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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9 329회 0건
그 후로 아이린은 사흘 내내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 지치면 잠들고 일어나면 울고, 또 지쳐서 잠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덕에 온 집안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을 정도였다. 아로사와 나자르는 한율의 시찰을 준비하느라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던 데다 하나 집에 있는 주인댁 딸이 이 모양이니 그도 무리는 아니었다. 엄마는 달래다 달래다 지쳐 이제는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참인지 정말…!”
“….”
“휴우….”
시종장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지 아빠가 그렇게 알아듣게 말을 하고, 한율 공도 찾아와서까지 그렇게 말을 했으면 이제 저도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거 아냐.”
“…. 처음 마음을 줬는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어요.”
“사흘이야, 사흘…!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안 먹으면서 저렇게 우니…! 저러다 어디 잘못되기라도 하면 진짜….”
“…그러게요. 걱정이네요, 정말….”
“연초 좀 줘봐.”
“마님 연초 끊은 지 꽤 되셨잖아요.”
“오늘은 한 대 피워야겠어. 좀 줘 봐.”
“…예.”
시종장이 핫산의 연초함에서 꺼내어 불을 붙이는데, 시녀 하나가 문을 두드리곤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마님. 손님이라니? 시녀는 밖을 슬쩍 내다보고는 누가 왔는지 알렸다.
“스클로도프 가의 루카스 도련님이십니다.”
“뭐…?!”
엄마는 순간 반색을 하다가 이내 이걸 반겨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종장을 쳐다보았고, 시종장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꿈뻑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응접실로 시녀의 안내를 받아 온 루카스는 엄마에게서 사연을 듣고는 알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루카스 공이 우리 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건 참 고마운 일인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참 고민이 많았네요.”
“예, 이해합니다.”
그는 짐짓 착잡한 얼굴로 엄마의 말을 모두 수긍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그의 심정을 말해주는 듯 보였다. 엄마도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루카스 공…. 내 입장에서 루카스 공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네요. 난 공하고 우리 애하고 좀 잘 됐으면 싶었는데…. 애가 저렇게 완강하니 어쩔 수가 없네요….”
“…. 알겠습니다.”
잠시 어색하게 침묵이 흘렀다. 루카스는 착잡한 얼굴을 거두고 조금은 개운해진 표정을 하며 갈 뜻을 전했다.
“그럼…. 일간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아가씨께서 그러시다니,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나들이라도 한 번 갈 수 있다면 좋겠군요. 아가씨가 싫어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정도라도….”
“…. 루카스 공….”
엄마는 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이라도 받은 얼굴로, 그러나 미안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루카스는 민망한 듯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오지 마십시오, 부인.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별도 없이 결례가 많았습니다.”
“결례라니요, 무슨 그런 말을…. 어머님께도 안부 좀 전해주세요.”
“예, 그러지요. 그럼….”
루카스는 깍듯이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대로 앉아있던 엄마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 사흘간 얼마나 한숨을 많이 내쉬었는지, 아예 습관이 된 듯했다.
“참 속도 좋네….”
“능력도 좋고…, 집안도 좋고…, 잘생기고…. 아까운 청년이군요.”
“너무 잘 나서 탈이지. 아니 왜 저런 앨 두고 그래, 응? 근본도 모를 떠돌이를 좋아해, 그래~?”
“…. 저도 실은 이해가 잘 안 돼요, 마님….”
한편,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단토는 영 못마땅해 하는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루카스가 연유를 묻자 따지듯이 단토는 안식일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하하…, 부집사는 어지간히 저 집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품위도 없고 예의범절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여자입니다. 왜 도련님 같은 분께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시는지….”
“… ….”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셨습니까…?”
“… ….”
루카스는 연초를 내던지곤 그를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내가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거 같아…?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부집사에게서 루카스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저 취미라고 해 두지. 반반하긴 하잖아.”
“….”
선선하게 하는 그의 말에 부집사는 문득 섬?함으로 오금이 저려왔다. 그 자신도 사납기로는 집안 모든 시종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고, 집사마저 그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나 이 작은 주인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잔인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는 그런 사람, 그것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이 젊은이였다.

