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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9 427회 0건
이튿날 아침 한율은 의회당에 들어섰다. 의회경비대로 배속 받은 명령서를 꺼내 보여주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적잖이 당황했다. 왜 이 사람이 일개 병사로 복무를 하나, 시찰하면서 뭘 잘못 보인 게 있었나 말들이 오갔지만, 정작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차프라 총사는 내 부관 격이니 여기 있어줘야 하겠고, 이번 사신단 호위대는 나자르 총사가 맡게 되었다. 미키네오스 사신단의 호위대도 있고 하니 병력은 5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키네오스의 왕도로 가는 길에는 론도 산맥과 가까운 지역도 없는데다, 대부분은 시가지를 지나야 하니 기강에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 해 주게. 여당 대표께서 자네들 둘 중 그래도 자네가 그 곳 복잡한 정치상황 내에서 군을 통솔하는 데 적합하다고 말씀하시더군.”
“과분한 말씀입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아로사 총사는 좀 성마른 데가 있어서….”
“아로사 총사는 용맹한 지휘관입니다. 비록 부대는 의회경비대입니다만 아로사 총사의 부대는 아마 보위부에서도 손꼽히는 강군일 겁니다.”
“…. 지난번에 봤네. 어쨌든…. 준비 잘 해.”
“예. 사령님.”
하루가 시작되기 전 사령의 호출을 받은 나자르는 용무를 마치곤 군례를 올린 뒤 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사령이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전 보위부 자문 한율 공이 자네 부대에 배속된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괜찮겠느냐는 말에 나자르는 원칙적인 대답만을 하고는 그 곳을 나섰다.
“전임이야 어쨌든, 오늘부턴 제 병사입니다.”
경계 근무에 들어간 다른 병사들을 제외하고 사신단 호위대에 선발된 50명의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나자르는 그들의 앞에 나아가 군례를 받았다. 병사로서의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아 본 일이 없는 한율의 군례는 다른 병사들에 비해 어설펐다. 덩치도 커다란 것이 그러고 있으니 단연 눈에 띄었다.
“3열 4행의 병사는 앞으로 나오라!”
한율을 부르는 말이었다. 주위의 동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3열 4행이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한율은 나…? 하는 얼굴로 다른 동료들을 마주 보았다. 나자르의 목소리가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한율은 어서 나오지 않고 뭘 하는가!!”
서슴없이 이름을 부르며 호통을 치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제까진 보위부 자문이었는데…. 야, 너무하는 거 아냐? 어제 깨졌나…? 다시 한 번 나자르의 정숙하라는 호통이 내리치자 병사들은 순식간에 부동자세로 돌아갔다. 한율은 그녀의 앞에 어색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걸음걸이는 그게 뭔가?”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지휘관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도록 되어 있나?”
“….”
“왜 대답이 없는가!!”
“잘못했습니다!”
한율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큰 소리로 답했고, 병사들은 부동자세로 있는 가운데서도 저거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눈초리로 자신들의 지휘관과 한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자가 어떻게 사신단의 호위대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모두 들어라!! 여기 모인 50명의 병력은 비록 그 수는 적으나, 바이마샤르 전 군부를 대표하는 부대인 것이다!! 오늘부터는 자신이 바이마샤르 최고의 병사라는 자부심으로, 사신단을 호위하여 돌아오는 그 날까지 그 마음을 절대 놓지 마라!!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강이 곧 바이마샤르 군 전체의 기강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알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2조장 앞으로 나온다.”
“예, 총사!!”
나자르는 병사를 불러 한율을 가리켰다. 오늘부터 자네는 저 병사를 맡는다. 기본적인 군례부터 시작해서 병사로서 지켜야 할 군율까지 자네가 모두 교육시킨다. 만일 저 병사가 내 부하로서 자격이 없다 판단되는 경우 자네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알겠는가?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내려지는 나자르의 명령에 2조장은 차마 대답을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곧바로 군례를 올리며 명령을 받든 그가 다시 위치로 돌아갈 때, 뒤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너무 기강을 세게 잡는구먼…!”
“…? 루카스 사령님…!”
