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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30 292회 0건
침대에서 내려와 가기 전에 사뇰의 머리를 툭 걷어찼다. 쯧쯔…, 속도 없는 놈…. 그러니 이 꼴을 당하지. 그리곤 자신을 향해 싸늘한 살기가 담긴 시선을 쏘아보내는 레이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서 베개를 머리에 댄 채 엉덩이를 위로 쳐들고 있는 모양새가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손발이 묶여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서 가라, 어서…. 그게 네놈의 마지막 자유가 될 것이다. 레이네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꼴 좋다, 창부년…. 내일부터 넌 지옥보다 더한 모욕을 감수하게 될 거야. 내가 당한 모욕의 천 배, 만 배는 겪게 해 주지. 기대해라…! 그 말을 남기고 에반더가 훌쩍 사라지자 레이네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사뇰이 문제였다. 등으로 향해 묶여진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은데다 발까지 묶여 제대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지만, 그녀는 이불을 쥐고 침대 아래로 힘껏 몸을 굴렸다.
‘사뇰…! 사뇰…!’
그녀는 되는대로 주저앉아 발로 이불을 밀어 그의 피를 닦아내곤 무릎으로 기어가 엎드려 생사를 확인했다. 다행히 살아있다. 레이네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침착하게 다시 몸을 일으켜 발을 사뇰의 옆구리에 꽂혀 있는 칼을 향해 내뻗었다. 기댈 곳 없이 그렇게 하려니 엉덩이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칼을 잡았다 싶을 무렵 테라스 쪽에서 인기척이 났지만, 그녀는 끝까지 발을 모으고 힘을 주며 칼을 뽑아냈다. 피가 갑자기 솟더니 다시 그의 옷을 적셨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녀는 입으로 그 곳을 틀어막았다. 아까처럼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를 쳐든 꼴이 되었지만 레이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발에 묶인 밧줄을 끊겠습니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돌아본 레이네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곧 손발이 자유로워지자 그녀는 입에 감긴 천조각을 풀어내며 오열하듯 소리쳤다.
“사뇰…!! 사뇰…!! 정신 좀 차려봐…!!”
눈물이 솟구쳤고, 눈물로 얼굴에 묻은 피가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피가 묻든 어떻든 계관치 않고 피가 솟는 부분을 누르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녀를 풀어준 정보원은 품을 뒤져 지혈제를 꺼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의원을 불러, 빨리 왕실 전의를…!!”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따위 것 난 몰라!! 빨리 전의를 불러와…!!”
발악하듯 소리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선 정보원은 고개를 돌려 에반더를 잡아온 수하에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옷을 찢은 후 지혈제를 뿌리고, 다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전의 부르라니까…!!! 너 뭐야….”
“제가 치료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피를 좀 많이 흘렸군요.”
“그래서, 그래서 위험해…?!”
“아닙니다. 걱정마십시오. 통증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 ….”
레이네는 안심이 되었지만, 대체 이놈은 뭘 하는 놈인가 싶었다. 그는 의자를 밀어내고는 사뇰을 안아들고 일어섰다. 동시에 레이네도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허락을 구하듯 쳐다보는 그에게 어서 눕히라며 침대보를 펴주었다.
“독주가 있습니까?”
“으응…!!”
레이네는 자신이 알몸인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그대로 방 한쪽 장식장으로 가 가장 독한 술을 한 병 가져왔다. 가져오며 마개를 따려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정보원은 그것을 빼앗듯 가져가선 손날로 깨끗하게 주둥이를 날려버렸다.
“…!!”
