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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49 270회 0건
그것은 주형에서 대충 만들어 뽑은 듯이 이음매 부분들이 허접하게 마무리된 붉은 색 손전등이었는데, 스위치가 따로 달려있지 않고 케이스에서 꺼내면 그 순간 불이 들어오도록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그건 뭐하게?"
디지털퍼머가 묻자 쇼트웨이브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깐 실험해 볼게 있어서."

쇼트웨이브가 손전등을 케이스에서 뽑아들자 건전지 사이를 강제로 벌려 놓던 스페이스 핀이 빠지면서 떨어져 있던 건전지가 붙어 전구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날씨가 흐린 탓에 손전등은 원뿔형의 노란 빛줄기를 만들며 그다지 밝진 않지만 침실 바닥을 둥근 타원형으로 비추었다.
"이것 좀 잡고 있어봐."
쇼트웨이브는 손전등을 디지털퍼머에게 넘기고 자신의 손가락에서 끼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얄팍한 백조 모양의 은색 링에 붉은 합성루비가 올라가 있는 반지였다.
디지털퍼머가 자신의 손가락에도 끼워져 있는, 그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들이 대학입학을 기념해서 똑같이 맞춘 것으로, 다만 틀린 점이 있다면 디지털퍼머의 것에는 루비가 아니라 인조 에머랄드가 박혀있다는 점이었다.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하게 여기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빛이 나가고 있는 손전등 앞으로 조심스럽게 반지의 루비 부분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손전등의 빛이 루비를 투과하는 순간 빛이 모아지며, 상아빛에 가까운 흰색의 직선광으로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마치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광선총에서 광선이 발사되는 것 같았다.
쇼트웨이브가 손을 들어 반지를 치우자 전등의 빛은 다시 평상시처럼 원뿔형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쇼트웨이브는 그 퍼져나가는 모양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눈쌀을 찌푸리며 다시 반지를 갖다댔다. 그러자 역시 아까처럼 루비를 통과한 빛이 볼펜심 정도 굵기의 곧은 직선으로 변하며, 주위에 산란되는 불빛보다 훨씬 더 밝고 진한 원통형의 궤적으로 두툼한 마루바닥을 흰 지팡이처럼 찌르는 것이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쇼트웨이브는 디지털퍼머를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한번 흉내 내본거야."
그녀는 손전등의 빛을 모으던 반지를 빼내 손가락에 끼었다.
"뭘 흉내내?"
"어젯밤 시청 돔 천정에 매달려 있던 보석 봤던거 생각나? 타베르니에 블루라고 부르던 다이아몬드 말야."
"응. 그 파란색 다이아몬드 말하는 거지?"
"그래. 다이아몬드를 통과한 빛도 지금 본 것처럼 일직선으로 쭉 직진했던거 기억나지?"
"응."
"말할 필요도 없이 그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란 말야."
쇼트웨이브는 반지를 좌우로 약간씩 돌려 손가락에 잘 맞도록 조정했다.
"원래 그런 식으로 빛이 모아져서 직진하기 위해서는 좀 지겨운 반복 과정을 거쳐야 돼. 빛이란건 쉽게 말해서, 들뜬 원자가 안정된 원자 상태로 변할 때 발생되는 에너지라고 할 수 있어. 에너지가 낮은 안정 상태가 되면서 남는 에너지를 광자로 발산하는 거지."
쇼트웨이브는 손가락을 쭉 펴서 반지가 예쁘게 끼워졌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그러니까 일반적인 빛이란건 여러가지 광자들, 위상도 다르고 파장도 다른 광자들이 마구 섞여서 나오는거야. 손전등은 보다시피 반사경을 이용해서 그 광자들을 대충 한쪽 방향으로 분출시켜준 것에 불과하단 말이지. 지금 우리가 본 것처럼 빛이 모아져서 직진하기 위해서는, 일단 강력한 전기장 속에서 단일화된 광자 에너지를 얻어낸 다음 거울을 사이에 두고 수없이 왕복시켜서 위상이 겹치도록 만들어야 되는거야. 고출력의 에너지 빔을 만드는 건데 그걸 공진기 속에서 빛이 증폭된다고 그러는 거지. 그렇게 출력이 높아진 단일광만이 직진성을 띠게 돼. 그렇지 않고 여러가지 위상과 서로 다른 주파수가 섞인 빛은 우리가 흔히 보듯이 넓게 산란한단 말야."
어려운 용어가 나오기 시작하자 디지털퍼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쇼트웨이브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 말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지 보석 나부랭이를 투과시켰다고 빛이 산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야."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생겼잖아."
"그래."
쇼트웨이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디지털퍼머에게서 손전등을 받아 케이스에 끼워 넣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손전등이 꺼졌다.