루카스 사령? 특수수색대 사령님이잖아? 저 분이 여기는 웬일이래? 젊은 군부의 지휘관들 중 최고의 유망주이며 엘리트로 주목을 받는 그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한율이 깨질 때보다 더 술렁거렸다. 이번엔 나자르도 그들을 향해 호령하지 않은 채 루카스에게 군례를 올리곤 반색을 하며 다가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보위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하하…. 날더러 호위대를 같이 이끌라고 하시더구먼, 보위부장님이….”
“예…?”
루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됐다고만 말했다. 나자르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하긴 미키네오스는 정치적으로 지금 굉장히 민감한 곳이라고 하던데…. 루카스도 고개를 마주 끄덕여 왔다.
“자네가 잘 알아서 할 테니, 난 앉아서 밥이나 축내면 되는 건가?”
“무슨 말씀이세요, 사령님. 하하…! 실은 좀 큰일이라서 긴장됐습니다. 사령님께서 와 주시니 정말 든든합니다.”
“…그래.”
루카스는 싱긋 웃으며 나자르의 어깨를 한 번 토닥여 주었다. 한 말씀 하시죠. 병사들이 다 모여 있는데…. 내가 뭘 또…, 어차피 자네가 이미 한 마디 해줬을 것 아닌가. 지루하기만 하지. 루카스는 손을 내저으면서도 앞으로 나섰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전체 쉬어.”
나자르는 옆으로 섰다.
“기본적인 건 나자르 총사께서 말씀하셨을 테고, 지금부터 제군들은 제식 훈련과 이동 중 경비훈련을 할 것이다. 미키네오스의 왕도로 가는 길은 비교적 안전하나,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도착할 때면 미키네오스의 왕도에 보르틴 대륙의 모든 사신단이 모여들 것이다. 총사께서 이르신 대로, 제군들은 바이마샤르 전 군부를 대표하는 이들이다. 복장부터 걸음걸이 하나까지 모든 기강을 새롭게 하여 바이마샤르 군이 다른 어느 나라의 군대보다도 근사한 군대임을 보여주기 바란다.”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커졌다. 보위부 뿐만 아니라 군부 내에서 루카스의 신임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나자르 역시 그가 호위대에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다는 기색을 여과없이 내비치고 있었다.

순시를 마친 신임 병부대신의 새로운 인사안이 전 군부로 하달되었다.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몇 파격적인 인사가 단행되면서 미키네오스의 군부 내에서는 파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얘깃거리는 예스프리에 관한 것이었다.
왕도사령부 직할대 돌격대대의 대대장실에서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대장이 중대장급 지휘관들을 모두 모아놓고 술자리를 갖는 중이었다. 벌써 얼근히 취해 있는지, 대대장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대대장님. 드디어 연대장급으로 승진을 하시는군요.”
“연대장급이 다 뭔가, 이사람아. 병부 전체의 행정을 담당하는 곳인데, 실권으로는 왕도의 사령관급에 못지않지. 안 그렇습니까, 대대장님…?”
“게다가 군수 업무를 보신다고 하니, 이제 사령관들도 대대장님께는 잘 보이려고 애들을 쓰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렇겠지, 그렇겠지…! 굶어죽고 싶지 않으면 나한테 잘 보여야 할 거야, 아마도…, 하하하…!”
“저희들은 굶기시면 안 됩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그래도 자네들은 내 자식 같은 부하들인데 설마, 내가 자식들을 굶길까봐서…?”
‘하하하하하….’
“1중대장은 이제 어쩐답니까? 국경 지역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대대장님께 설설 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대대장은 고소하다는 듯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렇겠지~. 이제 대대장님 세상입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중대장들이 술잔을 들어 그의 승진을 거듭 기뻐해주자 대대장은 다시 한 번 호탕하게 웃어제끼며 함께 술잔을 들었다.
반면 1중대는 통제실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침중한 분위기에 묻혀 있었다. 소대장들은 통제실에 예스프리와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고, 예스프리는 앞에 명령서를 놓아둔 채 연초를 물고 있었다.
“말이 대대장 승진이지, 이건 사지로 내몰리는 것 아닙니까.”
“병부대신께서도 정말 너무하십니다.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면 병력만 많다 뿐이지 솔직히 사지나 다름없는 곳 아닙니까?”
“… ….”
소대장들이 억울하다는 투로 토로하는데도 예스프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태연해 보이기도 했다. 3소대장이 갑갑하다는 듯 그에게 말 좀 해보라며 재촉했다.
“중대장님…!”
