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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9:44 599회 0건
“아니, 루카스 사령이 여긴 어쩐 일인가?!”
시찰 준비를 하던 병참연대 사령장은 때아닌 루카스의 방문에 화색을 보이며 그를 반겼다. 루카스가 군례를 깍듯하게 올리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권했다.
“바쁘신가 봅니다.”
“뭐 그렇지. 자문께서 시찰을 오신다고 해서, 오늘….”
“아, 여기였습니까?”
“자네도 바쁜가 보군. 수색대에서 이런 소식을 모르고 있다니, 하하….”
“정신없습니다, 요즘. 시찰도 시찰이지만 일단 미키네오스에서 론도 정벌을 하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돌다보니….”
“훈련계획을 다시 짜고 있겠구먼.”
“편제도 전시체제로 바꿔야 하는데…. 수비가 주목적인데 공격 태세로 하려니 참…별 것 아닌 듯 한데도 복잡하네요.”
“자네 같은 사람이 웬 엄살인가? 보위부 아니, 아니지. 보위부가 다 뭐야. 바이마샤르 군부 최고의 엘리트가.”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하….”
“그래,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인가…?”
“아, 참…. 저희 병참 문제로요. 무기 관리도 그렇고 해서 전체적으로 교체를 좀 했으면 합니다만….”
“전부 다 말인가?”
“전부 다는 아니고요. 특히 수색·정찰대 쪽의 검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이 너무 둔해서 말입니다….”
“음…, 하긴 수색 정찰 중에 벌어지는 교전은 전면전이 아니니 길고 무거운 것보다야 단검이나 암기 위주가 좋겠지.”
“예. 일단 군수참모님께 보고서는 올려놨는데요….”
“사령님, 사령님…!!”
루카스의 부관이 소란을 떨며 들어와 군례를 올렸다. 뭣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숨을 헐떡거리는 것으로 보아 뭔가 사건이 터진 모양이었다. 뭐야? 지금 부대 정문에 아이린 아가씨가 와 계십니다!
“뭐…?”
그 여자가 여길 왜 와? 하는 얼굴로 반응하는 루카스에게 아이린이 누구냐며 연대장이 묻자 부관이 대신 대답했다.
“허허…. 여당 대표님 따님이 아주 열정적이시구먼.”
“하하하….”
웃고 있는 루카스의 얼굴은 그러나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여기 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한율을 보러 시찰하는 데까지 쫓아다닌다 이건가….

융베리에 대한 종교재판은 미키네오스의 사법기관인 추밀원과 함께 공동으로 진행되었다. 원로회의에 참석했던 여러 주교들과 추기경들이 그의 발언을 하나하나 짚으며 문제 삼았고, 융베리는 교리에 대한 부정, 교회 행사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과 이교도 옹호에 의한 신성모독죄, 그리고 국왕 모함을 통한 교총과 국왕 바루나에 대한 이간죄를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여 혐의를 인정받았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며 시민들의 곤궁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라는 말을 꼬투리 잡아, 마도들과 결탁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얼토당토않은 혐의에 대해서까지 그는 조금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판결을 내리겠소.”
재판장이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죄인 보르틴 교원총연합회의 전임 총장 마놀로 융베리 원로교원은 지엄하신 미키네오스 국왕 폐하를 모독하고 또한 신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으며, 시민의 안정과 교리의 사소한 구절을 앞세워 반역을 꾀한 혐의가 인정된다. 또한 영광스럽고 은혜 가득한 교회와 영명하신 국왕 폐하께서 함께 주도하신 아슈람의 귀환자 행렬을 중간에서부터나마 책임진 자로서 이 같은 죄를 저질렀으니, 그 죄질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추밀원 최고 집행기관인 대사부 판관 니콜라스 아르네요와 보르틴 교원총연합회 팡그릿샤 왕도 대교구장 추기경 비센테 발데스를 재판장으로 하여 결성된 본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죄인 마놀로 융베리를 공개 수간형에 처한다. 남은 시신은 육시참형으로 다스릴 것이며, 목은 60일간 광장에 걸어둔다.”