그가 하는 일들에 놀랄 틈은 없었지만, 이번엔 레이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리병을 맨손으로 깨끗하게 잘라낸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녀가 놀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런 눈길이 익숙한지, 그는 아랑곳않고 상처에 독주를 부은 뒤 병을 내려놓고 품에서 실을 꺼내어 곧바로 꿰매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분명히 꺼낸 것은 실이었는데, 그가 상처 부위의 옆을 찌르자 실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레이네는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하는 기분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
솜씨를 보니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레이네는 고개를 돌려 두건이 씌워진 채 아무 저항도 못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고 있는 에반더를 보았다. 레이네는 조용히 살기를 띄우며 그를 주시하다가 다시 사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치료를 마친 정보원이 몸을 일으키며 군사 정보라도 보고하듯 말했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당분간은 안정이 필요합니다. 내일쯤이면 깨어날 겁니다.”
“그래. 수고했어. 고마워.”
“그보다 공주님의 상처도 살펴야 합니다.”
“….”
그제야 그녀는 찢어져 피가 흐르는 오른쪽 젖꼭지를 의식했다. 게다가 뺨을 얼마나 맞았는지, 터진 입안이 너덜너덜한 것을 느꼈다. 레이네는 말없이 의자를 일으켜 거기 앉으며 오른쪽 젖가슴을 그에게 내밀었다.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일단 그의 솜씨를 믿어보기로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정보원치곤 꽤 예의가 깍듯하다. 그렇게 느꼈다. 항상 말없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고 필요 이상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레이네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그 모양새로 미루어 그녀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저도 모르게 갖고 있었다.
“이가 좀 많이 파고들었던 모양입니다. 혈관이 파열되었군요.”
그녀의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들어올려 살핀 그는 이내 지혈제를 뿌리고 다시 독주를 부었다. 화끈거리며 통증이 밀려오자 몸을 움츠리며 레이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큰 상처는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로벤.”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어디선가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다른 정보원이 품에서 붕대를 꺼내들었다. 한 번만 더 실례를 하겠다며 그는 붕대로 레이네의 젖꼭지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슴에 붕대를 둘러주었다.
“이런 걸 할 줄 아는지는 몰랐군.”
“….”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
레이네는 흔들림없는 그의 눈을 보다가 이름을 물었다. 우선, 이름이 뭐지? 비토입니다. … …. 그녀는 침대에 앉아 사뇰의 상처 부위에 꿰매진 치료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왜…, 전의를 부르지 않았지? 아니 그보다….”
“… ….”
“왜 날 도왔지…?”
“…. 중요한 일입니까…?”
“중요해…!”
그녀는 몸을 발딱 일으켰다. 한 발 한 발 그에게 다가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비토에게 얼굴을 바싹 갖다댔다.
“넌 내 정보원이지, 내 정치적 방패막이가 아니야. 그런데 왜 날 도왔지…?”
“….”
“말해…!”
“…, 왜 물어보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 앞으로 널 믿고 내 수하로 써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그걸 가늠해봐야 하니까. 넌 내가 산 게 아니라 내가 죽인 재무대신이 산 거니까…!”
“누가 샀건….”
“….”
“현재의 제 주인은 공주님입니다. 그리고 저 자는, 공주님의 진심을 알아주는 유일한 자입니다.”
그 말을 하는 비토의 눈빛은 정보원답지 않은 기색을 담고 있었다. 마치 동정이라도 하듯한 그 눈의 표정에 레이네는 묘하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곤 이내 피식 하고 웃었다. 네놈의 동정 따위는 필요없어…! 독이 올랐다기보단 약이 오른 목소리였다. 레이네는 그를 뒤로 하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에반더의 앞에 가 섰다. 에반더가 몸을 떠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 벗겨.”
입을 틀어막은 천조각이 있었으나 에반더는 두려움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로 잔인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게 누군지….”
그녀는 쭈그려 앉으며 그의 턱을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어찌나 떨고 있는지, 그의 뼈마디가 다 어긋날 것만 같았다.
“분명하게 가르쳐 주겠어…!”
“으으…!! 으으으으…!!!”
“어떻게 네놈을 잡았는지 궁금하지…?”
“흐으으으…!!”
“조용히 해.”
“흐윽…!!”