한율은 시찰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마친 뒤 배속을 받아 병사로 들어갈 요량으로. 사신단이 국경을 넘었다고 하니, 그들이 오기 전에 시찰을 마치고 그들과 함께 미키네오스로 갈 부대에 끼어들 심산이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요즘 거의 밤잠도 안 주무시는 것 같던데요.”
집사가 걱정스러운 듯 전혀 걱정하지 않는 얼굴로 물었지만 한율은 반응 없이 자료를 검토하고 시찰 보고서 작성을 계속했다. 집사는 한동안 그의 분주한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집사님과 놀아드릴 시간 없습니다. 저 바빠요.”
“보르틴 연합회의에 갈 사절단에 끼어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게까지 해서 피하셔야 합니까?”
이번엔 정말로 안타까워하는 음성이었다. 한율은 그의 목소리가 변한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하던 일만 계속했다. 집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곤 돌아서서 서재를 나섰다.
“….”
문 앞에 헨야가 있었다. 집사를 보자 찔끔하는 눈치였으나,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오늘은 안 가는 게 좋을 거라 했지만 헨야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버려 두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에 열중하고 있는 한율이 보였다. 헨야는 혀를 쏙 내밀며 소리죽여 키득 웃고는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별안간 나온 한율의 말소리에 깜짝 놀라며 멈춰섰다.
“왜 안 자고 왔어요, 늦은 시각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인 줄? 보지도 않았으면서.”
“….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 하여튼 위원님은 신기한 분이세요.”
“…. 무슨 일이십니까?”
“너무 바쁘신 것 같아서 좀 쉬었다 하시라고요.”
“오늘은 쉴 수가 없네요. 당분간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 가서 주무세요. 늦었습니다.”
생글거리던 헨야의 안색이 뾰로통해졌다. 어린애 같은 뺨이 동그랗게 부풀었고,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한율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지금 며칠째 잠도 제대로 안 주무시잖아요. 안식일인데도 이렇게 일만 하고 계시고….”
“안식일만큼 일하기 좋은 날 있습니까, 어디…. 하루 종일 시간도 보장되어 있고…. 좋잖아요.”
한율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헨야는 그에게 다가서며 애교를 부렸다. 실은 위원님 저 들어오는 거 다 보셨죠? 일에 집중 안 되시죠? 요즘 표정이 부쩍 안 좋으셔서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한율은 그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펜을 놓으며 그제야 돌아보았다.
“그게 아니라…. …!”
헨야는 그가 돌아보자 말할 틈을 주지 않으며 곧바로 입술을 갖다 댔다. 작은 손이 한율의 뺨을 감싸 안았고, 키스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힘내시라구요.”
입을 떼고 나서 생글생글 웃는 헨야를 한율은 널 누가 말리겠냐는 식으로 쳐다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녀는 제법 발랄한 모양새로 서재를 나가 문을 살며시 닫았다.
“내일 모레면 서른인 게…. 잠자리 안 했으면 깜빡 속았겠네….”
이튿날 아침 시찰을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른 한율은 집사에게 더 이상 헨야를 보내지 말라고 일렀다.
“어젯밤은 제가 들여보낸 것이 아닙니다.”
“…. 그랬습니까…?”
“예.”
“…. 그럼 뭐…. 실례했습니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 ….”
마차는 집을 떠나 의회당으로 향했다. 이 날의 시찰은 아로사와 나자르, 그리고 차프라가 총사로 근무하는 의회경비대였다. 한율은 미리 받아둔 자료들을 보고 있었다. 딱히 보고받을 것이 없어 오늘은 빨리 끝나겠구나 싶었다. 도열 구경이나 하고 돌아오자 생각하며 자료들을 정리하는데 집사가 말문을 열었다.
“미키네오스로 가실 겁니까?”
“… …. 그건 왜요?”
“….”
“말리실 생각이라면 그만 두시는 게 낫다는 거…, 아실 텐데요.”
“… 기왕에 말릴 수 없다면….”
