에 갈증이 일어난다.



“허허...... 거 참, 아니...... 그럼 저를 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저도 돈을 굴려야 하는 사람인데......”



“내일이라도 오빠가 오면 다시 상의를......”



“저...... 그러지 말고...... 어디 인부들이 먹던 맥주라도 없습니까?”



기찬은 정말 갈증이라도 나는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본다.



“어, 없는데요. 그럼 제가 나가서 얼른 사 가지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시......”



“아니, 그러지 말고 함께 나갑시다.



기찬이 말도 채 듣지 않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여자는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섰다가 할 수 없이 따라나선다.

결론을 낼 수 없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기찬으로부터 여유 있는 말미를 얻어내야만 할 입장이었고,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그의 기분대로 따라주어야 할 일이었다.

순간, 야속한 말을 뱉어내고 나가 버린 남편이 생각나는지 여자의 눈에 눈물이 비친다.



“자, 한 잔 드세요.”



“네......”



여자에게 술을 권하여 잔을 부딪치고 한 잔 술을 털어 넣는다. 기찬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미 마음을 굳혔다.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뒷모습은 걱정에 찌들었는지 잔뜩 움츠려 왜소하게까지 보였고, 기찬 자신은 최근의 변화로 인해 당장 그 돈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운신이 가능한 터였다.



어차피 그 돈이야 아파트 밑에 잠겨 있는 돈이니, 차라리 이 부부에게 이자라도 받으며 그냥 계속 살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중매로 만나셨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남편의 애정에 대해서 묻는 것을 눈치로 알 수 있었는지 힘들이지 않고 적절한 대답을 찾아낸다.



“저희 집이 가난해서 시부모님이 많이 반대를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런 일까지......”



“그랬군요. 그렇다고 이게 왜 그쪽만의...... 아! 이런...... 이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강기찬입니다.”



“아! 네, 선생님 이름은 아까 메모를 주셔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차윤정이라고 해요.”



“네...... 윤정씨, 이게 윤정씨만의 잘못은 아니니까 시댁에서도 윤정씨에게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흐흑...... 그래도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데...... 아까도 혼자 어디론가 가면서 저보고 혼수물건 다 빼서 친정으로 가져 가 버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럼...... 우선 이렇게 합시다. 윤정씨...... 그냥 여기서 사세요. 남편과는 제가 내일 만나서 다시 상의를 하겠지만, 제게는 그저 정한 이자만 주고 살면 우선 당장은 해결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맞벌이를 하는 시대니까...... 윤정씨도 같이 일을 해서 버는 모습을 보여주면, 언젠가 시부모님이 당신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해결을 해 주지 않겠습니까?”



“어머! 정말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단, 조건은 있습니다.”



“조건이요? 네, 무슨 조건이신데요?”



“일단 윤정씨 남편에게 다시 한 번 전화를 해 본 후에 말씀 드리지요. 윤정씨 전화번호가 뜨면 홧김에 일부러 안 받는지도 모르니까 제가 한 번 해 보지요. 번호 좀 불러주세요.”



잠시 후, 한동안 울리던 음악소리가 끊어지며 역시 기대했던 대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보세요?”



“아, 네...... 저 아까 낮에 왔던 강기찬입니다.”



“아, 여보세요? 잠깐만이요. 저는...... 지금 이 전화 주인 친군데요. 이 친구가 지금 전화 받을 상황이 못 되거든요.”



“아! 그러세요? 그럼 잠깐만이요.”



기찬은 얼른 윤정에게 전화를 바꿔주고 결국 그 친구와 윤정이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윤정의 남편은 낙담한 채, 친구에게 찾아가 술을 퍼마시고 쓰러져 버려 침대에 뉘였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깨워 보내준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이니 결국 이야기는 내일 끝을 보게 되었다.



“저......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조건이라는 건......”



“아! 조건?...... 아파트로 올라갑시다. 한 시간만 있다가 갈 테니까......”



“네, 네?......”



“그게 조건입니다.”



한 시간만 있다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묻던 윤정은 기찬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이내 말뜻을 알아차린 듯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아,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럼, 다시 이야기는 원점입니다. 할 수 없이 저는 두 분을 내보내기 위해 재판을 신청할 것이고, 그 결과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제가 부담한 소송비용까지 모두 원인을 안고 있는 그쪽에서 책임져야 할 것이고, 일은 일파만파 커질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자, 이만 술이나 마시고 갑시다.”



기찬도 단호한 입장을 밝힌다. 여기서 흐릿한 태도를 보인다면 공연히 사람만 우스워질 수 있는 일이니 남은 술을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서 계산을 치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에서 나가 버리는 기찬을 잡지도 못한 여자는 한참 후 가게를 나서 어깨를 떨어뜨린 채 아파트로 향한다.



“음...... 어디에서 시간을 때우나?”



기찬은 나름의 짐작이 있었는지 집으로 향하지 않고, 주변 상가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근처의 호프집으로 들어선다. 애당초 기찬이 그런 조건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계약기간 3년 동안은 기다려 준다고 하더라도 막상 기간이 만료됐을 때까지도 이 부부가 해결해 줄 능력이 없어서 버티게 된다면 자신이 무작정 기다려 주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남편과 상의 후 3년 후에는 재판 없이도 가압류 등 즉시 강제퇴거를 시킬 수 있도록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공증을 하는 조건을 제시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이란 친구가 현재 인사불성에 귀가할 수 없는 처지란 것을 알게 되고는, 이미 발동해 버린 그의 컬렉션이 주체할 수 없는 곳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었다.



