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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7 326회 0건
레이네는 한 번의 회의가 끝날 때마다 회의내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받아 보곤 하였다. 이상할 정도로 충실하단 말이야…, 비토.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레이네는 비토를 불러내 그의 공을 치하했다.
“네 공이 컸어. 국왕이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정보를 넘겨주는 건 모두 너희 정보대원들 덕이다.”
“….”
비토는 말없이 목례로 그에 화답(?)했다. 레이네는 그래도 모르는 일이라며, 국왕의 명령을 받더라도 나한테 모든 정보를 줘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알지? … …. 왜 대답이 없어? 물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녀는 여전히 뻣뻣하게 대답하는 비토를 한 차례 흘겨보았다.
“그런데 공주님….”
“응, 왜…?”
레이네의 옆에서 문서들을 정리하던 나다니엘이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두루마리를 넘겼다. 바루나가 정보대원들을 빌리는 대가로 그녀에게 건넨 것들이었다. 뭐야, 이건…? 폐하께서 주셨던 것들입니다. …. 훑어보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이건….”
“병부의 인사명단하고 예산 상황들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런데…. … ….”
너희들이 이렇게 비싼 인력인 줄은 몰랐는데…. 헛웃음을 내뱉으며 비토를 향해 중얼거리던 레이네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놓았다 하였다.
“일단 병무대신이 미셀을 어떻게 처리해줄 지를 봐야 하지 않겠어…?”
“정보를 주기로 하셨던 건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될 것 같은데…?”
“….”
나다니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궁내의 밀고 당기기를 많이 보아왔으니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도 있었으나, 미리 상전들의 속내를 넘겨짚고 말을 주워섬길 만큼 그는 경망스럽지 않았다. 레이네는 대답을 기다리듯 말없이 문서들을 천천히 읽었다.
“공주님께 어려운 숙제를 내 주신 것 같습니다.”
“…? 무슨 말이야…?”
“폐하께선 앙굴리마라라는 세력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논의를 통해서 공주님께서 병무대신을 얻으실 단초를 주신 것이 아닌지 생각됩니다. 지금 이 문서도 그러하고요.”
“… ….”
저간의 사정은 하백 또한 알고 있었다. 바루나를 통해 회의 결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레이네에게 실어나른 것은 그였다. 자연히 오가며 들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하백은 저도 모르게 나다니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 차례 병무대신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셨다곤 해도…, 병무대신은 그리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병무대신께서도 폐하의 진심에 대해 어렴풋이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병부를 휘어잡을 기회를 한 번 더 준다, 뭐 이런 얘긴가?”
“공주님…!”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래? 어차피 상황이야 뻔한 건데….”
레이네는 문서를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담뱃대를 물었다. 병부의 예산이 이 정도라면 정벌 준비에 차질이 있을 법도 한데…. 담뱃대 끝을 잘근잘근 씹던 레이네는 피식 코웃음 치며 문서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이번엔 공주님께서 먼저 병무대신께 손을 내미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레이네가 눈을 부라리자, 나다니엘은 차분한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말씀드렸다시피 병무대신은 만만한 이가 아닙니다. 전에 한 번 그렇게 숙였다 해서 계속 그런 식으로는…,
“그럼 내가 그 자에게 아쉬운 소리라도 해야 된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앙칼지게 쏘아 붙이는 기세였지만, 레이네는 일단 나다니엘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일단 첫 번째에는 꺾어 두셨으니 다음번에는 손을 내밀어서 회유를 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병무대신께선 아주 곧은 분으로 압니다. 그러니 신뢰를 얻으시면 누구보다도 힘이 되리라 생각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 ….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의 눈길이 하백에게로 향했다.
“곧긴…, 곧지…. 누구처럼 건방지기도 하고….”
“….”
“그래, 뭐…. 고려는 해 보지. 어쨌든 미셀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부터 봐야겠지만….”

열병식을 앞둔 각국의 수행군은 제식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하백은 후원 외각 순시를 돌다가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네오시아와 발덴 지역에서 온 기사단이었다. 수십에서 많게는 백여 군사들이 손발을 맞추며 기치창검을 세우고 기강을 잡는 모습들이 근사해보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는 하백의 입에서 문득 나직하고 긴 한숨이 새나왔다.