“….”
“미키네오스로 가기보다는 차라리 유랑을 떠나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됩니다.”
“…. 이유는요…?”
“…. 그저….”
“…. 말씀해보세요.”
“…. 기왕 가신다면…. 전투가 없는 곳에 가시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원님께선 그래도 평화에 적응 못하시는 분은 아닌 듯해서요.”
“… ….”
집사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해봐야 득 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한율은 긴 말을 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도 아님을 집사는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마차가 시가지로 들어설 때까지 말이 없던 한율이 입을 열었다.
“내가 결정할 문젭니다.”
한편 아이린은 이 날도 바지를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다. 시녀들은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한 그녀를 말리며 붙들었지만, 아이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얘기를 전해들은 엄마도 더 이상은 그녀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내버려 둬…. 어차피 볼 날도 얼마 안 남은 걸 뭐….”
시락의 외곽을 돌아 들어가는 산길에서 아이린은 허기를 느꼈다. 며칠간 먹은 것이 없다보니, 말을 타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서서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참아내며 속을 다스리는데, 뒤편에서 마차 소리가 가까워 왔다. 마차의 앞에는 특수수색대대의 표식이 붙어 있었지만, 아이린은 그런 걸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자신이 의회경비대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무작정 말을 타고 집을 나선 터였다. 마차가 자신의 옆에 와 서는데도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린은 가슴을 쓸며 속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니, 아이린 아가씨 아니십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돌아본 그녀의 시야에 마차 안에서 얼굴을 내민 루카스가 들어왔다. 아이린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에 탄 채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제 댁에 찾아뵈었다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아이린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아이린은 그에게서 눈길을 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루카스는 자신의 마차에 탈 것을 권했다.
“드시지도 않으셨다더니, 어떻게 말을 타고 오셨어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제가 태워다 드리지요.”
“… …”
“사양치 마시고요. 아가씨 지금 말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루카스는 내려오라는 듯 고개짓을 하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이린은 말을 조금이라도 더 달렸다간 올라오는 신물을 뿜어내며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들릴 듯 말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아이린은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자, 어서 타시지요. 마부가 아이린의 말을 끌어다 마차에 묶었다. 루카스는 마부에게 무언가 눈짓을 하고는 아이린의 뒤를 이어 마차에 올랐고, 곧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아가씨 몸이 안 좋은 듯하니 일단은 천천히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의회…경비대요.”
“…. 그렇군요.”
루카스는 씁쓸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죄송…합니다.”
“… ….”
얼굴을 숙이며 말하는 아이린에게 루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린은 그래도 자신에게 신경 써 주는 그가 고마웠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마차는 길을 잘 골라서 가는지 더 이상 울렁거리거나 신물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한율은 의회당 입구에 나와 자신을 맞이하는 경비대 사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저런 수사를 갖다 붙이는 것으로 보아 그는 군인보다는 정치인 쪽이 어울리는 듯했다. 한율은 낯이 조금 간지러워졌다.
“하하…, 사령님께서 연설을 하시면 아주 근사할 것 같습니다. 이거 민망할 만큼 추켜 세워주시니….”
“사실은 저도 정치인입니다. 원래는 여당 원내대표님의 비서관을 했었지요.”
“아, 예~. 아니, 그런데 군대까지 지휘하십니까?”
“하하하…, 이 자리는 사실 명목상이고요. 지휘는 여기 이 총사들이 다 하죠. 저는 그저 자리만 지켜주는 겁니다. 위원님하고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거 참 뜨끔하게도 하십니다. 하하….”
그들은 서로 약점을 들쑤시면서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함께 의회당 내에 있는 경비대 사령실로 향했다. 아로사와 나자르, 차프라 세 총사들은 그 뒤를 따랐다. 차프라는 아로사와 나자르의 싸늘한 표정의 연유를 알 길이 없어 어색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꽤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 아직도 마차는 달리고 있다. 천천히 가고는 있다지만 이 정도면 시가지의 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린은 아직인가 싶어 창을 열어보고는 어…?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숲이 우거진 산길이었다.
