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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2 00:43 823회 0건
"...이, 이상으로 5조의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짝짝짝짝-
"후,"
박수가 터져나온다. 비로소 그동안 억눌러왔던 긴장이 흘러나온다.
"음, 좋았어요. 준비를 많이 했군요."
깐깐하기로 유명한 교수님의 칭찬에 순간적으로 숨이 콱하고 막혔지만, 금새 간질하면서도 뜨거운 느낌으로 변한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달린다.
"가, 감사합니다."

"자, 질문할 사람 없나요?"
주섬주섬 자료를 챙기는 손이 멈추고, 순식간에 나는 머리채를 잡힌다.
15분이라는 긴 발표 시간 탓에 숨을 고르지도 못했건만, 질문을 받을 생각에 벌써부터 현기증이 핑 돈다.
"아.. 네, 그럼 질문 받겠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
당연한 얘기지만, 쉽사리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쌔-할 정도로 조용해지는 강의실 분위기가 고맙다고 해야할지, 하하..
나는 비로소 한 숨 돌려본다.

"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요."
잠잠한 무리들 가운데서 번쩍-하고 손이 올라간다.
남학생.
얼굴은 분명 낯익다. 나랑 같은 학번이었던 거 같은데..
"..아, 네. 말씀하세요."

"으음..~"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손짓이 지나칠 정도로 가볍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느끼는 초조함은 배가 되어간다.

"실용성이 있나요?"
"네??"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에 나는 더욱 당황한다.
그걸 노렸던 걸까, 그는 상황을 즐기듯 반템포 빠르게 들어온다.
"발표하신 주제 말이에요. 바이오매스가 여러모로 괜찮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장점만 부각하신건 아닌지?"
그는 옅은 미소를 띤채 나를 바라본다.
"확실히 바이오매스는 좋은 자원이죠. 그치만 그 많은 원료는 어디서 충당하죠? 이당류는 코스트가 너무 안맞고.. 재처리 비용을 따져보면 단당류로 가닥을 잡아야할거 같은데, 그나마 옥수수가 괜찮겠네요? 근데 우리나라같이 땅 좁은 나라가 대규모 경작이 가능할 리는 없으니 그것도 다 수입해야하는거죠."
"천천히, 하지만 진득하고 길게 이어진 그의 말들이, 우리 조를 사정없이 헤집는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 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어요?"

"..."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단점에는 그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사업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발표 같은게 아니다.
학부생 몇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꽤 괜찮은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다.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하지만 열심히 했다는 점은 확실히 어필하면 교수님께 적당한 인정도 받을 수 있는.
그런데, 어째서?
질문의 강도를 넘어서 신랄하게 꼬집는 그의 의도를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아..."
컴퓨터 앞에 앉아 PPT를 넘기던 은채도 당황했는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한다.
그럴 수 밖에. 은채가 그러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녀가 건네준 자료에는 좀처럼 반박할만한 내용거리가 없었거든.

하지만 은채에 대한 질책보다는, 오히려 저렇게 질문을 던지는 그에 대한 깔깔함이 더욱 강해져간다.
뻔히 아는 입장에서 저렇게 나왔어야 하나?
한쪽 팔로 책상을 기대곤, 묘하게 힘이 실린 두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 역시도 영 마뜩잖다.

괜찮아, 내가 할께.
찰나의 순간, 은채와 시선을 마주한다. 깜짝 놀란 그녀의 눈이 마치 고양이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채에게 괜찮다며 신호를 줬고, 안절부절하던 그녀는 다소곳하게 사그라든다.
그래서일까, 잔뜩 굳은 내 어깨는 생각보다 쉽게 힘을 풀어준다.
"흠 흠,"
나는 가벼운 기침으로 굳어있던 목을 녹임과 동시에, 생각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준비한 대본에는 없다.
하지만 마냥 어려운 것은 아니다.

"네, 저도 그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셀룰로오스를 쉽게 분해할 방법이 없는 이상,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재료는 전분류, 즉 곡물이 되겠죠. 질문하신 분께서 짚어준 부분도..."
"이강철, 2학년 이강철입니다."
"...네, 강철씨가 짚어낸 부분은 확실히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답을 대뜸 자르고 들어오는 녀석의 행동이 못마땅하지만, 나는 금방 중심을 잡는다.