공개 수간형은 광장에 매달아놓고 굶주린 이리 세 마리를 풀어 죄인의 몸을 산 채로 뜯어먹게 하는 형벌로, 한 번에 이리들이 몸을 다 뜯어먹지 못하도록 높은 곳에 매달아 두고 발에서부터 차례차례 뜯어먹을 수 있게끔 조금씩 그 높이를 조절하는 처형법이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리토르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쓰리도록 저미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써야만 했다. 하백도 이 잔인한 처형방법을 듣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헛바람을 내뱉기만 했다.
“황녀님…!”
“… ….”
“융베리 구루님을 구해야 합니다…!”
“가벼이 행동하지 말라…!”
“황녀님…!!”
“…. 바루나….”
리토르나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
“…. 참으로…. 참으로 천벌을 받을 자로다…!”
국왕과 총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 앞 광장에서 시행된 공개 수간형은 융베리의 허벅지가 뜯길 때쯤 끝이 났다. 처형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기도를 위한 배려에 융베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향해 조롱과 비아냥을 던지는 시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신이시여…, 이 무지한 당신의 자녀들을 보살피소서….”
총장은 차마 이리 떼들에 의해 그의 발부터 뜯겨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융베리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광장에 가득찼다. 무릎뼈가 드러날 즈음 정강이뼈가 뜯겨 나가며 혼절한 융베리는 창에 옆구리를 찔리며 다시 의식이 돌아왔고, 수간형은 그가 의식을 잃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갔다. 결국 대퇴부의 뼈를 부러뜨리기 위해 이리 한 마리가 그것을 물고 매달리자, 통증과 과다한 출혈로 인해 융베리는 눈을 뒤집으며 숨을 거두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길어져 이튿날 이어서 시행된 육시참형 또한 쉬이 끝나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허벅지에 묶은 밧줄이 쏟아지는 비로 인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게다가 밧줄을 이끌고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마소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통에 결국은 톱과 칼 등으로 목과 허벅지 등을 썰어내야 했다. 분리된 목은 얼마 전 그가 직접 귀환자들을 이끌고 입성했던 왕궁 광장에 내걸렸고, 비는 3일간 쉬지 않고 내리 퍼부었다.

융베리의 처형이 집행되고 4일 후, 비구름이 물러간 하늘은 드문드문 구름이 낀 것을 제외하곤 햇빛으로 찬연한 파랑색을 띠고 있었다. 이 날 레이네는 왕궁을 떠나 왕도 대교구 사원으로 향했다. 그냥 두면 구역질나는 짓을 또 해야 할 그런 사내가 하나 있었으니까. 차가운 날씨에 비가 내렸으니 길이 얼어붙을 만도 했지만, 이어서 내리쬐는 햇빛으로 인해 길은 진흙으로 가득했다. 마차는 덜컹거리며 이따금씩 진흙으로 인해 기울기도 했지만 무리 없이 사원을 향해 나아갔다.
하얀 드레스에 사향털로 뒤덮인 겉옷을 걸친 레이네는 마차를 사제관으로 몰게끔 지시했다. 예배의식이 없는 날이니 대부분의 사제들은 사제관의 제 처소에서 기도를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일은 본당에서 치르기로 했지만 먼저 사제관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대단한 자야…. 비토 말야. 안 그래, 나다니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차에는 레이네와 나다니엘 두 사람만이 타고 있었다. 이즈음 그녀는 나다니엘을 거의 부관처럼 항상 곁에 두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손에는 비토가 수하들을 시켜 궁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사해 온 문서가 들려 있었다. 레이네는 그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며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직 국왕과 병부대신만이 알고 있는 극비의 내용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마도와 결탁을 했다…. 게다가 잉그라드로 진군을 한다….”
“잉그라드로요?”
“그렇다고 써있네, 여기….”
“아무리 마도들과 물밑에서 협상을 벌였다고 해도, 잉그라드와 맞붙는 건 힘든 일 아닙니까?”
“물론 전면전이야 무리겠지….”