“…. 네가 목욕 전에 하는 행동을 보고 알았지. 언젠가 무슨 짓을 꾸밀 거라고…. 그 때부터 정보원들에게 후원 외각에 대기하라고 했어. 무슨 짓을 하고 나서도 증거까지 없애고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넌… 별로 똑똑하지가 않거든.”
그녀는 팽개치듯 그의 턱에서 손을 떼고는 몸을 일으켜 다시 침대로 향했다. 그래도 뼛속까지 노예인 놈이 이 나라에서 가장 높으신 왕녀의 몸을 한 번 범해봤으니…, 연초를 꺼내들어 불을 붙이고 한모금 빨아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넌 행복한 거야. 안 그래…? 그 용기만큼은 칭찬해 주지. … …, 후우…, 그래도 그 행복의 대가는 치러야겠지.
“저 놈을 후원 창고에 일단 가둬놔. 나중에 지시를 하지.”
“….”
“으으으으…!! 흐으으으…!!”
다시 두건을 뒤집어 씌우고는 그를 둘러멘 정보원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레이네는 여전히 알몸인 채로 비토에게 다가갔다.
“어쨌든 수고했어. 정보조인 자네한테 시키긴 미안한 일이지만…. 날 도와준 김에 한 번만 더 도와주겠어…?”
“말씀하십시오.”
“좀 씻어야겠어. 목욕을 하고 싶은데….”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말투는 오만했지만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비토는 돌아서서 여느 때와 달리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가 나간 뒤 레이네는 연초를 집어던지곤 침대에 앉아 사뇰의 상처를 살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뇰….”
숨소리가 차분한 것이 안정이 된 모양이었다. 눈물이 곧 방울져 사뇰의 잠든 가슴섶에 뚝뚝 떨어졌다. 레이네는 울음을 삼키며 몸을 숙여 잠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왕도사령부 직할대대의 훈련장.
점심 시간이 되자 군사들은 너나없이 둘러앉아 배급을 받은 빵과 고기가 어설프게 들어간 수프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예스프리는 지통실 안에서 창밖으로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쉬어졌다.
“중대장님, 3소대장입니다.”
“들어오게.”
그가 들어와 군례를 올리고 다가설 때까지도 예스프리는 팔짱을 낀 채 계속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 ….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하아…. 다시 근심어린 한숨을 내쉬며 예스프리는 지휘관석으로 몸을 돌렸다.
“날씨가 추워지는데…, 병사들은 여전히 저 추운 데서 부실한 끼니를 먹어야 하다니….”
“중대장님….”
“우리 중대야 내가 내 재산 털어 먹일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군부 전체가 바뀌겠는가.”
“… ….”
“따뜻한 곳에서 세 끼 식사 해결할 장소 하나 없이, 그저 부대끼며 잠이나 잘 막사 하나로 만족해야 하다니…. 그렇게 해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그건 비단 미키네오스 군만의 얘기가 아닐 겁니다.”
“남의 얘길 하자는 것이 아니다, 소대장.”
“…예.”
“그래, 무슨 일인가?”
“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소대장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여태까지 수도 없이 건의가 들어왔던 일인가보다. 예스프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짐작한 것을 물었다. 또 훈련 이야긴가? …, 예 그렇습니다. … …. 한숨을 푹 내쉬는 예스프리를 보며 소대장도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군사들이 부당한 건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게.”
“중대장님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저를 비롯한 소대장들은 중대장님께서 트레제게 후작님의 장자라는 사실을 이미 잊어버렸습니다. 중대장님께선 충분히 능력이 있는 분이란 것을 소대장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단 말입니다.”
“….”
“하지만 병사들은 다릅니다. 우리처럼 작위를 받은 기사로서의 의무감이나 명예를 지키려는 그런 걸 기대해선 안됩니다, 중대장님…!”
“… ….”
