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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9:45 573회 0건
그리고 재무대신 르로아 메텔 자작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사병 확장과 개인 정보조직의 급속한 확대, 그를 위한 공금 횡령이 그 증거로 제시되었으며 죄명은 역시 반역이었다. 왕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공표되었고,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가 죽어 애도하는 기간을 틈타 반역을 도모했기에 식솔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법정최고형으로 즉결심판한 후 처형은 애도 기간 직후로 날짜가 잡혔다. 왕궁보다 넓은 그의 대저택과 토지를 비롯한 모든 현물자산은 국고로, 압수된 병장기들은 모두 군부로 회수되었다. 그리고 남아있는 모든 현금자산은 은밀하게 공주의 손으로 넘어갔다.
“돈도 들어왔고…, 귀찮은 놈 하나 없어졌고. 음….”
연초를 피우며 이제 슬슬 정보대를 움직일 생각을 하는 레이네. 본격적으로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젠 융베리인가…?”
중얼거리던 그녀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도록 튀겨서 정보대원들을 불렀다. 어딘가에 숨어있었는지, 그들은 그 소리만 나면 속속 눈앞에 나타났다. 새로 뽑힌 시녀들은 처음 그들이 나타났을 때 혼비백산하며 정신을 못 차렸지만, 이젠 익숙해져 있었다.
“교원총연합회에서 가장 사제답지 못하면서 세력이 있는 놈들 다섯만 추려와 봐. 반드시 이 종이에 적어와.”
그녀는 자신의 인장이 찍힌 백지를 내밀며 명령했고, 정보대원들은 그 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다시 사라졌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볼 적마다 신기하다는 듯 레이네는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진세가 흐트러진다!!! 원위치!!!!”
왕도 사령부 예하 돌격대대 1중대 훈련장.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훈련장을 뒤흔들듯 했다. 군사들은 벌써 며칠째 같은 훈련만 반복하고 있었다.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휘통제실에 모인 소대급 지휘관들 앞에서 예스프리는 진세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몇 장의 자료를 펼쳐들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반원진이다. 적은 전방에 있다.”
“적이 전방에 있는데 웬 반원진입니까? 이거 겁먹어서 엉덩이 뒤로 뺀 진 아닙니까?”
한 소대장의 말에 키득거리며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이내 거기에 예스프리는 찬물을 확 끼얹어버렸다.
“그 따위 소리나 하고 있으니 아직 그 나이에 소대장이다. 알겠나?”
“…!!”
“잘 들어라. 화살진은 일반적으로 돌격대가 구사하는 진이고 반원진은 대군이 후퇴를 하거나 포위공격을 할 때 일반적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평지에서의 전투를 전제로 한다.”
“… ….”
“전투는 평지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산중에서, 시가지에서, 어떨 땐 공성전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린 바다와 인접한 지역이 없으니 해군은 없지만, 수중전에 대해서도 제군들은 알아야 한다.”
나직하지만 힘있는 음성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돌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선의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밀리면 우리의 본진이 마음놓고 전략을 구사할 수 없다!”
골수까지 군인이었다.
“공격시에는 최전방! 퇴각시에는 최후방!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위치다!! 알겠나, 제군들!!”
“예, 알겠습니다!!”
“소대장들 목소리가 이 따위라서야…, 알겠나, 제군!!!!”
“예, 알겠습니다!!!”
그 소리에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대대장이 깜짝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다.
“이게 무슨 소린가…?”
“새로 보직된 1중대장 지휘통제실에서 나는 소립니다. 오늘도 어김없군요.”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부관의 말에 대대장도 함께 끌끌거렸다.
“부모 잘 만나 스물 한 살에 중대장 되더니 의욕만 넘치는군….”
“부럽습니다…, 전 병부대신하고 동갑인데 아직도 이꼴입니다.”
“이놈아, 난 대대장이야, 대대장!! 병부대신은 목이 부러져라 위로 쳐다봐야 한단 말이다!!”
“그래도 대대장이잖습니까….”
“난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그렇군요. 어휴~, 왜 하필 망한 가문의 가신으로 태어나셨습니까~.”