“웬 한숨을 그리도 깊게 내쉬시는지요…?”
“…? 아…, 시종관님….”
뒤에서 다가오는 나다니엘을 향해 하백은 얼른 돌아서서 군례를 올렸다. 나다니엘은 마주 읍을 하며 공손하게 그의 군례를 받았다.
“… ….”
나다니엘은 그의 옆에 와 나란히 섰다. 성벽 밖에서 추운 날씨에도 제식훈련을 반복하는 기사단의 모습이 보이자 나다니엘은 장관이로군요. 열병식이 내일이지요, 아마…? … ….
“…. 부러우십니까…?”
“… …. 뭐가 말입니까?”
“…. 저는 궁에 들어온 지 이제 4년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상단에서 회계 일을 맡았었고요. 좋지 않은 일 때문에 궁에는 노예로 왔었지만…, 공주님의 은혜로 면천을 하고 이렇게 시종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역정을 감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백은 마치 ‘너는 지껄여라’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다니엘은 말을 계속했다. 공주님을 모신 지는 3년 정도 되었지요. 저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
하백의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나다니엘은 차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차 한 잔 나누시겠습니까?”
공주의 주위를 지킨 지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하백은 시종관의 처소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나다니엘이 노예로 지내면서 기거하던 방에 들어선 그는 남루한 실내를 보고는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궁내 시종관이나 된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조금 놀라신 모양입니다.”
“… ….”
그는 하백과 마주앉아 손수 찻물을 달였다. 소박한 찻잔을 보며 하백은 그에게서 언뜻 빅쿠의 인상을 받았다. 드시지요. 뭔가 할 말이 있어서 부르지 않았나 싶었는데, 나다니엘은 말을 아끼며 일단 차 한 잔을 모두 비워냈다.
“공주님께서 내신 문제는 답을 찾으셨습니까…?”
“…, 아직….”
다시 찻잔을 따르며 나다니엘은 하백의 대답에 정곡을 찔렀다.
“찾지 않으신 거겠지요…?”
“…!”
하백이 찔끔한 기색을 보이는데 반해, 나다니엘은 별반 말이 없었다.
“공의 그런 태도에 대해 나는 별로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사는 방식이 있는 것이겠지요.”
“… ….”
“그러나 각자의 사는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거나…. 아니면 사람들과 어울려 살길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밖에 저는 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절대적인 힘…. 하백은 속으로 나다니엘의 말을 되뇌이며 한율을 떠올렸다.
“시종관님의 사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 … ….”
“….”
뜻밖의 시점에서 하백의 질문이 나오자 나다니엘은 잠시 그를 보다가 이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간결하게 말씀드리면…, 공주님의 뜻에 따라 공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
“나는 하백 공의 의기와 정직함을 높이 평가합니다. 사실 이 미키네오스는 나라 전체가 거짓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위선이 만연한 곳입니다. 사람들은 허황되고 장황한 말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 들고, 듣는 사람들은 그를 알면서도 또한 거짓되게 응대를 하는 것이 마치 미덕인양…, 그렇게 살지요.”
“시종관님….”
“역겨울 때도 많습니다. 공께서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꾸미며 참된 마음을 외면하는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하셨습니까?”
“참된 마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스스로에게 진실하며 늘 자신을 반성하는…,”
“무엇을 반성해야 합니까? 공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
나다니엘의 말에 반박을 하던 하백은 거기서 할 말이 없어졌다. 대답없는 그를 향해 나다니엘이 다른 질문을 했다.
“공께서는 레이네 마리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셨습니다. 그 충성심은 제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무슨 가당치 않은 말씀이십니까…! 한 번 충성을 서약한…!”
“공께서는 과연 진심으로 공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자신의 정직함을 의심받은 하백은 발끈하여 반박하다가 나다니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 번 몰아세운 나다니엘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상전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게다가 헤아리려 들지도 않는 것을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공의 충성심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 …!!”
“… ….”
질문 공세로 하백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나다니엘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 반박도 못하는 그를 놓고 찻잔을 비운 뒤 예의 차분한 어조로,
“말씀드렸듯, 나는 공께서 가진 의기를 높이 사며 지금 공께서 고수하고 계시는 입장을 탓할 마음은 없습니다.”