예스프리는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소대장은 나온 김에 다 말하자는 심정으로 토로하듯 이어갔다. 사실 중대장님의 훈련은 고된 데가 분명히 있습니다. 체력훈련이라곤 하지만…, 아까 중대장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문제들도 많습니다. 뭘 먹어야 힘이 나서 훈련을 할 것 아닙니까. 겨우 빵조각에 고기수프 흉내나 낸 것들로 끼니를 채웁니다. 어떻게 힘이 나서 체력 훈련을 하겠습니까? 그의 토로는 구구절절 예스프리의 폐부를 찌르듯 날카롭게 와 닿았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예스프리는 연초를 꺼내 물고는 그에게도 권했다.
“앉아봐.”
“….”
“앉아보라고….”
“훈련 시간을 조금 단축하든지, 강도를 낮추든지…, 무슨 방법을….”
“내가….”
예스프리의 입이 열리자 소대장은 말을 멈추고는 일단 연초에 불을 붙였다. 위아래로 시선이 오가던 예스프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잣말하듯 그래, 하긴…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하고 수긍했다.
“….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야.”
“….”
“하지만…, 자네는 군인의 긍지가 뭐라고 생각하나?”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적장의 목을 베어 승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 그건 기사의 긍지지, 군인의 긍지가 아니네. 특히나 지휘관에겐 더더욱 아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는… 자신의 명예만을 생각하면 되네. 그건 오피퀴움과 같은 행사를 보면 분명해지지. 단지 칼을 잘 휘두른다고 해서, 적장의 목을 베었다고 해서 명예를 지킬 수만 있다면 군사를 훈련시키는 것보다 기사 양성소에서 끝없이 대련을 하는 게 더 나을 걸세.”
“… ….”
“하지만 군인은, 지휘관은…. 그의 긍지는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부하들로부터 나오는 거다, 소대장. 부하들이 있어야 지휘관도 있다.”
“… ….”
“지휘관은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은 적을 죽였느냐보다는 얼마나 적은 부하를 잃었느냐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내 아버지이신 트레제게 후작께서 가르쳐 주셨네.”
“… ….”
“다들 그러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군인의 진정한 명예다, 기사의 명예다 떠들어대지만….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함부로 죽음을 미화하고, 함부로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군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자세라고 배웠네. 나는 그 말씀이 옳다고 믿어.”
“….”
“물론 죽어야만 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네. 부하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어.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돌아올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는 어떤 경우라도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내가 이렇듯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소대장.”
“… ….”
“중대장님!! 중대장님!!”
그 때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과격하게 문을 열며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병사가 있었다. 왜 이 소란인가? 중대장님, 큰일났습니다!! 예스프리는 사정을 듣고 즉시 뛰어나갔다. 대대장이 순시를 하던 중 예스프리의 병사 하나를 불경죄로 즉참하려다 그 소대장이 말리자, 소대장마저 죽이겠다며 칼을 뽑아들었다는 것이었다.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뛰어가 말리고 봐야 했다.
“대대장님, 한 번 용서를 해 주십시오…!”
“이 놈들이 정말…!!”
“대대장님…!!!”
다시 칼을 쳐들던 대대장은 저쪽에서 뛰어오는 예스프리를 발견하고는 칼을 멈추었다. 아주 골고루 걸려드는구만, 이놈들…. 전력으로 뛰어온 지라 숨이 찬 가운데서도 칼같이 군례를 올린 예스프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대로 따귀부터 한 대 맞았다.
“부하 단속을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왔으니 말 좀 해보게. 감히 일개 병사 따위가 대대장에게 불경을 행했다면, 그래서 대대장의 직권으로 즉참을 하겠다는데 말리는 소대장은 대체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군율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 군율. 군율 좋지…! 자네는 군율을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니 자네가 말해보게. 군율에 따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즉참을 할 수 있는 죄를 지었다면 즉참을 해야 하며, 그것을 말리는 부하는 지휘관의 직권으로 즉시 파직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곤장 30대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자네가 지휘관이니까 자네가 하게…!”
“알겠습니다.”
“주…중대장님…!!”