“그만들 두게.”
“….”
“….”
“왜들 그렇게 억울해 하나? 난 오히려 좋은데, 이 인사결정….”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대장님처럼 왕도사령부에 필요한 분이 어디 있다고…!”
“지금 대대장님이 병부 행정관으로 가시게 되면 카몬 협곡으로 군수물자가 가는 일은 거의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뭐가 잘 됐다고 하시는 겁니까, 대체…!”
“국경의 독립대대들은 군수물자를 중앙에서 지원받기보다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아. 전임 병부대신께서 만드신 제도가 있지 않은가. 관할 구역에서 거둬지는 세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말일세.”
“그래도 카몬 협곡 근처에서 대체 무슨 세금이 거둬지겠습니까. 거긴 산지인데다 근처에는 작은 마을 하나조차 찾기가 힘든 곳입니다…!”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조달을 하기 위해 운영하는 국영 경작지도 있네. 가 보면 방법이 있겠지.”
무슨 말을 해도 예스프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골수까지 군인이라고 해도 그의 이런 태도에 소대장들은 갑갑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예스프리는 연초를 껐다.
“그렇게 한숨들 내쉬지 말게. 군인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야. 게다가 지금 전쟁을 결의하기 위해 연합회의가 소집된 상황일세. 카몬 협곡은 보르틴으로 향하는 요지 중의 요지야. 위험한 전방일수록 군인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병부대신께서 내게 기회를 주신 거라고 생각하네.”

새로운 인사안을 단행한 병무대신은 정무회의에 들어가기 전 전임인 라크라오스와 자신의 집무실에 마주해 있었다. 찾아온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플로랑은 그가 아들을 변방으로 내쫓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 한 잔이 다 비워질 때가 되자 비로소 라크라오스의 입이 열렸다.
“자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네.”
“…?”
“아들을 전방으로 보내줘서 말이야.”
“… ….”
진심일까. 플로랑은 라크라오스의 눈치를 살폈지만, 눈을 반쯤 감고 내려뜬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찻잔을 모두 비운 라크라오스가 플로랑의 인사안에 담긴 속뜻을 짚어냈다.
“꽤…. 세심하게 살핀 듯하더군. 돌격대대장은 나 역시 야전보다는 행정직이 더 낫다고 생각했네마는…. 그래도 병부 행정관의 군수 업무라면 그런 자에게 맡기기가 좀 위험하지 않겠나…?”
“… ….”
눈을 들어 아무 대답도 없는 플로랑을 보는 라크라오스, 이번엔 플로랑이 눈을 내리뜬 채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 라크라오스가 피식 웃었다. 하긴,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이미 현 병부대신은 자네니까….
“아드님은….”
“….”
“유능한 지휘관입니다. 비교적 안전한 왕도사령부보다는 끊임없이 교전이 벌어지는 변방에서 국경을 지키게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건 나도 아네. 하지만….”
“….”
“하지만 벌써부터 대대장직을 맡길 만한 경험은 없어. 독립대대 하나를 통째로 이끌어가기엔 아직 애송이란 말일세.”
“옷에 몸을 맞추는 일도 왕왕 있는 법입니다.”
“그 옷이 너무 크지 않은가…?”
“만일 카몬 협곡에도 중대장으로 보냈다면, 돌격대대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그대로 겪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확실한 지휘권을 보장해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 자네 말도 맞군….”
말끝을 늘어뜨리며 라크라오스는 문서를 하나 그에게 내밀었다. 읽어보라는 듯 라크라오스의 턱짓에 그것을 집어든 플로랑의 안색이 변했다.
“이게….”
“자네가 처리를 좀 해줬으면 싶네.”
“… ….”
잘못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플로랑은 다시 그것을 눈으로 훑었다. 라크라오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식적으로 처리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어. 그래서 자네 직권으로 거기에 대한 예산을 마련해주게. 부족하다 싶으면 내가 좀 보태도록 하지….”
“…. 정무대신…!”
“군사들을 다스리는 건 군율만으로 되는 일이 아닐세.”
“우리는 교권 국가입니다…! 보르틴 대륙에서도 유일하게…!”
“미키네오스의 국왕은 총장이 아닐세.”
“…!”
잠시 정적이 일었다.
“…폐하의 뜻입니까…?”
“… …. 나 역시 다르지 않네.”