“폐하께선 그렇게 무모한 결정을 하실 분이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레이네는 문서를 잘게 찢으며 그럴 리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켜. 예…? 아, 예, 공주님…. 두 말 없이 그것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켜버리는 그를 보며 레이네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는 태우라고 할 수도 있어.”
“관계없습니다.”
“그런 문서들을 네가 관리해주길 바란다는 말이다.”
“공주님…!!”
“아직은 다 맡길 수 없다. 너무 기대하지 마라. 난 어느 누구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지?”
“예, 공주님.”
“…. 국왕이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지…. 아니야….”
“… ….”
“… 궁금하지 않아?”
“…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 꽤 똑똑하군…. 너 말야.”
비웃는 듯한 말이었지만, 레이네의 말투는 원래 그런 편이었다. 나다니엘은 기쁜 기색을 감추려 애썼지만 레이네의 눈에 그런 것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이…이게 뭡니까, 공주님…?”
비센테 추기경은 집무실로 찾아온 레이네가 전표를 내밀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과 레이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번 일에 대한 조그만 성의라는 말과 함께, 레이네는 담담하게 웃으며 확인해보라는 듯 그에게 눈짓을 했다.
“아… 아니…. 공주…!”
“크진 않으나, 교회와 추기경님을 위해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
“매번 이렇게…. 앙느쿠테를 무사히 치르도록 도와주신 것만 해도 황송한데… 뭘 이런 것까지….”
“저는 오직 국왕 폐하의 영광과 교회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추기경님…. 알고 계시지요?”
황송해하는 말과 달리 추기경의 손은 얼른 그것을 품안으로 넣고 있었다. 아 물론 알고말고요! 왕녀님께 무한한 신의 은총과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조금은 당황했던지 말소리가 들떠 있었다.
“이제 교총에서도 전쟁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혔으니…, 남은 것은 그 준비일 것입니다.”
“예예, 그렇지요…! 우리 교총에서도 모쪼록 국왕 폐하의 전쟁 의지가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요…?”
“예…?”
레이네는 묘한 눈빛으로 추기경을 주시하며 생각해 둔 방도라도 있느냐 물었으나, 그에게선 별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셨겠지. 그녀는 했던 말을 반복하며 그에게서 대답을 이끌어내려 시도해보았다.
“저는 오직 국왕 폐하의 영광과 교회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방도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 저…,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모르게 가슴팍으로 손이 올라갔다. 직감적으로 추기경은 그녀가 준 전표를 떠올렸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줘놓고 도로 뺏자는 수작인가…. 레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제가…, 추기경님께 사례로 앙느쿠테 집전 예산의 네 배나 되는 거액을덜컥 드렸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 물론…! 물론 아니지요,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서 쓰라는 말씀에 이걸 어떻게 교회를 위해 쓸 지 고민을 해야 했지요…! 아하하하…!”
지랄 처웃긴….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추기경을 향해 레이네는 생긋 웃어보이곤 역시…! 하며 그를 짐짓 추켜세워 주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 매는 추기경에게 레이네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군부는 전쟁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새로운 병부대신께서는 취임식조차 마다하시고 순시부터 나설 생각이지요. 폐하께선 이스마르와 울리프, 발덴, 바이마샤르, 네오시아 등 교총 산하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샤몽과 네무로 등의 부족국들로도 사신단을 파견할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그들 모두의 병참을 지원하려면 꽤 많은 자금이 필요할 겁니다.”
“그…그렇겠지요.”
“교총에서 확보하고 있는 기사단의 규모라고 해봐야 고작 3만이니…,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지원을 할 여력이 되지 않을 테고 말이지요…?”
“아… 아무래도 3만으로는…그렇지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 다른 지원방책을 찾아봐야겠지요. 이를테면 군… 군자금이라든가….”
그의 말에서 ‘군자금’이란 말이 나오자 비로소 레이네의 얼굴은 천진한 웃음을 띠며 화색이 돌았다. 공주의 압박에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말을 내뱉은 추기경도 억지로 웃으며 그녀에게 맞장구를 쳤다.