“이놈이 상관모독죄로 즉참을 당하고 싶은가….”
“가시죠, 가시죠…. 뭐 그런 걸로 즉참까지….”
“에잇~ 퉤~!”
고깝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소대장도 보통 지휘관 수업을 1년 정도 받은 뒤 1년 이상 보병으로 복무해야만 비로소 보직을 위한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소대장급들부터가 일단 군생활 겨우 3년차에 솜털 보송보송한 예스프리에게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같은 중대장급들로부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예스프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무뚝뚝한 부친으로부터 난생 처음으로 격려를 받고 다짐했기에,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체력훈련을 하겠다고…?”
“그렇습니다.”
대대회의에서 예스프리의 건의안을 들은 대대장은 대답도 없이 멀뚱히 예스프리를 쳐다보기만 했다. 상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예스프리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진세 훈련기간입니다만, 병사들의 체력이 너무 허약합니다. 이제 겨우 칠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탈진하는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런 체력들로는 전투는커녕 치안조차 제대로 해낼 수 없습니다.”
“허허허….”
다른 중대장들도 모두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모욕적인 반응들이었지만 예스프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똑바로 대대장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눈이 마주친 대대장은 먼저 그의 불경부터 물었다.
“자네, 어딜 그렇게 똑바로 노려보고 있나…?”
“답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놓으라, 이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 도전적인 눈빛은 대체 뭔가?”
다른 중대장들의 표정도 불쾌하다는 식이었다. 예스프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슨 말이냐는 듯 반응했다. 걸렸다. 대대장은 밀부로 책상을 내리치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 인상 말이야, 그 인상!! 어디서 감히 인상을 쓰는 게야!!”
“대대장님, 제가 무슨….”
“이놈이…!!”
“죄송합니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나가!!!”
“예…?”
얼른 몸을 숙이며 사죄하던 예스프리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 순간 밀부가 날아와 이마에 맞았고, 뻑 소리와 함께 눈앞이 번쩍했다. 아찔한 통증에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어서 꺼져!! 어디서 감히 눈을 부릅뜨고 있어, 기껏해야 소대장 나부랭이 놈이…. 체력 훈련…? 군부에서 정한 훈련일정을 어디 감히….”
씹어뱉듯 하는 대대장의 욕지거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손가락 사이로 뜨뜻한 것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나가라는 말 안 들리나…? 다시 부를 때까지 자네는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는 피가 줄줄 흘러 얼굴의 반이 온통 피칠이 된 상태에서도 깍듯이 군례를 올리고 회의실을 나섰다.

“다시 볼 날이 있을 겁니다.”
“아마 그러겠지.”
시락에서 바이마샤르와 네오시아, 그리고 이스마르로 귀환하는 무리들을 모두 떼어놓고, 이제 남은 이들을 이끌고 사절단은 본국인 미키네오스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있었다. 융베리와 리타, 그리고 바이마샤르에 있는 내내 줄거리상 찬밥이었던 하백은 미키네오스로 떠나는 길에 핫산의 저택에 들러 한율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아우?”
“예. 오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못 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이별이구먼?”
“하하~, 또 뵙게 되겠지요.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낯간지런 소리 집어치고….”
변함없이 걸쭉한 말투가 하백은 친근하고 좋았다. 난생 처음으로 만난 동족인데다, 성격도 그러하니 한율이 그는 친형이나 숙부처럼 느껴졌다. 한율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열심히 하라구. 자네는 재능이 좋아. 그건 내가 보증하지.”
“예!”
멀찍이서 이들을 지켜보던 차프라는 세 사람이 그 곳을 떠나는 걸 보고서야 다가와 한율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들 나누러 오셨었군요. 어이구, 안녕하세요. 한율 공께선 저보다 한참 나이도 많으신 것 같은데, 그렇게 예의 차리지 마시지요. 에이 뭐 그렇다고 무릎 꿇고 절하는 것도 아닌데…. 하하하하~! 둘은 잡스러운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뒤뜰 언덕으로 향했다.
“아로사는 여전합니까?”