눈을 감으며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플로랑에게 라크라오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회당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곤 집무실을 나섰다. 플로랑은 문서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깊이 한숨지었다.
정무회의에서 국왕이 꺼내든 안건은 대신들의 큰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외무대신이 먼저 거기에 반대를 하고 나섰다.
“폐하, 앙굴리마라는 단순한 자객집단입니다…! 그런 자들을 우리 보르틴 대륙의 성전에 참전시키고자 애쓰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만일 그들이 참전하게 된다면 교총을 필두로 한 연합군의 명분이 크게 감소될 것입니다…!”
새로운 재무대신에 거기에 거들고 나섰다. 궁정대신은 말없이 다른 대신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국왕은 다른 대신들의 표정을 둘러보고는 병부대신의 의견을 물었다.
“폐하…. 앙굴리마라의 군력을 아직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듣기로는 그들의 군사력이 대단한 것으로 압니다. 일단은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의 참전을 결정하는 일은 조금 이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모르는 말씀 마시오…! 그들은 그저 돈을 받고 사람을 해치는 자객일 뿐이오…! 재물을 위해 사람을 해치는 자들이 어떻게 이 성전에 참전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비센테 추기경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나서서 반론을 제기하자 국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국왕을 향해 읍소를 하며 거듭 반대의 뜻을 밝혔다.
“폐하…! 결코 안 되는 일입니다…! 보르틴 대륙의 전 군사들이 모이면 그 수가 수백만에 달할 것입니다…! 게다가 저희 교회에서도 군자금을 댈 것이며, 신의 군대가 승리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무력만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군사들의 사기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신의 뜻으로 한 데 뭉친 군대에 오직 재물을 위해 사람을 해치는 이들이 끼어든다면 군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것입니다…!!”
국왕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국왕의 눈길이 정무대신에게 향하자, 입을 다물고 있던 정무대신이 앞으로 나섰다.
“비센테 추기경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병부대신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먼저 그들이 신의 군대와 함께 할 수 있는 명분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보시오, 트레제게 경…!!”
“추기경께선 지금 이 전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연합회의의 과정과 결과에 따라 얼마의 군사가 모일지 모릅니다. 이것은 절대로 이겨야만 하는 전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보르틴 대륙 전체가 무너져버려 회생할 길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군사들의 사기와 명분, 그에 못지 않게 군력 증강 또한 중요합니다.”
그는 국왕을 향해 말을 이었다. 폐하, 바이마샤르에선 그간 수 차례에 걸쳐 앙굴리마라의 군사들을 용병으로 사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겨우 수백의 군사로 수천의 마도들을 상대하기도 했으며, 분쟁지역에 투입되었을 땐 마법과 같은 무력으로 상대를 언제나 제압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스마르의 왕실 근위대는 대부분 앙굴리마라의 용병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사실들은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비센테 추기경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서 다시 한 번 성전을 강조하며 명분을 내세우자, 국왕이 손을 들어 추기경의 발언을 멈추게 했다.
“그만들 하라. 누구 하나 틀린 말이 없다. 일단은 병부대신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지. 추기경의 말대로 이 전쟁은 신의 이름으로 모인 군대가 벌이는 전쟁이다. 또한 정무대신의 말대로 절대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군대도 필요하고, 강력한 명분도 필요하다. 앙굴리마라 군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무엇인지부터 찾아보고, 판단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추기경은 끝내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국왕이 그렇게 상황 정리를 해버리자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외무대신과 재무대신도 더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국왕은 정무회의를 마치자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당에서 나서던 플로랑은 근위장의 기별을 받고 바루나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들어서자 거기엔 바루나만이 앉아있었고, 항상 있던 라크라오스가 보이지 않자 그는 조금 의아해 하는 얼굴로 바루나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정무대신은 이제 이 나라의 재상이지, 내 가신이 아닐세.”
그의 속내를 읽은 듯한 바루나의 말에 속이 조금 뜨끔했다. 이어서 시녀가 가져온 술잔이 그들의 앞에 각각 놓였고, 간단한 음식이 가로놓였다. 바루나가 병을 들었다. 받지.
“폐하, 어떻게 직접…!”
“받아. 그대에게 긴히 당부할 일이 있으니…. 그 전에 주는 술 한 잔 정도는 내 손으로 따라야 하지 않겠나.”