따라나선 3소대장이 놀라 예스프리를 쳐다보았지만, 예스프리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대대장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호오…, 이놈 봐라. 웬일로 고분고분하군…. 예스프리의 검끝이 흔들림없이 엎드려 있는 병사의 목에 닿았다. 진땀을 흘리던 병사의 몸이 얼어붙은 듯 경직되었다. 그의 지휘관인 1소대장이 말리려 했으나, 그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예스프리의 서릿발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1소대장은 물러서라.”
“…주…, 중대장님….”
병사는 아무 말없이 눈을 꽉 감았다. 예스프리가 어떤 사람인지,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4백 명이 넘는 군사들 중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군인인 사람이었다. 칼을 쉽게 뽑지도 않지만 일단 칼을 뽑으면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그런 사람, 그가 예스프리였다. 휘하의 누구도 나서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어서 검이 내리쳐지기만을 기다리며 이를 악다문 병사의 귀로 예스프리의 말소리가 꽂혔다.
“말하라. 대대장님께 무슨 불경을 저질렀는가.”
“…!!”
“…!!”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뜻밖의 질문에 예스프리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병사는 눈을 번쩍 뜨고는 슬그머니 대대장을 쳐다봤다.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하지 않았나!!”
“어서 말해봐. 대체 무슨 불경죄를 저질렀기에 즉참을 당한단 말이냐.”
“이놈이…!!”
대대장이 한 걸음 다가서며 예스프리를 위협했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시선만을 대대장에게 돌렸다. 화살이 꽂히듯한 그의 시선에 대대장과 그 옆의 부관이 움찔했다.
“즉참을 해야 한다면 저는 망설임없이 이 자의 목을 벨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전시도 아닌 이 때에 즉참을 당할 만큼 이 병사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건방진 놈…!!”
다시 한 번 철썩 하는 소리가 나며 예스프리의 뺨에 대대장의 손바닥이 작렬했다. 그러나 예스프리는 버티고 서서 그에게 보내는 시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엔 주먹으로 그의 뺨을 때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상관이 명령하면 따라야 한다, 모르나?!!”
“군인이라고 해서 모든 명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뭐야…?!”
“항명을 할 뜻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대대장님께서 사소한 일로 대대장님의 권위의식에 손상을 입혔다는 이유로 이 병사를 즉참하려 하신다면…, 저는 이 일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놈이…!! 네 아버지의 권위라도 빌리겠다는 거냐…?!!”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이놈…. 감히 대대장을 모욕하다니…. 부관!!”
“예, 대대장님.”
“이놈들을 당장 잡아가라고 해!! 항명을 하고 상관을 모욕한 놈들이다, 어서 본대에 전해!!”
“잡아가실 수 없습니다.”
대대장은 아까부터 이미 예스프리의 기백에 짓눌려 있었다. 피가 흐르는 입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여전히 병사의 목에 검을 겨눈 그대로 예스프리는 대대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내 명령이다!!”
“내 부하입니다!!!!”
사나운 기세로 예스프리는 포효하듯 소리쳤다. 대대장은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예스프리는 그를 향해 살기를 쏟아내며 호통쳤다.
“아무리 잘못한 부하라도 해당 지휘관에게 통보하고 형량은 권고사항으로 지시하는 것이 군율입니다, 헌데!!! 대대장님께서는 지금 제 지휘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 관할 중대의 훈련장에서 군율을 어기라고 제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 이…!!”
“저는 이 병사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 전엔…!! 이 병사에게 저 이외의 어느 누구도 손끝 하나 댈 수 없습니다!!!”
“이… 이놈이…!!”
대대장의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예스프리는 그에게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검을 거두고 군례를 올린 뒤 돌아섰다.
“소대장은 그 병사를 데리고 따르라.”
“예, 중대장님…!!”
그의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대대장은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성큼성큼 통제실로 향하는 예스프리를 따르는 병사와 1소대장, 그리고 3소대장은 감히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집무실에 돌아온 대대장은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고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도무지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아비가 병부대신이며 국왕의 측근이니, 그가 아무리 아비의 권위를 빌리지 않는다 해도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던 그는 책상을 부술 듯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예스프리…이…놈…!!”