“… ….”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로사에 대해 묻는 차프라를 한율은 묘하게 웃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이 총각, 아로사에게 남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냥 씨익 웃으면서 성큼성큼 앞서 갔다. 차프라는 그가 대답하지 않자 당황하며 얼른 그를 쫓아갔다.
“합!!”
꿍…하는 소리와 함께 아로사는 팔꿈치를 내지르며 발을 디디다가 아윽…! 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발목에 지끈…하고 통증이 찾아왔다. 아야… 쓰읍…. 활을 손보던 나자르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왜 무리를 해, 바보같이….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니?”
“아아, 괜찮아, 괜찮아….”
“뭐야? 왜 저래…?”
차프라는 나자르의 부축을 받아 바위에 앉으며 발목을 쥐는 아로사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 아로사! 왜그래, 다쳤어?!
“맞네, 뭐…마음 있네….”
그런 뒷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던 한율은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꺼내 연초를 꾹꾹 눌러담으며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어디 보자며 달려드는 차프라를 차갑게 뿌리치는 아로사. 하여간 앙칼지긴…. 혀를 차며 담뱃대를 물고는 불을 붙인다.
“어디 봐, 이래이래… 이래 봐.”
한율은 바닥에 주저앉아선 아로사의 종아리를 서슴없이 움켜쥐곤 신발을 벗겨버렸다. 거침없는 행동에 놀란 차프라와 나자르보다, 소리를 지른 것은 아로사였다. 신발을 홱 벗겨내는 통에 발목에 통증이 한 번 더 간 모양이었다.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올린 한율이 발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혀를 끌끌 찼다.
“이 봐, 이거 봐, 이거, 응…? 디딤보를 벌레 밟아 죽이듯 하니까 발모가지가 이모양 되는 거 아니야, 이거 이거~ 응~?”
“…?”
나자르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물어보기가 망설여졌다. 머뭇거리는 새 아로사가 먼저 그럼 뭐가 잘못된 건가요? 하고 대뜸 물어봤고, 나자르는 괜히 흠칫 놀랐다.
“대답해주세요! 제 디딤보에 뭐가 잘못된 거죠?”
다그치듯 하는 아로사.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던 한율은 내가 무슨 빚진 게 있나…하는 얼굴로 헛웃음을 집어삼키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과 종아리를 주무르면서 대답을 꺼냈다.
“말했잖아. 디딤보는 그렇게 뭘 밟듯이 하는 게 아니라고. 칼을 쓰든 주먹을 쓰든 일격을 내지른다는 건 모두 똑같아. 온 체중을 실어서 내지르는 건데, 그 와중에 내딛는 걸음이기 때문에 거기에 단지 무게가 실리는 거야. 그저 세게 내딛는다고 위력이 생기는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프라는 그저 한율이 부럽기만 했다. 아로사의 맨살, 그게 발일지라도 스스럼없이 만질 수 있는 것이 부러웠다.
“뭐 하시는 거에요?”
실내로 아로사를 들이고 뜸을 놓는 한율. 그 모습을 보고는 핫산의 친딸 아이린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리곤 이내 시퍼렇게 피멍이 든 아로사의 발목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아로사, 다쳤어?! 발목이 왜 이래?!”
“조용히 좀 해요, 아가씨. 잘못 놓을 뻔 했어….”
그는 세 개 정도의 뜸을 놓고는 담뱃대를 뻑뻑 빨아서 불씨를 키운 뒤 불을 붙였다. 가만~있어, 가만~히…. 좋은 거니까…. 아이린은 꺅 소리까지 내며 한율을 붙들었다.
“뭐 하시는…!”
윽…! 보기에도 커 보이는 한율의 몸은 단단하고 육중했다. 그를 잡아당기려고 겨드랑이를 잡고 당겼지만, 그는 아예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태연하게 돌아보며 혀를 차기까지 했다.
“거 참…, 아가씨 성질 급하네. 내가 아무렴 이 애 발목을 태워버릴까 그러시나…? 이게 다 치료방법이요, 치료방법.”