“저…. 여기…가 어디죠? 전 의회당으로….”
“아가씨의 오늘 목적지입니다.”
“네…?”
마차가 세워지고 아이린은 문득 뒷덜미를 잡아채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몸을 도사리며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여기…어디에요? 저… 어디 와 있어요…?”
“…. 꽤 귀여운데….”
“루카스 님…?”
루카스는 발을 쭉 펴서 아이린이 앉아있는 의자 쪽에 얹었다. 마차의 문 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시킨 셈이었다. 그는 연초를 피워 물고는 여유를 부리며 아무 말 없이 몇 차례 연기를 내뿜었다. 아이린은 코와 입을 가리며 불안한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여태까지 멋대로 굴면서 온갖 수모를 다 줘놓고….”
“…네…?”
“이제 와서 그냥 넘어갈 거란 생각은 안 하겠지, 설마….”
“….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어디에요? 저 어디로 데려오신 거에요?”
루카스는 곁눈질로 그녀의 몸을 훑었다. 착 붙은 승마용 바지는 적나라하게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 선을 드러내고 있었고, 위에 걸친 모피도 몸에 감기듯 하여 다른 외투와 달리 그녀의 굴곡을 어느 정도는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쯤 되니 아이린으로서도 자신이 무슨 일을 겪게 될 지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몸을 뒤로 물렸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내려주세요…, 저 보내주세요….”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연초를 내던짐과 동시에 루카스는 아이린을 찍어 누를 듯 덮쳤다. 비명을 질렀지만, 이 산중에서 누구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어허~ 옷 찢어져, 조용히 있어. 아이린이 루카스의 완력을 이겨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씩 굶은 상태에서 그녀는 반항을 할 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성한 꼴로 집에 들어가려고 그래? 바이마샤르의 높으신 양반댁 따님이 어디서 어떤 남자한테 당해갖고 옷이 너덜너덜해져서 왔다고 해 봐. 집안 꼴 뭐가 될 지….”
“…비켜…!! 저리… 가란 말이야…!!”
루카스는 그녀의 양 다리를 누른 채 안되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검을 뽑았다. 날이 시퍼렇게 선 검날이 다가오자 아이린도 어쩔 수 없이 반항을 멈춘 채 눈앞에 온 검끝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게 정말 나한테 일어나고 있는 일일까. 그녀는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좋은 거 해줄 거야. 애써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좋은 거 하고 험한 꼴로 집에 갈 순 없는 거잖아.”
아이린의 커진 눈에서 눈물이 솟고, 그것이 귀 밑으로 흘러내렸다.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카스의 손길이 모피를 헤치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내는데도 아이린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일인 양 멍청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명품이잖아, 생각보다…. 마른 줄 알았더니….”
루카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는 아이린의 바지를 속옷과 함께 모릎까지 벗겨 내리곤 그대로 무릎을 들어올렸다. 이 자세를 여자들이 꽤 좋아하더라고? 한 번 맛보면 잊지 못할 거야, 아마….
“전 부대- 발도-!!”
도열한 경비대의 앞에서 한율은 사령과 함께 군례를 받았다. 시찰은 짧았다. 의회 경비대야 거의 경계 근무가 일상이었고, 달리 작전이라든가 부대 배치 등에 대해 보고받을 것이 없었다. 그저 준비되어 있던 자료나 잔뜩 받아서 오면 그만이었다.
“일찍 끝내셨는데, 오늘은 또 다른 곳에 시찰을 가시는지요?”
“예, 그럴 예정입니다. 일단 의회에 좀 들렀다가요.”
“아, 무슨….”
“보위부장님께 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요. 그간 시찰했던 것에 대한 결과 보고서입니다.”
“예…?! 그걸 벌써 작성하셨단 말씀이십니까?!”
“….”
한율은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령은 대단하다며 다시 한 번 그를 추켜세웠고, 한율은 애써 그의 칭찬을 받아넘기며 서둘러 의원 및 행정부 인사들의 집무실이 모여 있는 실무관으로 향했다.
“어? 한율 공…!”