“… ….”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으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 자의 충성심을 믿어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 ….”
“하백 공.”
“…!”
말없이 찻잔만 내려다보던 하백은 나다니엘의 눈빛을 마주 대하고는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쉴 틈 없이 몰아세우던 사람이라기엔 나다니엘의 눈빛은 간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주님은 안타까운 분이십니다.”
“…!”
“나는 공께서 진실되고 신의가 있는 분임을 압니다. 공과 같은 분이 공주님께는 필요합니다. 이 사람은 공께서 부디 공주님께 그 곧고 의기로운 마음을 바쳐 주셨으면 합니다.”
“… ….”

“내일이 열병식이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들 푹 쉰다. 술을 마실 사람들은 술 한 잔씩들 해도 좋고. 하지만 휴식 군기는 엄정하게! 알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어이구, 군기들이 바짝 들었네.”
“…?”
부대의 뒤에 서서 루카스의 통솔에 따르며 병사들을 통제하던 나자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브로시니가 갑옷을 벗은 전포 차림으로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며 다가와 섰다. 요즘은 매일 드나드시는군요. 내일이 열병식인데 참 여유만만이셔…? 에이, 내가 군영에 눌러있다고 해서 나아질 것 있나. 할 땐 하고 놀 땐 또 놀아야지. 손을 내저으며 대꾸한 브로시니가 저만치 서 있는 루카스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자, 루카스는 무표정하게 응답하고는 군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 참…, 설마 아직도 그 때 일로 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원래 좀 냉정하시긴 하죠. 댁처럼 속없이 굴진 않거든요.”
말로는 비꼬고 있었지만 나자르의 표정은 이전에 비해 한결 풀어져 있었다. 브로시니는 별 일이라는 듯 허허 웃으며, 요즘 나한테 좀 사근사근하셔? 이제 내 마음을 좀 알아주시는 건가? 건들거리지 말아요, 체신 없이…. 나 체신 읍서~. 나자르가 웃음을 터뜨리자 브로시니도 덩달아 낄낄거렸다. 해산하던 병사들은 언제 저렇게 친해졌냐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어쨌든 브로시니 경에게는 감사하고 있어요.”
“응…? 무슨 소리람, 그게…?”
“사실 사령님이 좀 변하셔서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전에 없이 병사들한테 좀 뭐랄까….”
“…?”
“어쨌든 그랬는데, 브로시니 경하고 한바탕 하고 나더니 다시 예전처럼 되셔서 다행이에요.”
“오, 그래…? 역시 루카스는 사나이였군…!! 사내들은 싸움으로 크는 거거든, 원래, 핫핫하하하…!!”
“그놈의 사나이 타령은….”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치며 크게 웃어젖히는 브로시니에게 눈을 흘기며 구시렁거리던 나자르는, 뭔가 생각난 듯 정색을 하며 그에게 따지고 들었다. 아, 가만…. 그런데 당신, 왜 나한테 계속 반말해?
“으응…??”
“으응, 이 아니라, 왜 나한테 반말하냐고? 거 듣다 보니 기분 나쁘네?”
“그럼 총사도 반말하게나.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 사람 좀 봐? 그래도 명색이 귀족이란 사람이….”
“귀족은 무슨…, 야전에 나오면 병사나 기사가 다 똑같지.”
“….”
의외의 말에 나자르가 이것 봐라…? 하는 얼굴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브로시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건들거렸다. 나 좀…, 멋있나?
“뭐…, 그런 말만 안하면….”
고개를 끄덕 끄덕 하면서 피식 웃었다.
“추운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 술이나 한 잔 하세. 어차피 오늘은 더 훈련도 없잖아?”
“칭찬해주자마자 수작질이네.”
어깨에 짚은 손을 꼬집어 떼어낸 나자르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직접적으로 물었다. 당신, 솔직히 말해봐. 나랑 자고 싶어? 뭐…? 못 들었어? 다시 물어봐 줘…? 브로시니는 자네 마네 하는 소리를 입에 담는 이 여자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고, 나자르는 비웃듯 하는 눈길로 그를 흘겼다.