차프라와 나자르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금씩 타들어가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올리는 뜸을 가까이 지켜보았다. 아로사는 문득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히며 그들에게 뾰족하게 쏘아부쳤다.
“뭘 그렇게 봐~! 저리 안 가…?!”
“신기하잖아…. 이게 말로만 듣던 뜸이구나.”
“어라? 너 아는 거 많구나.”
“헤헤…, 들어본 적 있어요. 환국에 대해 공부하면서….”
으응…, 하며 다시 담뱃대를 무는 한율은 상기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아이린을 발견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 잡아당기느라 힘 빠지셨나? 어서 일어나슈. 어여~. 아이린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흠, 흠…. 헛기침을 하는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시 뜸이 타는 걸 지켜보는 한율의 등을 남몰래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넓고 탄탄한 등이었다.
“다 타면 알아서 꺼지는 거니까, 괜히 끈답시고 물 끼얹고 그러지 마. 알았지? 꺼질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네…, 고맙습니다.”
“똑바로 해, 똑바로….”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행낭을 챙겨갖곤 휭허니 자신의 거처로 옮겨가버렸다. 아이린은 그대로 서 있었고, 차프라와 나자르는 또다시 뜸이 타는 것을 빤히 지켜보다가 아로사에게 한 마디씩 들었다.
정례의회가 끝난 후 총리 기즈는 잠시 핫산과 함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몇 가지 쟁점사항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또한 몇 가지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뒷담화도 나누는 그런 자리. 같은 당인데다 오랜 정치동문인지라 그들은 의회가 끝나고 나면 항상 그런 시간을 보냈다.
“일단 귀환자 지급 문제는 그럼 보류된 셈이 되겠군….”
“그런 셈이죠. 어쨌든 넉넉하게 편성해놓길 잘했습니다. 틀림없이 바루나는 전쟁을 하려고 들 테니까요.”
“사절단이 도착하자마자 또 사절단 순례를 시키겠구먼. 무슨 성지순례도 아니고….”
“미키네오스 입장에서야 성지순례죠, 뭐. 신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들 아닙니까. 명분상으로만 그래서 문제지….”
“하하하~, 그래, 맞아 맞아.”
잠시 찻잔 기울이는 소리와 함께 말이 없던 중 기즈가 야당 대표의 이야기를 꺼냈다. 토메즈가 자넬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 같던데. 핫산은 피식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여야 최고의원으로 갈라져 정치적 입장은 달라도, 의회가 분열되면 정치하기 어려워. 기즈는 타이르듯 했다.
“총리생활 좀 편하게 해주게. 둘 다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싸워…?”
“그게 제 탓입니까, 어디…. 토메즈가 괜히 저한테 질투하는 거죠.”
“질투…?”
“제가 한율 공을 데리고 있잖습니까. 지금 그 이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명망 높은 기사를 제가 끌어안는 모양새가 됐으니 지지율이 저한테 오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흠….”
정말 그렇다. 생각해보니. 핫산도 꽤 정치적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기즈는 그런데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냐 슬쩍 떠본다.
“뭐…, 없다면 거짓말이지요. 하하하하~!!”
둘은 함께 소리내서 웃고는, 웃음이 잦아들 즈음 기즈가 입맛을 다시며 깍지손을 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쩝…, 뭐 좋은 생각 없나…? 내가 총리노릇하기 좋은 것도 좋지만, 일단 분열이 되고 나면 다시 모으기가 힘들어. 정책 추진은 고사하고 수립하는 것부터가 어려워진다고. 그렇지요…. 둘은 각자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았다.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율 공을 딱히 토메즈 공관에서 지내게 할 이유도 없고….”
“그건 좀 우스운 꼴이지….”
“그렇지요…, 핫….”
“전쟁은 어때…?”
“…?”
“전쟁 말이야. 바루나가 정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반드시 거기엔 이권이 있을 거라고. 바루나가 명분 하나로 전쟁할 사람인가, 어디?”
“아하…!”
“어차피 이번 일로 보르틴 연합체 주도권의 명분은 바루나가 가져갔고, 전쟁 명분도 갖춰졌겠다. 그럼 남은 건 전리품 나누는 거잖아. 거기서 토메즈한테 좀 뚝 띠어 줘버려~.”