“… 황공합니다, 폐하.”
병부대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두 손으로 그가 따르는 잔을 받아들었다. 국왕도 잔을 채우고, 둘은 함께 술잔을 비웠다.
궁정대신은 정무회의가 끝나자 마자 왕궁 후원으로 달려갔다. 공주…! 공주…! 시위장을 밀어내며 문을 열어젖힌 방 안에선 레이네가 침대에 누워 무슨 문서들을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궁정대신…? 왕녀의 방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오, 공주…!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기회가 왔어요…!”
제 말을 끊어먹고 흥분하는 궁정대신의 말에 레이네는 몸을 일으키며 대체 무슨 소리냐 물었다. 궁정대신은 병부대신 어쩌고 말을 꺼내려다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했다. 레이네는 그 모양새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병부대신을 끌어들일 기회 말입니까?”
“음….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그거라면 됐습니다.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수를 낼 테니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보고 있던 문서로 눈길을 돌리던 레이네는 그 말에 다시 궁정대신을 돌아봤다. 약간 불쾌한 빛이 서린 눈빛을 대하면서 궁정대신은 싱글싱글 웃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는 모르나, 폐하께선 병부대신에게 앙굴리마라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라 하실 겁니다.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연합군의 군력이 훨씬 증강될 테니까요.”
“알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공주께서는 직접 병부대신을 찾아가시기라도 할 요량이십니까?”
“… ….”
“병부대신이 공주님을 찾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병부대신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요…?”
“…. 그래서라니요…. 몰라서 물어보십니까…?”
“화대를…내라…?”
“이를테면 그런 거지요, 하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궁정대신을 향한 공주의 눈빛에 언뜻 살의가 지나쳤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병부대신은 유능한 자입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제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궁정대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레이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치웠다. 나다니엘의 안색을 슬쩍 살핀 레이네가 옆의 시녀에게 눈짓을 하자, 두 명의 시녀와 나다니엘을 남겨놓고 다른 시녀들이 모두 물러갔다.
“흐흐…. 오늘은 좀 특별하게 해 보고 싶은데…. 어떻겠소, 공주…?”
“어떻게요…?”

바루나는 예스프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지었다. 아무래도 플로랑이 라크라오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인가 싶었다. 조심스럽게 정무대신을 입에 올리는 플로랑의 말을 막고, 바루나는 그를 다독였다.
“라크라오스는 내 곁을 30년이나 지킨 사람이야. 내가 잘 알지.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닐세.”
“그렇지만….”
“걱정 안 해도 돼. 오히려 대대장으로까지 승진시킨 것이 무리라고 했다면, 라크라오스의 됨됨이로 보건대, 자네를 더 걱정하고 있을 거야. 무리한 인사를 단행했다고 해서 말이지.”
“….”
술이 반 정도 남아있게 되자 바루나가 비로소 그에게 할 말을 꺼냈다.
“앙굴리마라…. 어떤 집단일까…?”
“…. 폐하.”
“그대가 하지.”
“…!”
“그대가 앙굴리마라에 대해 좀 알아봐. 여태까지 돈 받고 싸워주기만 일삼은 자객 무리라고는 해도, 틀림없이 거기엔 빈틈이 있을 거다. 싸워야만 하는 명분이든 뭐든….”
“… ….”
“공주에게 가 봐.”
“…. 예…?”
바루나는 술잔을 다시 채우며 뜸을 들였다. 앙굴리마라에 대해 알아보라며 어째서 공주에게 가 보라는 말인가. 플로랑은 그가 말을 계속하길 기다리며 잠자코 있었다. 시녀가 그의 잔에 술을 채우고 나자 바루나가 말했다.
“그 아이는, 정보력만큼은 아비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뛰어난 정보원들을 데리고 있을 거다.”
“아니…, 어떻게 폐하보다 더….”
“…. 그런 아이다.”
그의 입에 문득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지…. 내가….”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플로랑은 그것을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왕족의 일이란 보통의 가족들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조차도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다, 보통의 가족들처럼 쉬이 화해가 될 만한 것도 아님을 그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긍하는 플로랑에게 바루나가 당부했다.
“아직 어려서…. 정치를 단지 권력 다툼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자네가 편을 좀 들어줘. 그 아이가 진정으로 정치가 뭘 위한 것인지 알게끔 가끔씩은 가르쳐 주기도 하고….”