“염려 마세요, 추기경…. 나는 그대에게 충분히 이 교회를 이끌어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교권의 중심에 있는 미키네오스 왕도 대교구의 추기경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과 자질이 있는 분이겠지요. 안그렇습니까…?”
추기경의 얼굴에 떠올랐던 억지웃음이 사라지고, 이윽고 감격에 찬 기대감이 공주를 향해 마치 찬양이라도 올리듯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레이네는 말을 아끼며 그 이상은 입을 다문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레이네에게 신의 가호를 기원한 추기경은 문이 닫히자 한동안 그대로 앉아 멍한 얼굴로 있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됐다는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가 내 편이다…! 왕녀가 나의 편을 들어 주었어…! 교총…! 교총의 총장이 되는 거다…! 품에 넣어둔 전표를 꺼내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 교총의 총장이 되는데 이까짓 2천만 팡그를 아까워 할 일이 아니다…! 이 정도 투자면 오히려 이익을 보는 장사지…!!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아아아아악…!!!!”
득의에 찬 그의 웃음에 찬물을 확 끼얹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짧게 퍼지고 메아리는 들리지 않았으니 이건 사제관 내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싶었다. 추기경은 별안간 이게 웬 변고인가 하는 생각에 얼른 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다른 사제들도 제각기 문을 열고 나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대체…?”
“여자 비명소리였는데요?”
“본당 쪽에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본당에 왜 여자가 있어…?”
다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일단 추기경은 상황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사제관 밖으로 나갔다. 사제관과 본당은 지붕을 이어붙인 건물이었으니, 나가면 곧바로 본당의 입구가 드러났다. 그가 사제관의 정문을 열고 나갔을 때, 레이네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그의 품에 뛰어 들어왔다.
“아니…?!! 고…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이라니?”
“레이네 왕녀님…?”
추기경의 말에 더욱 놀란 사제들이 서로 마주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윌토르가 정문이 열린 본당 앞에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이 비로소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엄숙한 사제복을 입은 윌토르의 아랫도리는 불쑥 솟아 있었고, 레이네는 추기경의 옷자락을 붙들고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두려움에 떠는 시늉을 했다.
“추, 추기경님…! 저… 저것이 무엇입니까…?! 대주교님께서 제게 저것을…! 제게 저것을…!!”
“공주…!!”
윌토르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아랫배를 밀착시키는 순간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제 아랫도리에 솟은 것을 생전 처음 보는 듯 부들부들 떨며 여기까지 도망쳐 나온 공주의 기막힌 연극에 그는 분기탱천하여 당장이라도 그녀를 쳐 죽일 기세였다.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사원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대주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공주를 꼭 끌어안은 추기경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그를 향해 내리쳐졌다. 윌토르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공주만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달리 해명할 길이 없었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불리했다.
“아니, 대주교님…!!”
“이 대체 무슨…무도한…!!”
“추기경님, 오해입니다…!!”
“닥치게!! 사제가 되는 날부터 남성을 버리고 오직 신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이끌어야 할 몸으로 어찌 아직도 그런 흉물을 몸에 지니고 있단 말인가!!”
비센테는 대교구의 교구장답게 근엄하게 그를 꾸짖고는 윌토르에게 변명할 틈을 주지 않고 사제들에게 그를 잡아 가둘 것을 명령했다. 추기경님!! 억울합니다!! 공주께서 먼저 날 유혹했단 말이오!! 윌토르의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무서워 추기경의 품에 안긴 채 떨고 있는 공주와, 사제복 위로 제 성기를 있는 대로 세워 드러낸 채 서 있었던 윌토르. 사제들에게 어느 쪽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논란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뭣들 하는가!! 어서 기사단장을 불러 이 사악한 자를 잡아가두라!!”
“예, 추기경님…!!”
“공주!! 뭐라고 말 좀 해보시오!! 공주…!!”
윌토르가 달려들려 하자 공주는 더욱 추기경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겁에 질린 비명을 질렀고, 사제들이 그를 붙드는 동안 추기경은 공주를 제 뒤로 숨기며 보호했다.