“괜찮군요…. 그 참에 아예 한율 공도 같이 전쟁에 보내는 건 어떨까요?”
“그…그 친구를…?”
“저도 여당 대표지만, 괜한 수싸움으로 시간 낭비하긴 싫습니다. 차라리 화근이 될만한 사람을 치워버리는 게 낫지요.”
“그…말이 틀린 건 아닌데…, 글쎄, 그거 쉽지 않을걸…. 게다가 우리는 군자금 지원으로 갈 거잖아. 그런 와중에 군대까지 파병한다. 너무 눈에 띄지 않겠어? 이스마르 같은 놈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당장 바루나부터 우릴 견제하고 나설 거라고.”
하긴.
“그럼 어쩌지…, 내쫓을 수도 없고….”
“그 친구처럼 영웅 대접을 받는 사람을 내쫓는 건 우리에게도 득될 게 없어. 알만한 사람이…. 일단은 여기 있을 수 있게 해야지. 제 발로 공화국에서 나간다고 해도 뒷말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며칠 지켜 본 바로는 그저 놀고 먹는 걸로 성이 찰 사람은 아니더라고요. 일단 군부에 넣어주겠다고 해 보죠. 말직을 주는 건 좀 그렇고, 그래도 욕심은 별로 없는 사람 같으니까 허울뿐인 자리를 주면 저랑 줄이 닿았다고 해도 일단 야당의 견제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목적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딱히 거절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군부에 자리잡게 해준다고 하면…?”
“그렇게 호락호락 우리 뜻대로 움직여줄 위인 같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말은 좀 해봐. 나도 생각은 해 볼 테니까….”
“그러지요.”
확실히 한율은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긴 했다. 융베리로서는 바루나의 공작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한율을 노출시켰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한 바이마샤르의 입장에선 고민거리였다.
저택의 뒤뜰.
한율은 발검 자세로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코와 입으로 들숨과 날숨이 천천히 드나들었고, 예리한 투기가 그의 주위를 감싸며 돌았다. 후우우….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투기가 그의 몸속으로 다시 수렴되면서 주변의 공기가 경직되듯 했다. 이윽고 진공 상태처럼 변한 그의 몸에서 강력한 검기가 발산되며 우렁찬 기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얏!!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에 있던 풀잎과 나뭇잎들이 잘려 나갔고, 한율은 재차 호흡을 가다듬으며 몸을 바로 했다.
‘굉장해….’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 기별하러 온 아이린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런 식의 수련에 대해 그녀는 들어본 일도 없었다.
“…? 아….”
인기척을 느낀 한율이 뒤돌아보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자, 아이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그의 앞으로 나섰다. 저녁…식사 시간이라서 왔어요. 어…,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검 다섯 자루를 챙겨 들고 따르는 한율이 긴 한숨을 내쉬자 아이린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물었다.
“아니 뭐…, 걱정이라기보단. 이렇게 하는 일도 없이 여기 공짜로 묵는 게 좀 그래서요.”
“특별히, 가야 할 곳은 없으세요?”
“…,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긴 한데…. 하하, 만나려고 한다고 만나질 사람이 아니라서 말입니다요.”
“….”
말하는 투를 보니 꽤 중요한 사람 같다. 아이린은 약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나야 할 분이… 어떤… 분이신데요…? 딱히 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지만 한율은 아이린과는 다른 이유로 대답하는 데 뜸을 조금 들였다.
“같은… 스승을 모셨던 분입니다. 제 스승님과요….”
“아, 네….”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는 아이린의 입꼬리가 실룩거렸지만, 한율은 그를 모른 채 한숨만 한 번 더 내쉬었다. 떠나올 때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본다.
- 나와 같은 스승을 모셨던 사람이 있다. 언젠가 그를 만나기는 해야겠지만…, 애써 찾지는 말거라. 네가 숙명에 사로잡히건, 그것을 씻어내건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을 때 그가 네 앞에 나타날 것이야.