왕도 대교구의 사원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융베리는 몹시 침중한 안색이었다. 함께 길을 잡은 수행사제는 연유를 물었고, 융베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꺼렸다.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
“원로님….”
“…. 국왕 폐하의 전쟁의지를 막을 방법이 없네….”
“…. 전쟁을 막겠다니요, 전쟁을 일으키겠다 하십니까? 누구와요?”
“…. 론도 정벌을 생각하고 계신 듯하네. 레몽 도메네크 경이 마도들에게 변고를 당했고, 또 사절단의 절반 이상이 당했으니….”
“그럼 당연히 응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한숨을 깊게 내쉰 융베리는 고개를 다시 가로저었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나 역시 그들의 죽음이 애통하네. 바로 옆에서 보았는데 어떻게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죽음을 기리고자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세. 론도 산맥은 저 너머 대륙의 잉그라드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는 곳이야. 외교적으로 민감한데다…. 잠시 말끝을 흐리자 사제는 재촉하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녀께서 이 곳에 계시는 마당에 잉그라드를 향해 진군을 해 보게. 목표가 마도의 무리들이라고 해도 버젓이 잉그라드령 안쪽에 있는 마도들도 반이 넘네. 그들을 모두 소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무엇보다 잉그라드에서 국경쪽으로 군사를 움직일 수도 있어.”
“그럼…. 잉그라드와의 전면전이 되는 건가요…?”
“그럴 리야 있겠는가마는….”
“잉그라드가 그렇게 셉니까…?”
황녀 전하와 이야기를 했단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대답을 하기에 앞서 그렇게 산을 짚어본 뒤 그럴싸하게 말을 꾸몄다.
“…. 자넨 모르는 모양이군…. 바이마샤르는 잉그라드와 무역을 자주 하는 나라야. 이 곳에 오기 전에 거기서 잉그라드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냈네. 왕궁 후미진 곳에 군막을 세우고 주둔해 있는 잉그라드군 말일세. 봤나…?”
“예. 대단하긴 한데…, 그들은 황실 친위대잖습니까. 아무리 잉그라드라도 황실 친위대야 뭐….”
“삼백만일세.”
“…삼백만…, 예에…?!!”
화들짝 놀라는 사제를 향해 융베리는 다시 한 번 그 숫자를 힘주어 말했다. 황실의 친위대만 삼백만일세. 저들은 삼백만 황군을 보유하고 있어. 그들의 무훈은 자네도 들어 알겠지. … ….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닐세. 수천의 마도들이 새카맣게 몰려드는 걸, 반나절, 아니 그 반도 걸리지 않아 전멸을 시켰네. 그것도 단 한 명의 전사자 없이. 사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로 그의 말에 반응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황도의 방위군과 280여개 제후국들의 군대까지 다 합치면 그 수가 도합 7천만이라고 하네. 미키네오스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지. 마음만 먹으면 보르틴 대륙 전역을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군사력이란 말일세.”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융베리 원로!!”
총장 레오와 추기경 비센테, 그리고 대주교 윌토르를 위시한 왕도 대교구의 주교급 이상이 모여앉은 자리에서 잉그라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윌토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의를 제기했다.
“7천만이라니…!! 그게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알고나 하는 말씀이십니까?!”
믿을 수 없다는 반응,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융베리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끝까지 듣게, 대주교. 총장이 손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는 윌토르, 융베리가 정보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바이마샤르 이야기를 꺼내자 이번엔 비센테가 가로막고 나섰다.
“융베리 원로 예하. 예하께선 아슈람에서 너무 오래 계신 듯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추기경…?”
“바이마샤르는 예전과 같은 미키네오스의 우방이 아닙니다. 원로 예하께서 미키네오스로 올 것임을 뻔히 알고 있는데, 저들이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줄 것 같습니까…?”
“이보게, 추기경…!”