"난 어젯밤에 타베르니에 블루를 보면서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아주 궁금했어. 그 빛은 이 도시 사람들을 아귀들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잖아. 굉장히 중요한 빛인데 대체 어떤 원리로 그렇게 발진되는 것일까. 집사한테 물어봤더니 너도 봤다시피 그 사람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어. 집사는 왜 몰랐을까. 자기네 도시의 뛰어난 점은 우리가 묻지 않아도 자랑하고 싶어 못배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말야."
쇼트웨이브가 손전등을 화장대 위에 놓고 침대로 가서 앉았다. 디지털퍼머가 말없이 눈으로 얘기를 재촉했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이 장치가 대단히 치밀하게 고안된 과학적인 장치라기 보다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연구할 필요조차 없는 일반적인 현상을 응용한 장치가 아닌가 하는 거였어. 그러니까 이 도시 사람들한테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 설명이 필요없는 것이 란 얘기지. 예를 들어 우리도 우리 세상에서는 마찰력이나 관성력 같은 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 힘이 어떤 힘인지 설명하라고 요구하면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디지털퍼머는 보석을 통과해서 직진하는 빛과 마찰력 사이에서 절대로 존재할 것 같지 않는 어떤 상관관계를 궁리하면서 쇼트웨이브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넌 이 현상이 여기서는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는 거야?"
"맞아. 이 세상에서는, 아니 적어도 이 도시는 특이한 공간을 가지고 있잖아. 난 이쪽 공간의 이상한 성질에서 그런 현상이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됐어. 너도 아는 것처럼 이 도시는 이상하게 굴절되어 있는데, 그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왜곡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뒤틀려 있는 공간이라면 우리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물리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반드시 있을 수 없는 일만은 아니겠지."
디지털퍼머는 화장대 위에 놓여있는 손전등을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도구들로 간단히 실험을 해 본거다 이거군?"
"그렇지."
그녀는 화장대 앞에 놓여있던 작은 의자에 앉아 묘한 표정으로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런 현상이 우리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거야?"
쇼트웨이브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젯밤에 가마를 타고 오면서 네가 집사한테 반지에 박힌 보석도 보호석이 될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집사는 가타부타 정확히 얘기하지 않고 흐지부지 말을 돌렸고."
"응. 그랬지."
"내 생각은 이래."
쇼트웨이브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거실을 왔다 갔다 거닐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보석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석을 투과하는 빛 중에서 어느 한 파장, 또는 한가지 위상을 가진 광파만을 선별해서 발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녀는 깊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우연하게도 아귀들한테 치명적인 작용을 하는거야. 이 도시 사람들은 그 성질을 이용해서 밤에는 아귀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구."
디지털퍼머는 시계추처럼 자기 앞을 왔다 갔다하는 쇼트웨이브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난 우리 역시 이 성질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문제는 보호 작용을 하는 보석이 타베르니에 블루 뿐인지 아니면 다른 보석들도 가능한지 하는거야. 그런데 집사의 말에 의하면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밤 중에 반드시 타베르니에 블루의 방패막 안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스스로 보호석이라는 것을 지니고서 집 안에서 머물기도 한다고 했거든. 그렇다면 다양한 보석들이 이런 방법으로 아귀를 물리치는데 사용된다고 봐야 할거야. 게다가 우리 반지도 보호석이 될 수 있느냐는 네 질문에 집사가 보여준 애매모호한 반응은.."
쇼트웨이브가 걸음을 멈추고 디지털퍼머를 마주보았다.
"백 프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긍정이라고 봐도 될 거라고 생각해. 집사로서는 이 곳의 비밀스런 부분을 우리한테 꼬치꼬치 얘기해 주기 싫었을 테니까 말야. 아마도 우리가 자신의 보호 안에서 얌전히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겠지."
"흠.."
디지털퍼머가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꼬며, 일종의 동의의 표시로 사탕을 문 어린아이가 내는 것 같은 콧소리를 냈다.
"그래서 네가 아침에 집사한테 이 도시를 떠나겠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한 거로구나. 꼭 실험을 해보지 않았어도 보석의 성질이 이럴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거지?"
쇼트웨이브는 흐트러진 옆머리를 귀 옆으로 넘겼다.
"대충 이럴 거라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이 도시를 떠날 수 있다고 집사한테 그랬던건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야."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는 정색을 한채 디지털퍼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남의 호의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집사나 이 도시 사람들이 우리를 정말로 잘 보호해 주고 나중에 우리를 다시 집으로 보내준다면야 더이상 바랄게 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대체 우리를 무슨 일에 이용하려고 하는지 알 수도 없다는 거야. 집사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아직까지도 우리한테 무슨 일을 부탁하려는지 얘기해 주지도 않고 있잖아. 난 말야, 오늘 아침 집사한테 말했던 것처럼 최악의 경우가 생긴다면, 아니 생길 거 같다는 예감이 들면 우린 망설이지 말고 이 도시를 나가야 된다고 믿어."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디지털퍼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모르겠어. 네 말이 분명히 맞긴한데 그 아귀들이나..또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괴물들을 생각하면 그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는게 정말.."
그녀는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이며 꼬았던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마른 콩깍지처럼 조그맣게 오그라들었다. 쇼트웨이브는 조용히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녀 역시 디지털퍼머의 두려움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숨막히는 화염처럼 이성을 태워버리는 극도의 공포였으며, 그녀의 모든 자신감과 존엄성을 마비시켜 버리는 절대적인 무서움이었다. 쇼트웨이브도 디지털퍼머 만큼이나 무서웠던 것이다.

정적을 깨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이 고개를 들어 서로 마주 보았다.
"접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집사의 목소리였다. 디지털퍼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들어오시죠."
빠끔 문이 열리고 집사의 머리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 다 되셨나요? 가시죠. 저희 쪽은 준비가 다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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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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