“… ….”
플로랑은 직접 자신에게 당부하는 국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따를 뜻을 내보였다.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를 향해 다시 잔을 들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레이네는 온 몸이 묶인 채 갖가지 자세로 궁정대신을 향해 비경을 들이댄 꼴이 되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러야 했다. 한 나라의 왕녀가 겪을 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궁정대신은 화대로 요구했고, 레이네는 이를 악물며 그가 다루는 대로 엉덩이를 쳐들거나 다리를 접어 올리거나, 심지어 젖가슴으로 그의 번질거리는 성기를 비벼줘야 했다. 그를 지켜보는 나다니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녀들조차 눈을 감은 채 이 흉측한 일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는 얼굴로 역겨움을 삼키고 있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튿날 레이네가 들은 부왕의 말이었다. 레이네는 오래간만의 부왕의 호출에 집무실을 찾았다가 이야기를 듣고는 헛바람을 내뱉었다.
“좋습니다, 폐하…. 아주 좋네요.”
“….”
“저를 그런 식으로 써먹다 못해 이제는 아주 절 바보로 만드시는군요…?”
“공주야…!”
“제가 어제 어떤 일까지 해야 했는지 아십니까…?”
“…, 궁정대신이었느냐…?”
“그 역겹고 음탕한 늙은이가 이 나라의 왕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제가 왜 그걸 참아내야 했는지 모르지 않으실 폐하께서…!!”
“… ….”
말해 뭐하나 싶었다. 레이네는 토로를 하려다 말고 피식피식 웃으며 등을 의자에 털썩 기대었다. 바루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술 좀 가져와.”
“…! 공…공주님…!”
“죽고 싶으냐…?”
“… ….”
바루나는 근위장에게 고개짓을 했고, 근위장은 잠시 당황했던 기색을 거두며 잔을 내왔다. 자신의 앞에 잔을 내려놓는 근위장의 손을 밀어내더니 레이네는 병째로 그것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공주님…!!”
“푸우….”
꽝 소리가 나도록 술병을 내려놓은 공주는 이제 조금 진정이 된 듯한 얼굴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병부대신은 뛰어난 사람이다. 게다가 공정하고, 뜻을 세워 움직이는 사람이다. 술수로 부리기보다는 마음을 먼저 주는 편이 좋다.”
“…. 그 마음…. 제게도 좀 주시지요, 폐하.”
“… ….”
몇 번을 겪어도 이 상황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쩔쩔매는 근위장에게 원위치로 오라는 턱짓을 하고 바루나는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병째로 마셨다.
“….”
“…. 궁정대신은 내가 해결해 주마.”
“… 흥…! 참으로 자애로우십니다, 폐하….”
“그리고…, 병부대신을 좀 도와줘.”
레이네는 그가 내미는 술병을 받아 이번엔 잔을 채웠다. 아비의 잔에도 술을 따른 그녀는 잔을 비운 뒤 조건을 걸었다.
“그럼…. 제겐 뭘 주실 생각이십니까…?”
“뭘 바라느냐.”
“…. 제 시종인 나다니엘이란 아이가 있습니다.”
“….”
“…. 그 아이는 사뇰이란 이름이었지요. 원래는 헤첸슬라바 왕국의 귀족이었다고 합니다. 작위까지 갖고 있던….”
“… …. 알았다.”
“제가 원하는 건 면천 따위가 아닙니다.”
“…?”
바루나는 그때까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레이네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 아이를…, 미셀 그 음탕한 늙은이의 후임으로 앉혀 주십시오.”
“…!!”
바루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며 레이네의 입가에 득의만면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왜요, 안되겠습니까…? 한참 대답이 없던 바루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궁정대신은…왕궁 내의 모든 행정을 관할하는 이 나라의 재상이다. …아무리 그 아이가 먼 나라의 왕족이었다고 해도… 그런 자리를 면천과 동시에 줄 수는 없다.”
“…그럼 거래는 없습니다. 병부대신 따위 없어도 저는 아쉬울 것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 녀석…!”
“폐하께서 제 일을 망치신 것으로 치자면 이 정도도 그리 큰 대가는 아닐 것으로 압니다만….”
“… ….”
레이네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내의… 시종관 자리를 주마….”
“….”
