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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48 378회 0건
디지털퍼머는 딱히 그래야 하는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 안으로 살짝 고개만 들이민 집사 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살며시 손전등을 끌어당겨 그것을 쇼트웨이브의 배낭 속에 넣었다. 그것을 본 쇼트웨이브가 약간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가방을 건네 받았고, 디지털퍼머 역시 방금 전에 한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이 열고 나온 미닫이 문은 시청 본관 옆에 조그맣게 나 있는 쪽문이었다.
그녀들은 문을 나서자마자 충격적일만큼 넓은 광장을 마주쳤다. 어젯밤에도 본 풍경이었지만 달빛 아래서 본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광장의 전경은 마치 산굽이를 돌다가 갑자기 탁 트인 수평선을 마주친 것처럼 그녀들의 시각을 압도하여 공간적 균형감을 일순 앗아버렸다. 디지털퍼머는 약한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일행이 서 있는 곳은 시청 앞 광장으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의 제일 윗쪽이었다. 층계참이라고는 하지만 100미터 달리기라도 할 수 있을 만큼 넓직한 곳으로 눈처럼 하얀 안산암을 들이깎아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편평하게 축조된 곳이었다. 짧지 않은 계단 밑으로 어제 탔던 것과 동일한 가마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마를 사이에 두고 양 편에는 어김없이 어정쩡한 가마꾼들이 늘어서 있었다.
"자, 가시죠.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집사는 조심하라고 말했지만, 계단이 워낙 완만하고 낮아서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집사는 난간을 넘어 가마에 올랐고, 그녀들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집사와 닿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가마에 앉았다.

가마는 천천히 광장을 벗어나 어제 그녀들이 왔던 도로의 반대편 쪽으로 뻗어있는 직선가도에 들어섰다.
기묘한 풍경이 나타났다. 지평선을 보여주는 것이 금지라도 된양 톱니처럼 뾰죽뾰죽한 산봉우리들이 시외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었다. 산가까운 하늘에는 노을이라도 진 것처럼 붉은 색의 빛이 불길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그 빛은 금새 힘을 잃어 네온핑크색으로 변한 후 난꽃과 같은 보라색으로,검은 올리브그린 색으로,마지막으로 쌀겨가 타버린 후 남는 잿빛같은 회색으로 변해 창공을 덮고 있었다.
집사가 길게 난간에 기대며 한마디했다.
"오늘은 날씨도 아주 좋군요. 놀러나가기 정말 좋은 날씨입니다."
그녀들은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시커먼 먹물에 담가두었던 한지를 꺼내서 우유 속에다 행궈 버린 것 같은 무채색의 답답한 공간을,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의 대리석으로 포장된 도로가 곧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로마의 유명한 공동 목욕탕 바닥이 저랬겠지 싶은 반들반들한 도로의 주변에는 다른 도로와 마찬가지로 아름드리 상수리 나무들이 간격을 맞춰 심어져 있었는데, 나무들의 검은 실루엣 주변이 야광충처럼 희게 빛나고 있어서 매우 기괴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트리움으로 가려진 인도에는, 많진 않지만 도시의 시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점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끔 커다란 유리창으로 전면을 장식한 건물도 보였는데 밝은 불이 들어와 있어 그 곳이 상점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호기심이 일어 유심히 그 안을 쳐다보았으나 특별히 손님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가마는 어제처럼 급박하지는 않은 속도로 여유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전진했을때 가마는 대로를 벗어나 사자상이 서 있는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들어가더니 재빨리 회전을 했다. 기름이 눌어붙는 것 같은 진득한 느낌의 공간분할이 일어나고, 정신을 차렸을 땐 다시금 대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말했다.
"오. 그러시면 안되죠. 그게 드라이브의 절정인걸요. 스타카토처럼 끊겨져 나가는 공간 단절의 순간이요.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걸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상쾌합니까. 굴절공간을 주행할 때 느껴지는 이 감각들 말이예요."
집사가 모자를 뒤로 젖히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쇼트웨이브는 코웃음을 쳤다.
"글쎄요. 하긴 세상에는 홍탁도 새콤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으니까요. 익숙해지기 나름이겠죠. 하지만 저흰 이런 것들에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군요. 설마 집사님께선 이걸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저희를 이곳에 붙잡아 두려는건 아니겠지요?"
"아뇨. 저는 다만 이것이 즐길만한 가치가 있는 드라이브라는 걸 알려드린 것 뿐입니다."
능글능글한 집사의 미소가 뒤를 이었다.

가마가 다시금 굴절된 공간으로 들어가려는지 대로를 벗어나 좀 좁아진 샛길로 꺾어 들어섰다. 그러자 눈 앞에 가두를 잇고 있던 석조 아트리움이 갑자기 끝나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낯설고 검은 커다란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쇼트웨이브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건물 앞에는 빨간 색의 작은 풍차 하나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 건물은 그녀가 밤 중에 숙소 창문을 통해서 보았던 그 건물이었다.
"잠깐만요."
쇼트웨이브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왜요?"
집사가 깜짝 놀란 듯 그녀를 돌아보며 자세를 바로 하고는 난간을 두드렸다. 그것이 서라는 신호였는지 가마가 멈추었다. 공간이 가열된 아크릴판처럼 녹아 흐르려다가 순간 정지하며 다시 또렷해졌다. 디지털퍼머와 집사가 무슨 일인가 싶어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샛길은 대로보다는 좁았으나 대로가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느낌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민방위 훈련 공습경보가 울린 거리처럼 퀭한 분위기를 풍겨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잠시 당황한 쇼트웨이브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건너편 아트리움에 있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커피 한잔 마시고 갈 수 있어요?"

아트리움이 이어지는 보도 안 쪽으로 넓직하지만 촌스러워 보이는 쇼윈도우가 설치된 상점이 보였다. 그 상점은 영양실조에 걸린 피난민들의 피부처럼 푸석푸석한 벽돌로 외관을 치장하고 있었는데 약갈색의 정문이 오래된 집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트리움 앞으로 이마처럼 튀어나온 부분에 자그마한 채널사인이 붙어있었는데 쇼트웨이브는 용케도 그것을 읽은 모양이었다.
카페 바트. 강철로 만들어진 채널사인은 잘 벼려진 창날처럼 섬뜻한 은회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집사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여기는 좀.."
쇼트웨이브는 고개를 돌려 풍차 너머에 있는 검은 목조 건물의 입구를 유심히 쳐다보고는 말했다.
"커피 한 잔인데 뭐 어때요. 금새 마시고 가면 되죠,뭐."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시선을 따라 그 목조 건물을 쳐다보았으나 딱히 특이할 만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건물에서 시선을 돌려 난감해 하고 있는 집사와 목조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쇼트웨이브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분명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쇼트웨이브는 괜히 커피나 마시자고 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그래요. 한잔 사주세요. 안그래도 우린 어제부터 커피 마시고 싶어 근질거리던 참이었어요."
디지털퍼머까지 거들고 나서자 집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가마꾼들에게 카페 앞으로 가자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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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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