“놔라, 이놈들…!! 난 억울하다!!”
“닥치시오!! 대주교의 몸으로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했소!!”
“이 놈들…!! 공주…!!”
기사단은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호출을 받고 달려온 기사단원 세 명이 윌토르의 입을 막고 손을 묶었다. 추기경은 사제들과 그 자리에 모인 모두를 향해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감히 미키네오스의 왕녀를 범하고자 사악한 술수를 부려 성스러운 신의 전당을 어지럽힌 대주교 윌토르에 대해, 추기경의 권한으로 즉시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심판할 것이다!!”
“으읍…!! 으으으으…!!”
“성사소 사제는 재판을 준비하라!!”
“예, 추기경님!”
소식을 전해들은 국왕 바루나는 놀란 모양이었다. 잠시 말없이 입을 벌린 채 어허…하는 소리만을 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진정은 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허허…. 평소에는 웬만한 일로 입꼬리 한 번 실룩거리지 않는 라크라오스조차도 이번에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공주님께서…, 행보가 무척 빠르십니다.”
“그 녀석…,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능란하군….”
국왕은 헛웃음을 웃으며 이번에는 정말로 감탄했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라크라오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같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내 미간을 좁히는 국왕의 안색을 살피며 그는 무슨 근심이라도 있습니까? 대답 없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국왕은 연초를 물며 으음…하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뭔가 좀….”
“….”
“… …. 이대로 괜찮을까. 너무 일이 쉽게 되고 있어.”
“윌토르 대주교는 비센테 추기경의 가장 큰 정적입니다. 종교재판에 즉심회부 되었다면 그에게 해명의 여유를 주고자 하지 않을 겁니다.”
“정적이라…. 하긴….”
신을 모시는 사원에서 정적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엄연히 그들 사이에서도 힘겨루기는 있었던 바, 국왕은 그 역설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다시 밝아지지 않았다.
“공주님을… 염려하십니까?”
“… …. 그 아이가 너무 적극적으로 아비의 일을 돕는군….”
“폐하…!”
“자네도 알겠지만, 레이네는 그리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닐세. 술수에 있어서만큼은… 어쩔 땐 아비인 나조차도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어. 그런 그 아이가 너무 전폭적으로 내 일에 탄력을 받쳐주고 있지 않은가.”
“폐하의 따님 아니십니까….”
“… ….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 않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 안 해.”
“… …. 폐하….”
바루나는 마음 속 깊이 품어둔 근심을 좀처럼 꺼내놓는 법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라크라오스 앞에서조차 그는 대체로 국왕으로서의 모습만을 보여 왔었고, 그런 주인을 라크라오스는 아주 가끔이었지만 측은하게 여기기도 했다.
“나는 이 나라의 군주고, 그 아이는 왕녀일세. 내가 비록 예스프리를 후계로 점찍어 놓고 있다고는 해도, 그 아이 역시 이 나라의 군주가 될 몸이야. 거기엔 부모자식도, 형제도 없이 오로지 신하와 군주의 관계만이 있을 뿐일세.”
“….”
국왕은 연초를 태우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내 꺼버렸다. 라크라오스는 사신단 차송의 문제를 마무리 짓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병부대신의 순시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던가? 아까 정무회의에 참석치 않았던데….”
“부총관만을 데리고 잠행을 한다고 보고서가 왔었습니다. 다른 대신들에게 알려지면 군부에 자제를 둔 귀족들의 입김이 닿을 수 있다면서….”
“허허….”
볼수록, 들을수록 대단한 인물이란 생각이 굳어졌다. 군략을 짜거나 군사를 지휘하는 데는 어떨는지 몰라도, 국왕은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했다. 정무대신이 집무실을 나간 뒤에도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플로랑의 행보에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병부 부총관과 함께 밀부를 지닌 채 순시를 나선 신임 병부대신 플로랑 메르히네는 왕도사령부 직할대대 중 무작위로 하나씩 방문하며 이 날은 돌격대대에 다다랐다. 부대 외각에 위치한 1중대의 훈련장 근처에 다가가자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다가와 그들을 향해 군례를 올렸다.