시종관이면 근위장보다도 오히려 실권이 있는 자리였다. 궁정대신의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며 궁내의 모든 시녀와 시중들을 단속하고 그들 사이에 도는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쥘 수 있는 자리였으니, 귀족들이 앉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더 큰 권한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레이네는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바루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지요….”
아비를 뒤로 하고 집무실을 나선 레이네는 됐어! 하는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후원으로 돌아간 그녀는 나다니엘을 제외한 모든 시종들을 물러가게 한 후 그의 앞에 문서함을 내놓았다.
“…?”
“열어보거라.”
나다니엘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것을 제 앞으로 끌어당기고는 낡은 고리를 풀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어쩐지 눈에 좀 익은 반지와 밀부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그러다 이내 기억해내고 크게 놀라 자신을 쳐다보는 나다니엘. 레이네는 담뱃대를 입에서 떼며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네 가문의 13대에 걸친 족보와 귀족 증명서, 그리고 가주임을 증명하는 반지와 밀부다.”
“…공주님…!!”
“부왕은 널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했지만, 난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구나. 네가 귀족이고 먼 나라이긴 해도 왕족 출신인 걸 증명할 수 있다면 이 나라의 재상인들 못 될까.”
“… ….”
나다니엘은 반지와 밀부를 들어 살피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감격에 떨고 있겠지. 레이네는 그렇게 짐작하며 희미하게 웃음기를 띠었다. 네 형제들은 이미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저버리고 포목점을 하고 있다더구나. 죽은 네 아비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을 테고…. 밀부와 반지를 든 나다니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반지를 손에 끼고 밀부를 취하거라. 너라도 한 나라의 문장관까지 지냈던 아비의 뒤를 이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나다니엘의 행동은 의외였다. 그는 별안간 품에서 단도를 꺼내어 반지를 내리쳐 보석 장식을 깨뜨려 버렸다. 레이네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더니 이내 밀부마저 바닥에 내리쳤다. 섬세하게 박혀있던 보석 장식들이 몇 차례에 걸친 충격에 우수수 떨어지고 무늬는 망가져 버렸다. 퍽 퍽 퍽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밀부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레이네는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밀쳐내고는 밀부와 반지를 빼앗았다.
“이게 뭐 하는 거야, 지금…?! 네 가문의 표식이란 말이다…!”
“….”
나다니엘은 급기야 문서함에 들어있던 귀족 증명서를 꺼내 레이네가 말릴 틈도 없이 그것을 찢어 입안에 구겨 넣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레이네는 그에게 달려들어 입을 벌리려 안간힘을 써봤지만, 나다니엘은 완강하게 버티며 끝내 입에 넣은 증명서 조각을 삼켜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레이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다니엘은 조금 뒤로 물러나 앉아 그녀를 향해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가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 ….”
“이미 저의 아비는 죽었고, 제 형제들은 귀족이 아닙니다. 저는 헤첸슬라바 왕국의 귀족이었으나,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다만 미키네오스의 노예이며 공주님의 시종입니다.”
“…이 놈….”
“이름을 되찾아 주신 은혜만으로도 과분합니다. 저는 귀족이며 면천이며 그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공주님의 곁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 ….”
레이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이마에 핏줄이 불거진 그녀는 부르르 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다니엘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침대에 앉은 레이네의 눈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가 나다니엘에게 날아갔다. 그의 등에 맞은 담뱃대가 뒤로 넘어가 장식장 유리에 맞으며 쨍 하는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 건방진 놈….”
“… ….”
움직이지 않는 나다니엘을 지켜보던 레이네는 벌렁 누워버리며 그를 향해 등을 돌렸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다니엘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부서진 밀부와 어지럽게 흩어진 보석을 정리하여 문서함에 담기 시작했다. 보석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네는 그가 담뱃대를 제자리에 놓고, 문서함을 들고 나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레이네는 눈을 깜빡여 고여 있는 눈물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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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열흘 씩이나 지나버렸네요.
날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공감하시는 분들 많을 것 같은데..(ㅋ)
30대 중반이 되어가다보니.. 시간이 정말 쏜살같군요.
게다가 집에서 주로 일을 하다보니, 마치 진공상태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그래도 하루하루 열심히 지내도록 애써야겠져.

연재 올리는 날을 알람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비가 오고 나서 기온이 뚝 떨어져 버렸군요. 건강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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