“뭐, 간단하게 생맥주 큰 것으로 하나 주시고, 땅콩이나 한 봉지 주십시오.”



결국 채 한 잔을 마시기도 전에 기찬의 전화가 울린다. 윤정의 입장에 정말 이혼을 할 것이 아니라면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근근이 결혼을 유지해 산다고 하더라도 그런 시부모와 남편에게서 모진 구박을 받고 살아야 할 테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신혼여행이 이별여행이 될지언정 더 이상 함께 살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었다.



“어, 어디 계세요?”



“응? 누구...... 윤정씨?”



“네...... 전...... 먼저...... 올라오신 줄 알았어요. 어디 계신 거예요? 흐흑......”



“아, 아...... 그랬던 겁니까? 허허...... 이런...... 알았습니다. 그럼 지금 갈 테니까 잠자리나 좀 봐 두세요.”



행여 기찬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 두려웠는지 서둘러 마음을 바꾼다. 무릇 결혼이라는 것이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니, 친정의 부모를 생각한다면 비록 전쟁포로 같은 황량한 대접을 받더라도 결혼하자마자 쉽사리 이혼을 꿈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아파트에 들어선 기찬의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한 채 윤정은 현관을 걸어 잠근다.

침대커버를 짐 속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 침대 위는 담요로 대충 덮어 둔 채 기찬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방으로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거실에서 서성거리는 윤정을 무시한 채, 옷을 모두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오니 기찬의 옷은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실내는 모든 조명을 꺼버려 오직 욕실에서 새어나온 불빛만이 흐릿하게 윤정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자, 윤정씨도 씻고 와요. 아......시원하고 좋은데......”



벗은 몸을 가리지도 안은 채 당당히 걸어 나오는 기찬을 윤정은 마주 보지 못하고 떨리는 가슴을 끌어안은 채 자리를 피하듯 욕실로 들어선다.

잠시 후 물소리가 멈추고 욕실의 문이 열린다. 곧 불이 꺼져버려 사위는 어둠에 잠긴다.



“자...... 윤정씨, 어서 이리 와요. 내가 빨리 가는 게 윤정씨에게도 좋은 일일 텐데......”



기찬은 침대 위에 네 활개를 펼친 채, 중얼거리고 곧 어둠 속에서 다가서는 윤정의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저...... 약속은 꼭 지켜 주시는 거죠?”



“그럼...... 비밀도 지켜 줄 거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허억......”



급기야 기찬이 팔목을 잡아 끌어당기자 윤정은 기찬의 몸 위로 쓰러지며 헛바람을 들이킨다.

몸을 감싼 수건을 떼어내자 채 물기가 가시지 않은 차가운 피부의 기운이 기찬의 오감을 일깨운다.



“흐읍...... 쭈우웁......”



모든 전개의 수순이 그러한 건지 언제나처럼 입술을 들이마신다. 잠시의 망설임도 어둠 아래에선 필요치 않은 것인지 의외로 윤정은 달콤한 타액을 기찬에게 건네준다.

부드러운 살과 살덩이들이 한데 엉켜 유희를 즐길 즈음, 기찬의 팔은 다른 여행을 준비한다.

매끄러운 윤정의 등을 따라 깊은 골이 흐르고 그 끝에 이르러서는 풍만한 고원으로 이어져 여행자의 호흡을 가쁘게 한다.

부드러운 육덕을 움켜쥐는 기찬의 손가락 사이로 그 보드라운 살덩이들이 비명을 지른다.



“하윽......”



천천히 가슴을 쥐어 몸을 밀어내자 윤정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쉼 없이 가슴을 주무르는 기찬을 피하려는 듯 몸을 세우자 윤정의 예민한 곳에 느낌이 전해진다.

기찬은 허리를 들어 윤정에게 자극을 더해주며, 윤정의 손을 이끌어 안내한다.



여전히 차가운 윤정의 손을 느끼며 이내 후끈한 살집 사이로 사라져 가는 분신에서 은근한 압력을 쾌감으로 끌어올린다.



“하악...... 하악......”



기찬에게 들릴세라 숨을 죽여 가며 허리를 밀어붙이던 윤정의 움직임이 멈출 즈음, 기찬은 윤정을 밀어두고 침대를 내려선다.

윤정도 이젠 제법 달뜬 표정으로 시선이 몽롱한 채 기찬을 바라보고, 기찬은 윤정의 뒤로 붙어 허리를 잡아간다.



“후욱......”



“아...... 아학......”



한 줌에 잡히는 허리 밑으로 이렇게 풍만한 엉덩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조물주의 축복일 것이다. 위용을 자랑하며 끄덕이는 기찬의 상징에는 굵은 혈관이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듯 용솟음치고, 원래 제 자리였다는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분홍빛 꽃잎 사이를 헤집어 단번에 밀고 들어간다.



기찬을 받아내는 윤정은 이미 침대에 너부러진 채 담요를 물어뜯고, 그녀의 하얀 엉덩이만이 달빛을 받아 곱게 핀 복사꽃처럼 벌어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흑...... 흐윽......”



이윽고 기찬의 몸이 떨어 울리고 그와 함께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 온 윤정도 경련을 일으킨다. 이 시간만큼은 서로에게 충실하였고, 그 가슴의 느낌은 거짓이 없는 것이니 서로가 몸으로 확인한 정은 아직도 서로의 갈 길을 아쉬워하며 선뜻 헤어질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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