복도에서 마침 비서관과 함께 마주 오던 핫산과 마주쳤다. 한율은 인사를 하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오늘은 의회경비대 시찰했었나보군요.”
“예….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보위부장 찾아오셨습니까?”
“예에. 그간 시찰했던 결과 보고서를 드리려고….”
“예에…?!”
핫산도 사령과 마찬가지로 반응했다. 아니 그걸 벌써 다 했다고요?! 하하…. 뭘 그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좀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을…. 한율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오후엔 다른 부대로 시찰을 갈 예정이라 밝혔다. 핫산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서둘러 떠나실 생각이시군요….”
비서관은 이게 무슨 소리야? 하는 얼굴로 한율과 핫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집사는 그저 한숨만 내쉬어 보일 뿐 말이 없었다.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사신단이 온다고 하니….”
“…. 그런데요?”
“이번엔 회의소집으로 오는 거라고 하던데…. 그 때 그 호위대에 저를 좀 끼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
핫산은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자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는 흠…하며 나직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는 얼굴을 보였다. 한율이 그를 말렸다.
“그렇게 보지 말아주십시오, 의원님. 괜찮습니다.”
“한율 공….”
“그럼…. 또 기회가 되면 뵙겠습니다.”
한율은 착잡한 얼굴의 핫산을 뒤로 하고 보위부장실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본 핫산의 시야에서 그의 넓은 등이 사뿐하게 발걸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린은 멍한 얼굴로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의자에 걸터앉자 아래가 시큰거렸다. 아얏…. 몸을 움찔거린 아이린은 승마 바지를 입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루카스가 자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직후 느껴졌던, 불덩이 같은 것이 지지는 것 같은 느낌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 그 곳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느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여기로…. 뭐가 들어왔었어…. 그 곳의 느낌이 묻어난 듯한 손끝을 보던 아이린은 바지와 속옷을 벗고는 가만히 다시 손을 대어봤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루가 되어 묻어났다.
“… ….”
제 몸속으로 파고들던 감각이 기억나기 시작하자 아이린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의자 위에 쪼그려 앉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울었다.

시찰이 끝나자 비로소 집에 돌아온 아로사와 나자르는 옷도 갈아입기 전부터 엄마에게 불려가야 했다. 서재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아버지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핫산이 연초를 꺼내 나자르에게 내밀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어머니랑…. 두 분 표정이 왜 그러세요?”
“그러게,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 ….”
“… ….”
부부는 말이 없었다. 나자르는 뭔가 있긴 있구나 생각하며 잠자코 연초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한 모금 빨고 건네자 아로사는 됐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연초를 제 입으로 가져가 한 번 더 연기를 품었다가 내뿜자 비로소 핫산의 입이 열렸다.
“너희들, 혹시 한율 공하고 아이린 사이에 대해 아는 거 있어?”
“…?”
“… …”
두 딸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서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모르겠다는 말만 했다. 무슨 일인데요? 아이린이 뭐라고 하던가요? 엄마는 나자르의 물음에 그녀의 연초를 빼앗아 한 모금 빨고는 한숨처럼 내쉬었다. 연초 끊은 지가 몇 년이 지난 엄마가 그러자 둘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까 아침에 한율 공 만나러 갔다가…. 돌아왔는데….”
“…. 아이린이 한율 위원을요?”
“…. 못봤는데…. 너 봤어…?”
아로사가 나자르를 툭 치며 묻자, 나자르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대 안에 있는 너희들이 못 봤을 수도 있지. 문제는 그게 아니고…. 아버지의 말을 엄마가 받았다. 애가 좀 이상해서. 아까 들어가 봤는데 넋이 한 반쯤 빠져서…. 괜히 주술사 같은 사람들한테 홀려서 넋이 반쯤 빠진 사람들 있잖니. 꼭 그 꼴이더라고…. 너희 뭐 아는 거 없어…? 나자르와 아로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사연을 듣고 보니 뭔가 한율에게 매정하다 못해 잔인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와 아이린 사이에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제가 올라가 볼게요.”