“…?”
“이 곳은 군사구역이므로 일반 시민들께선 들어서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 그런데 일반 시민에게 군례를 올리는 이유는 뭔가?”
물끄러미 병사 둘을 내려다보는 병부대신. 그는 그들의 대답에 호기심이 일어났다. 미키네오스의 군사는 미키네오스의 시민을 지키는 종복입니다. 따라서 상관뿐만 아니라 시민에게들도 군례를 올리는 것으로 압니다. 부총관이 이 당돌하게까지 들리는 말에 허허 웃으며 플로랑을 쳐다봤고, 플로랑은 그 말에 감화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지휘관이 누구냐 물었다.
“군사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말을 참 잘 하는군. 그것도 훈련된 것인가?”
“…, 그렇습니다.”
으음…하며 부총관을 보는 플로랑에게 병사는 다시 한 번 돌아갈 것을 권유했고, 부총관이 밀부를 꺼내어 그들에게 내보였다.
“나는 병부의 부총관이고, 이 분께선 신임 병부대신인 플로랑 메르히네 남작이시다. 병사는 이 분을 훈련장으로 안내하라.”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병사들은 즉시 창을 세우며 군례를 올렸고, 절도 있는 병사의 모습을 보며 플로랑은 감탄의 빛을 떠올렸다. 중대장이 누구인지 꼭 봐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통제실로 갈 것 없이 훈련 상황을 보겠다는 병부대신과 부총관을 안내하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뭔가 기대라도 하는 듯 당당하고 힘이 넘쳤다. 부총관과 눈길을 주고받는 플로랑의 얼굴에는 대단하네~ 혹은 믿는 구석이 있나본데~ 따위의 말들이 써져 있었다.
“집단창술은 각개전투와는 또 다른 전투의 형태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와 같이 창을 휘둘러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자가 있어도 진형이 흐트러지면 그것은 뛰어난 기사 하나만도 못한 오합지졸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중대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훈련장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보통 중대장급에게 지급되는 털옷조차 걸치지 않은 채 병사들과 똑같은 차림으로 버티고 서서 호통을 치는 기세가 남달랐다.
“저 자가 중대장인가 봅니다.”
“음….”
“이 추운 날씨에 저게 뭐 하는 짓이랍니까…?”
“훈련 상태가 상당히 좋군….”
동문서답을 하는 병부대신의 눈길이 어깨동무를 한 채 각자 맞닿는 발을 묶고 2인 3각으로 훈련장 외각을 도는 병사들로 향했다. 그는 저게 뭘 하는 것이냐며 자신을 안내한 병사들에게 물었다.
“집단창술 훈련에서 동작이 서로 맞지 않는 조가 받게 되는 훈련입니다.”
“허….”
부총관도 감탄했다는 듯 허허 하고 웃었고, 병부대신과 그는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장 안쪽에서 벼락처럼 내지르는 기합성과 함께 한 몸처럼 창을 휘두르는 병사 무리들을 보며 병부대신은 말을 몰아 예스프리가 서 있는 연단 쪽으로 향했다.
“…?”
“…누구…랍니까?”
“…, 낸들 알겠나. 볼 일이 있으면 와서 말하겠지.”
별 관심 없다는 듯 대답은 했지만 예스프리는 병부대신이 타고 있는 말을 보고는 누구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올 것이 왔군…. 예…? 그는 훈련을 계속하라 지시하고는 다가오는 플로랑을 향해 돌아서선 바르게 자세를 갖추었다.
“전체 부동-!!!”
멀리서 들을 때도 그랬지만, 가까이서 들으니 그 목소리가 엄청났다. 기사의 가문이었다지만 문관 출신인 플로랑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흠칫 몸이 굳어졌다. 집단 창술을 하던 병사들도, 2인 3각으로 뛰고 있던 병사들도 모두 일시에 동작을 멈추고 돌아섰다. 예스프리는 연단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서서 검을 뽑아 절도 있게 군례를 올렸다.