“7천만입니다, 7천만…. 여태까지 이 사람은 그런 군대를 가진 나라가 있다는 소릴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이 드넓은 보르틴 대륙의 최강대국인 미키네오스조차 전성기때의 군사 규모가 80만이었습니다. 교총 산하의 성 기사단들을 다 합쳐야 겨우 백만을 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에서 7천만의 군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잉그라드의 황녀가 직접 말했다고 하면 자신을 내통 혐의로 몰 것이었으며, 그것은 정보에 신빙성이 없다는 걸 스스로 밝히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함에 한없이 침전하는 융베리였다.
“그보다…. 일단 원로의 이야기를 더 들어봅시다. 원로회의도 아직 열리지 않았으니 여기서 논박을 할 일은 아니오. 다들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말고 들으시오.”
“…, 고맙습니다, 총장.”
“….”
“…, 군사가 7천만이건 7백만이건…. 잉그라드가 미키네오스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국이란 건 모두 아시리라 믿소.”
“흥…! 가 보지도 않은 나라를 어떻게 아오?”
“대주교…!”
“… ….”
윌토르에게 주의를 주는 레오 총장에게 눈인사를 한 융베리의 말이 이어졌다. 아다시피 지금 잉그라드의 황녀가 왕궁에 와 있소. 군사 1천 5백과 말입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잉그라드령과 인접해 있는 론도 산맥으로 진군을 해보시오. 그건 황녀를 인질삼아 잉그라드 국경을 위협하는 행위로밖에는 비쳐지지 않을 것이외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융베리 원로.”
“예.”
“그렇다 해도 우리가 국경까지만 안 가면 되는 일이 아니오? 론도 산맥은 길기도 하거니와, 그 깊이가 미키네오스 영토를 종단하는 것보다도 깊소. 잉그라드의 국경까지는 한참이란 말이지요.”
총장의 의문에 비센테와 윌토르를 비롯한 다른 주교들의 눈빛이 그렇지, 그렇지…하며 적극적인 동의를 표시해왔다. 그건 총장께서 현 미키네오스의 국왕 폐하와 또한 잉그라드라는 나라를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루나 국왕 폐하는 야심이 많은 분입니다. 미키네오스를 강대국으로 올려놓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분이지요. 막말로 광물이며 온갖 자원이 지천에 널려 있는 저 보고를 조금만 집어삼키고 만족해할 것 같소? 게다가 잉그라드는 어떨 것 같습니까? 만일 국왕 폐하가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자 사신을 보낸다면 가장 좋은 것은 황녀의 친서겠지요. 황녀가 직접 갈 리는 절대 없습니다. 사신을 통해 황녀의 친서를 전달한다고 해보십시오. 아무리 외교적 수사를 갖다붙인다 해도 그것은 잉그라드 차기 황제를 인질로 잡아놓고 너희들 앞마당을 좀 어질러놓겠다는 말밖에 안 된단 말입니다.
“이보시오, 융베리 원로…!!!”
비센테 추기경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총장이 그를 막았으나 그는 오히려 총장에게 말리지 말라며 똑바로 융베리를 주시했다.
“국왕 폐하를 모욕하시는 게요, 지금?!! 어디서 그 따위 막말을 늘어놓는 거요!! 그대가 아무리 전임 총장이었다 해도 지금 교총은 국왕 폐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 위상을 보장받아왔소!!! 도의적으로도 지금 그 말씀은 할 수 없는 말씀이외다!!!”
“비센테 추기경이야말로 현실을 똑바로 보라!! 바루나 국왕이 교총의 권위를 살리는 것과 미키네오스의 융성을 꾀하는 것 중 무얼 택할 것 같은가?!! 지금까지는 사분오열된 국론을 결집시키기 위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느라 교총이 필요했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종교적 숙청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던 다른 나라들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이교도의 극형금지령을 내린 걸 보고도 아직 그 타령인가!!!”