“아니 무슨 여자가….”
“뭐, 성격도 시원시원하니 괜찮아 보이고, 생긴 것도 그만하면 봐줄 만은 한데…. 글쎄. 나중에 바이마샤르로 한 번 찾아와. 그럼 생각해줄 수도 있고….”
“이…, 이봐…!”
“어쨌든, 나한테 수작을 걸어보려거든, 여자들에 대한 당신 생각부터 바꿔야 될 거야. 내일 봅시다?”
네오시아에서 정절입네 하며 하룻밤 지내면 목숨 거는 여자들만 보다 날 보니 정신이 없을 거다…. 한 방 먹여줬다는 생각에 나자르는 휘파람까지 불며 지휘부 군막으로 향했다. 브로시니는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아니 뭐 저런 계집이…, 하며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루카스는 다음날 있을 열병식에 대한 문서를 보며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내일 열병식 순서가 어떻게 돼요? 어…. 우리는 세 번째야. 그래요…? 문서를 들어 보이며 루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병사들이 이 긴 문장을 어떻게 외웠는지 모르겠어. 내가 잊어버릴까 걱정이네. 그가 말하는 것은 열병식에서 복창할 연합결의문이었다.
“하하…, 어떻게 손바닥에라도 적어 가셔야겠네요.”
“126단어나 돼. 내 손바닥이 무슨 대자보인 줄 알아?”
“그걸 다 세보셨어요?”
나자르는 하하 소리내 웃으며 검을 탁상에 기대놓고는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 물 차가워~. 괜찮아요. 불도 지펴놨는데 뭐…. 서너 차례 손에 물을 끼얹더니 이젠 허리를 숙이고 세수를 했다. 루카스의 눈길이 숙인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쓸어보았다. 바이마샤르의 군복은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 날렵하게 만들어져, 전포부터 갑주에 이르기까지 몸에 다소 달라붙는 형태였다. 거기다 상체를 숙였으니 엉덩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찰싹.
“…!!”
“엉덩이는 정말 일품이야, 자네….”
나자르는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침상으로 가 앉은 루카스는 자신의 행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지 태연하게 결의문을 보며 중얼중얼 읽어보았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자르는 천천히 손으로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여전히 결의문에 눈을 두고 있는 루카스를 쏘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루카스가 고개를 들었다.
“…?”
“… ….”
“…, 왜 그래…?”
“… ….”
나자르는 분을 삭이듯 물 묻은 손으로 이마를 훔쳐냈다. 대답이 없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루카스는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령님.”
“…. 어.”
“….”
“…, 말해. 왜 그러는데…?”
천연덕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실수했음을 모르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일단 말이나 해봐야겠다 싶어 나자르는 목을 가다듬으며 감정을 조절했다.
“저기, 방금 뭐 하신 겁니까?”
“…. 뭐가?”
“지금 제 엉덩이를….”
“뭐야, 지금…? 자네 그것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야?”
“… …!!”
“위안부끼리 무슨 그런 걸로…. 참…. 자네 보기보다 소심하네.”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내뱉으며 침상에 누워버리자, 나자르는 더 이야기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말없이 검을 들고 군막 밖으로 나섰다. 새삼스럽게 왜 저래…? 결의문을 외우던 루카스는 별 일 다 보겠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군막을 나선 나자르는 그 길로 왕궁에 들어 객궁에 머무르는 핫산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많은 국가와 영지로부터 사람이 모인 이곳에서 뭔가를 해결해볼 수도 없었다.
“… ….”
이야기를 들은 핫산은 심각한 얼굴로 공감했다. 차분하고 침착한 네가 와서 그렇게 말할 정도니, 일단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알겠다만…. … …. 삼백 기사단의 그자와 한바탕 싸우고 화해하고 난 뒤에 좀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뭔가 절제력이랄까,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나도 좀 이상하다 싶었다. 이렇게 민감한 곳에서 함부로 싸움을 벌일 친구가 아닌데…, 게다가 희롱까지….”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음….”
“내일 시락으로 가는 전령…, 제가 갔으면 해요.”
“뭐…?!”