“나오셨습니까.”
“…. 혹시 자네가 트레제게 중대장인가?”
“…. 예, 그렇습니다. 왕도사령부 직할 돌격대대 1중대장 예스프리 그라토레 트레제게입니다.”
병사들 모두는 귀족 냄새가 풀풀 풍기는 플로랑과 부총관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술렁거릴 만도 했건만, 지휘관이 군례를 올리는 것을 본 탓인지 전혀 동요 없이 부동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플로랑은 그들을 돌아보고는 부친에게서 기별을 받았느냐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내가 신임 병부대신인 것을 어떻게 알았지?”
“말을 보고 알았습니다.”
“말을 보고 알았다고…?”
“이 말은 국왕 폐하께서 병부대신의 자리에 앉는 분들께 내리시는 종마입니다. 아버님께서도 이 말을 타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군…. 눈썰미가 좋아.”
그는 별반 성의가 담기지 않은 말투로 칭찬을 내놓으며 예스프리를 살폈다. 자신을 향해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똑바로 서 있는 그에게선 골수까지 군인의 유전자가 흐를 것 같았다. 크지 않은 키였지만 곧은 체형에 어깨가 넓고 벌어져 있어 당당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중대장급에게 지급되는 털옷을 걸치지 않고 그렇게 차가운 갑옷 차림인가?”
통제실로 들어온 병부 대신의 물음에 예스프리는 지체 없이 답했다. 병사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병사들과 모든 것을 함께 한다. 그럼 그들과 식사까지 같이 한다는 건가? 저 훈련장에서? 그렇습니다. 부총관은 그 기상이 대단하다며 웃었지만 병부대신은 그리 동의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네 병사들을 보니 자네가 얼마나 유능한 지휘관인 줄은 알겠다. 하지만…, 자네의 그 생각은 틀렸다.”
“….”
“나는 군략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적어도 지도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집단에게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는 잘 안다. 중대장급 지휘관이 병사들과 똑같이 지낸다는 그 뜻은 칭찬할 만하지만 지휘관은,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몸을 아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겠다.”
“말씀하십시오.”
“자넨 군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
“자네가 생각하는 군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국왕 폐하와 시민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집단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그들을 위협하는 모든 무력으로부터입니다.”
“음…. 그럼 군인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뭐라고 생각하나?”
“충성심과 동료애라고 믿습니다.”
“믿는다…. 그럼 명령복종은 그 다음인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군인의 의무이지, 덕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
부총관의 표정이 의아해 하는 빛을 띠었다. 그에 반해 동요가 없는 병부대신이 그 말의 뜻을 물었다.
“군인이라고 해서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흠…. 듣기에 따라선 위험한 생각이기도 한데….”
“….”
소대장은 예스프리의 망설임없는 대답에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병부대신 앞에서조차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제 생각을 펼치는 중대장이 어떻게 될까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를 들면 어떤 명령이 그런 데에 속하는가?
“동료나, 국왕 폐하, 또는 시민들을 향해 칼을 겨누라는 명령이 거기에 속할 것입니다. 또한 군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권위만을 위해 부하와 동료들에게 칼을 겨누고자 하는 상관의 명령이 거기에 속할 것입니다.”
“… …. 혹…. 자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상관이 있었던 것 같군….”
“그런 뜻은 아닙니다.”
“…. 그래. 알겠네.”
“아니…? 병부대신…! 바로 가시는 겁니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플로랑에게 부총관이 훈련 보고를 받지 않는 연유를 묻자 플로랑은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예스프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훈련일지를 작성해서 병부로 제출하게. 사람을 보내지.”
“예, 병부대신.”
중대를 떠나 대대 통제실로 향하는 플로랑을 향해 부총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반복해서 물었다. 아니, 훈련 일지를 작성해서 보내라니요, 병부대신. 여태까진 그 자리에서 바로 사본을 확인하고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계속 대답이 없던 병부대신은 부총관이 라크라오스의 이야기를 꺼내자 정색을 하며 돌아보았다.