“한율 님의 스승이란 분은…, 그 분도 환국 출신이신가요?”
“허허, 그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싸움질도 그 양반에게서 배웠으니까요.”
“어떤… 분이신가요?”
“… ….”
잠시 뜸을 들이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아이린은 대답을 기다렸다. 딱히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말없이 가는 것도 어색해서 던진 질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오는 대답이 꽤나 주목할 만했다.
“환국의… 19대 환인, 그러니까 왕이셨지요.”
“왕…!”
크게 놀라는 아이린의 반응에 한율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괜스레 멋쩍어져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쩌다 보니 그게 그렇게….
“한율 님은 고귀한 신분이셨군요….”
“아니, 저기…,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국왕에게서….”
“그건….”
사정을 말하자면 복잡했다. 그가 대답을 미루고 있자 아이린은 황급히 사과하며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마시키려 들었다. 한율은 손을 저었다.
“그런 것까진 아니고요. 사정이 좀 복잡해서 말입니다요. 어쨌거나….”
“….”
“환국에서 왕자리는 그리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낮은 자리이기도 하지요.”
“…국왕이 가장 낮은 자리라니요?”
“신민들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으니까요. 실제로 환국에선 지방 영주들이 자기가 다스리는 평민들하고 같이 농사도 짓고 사냥도 하고 그랬답니다.”
“예에…?!”
“하하…, 뭐 그런 겁니다. 아무튼…, 독자들을 위해서 했던 얘기 또 하는 건 좀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죠.”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핫산이 와 있었고, 아로사와 나자르는 보이지 않았다. 당직이라는 아이린의 말에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율은 핫산과 함께 식사가 준비된 곳으로 향했다.
“지내기는 어떻습니까?”
“덕분에 아주… 하하, 좋습니다.”
“다행이군요. 조금 무료해할 것 같아 걱정을 좀 했어요, 사실….”
“하하…, 실은 좀 그렇기도 합니다. 늘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거저 사는 게 좀….”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핫산의 입가에 됐다. 하는 표정이 그려졌다. 첫 번째 확인은 됐고…,
“딱히 정해놓은 목적지가 없다면 여기 자리를 잡는 건 어때요?”
“아….”
뜻밖의 제안에 한율은 손을 멈추었다. 아이린의 얼굴엔 화색이 확 감돌았고, 핫산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실은 한율 공이 내 집에 머무르고 있는 문제로 정치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뭐, 큰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죠.
“그… 그렇습니까…? 아이고 이거….”
“아니아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저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그런 겁니다.”
“왜요, 아버지…? 무슨 문제가 있는데요?”
약간 불쾌해진 아이린이 묻자, 핫산은 으음… 하며 잠시 뜸을 들이고는 사연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한율은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그런 그를 보는 아이린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참…,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군요. 어떨 땐 정말 유치하다니까…, 당신도 고생이네요.”
부인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자 핫산이 그러게 말이야. 라는 듯 웃었다.
“한율 공이 군부에 소속되거나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이점이란 건 우리 공화국만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요.”
“말씀해 보시지요.”
“일단 한율 공의 무훈은 우리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에도 전해져 있습니다. 그런 공이 우리 군부에 자리를 잡았다 하면 우리 공화국 군대 전체의 위상이 높아지지요.”
“하하…, 너무 절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사람 하나 들어갔다고….”
“아닙니다.”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는 핫산.
“보르틴의 문화는 그렇습니다. 상징적인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지요. 공이 보기에 어리석다 할 수도 있는 격식이나 명분 같은 걸 따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나 역시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정치란 그런 것이 중요한 분야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뒤에 있었다. 한율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핫산이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다 보니, 사실 공에게 제안할 자리도 그리 실권은 없습니다. 상징적인 자리일 뿐이죠.”
“아버지…!”
눈 가리고 아웅이냐는 식으로 쳐다보는 아이린을 무시한 채 핫산은 말을 마무리지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리지요. 하지만 정치적 문제란 건 사소한 데서부터 균열이 일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라서….