“여기서 뭘 해결해 볼 방법도 없잖아요. 제가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게다가…?”
“내일 열병식도 있는데…. 여자가 군인을 한다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요. 우리 군에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아요.”
“루카스 꼴 보기 싫어서 그냥 가겠다는 건 아니고…?”
“… ….”
핫산이 정곡을 찌르고 나오자 나자르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한숨을 깊이 내쉬는 그에게 미안한 생각부터 들었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건 그녀는 사신단 호위군의 지휘관이었다. 별로…, 너답지 않구나. 늘 사리분별은 잘 했지 않니. 죄송해요, 저도 지금 너무 좀…. 핫산은 고개를 푹 숙이는 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많이 힘들었구나. 하긴 루카스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힘들기도 했겠지.”
“….”
“그렇다고 네가 빠지는 건 말이 안 된다. 넌 우리 바이마샤르 군부를 대표해서 온 지휘관이야.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 …. …예.”
핫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자르가 염려하는 바를 그도 똑같이 염려하고 있었다. 펠리그로니에프처럼 완고한 교리 원리주의자와, 그를 따르는 영주들에게 있어, 아니 어쩌면 바이마샤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들에게 있어, 여성이 공석에 나서는 일은 탐탁치 않은 일일 것이었다. 더구나 펠리그로니에프는 공화정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회의 기간 내내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조금도 굽힐 생각이 없다. 우리 바이마샤르는 모든 시민이 마땅히 평등하다는 걸 원칙으로 하는, 유일한 나라다. 난 그것이 늘 자랑스러운 사람이야. 너 역시 그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지요. 그래도….”
“굽히는 순간 지는 거야. 정벌을 위한 논의라고 해도 지금도 전쟁 중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열병식은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정벌 결의를 다지는 약식 출정식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행사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조금이라도 물러나선 안 된다, 알아듣겠지?”
“…. 예.”

리토르나는 1천의 특수전부대를 비밀리에 몰고 온 자와카로부터 선제의 붕어 소식을 들었다. 객궁의 거처에 든 자와카는 약간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그보다 더 눈에 띈 것은 비장함이 깃든 그의 표정이었다. 리토르나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예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아타 아디라자를 뫼셔 왔나이다, 전하.”
예를 올린 후 무릎을 꿇은 자와카의 입에서 나온 첫말이 그녀의 예감을 사실로 확인시켜주었다.
아타 아디라자, ‘황제의 영혼’을 뜻하는 잉그라드의 옛말이다. 이것은 황제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일종의 법력으로써, 잉그라드의 독특한 황위계승 방식의 핵심과 같은 것이었다.
전제군주제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잉그라드는 그 시초부터 직계 혹은 방계 등의 혈연과 무관하게 황통을 이어 왔다. 가나파티 출신인 잉그라드의 시조 슈타르바 잉그라드에게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거니와, 무엇보다 그는 제국의 정통성을 대륙의 정통성으로 이어가고자 열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가나파티의 법사들은 그 뜻에 따라 앙카라시아의 하늘과 땅, 대기와 물, 그리고 모든 생명의 기운을 담아 법력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바로 아타 아디라자였다. 황위를 이어받을 이는 가나파티에서 황제의 영적 후계자를 찾아 황통을 이을 적자로 정하여 그로 하여금 아타 아디라자를 이어받게 해왔으니, 이제 리토르나가 열여섯 번째로 그것을 받을 차례가 된 것이었다.
“…. 그럼….”
리토르나는 애써 격동된 속내를 갈무리하며 신음처럼 물었다.
“선황 폐하께선…. 편안히…, 가셨는가…?”
“…. 홀로 가셨사옵니다.”
“… ….”
굳은 표정의 리토르나를 향해 자와카가 머리를 조아렸다.
“트란드라 1천이 당도하였고, 또한 가다르파의 법사들이 만샤르차크의 군영에서 의식을 준비하였나이다. 어서 납시어 의식을 행하소서, 폐하.”
“… ….”
리토르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들에 대해 물었다.
“가다르파의 법사들…, 아타 아디라자의 온전한 양위를 위해 온 것인가…?”