“그 국론의 분열이 대체 누구 탓이란 말이오!! 책이나 붙들고 앉아 학문입네 문화입네 하고 줄줄이 글줄이나 주워섬기다 전쟁이 터지니 가장 먼저 교총 본단을 버리고 도망친 게 누구냔 말이오!!!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비록 미키네오스의 국론과 교총의 권위상실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융베리는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누구도 선뜻 비센테를 향해 동의의 뜻을 보내는 이가 없었다. 사실이라고는 하나, 그의 말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이었다.
“비센테 추기경. 앉게. 좀 심했던 듯하네.”
“으흠…!!”
추기경이 눈을 흘기며 신경질적으로 앉자 총장은 융베리에게도 앉을 것을 권했다. 두 분 다 너무 흥분들 하신 것 같소. 이 이야기는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 ….”
침통한 표정의 융베리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떨군 채 총장의 말을 계속 듣고만 있는 그의 마음이 전례없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어차피 교총의 입장을 정하는 것은 각 교구의 추기경들과 나를 비롯한 원로들이 내년에 모여서 할 일이오. 그러니 이쯤합시다. 그보다 이번 앙느쿠테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지. 내일이 아닌가?”
“예, 총장 예하. 내일밤 자정에 시작하여 해가 뜨는 시각까지 할 것입니다.”
“허허…, 이거 다 늙어서 밤샘 한 번 하고 나면 허리가 휘지는데….”
“낮잠이라도 주무셔야겠습니다.”
하하하하… 회의장에 웃음이 돌기 시작했으나, 융베리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시각, 객궁에 있던 리타는 지금쯤 회의를 하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비사카 대장.”
“예, 전하.”
“나는…, 융베리 구루에게 죽음을 명령했습니다.”
“… 무슨 말씀이시온지….”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구루에게 권고했던 건 명령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 …. 전하께오선 만국의 지존이시옵니다. 어느 누구에게 무슨 명령인들 못 내리시겠나이까.”
“허나…. 바루나는 전쟁 의지를 꺾지 않을 것입니다….”
“…, 전하….”
“내가 만국의 지존이 될 거라고 했나요…?”
“이미 황녀전하께오선 지존이시옵니다.”
“그럼 그대는 폐하께 불경한 신하입니다.”
“… ….”
“하하하, 긴장하지 말아요.”
“… ….”
한편 융베리는 사제관에서 배정받은 방에 앉아 고심중이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교총이 바루나와 결탁했다면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전쟁을 막을 길은 없었다. 그래도 막아야 한다. 보르틴 대륙이 전멸을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고심하던 융베리는 문득 리타의 말이 떠올랐다.
‘그대를 해치는 것은 그가 아닙니다.’
“… …!”
“나는…, 이 전쟁은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융베리 구루는 뜻을 꺾는 편이 옳습니다.”
‘황녀께선 이 전쟁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바루나가 마도들과 결탁하여 잉그라드의 국경을 넘을 것임을 말하고야 말았지요….”
‘그걸 모른 채였다면 몰라도…, 그걸 아는 내가 뜻을 꺾지 않을 것 또한 예상하고 있었어…. 결국….’
“결국 융베리 구루를 죽게 하는 건 바로 나입니다.”
‘차라리 진실을 밝히면 어떨까…. 그럼 어떻게 될까….’
그러다 융베리는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렇게 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만일 진실을 밝힌다면 바루나는 가장 먼저 황녀를 치려 들게 될 거야. 잉그라드군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군세는 1천 오백…. 왕도의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는 없다. 설령 황녀께서 밀부를 발동하신다 해도 여기까지 오려면 며칠 길은 될 터…. 그럼 공멸일 뿐이야…. 그는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며 통곡과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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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보아주시고 응원해주셔서 몹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국가별 부족별 설정을 함께 올려드리려고 했는데, 정리를 못했습니다.
새 화실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게다가 지금 그 곳에서 밤 열 시까지 있다보니..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틈틈히 정리해서 되는대로라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크으엄.. 논문도 써야 하고 개인 작업도 해야 하고 이 시나리오도 써야 하고...
몸이 배겨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환절기도 다가오는데 건강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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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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