“어, 그래라….”
아로사가 먼저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나자르는 연초의 재를 털어내곤 손을 내미는 엄마에게 건네며 눈을 이리저리 굴려봤다.
“한율 공…. 그렇게 독한 사람이니? 너희들하곤 그래도 출신도 같고 해서 여기 있을 땐 친하게 지냈잖아.”
“그건…. 뭐 됐고요. 그보다…. 잘 모르겠어요. 독한 사람인지 어떤지….”
“…. 너희들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랬잖아.”
“그만 둬, 당신…. 뭐 여기 얼마나 있었다고…. 나이도 어리지 않은 사람인데, 마음만 먹으면 속내 숨기는 거야 쉽지…. 뭐 얼마나 알겠어, 그런다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 뭘?”
“한율 공 말이야. 아이린이 충격 받을 만큼 독한 소리 할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당신은 그래도 사람은 볼 줄 알 거 아냐, 얘네보단….”
핫산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아니라는 거야 모르겠다는 거야?”
“모르겠어. 그럴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닐 사람 같기도 하고…. 워낙 속을 모르겠어서….”
“아니, 당신이 속을 모르면 어떻게 해?”
“나라고 그 속에 들어가 있나, 어디…. 게다가 사연도 많은 사람 같은데….”
“아우 답답해 정말…!”
엄마가 가슴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 열어젖혀지며 시녀 하나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마님 큰일났어요!!”
“뭐야, 뭐…. 왜 그래?”
“마님, 어서 나가보세요!! 어서 3층으로…!! 의원을 불러주세요…!!”
“말을 해, 말을…!”
나자르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시녀를 지나 서재를 나서고, 시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아가씨가 목을 매셨대요…!!”
“뭐야?!!”
“뭐…, 뭐라는 거야, 얘가 지금?!!”
핫산과 엄마도 다급하게 서재를 나섰다. 엄마는 정강이를 소파에 부딪쳤지만, 아픈 줄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시녀와 함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이가 목을 맸다니, 엄마는 아이린이 낮에 그랬던 것처럼 정신이 반쯤 나간 모양이었다. 도착한 3층 복도에서 아로사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이 계집애야!! 아이린!! 아이린, 내 말 들려?!!”
아로사에게 안겨 흰자위가 드러난 채 힘없이 늘어져 있는 아이린의 가는 목에는 낮에 입었던 승마복 바지로 묶은 매듭이 걸려 있었다. 나자르는 침착하게 먼저 매듭부터 끊어낸 뒤 아로사의 품에서 아이린을 받아들어 침대에 눕히곤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한 손으론 가슴을 맛사지하며 다른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입에 숨을 불어넣기를 반복했다.
“… …!!”
그 모습을 본 핫산은 내가 지금 보는 게 대체 뭔가 하는 얼굴로 굳어버렸고, 엄마는 남편의 뒤에서 그걸 발견하곤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핫산은 이내 난감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고, 엄마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마, 마님…!! 마님…!!!”
“아니, 여보…! 부인…!”
“어머니…!”
나자르가 응급 처치를 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아로사가 이를 먼저 발견했다. 나자르도 그것을 보았지만, 지금은 아이린이 더 급했다. 맥박이 잘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호흡도 너무 가늘었고,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너가 가 봐. 난 아이린 계속 할테니까. 알겠어…! 방 안과 방문 앞에서 동시에 일이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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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많이 늦었군요. 써놓은 걸 복사해서 붙이면 그만인 것을 왜 이리 늦느냐
타박하신다면 그저 울지요..ㅡ.ㅡ;;; 좀 안좋은 일들이 있었네요. 아직 다 해결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일단락은 지어놓은 셈입니다.

아참... 황녀와 하백의 섬씽을 기대하시는 분이 계실 줄...몰랐군요.;;
음...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지만.. 일단 하백과 황녀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ㅎㅎㅎ(스포일러..;;)

어쨌든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시고 보아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고맙습니다.
월요일입니다. 즐거운 일주일(?) 되세욥~ 전 금요일에 또 업뎃을 하며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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