“….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긴 앙카라시아의 기운이 미치지 못하는 이곳이니 법사들이 필요하기도 하겠지…. 의식이 끝나면….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
자와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리토르나는 그의 침묵에서 법사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더러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황위 승계의식을 치르라고…, 그 하나 때문에…. 그런 말인가…?”
리토르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자와카는 한 차례 머리를 더 조아리며 그녀에게 의식을 행하러 갈 것을 재촉했다.
“신들의 목숨은 이미 폐하의 것이옵니다. 그들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사오니, 폐하께오선 부디 마음을 굳게 하소서.”
“….”
꾹 쥐어진 리토르나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곳에서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는 일이옵니다. 어서 납시오소서, 폐하.”
“…. 황위…계승을 하는 것부터…, 그대들에게 빚을 지는군….”
무겁게 입을 떼는 리토르나의 말에 자와카는 가당치 않은 분부라며 황망해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굳힌 듯 리토르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서라.”
자와카와 비사카, 그리고 나바스암바라의 호위무사 둘은 리토르나를 사방으로 둘러서며 거처를 나섰다. 약한 눈발이 날리는 매서운 날씨였으나, 리토르나의 옷자락은 미풍도 불지 않는 듯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서만 주름지었다. 객궁 외각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 하나가 그들을 보고는 검을 내밀며 막아섰다.
“황녀님을 뵙고 간다 하지 않았소? 지금 황녀께선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잠시 내 군영을 시찰하고 올 것이니라, 물러서거라.”
리토르나는 대뜸 하대를 했다. 여태까지 시녀나 시종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는 하대를 한 적이 없었다. 서슴없이 하대를 하며 물러날 것을 명령하는 그녀의 말에 병사는 주춤하더니 이내 검을 내민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소.”
“… ….”
리토르나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잠시 기다려주시오. 황녀님께서 궁을 나서는 것은 내가….”
순간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리토르나는 벼락처럼 그를 향해 호통쳤다.
“물러서지 못할까-!!!”
그것은 바람소리를 뚫고 온 객궁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막아선 병사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퍽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고, 객궁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섰다. 뭐야…? 무슨 소린가, 이게…? 황녀 목소리 아닌가…? 그러나 그들이 나왔을 때 이미 리토르나는 주저앉아 공포와 당혹감에 싸여 부들거리는 병사를 지나 객궁에 나 있는 후문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봐…!”
마침 순시를 돌던 세이부-하백과 검투를 벌였던 근위무사는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병사를 보고는 얼른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방금 그 소리가 뭐였나? 병사는 턱까지 후들거리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황…황녀…, 황녀가….”
“황녀가 뭐…? 말을 해 봐. 이놈이 왜 이러는 거야, 대체…?”
“군…군영 시찰을 나선다고…, 했습니다.”
“… ….”
세이부는 그게 뭐 큰일이기에 이 소동인가 싶어 의아스러운 눈으로 후들후들 떨고 있는 병사와 황녀가 나선 후문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일은 즉시 바루나에게 보고되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루나는 허허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늘 객궁에만 머물러 있으니 간혹 군영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한 번도 직접 나가 시찰을 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뭐….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은 아니네만…. 어쨌든 막아섰다가 곤경을 한 번 제대로 겪었겠네 그려.”
“그렇겠습니다. 아직 어리다고는 해도 대국의 황녀이니….”
바루나는 근위장에게 직접 가 살펴보고 오라 명령했다.
“감시한다는 인상을 줘선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럼….”
리토르나가 군영으로 들어가자 나바스암바라와 만샤르차크 전 부대원이 도열하여 군례를 올렸다. 1천 5백의 보병과 기마병이 동시에 군례를 올리는 모습을 본 바로 옆 군영의 바이마샤르 경계병들은 감탄하며 저희들끼리 숙덕거렸다. 박력 죽인다, 저놈들 하여튼…. 난 늘 저 말들이 궁금해. 저거 진짜 말 맞나? 잉그라드에만 있는 뭐 이상한 동물 아닐까? 한 번 가서 물어보지 그래? 어유, 어떻게 물어보냐, 살벌해서 말도 못 붙이겠다, 나는….