“트레제게 경 때문입니까?”
“….”
“…! …. 아니 전…그저…대신께서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자넨 그 입을 조심해야겠군…. 내가 트레제게 경의 눈치를 살피느라 중대장에게 호의를 베푼 것 같은가?”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만….”
“저 정도의 지휘관이라면 훈련 일지를 복사할 필요도 없네. 아마 군사들의 훈련을 대대에서 내려 보내는 대로 하지 않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서 진행을 했을 거야.”
“그건 명령 불복종 아닙니까? 훈련계획은 병부에서 지시를 하고 대대 단위로 짜서 하달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훈련계획의 방향을 병부에서 지시하고 대대에서 짠 계획은 권고사항으로 중대에 하달되고 있네. 중대급 훈련의 권한은 중대장에게 전적으로 일임되고 있어. 설사 병부의 훈련계획에 반하는 내용으로 훈련을 하고 있다고 해도 처벌을 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야.”
“병부대신…!”
“참 대단한 자를 봤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먼…. 하하하….”
그러나 그 웃음은 대대 통제실에서 중대장급 지휘관들에 대한 평가서를 보면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평가서에 나타난 예스프리의 점수는 다른 중대장들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확실히…. 그런데 사유를 보면 그럴 법도 합니다.”
대대장은 잠자코 병부대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입에서 예스프리의 이야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는 어서 나와라 어서 나와라 하는 말을 얼굴에 써 붙여 놓고 있었다.
“1중대장 말일세. 왜 이렇게 평가점수가 낮은 건가?”
나왔다!
“그 자는 무례한 자입니다. 전임 병부대신의 후광으로 갓 스물 하나에 중대장급에 오르더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더군요. 보시다시피 항명과 임의적인 군사운용에 이제는 저도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군사운용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중대장급 지휘관의 소관이니 저 역시 뭐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 병부대신의 눈이 조용히, 거침없이 쏟아내는 대대장의 입으로 향했다.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지를 않습니다. 이전엔 1중대 병사 하나가 제게 무례를 범하였기로서니, 벌하라고 명했는데 제 앞에서 대체 잘못한 게 뭐냐며 따지고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자에게 중대장이라니…. 대대장은 탄식이라도 하듯 한숨까지 내쉬었다. 전임 병부대신께서 아드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이야 이해합니다만, 그 인사는 좀 무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꾸할 틈도 없이 토해져 나오던 대대장의 말이 끝나자 병부대신이 곧이어 헛 하고 웃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군….”
“…예? 그게 무슨….”
“1중대장 말일세. 내가 묻길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었나…?”
뜨끔하여 당황한 대대장은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추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그저…. 알겠네. 더 이상 그의 말은 들을 것 없다는 듯 플로랑은 한 마디로 일축하며 평가서를 덮었다. 자, 그럼…. 수고해주게.
“아…아니, 병부대신…. 훈련 보고라든가…. 그런 건….”
“이미 각급 중대장들에게 지시를 내려놓았네. 지금쯤이면 속속 병부에 사본이 도착해 있겠지. 훈련 보고는 그것으로 대신하지. 그럼 수고하게.”
대대장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플로랑은 곧바로 통제실을 나서서 병부로 길을 잡았다. 부총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에게 아까처럼 계속해서 연유를 물어왔다.
“아니, 이번엔 훈련일지조차 안 받으십니까? 게다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부총관인 저에게도 언급조차 안 하시고….”
“거짓말일세.”
“…. 예에?!”
“돌격대대장이라는 놈이 꼭 귀족 대신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나. 이미 다른 대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해서 내가 훈련 일지를 즉석에서 필사 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 일지를 받아서 뭐에 쓰겠나.”
“… ….”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부총관에게 병부대신은 대대장에게 했던 거짓말을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한 그는 국경과 지방으로 파견을 보냈던 순시관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받았다. 즉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병부의 회당으로 부총관이 나간 후 플로랑은 한 뭉텅이나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펴들며 빠르게 눈으로 훑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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