“오래 걸리면 곤란하단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한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밤 자신의 거처에서 담뱃대를 문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그는 아이린의 방문을 맞았다. 어이구,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안 주무시고…. 차를 준비해 온 아이린은 탁상에 그것을 내려놓고 앉았다.
“고민하시느라 안 주무실 것 같아서요.”
“하하…, 고민이야 내가 하는 건데…. 하여튼 고맙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마주하고 앉았다. 아이린은 찻잔을 나누어 놓았다. 둘 다 말없이 그것을 마시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술은 좀 하십니까?”
“네…?”
엉뚱한 한율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는 아이린, 한율은 일어나서 제 행낭을 뒤적거리다가 가죽으로 된 물통을 꺼냈다. 이게…, 산적들하고 지낼 적에 얻었던 건데…, 꽤 괜찮더라고요? 아이린이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한율도 같이 웃었다. 차분하던 분위기가 풀어지고, 둘의 웃음소리가 가볍게 들떴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재미있는 분이세요, 한율 공은….”
“좋은 게 좋은 거더라고요, 살다 보니….”
“그런 말들은 환국에서 쓰는 말인가요…?”
“예? 어떤….”
“음….”
아이린은 눈을 잠시 굴리며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의 말버릇을 지적했다. 한율 공께선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 표현들을 많이 쓰세요. 방금 말씀하셨던 좋은 게 좋은 거라든가…,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스스로는 모르세요? 하하하…, 고향에서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제가 원래 좀 그런 편이기도 합니다. 항상 멋대로만 살아와서 그런지…. 스승을 모실 때도 멋대로만 하셨나보죠? 다시 웃음소리가 들떴고, 아까보단 조금 더 천천히 가라앉았다.
“… ….”
“… 군부에….”
“….”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글쎄요.”
“…. 허울뿐인 자리라서 마음에 안 드세요?”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 그래도 기분은 상하셨잖아요.”
“…, 왜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 아버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실은 그래서 그분이 더 좋습니다.”
“네…?”
한율은 앞에 놓은 술주머니의 마개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솔직하시니까요. 다른 술수를 부리지 않고 저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으시지 않았습니까. 전 그런 분들이 좋아요.”
“네에….”
그는 마개를 열고 한 모금 들이켰다.
참 시원하게도 마신다. 아이린은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찻잔을 단숨에 비워낸 뒤 내밀었다. 어라…? 한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아이린은 잔을 더 내밀며 재촉했다. 뭐, 그럽시다. 라는 얼굴로 한 잔. 그러나 보통 독한 술이 아니었다. 마시는 순간 아이린의 눈이 이만해지고, 그녀는 끊어질 듯 기침을 해댔다.
“굉장히 독한 술인데, 기세 좋게 드신다 싶었지….”
“어우….”
눈까지 약간 빨개진 아이린이 다시 잔을 내밀었다. 에엥?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어서 한 잔 더 달라며 재촉하자 한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이번엔 아까보다 더 많이 채웠다.
“당신…, 그거 알아요?”
“…? 뭔데?”
잠자리에 든 핫산은 아내로부터 아이린이 핫산에게 마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흠…, 하며 눈을 굴렸다. 확실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해요. 허허…. 아내는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애도 참…, 마음 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떠돌이를….”
“제안을 수락하기만 한다면 명색이 보위부 군사자문이야.”
“허울 좋은 자리야 앉으나 마나지 뭐….”
“그래도 꽤 높은 자리인데 뭐. 문서상으로는 차관급인걸.”
아내는 계속 한율을 두둔하는 듯한 말에 정색을 했다. 당신은 그럼 아이린하고 저 떠돌이를 혼인이라도 시켜야 한단 말이에요? 안될 건 뭐야. 이보세요, 여당 최고의원 핫산 나으리! 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이 사람이…?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예요?”
“그 나이 때야 뭔가 새로운 걸 보면 좋아할 수 있지…. 어디 좀 특이해?”
“이봐요!”
“문제는 그 친구를 사위삼을 수 없으니 아이린이 좀… 힘들다는 거지.”
“…, 여보.”