리토르나는 군영 한가운데에 세워진 막사로 향했다. 자와카를 비롯한 네 명의 대동 무사들은 각기 두 명씩 양쪽으로 비켜섰다. 자와카는 품에서 황제의 법력이 담긴 권책-아타 아디라자를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 ….”
두 손이 천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막사 안으로 사라질 즈음, 왕궁 첨탑에 난 창으로 근위장이 나타났다.
“… ….”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였으나, 황녀가 직접 시찰을 나왔으니 유별나게 생각할 일은 없는 듯했다. 그는 일단 더 두고 볼 요량으로 찬찬히 병력이 줄지어 선 형태를 뜯어보았다.
막사 안에는 가다르파의 법사 20명이 얀트라를 구성하고 있었다. 리토르나가 가운데로 들어가자 그들은 이내 가운데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 그들의 몸에서 갖가지 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 리토르나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옴…샤크티… …바하 …. 칼가마나가 죽어가던 황제의 앞에서 외웠던 주문을 그들이 암송하기 시작했다. 리토르나의 손에 들린 권책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고,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완전한 결계가 이루어졌다.
‘위대한 앙카라시아의 쟈나카로부터 쟈니카, 살아있는 파바나와 마티카, 치바나에게 고하나이다. 잉그라드 8백 33년, 가이옷 라마 아요디아 잉그라드로부터 리토르나 지앙 오르페이아 잉그라드가 대륙의 주인으로서 아타 아디라자를 이어받나이다.’
리토르나의 이마에 박힌 검붉은 구슬이 빛을 발하며 권책을 펼쳐내자 그 안에 있던 상형문자들이 수만 갈래의 빛줄기로 화하며 리토르나를 향해 굼실굼실 몰려들었다. 마치 땀구멍 하나하나로 스며들 듯 빛줄기들은 리토르나의 온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저 안에서 뭘 하는 거지…. 부대 지휘관은 저기 있는데…. 근위장은 막사 밖을 지키는 우탐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비사카와 함께 막사 정문을 지키고 있는 자와카는 처음 보는 듯했다. 천오백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할 수야 없었겠으나, 어쩐지 낯이 설었다.
‘무례한 자로다….’
“…!!”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귀가 아플 정도로 그 소리는 컸다. 근위장은 머릿속까지 울리는 누군가의 음성에 아찔하여 본능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첨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수습해 들이지 못해 황망해 하던 근위장은 문득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자와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었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압박감이 전신을 마치 묶어버린 듯 꼼짝을 못하게 하였다. 생김새도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에서 자와카는 분명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근위장의 귀로 방금 전의 천둥 같은 음성이 한 차례 더 파고들었다.
‘두 번의 묵인은 없을 것이다….’
온 몸을 관통하는 그 음성의 떨림이 멎자 자와카가 시선을 거둠과 동시에 그의 숨통도 트였다. 헉…! 허억…! 근위장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호흡을 골랐다.
‘대체 이게 무슨…!’
그즈음 리토르나는 아타 아디라자를 온전히 흡수하여 잉그라드의 새 황제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마에 박혀 있던 구슬 주위로 황제의 표식이 새겨졌고, 몸 전체를 둘러싼 빛이 점차 수렴되어 갔다. 주위에 있던 법사들은 리토르나의 몸속으로 빛이 완전히 수렴될 즈음,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어 스러지기 시작했다.
“… ….”
그들의 몸이 모래성처럼 스러져 완전히 사라지고, 리토르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20명의 법사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하나하나 둘러보는 심경이 착잡한 듯, 그녀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전원 직검.’
의식을 마친 리토르나가 막사 밖으로 나오자 자와카가 구령을 붙였다. 천오백의 황군이 동시에 창검을 쳐들며 새 황제에게 군례를 올렸다. 리토르나는 자와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착검.’
짧은 구령과 함께 전 병력이 다시 부동자세로 들어갔다. 자와카는 리토르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군의 수장 자와카, 황제폐하의 등극을 하례드리나이다.”
-------------------------------<각주>----------------------------
쟈나카 : 하늘의 신/ 쟈니카 : 땅의 신/ 파바나 : 대기의 신/ 마티카 : 물의 신/ 치바나 : 모든 생명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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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르나는 대체 언제쯤 본국으로 돌아갈지... 아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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