“생각해 봐. 지금 여야가 힘이 비슷해. 야당하고 사소한 문제 생기는 것도 피하려는데, 그런 사람을 사위삼아봐. 선거가 한참 남았는데, 그런 사람이 우리 쪽으로 온다고 해서 표가 우리 쪽으로 몰릴 것 같애? 어차피 그런 식의 손잡기로 지지 얻는 건 잠깐이야. 잡아도 선거 직전에 잡는다면 모를까….”
“이 양반이…, 아니 당신은 지금 딸 이야길 하는데 정치가 눈에 들어와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그럼 내가 정치 생각 안하고 뭘 생각해? 당신은 안팎으로 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애 맘 다잡아 줄 생각이나 해.”
“…, 수락을 하든 안 하든, 이 집에 계속 둘 수는 없어요.”
“시끄러워.”
“내보내야 된다구요. 딸 단속하려면.”
“알았어. 알았다고.”
“참 나… 어디 남자가 없어서…, 차프라 같은 애들 얼마나 좋아. 집안 좋고, 힘 있고…, 보위부 총사가 훨씬 낫지.”
“아, 좀 시끄러워~.”
같은 시각.
“크으~~!”
“… ….”
석 잔째 비워낸 아이린은 얼큰한 소리를 내며 입가를 닦았다. 한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하늘하늘 부러질 것 같은 아가씨가 보기하곤 다르네…. 고개를 드는 아이린의 얼굴이 술기운으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푸하…, 이거 마실수록 괜찮네요?”
“벌써 혀 꼬이고 있시다.”
“더워….”
아이린은 목까지 올라온 옷의 단추를 풀고는 겉옷을 벗었다. 술기운으로 목언저리까지 빨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율은 혀를 끌끌 차면서 술통의 마개를 닫았다.
“어…? 더 안 마셔요?”
“그만 합시다. 오밤중에 웬….”
“그럼 밤중에 마시지, 아침에 마시나…?”
키득거리며 쳐다보는 그녀는 벌써 취기가 오른 것이 분명했다. 인사불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신줄은 살짝 놓은 모양이다. 한율이 연초에 대해 양해를 구하자 아이린은 선선히 그러라고 응했다.
“그 파이프도 되게 특이해요.”
“이건 곰방대라고 하는 거요. 환국 물건이죠.”
“좀 봐도 돼요?”
받아들고 찬찬히 위아래로 살피곤 입에 물고 뻐끔뻐끔 피우는 흉내를 내 본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짓이 귀엽다. 한율은 그렇게 생각했다. 얌전해 보이는데 의외로 톡톡 튀는 구석도 있다. 담뱃대를 돌려받아 연초를 채워넣고 불을 붙이는 동안 아이린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 어때요…?”
“…? 뭐가 말이오?”
“나 예쁘지 않아요…?”
“… ….”
멀뚱히 쳐다보던 한율이 연기를 뻐끔히 뿜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그러다가 아이린이 한 말에 그는 별안간 기침을 해댔다.
“좋아해요.”
쿨럭쿨럭, 쿨럭쿨럭. 담배연기가 목에 걸려 한 차례 격렬하게 기침을 한 한율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그녀를 쳐다봤고, 아이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살짝 꼬인 혀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구요.”
“… ….”
허허허…, 어이없다는 웃음이 나오자 아이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돼요…?”
“이봐요, 아가씨.”
“네.”
“내가 지금 몇 살인지 알아요?”
“서른 셋이요.”
“…음…, 너무 콕 찌르니 좀 그러네. 아가씨 나이는 올해 몇이지?”
“스물 하나요.”
“응. 내 듣기로는 이쪽 동네선 스무 살이 되면 짝들 찾는다던데. 짝짓기를 해도 벌써 두세 번은 했을 법한 아저씨한테 마음이 왜 가요…?”
“두세 번씩이나 했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내 나이가 그렇다는 거지~.”
“안 했잖아요~. 여자도 없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뭐가 문제예요? 나이? 그깟 나이가 뭐 대단하다고….”
“허, 참….”
한율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담뱃대를 뻑뻑 빨았고, 아이린은 잔뜩 부은 얼굴로 그에게 꽂아놓은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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