"하하, 그런가요? 사실은 제가 비슷한 주제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서 말이죠~""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게 목적이었는지, 녀석이 본 의도를 드러낸다.
"당장은 연료값보다 옥수수의 값이 싸지만 언제 상황이 역전될지도 모르고, 또 잉여 농산물을 전환하다보면 그 값어치가 높은 코스트에 고정되어버릴 문제도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제 3세계의 기아사태는 점점 해결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네, 맞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건 바로 그 부분이었죠. 우리가 좀 빨리가고 또 편하게 지내자고 그 아까운 식량을 허비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건 너무도 오만한 처세가 아닐까요? 더욱 좋게 사용할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궂이 이런 방법을 택해야할지가 의문이에요."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철이 한발 빠르게 치고 나온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당연한 것들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것을 대신 뺏을 뿐이죠.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값싸고 질좋은 전기에너지를 제공받고 있어요. 그 이상은 욕심일 뿐입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강의실의 모두를 보며 강하게 외친다.
적잖이 놀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의견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건지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쪽은 발표의 주도권을 빼앗겨가는 우리 5조 뿐이었다.
안그래도 불안해보이는 은채의 두 눈이, 이제는 아예 그렁그렁하다.

"아뇨,"
강철이 만든 분위기를 칼 같이 썰어낸다. 덕분에 강의실은 전체의 온도가 2도 가량은 떨어진듯 싸늘하고 조용해진다.
"..그게 무슨?"
"아니에요, 그건 욕심이 아니에요."
주목 받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면, 나 역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호오~"
여태껏, 강의실 끝자리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시던 교수님이 흥미를 표시한다. 하지만 굳이 나설 생각은 없는듯, 이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신다.
괜찮은건가?
나는 아슬아슬하게 안전선에 걸친 사람처럼 안도한 후, 말을 계속해서 잇는다.

"강철씨가 하는 얘기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전분을 당화 시켜서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것은 자칫 식량난을 가속시킬 위험도 있으니까요."
"네, 바로.."
"하지만 그건 바이오에탄올에 국한된 경우겠죠. 오늘 저희 조가 발표한 내용은 좀더 포괄적인 개념의 바이오매스였는데, 너무 한 부분만 보신건 아닌가요?"
"그..!"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린다.
통쾌함이 성적 쾌감처럼 등골을 후벼 파내곤 있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당당하게 서있는 그의 오금을 걷어차 준 다음, 부수고 깎아내릴 작정이다.
철저하게, 하나하나까지도,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고 그 앞을 막아서자.
과학적인 접근 뿐만 아니라, 시사와 정세 그 모든것을 고려한다.
과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가장자리를 스쳤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을 억누른다.
그는 교만했지만, 잘난척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탄탄했고 어줍잖은 장악력으로 나를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이쪽에서 봐줄 상황따위 한톨만큼도 없었다.
잡아 먹히기 싫다면, 잡아 먹어버리자.

"21번째 PPT 페이지를 띄워주겠어요?"
"아..네, 넵!"
부드럽지만 심지 있는 목소리로 은채에게 명령했고, 그녀는 그것을 재빨리 수용한다.

"화면의 왼쪽 자료를 봐주시겠어요?"
그 뿐만이 아니라 강의실의 모든 인원이 우르르 고개를 돌린다.
한창 발표를 할때만해도 태반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딴짓을 했는데,
묘한 쾌감이 든다.

"다양한 예시들 중에서도 덴마크에 대한 이 자료가 강철씨의 의문점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생각드네요."
힐끔 쳐다본 그의 얼굴엔 "이 따위로 뭘?"같은 찌푸림이 새겨진다.
"덴마크는 바이오매스를 적극 이용하는 국가라고 설명 했는데요,"
"네, 그 부분은 아까 충분히..."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덴마크에서는 바이오에탄올이 아닌, 바이오메탄가스를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들 중에는 악취를 동반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 것은 충분히 문젯거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꺼리게 만들죠."
잔뜩 긴장해서인지 연신 발음이 꼬이려했고, 나는 잠시 뜸을 들인다.
일부러 여유를 부리자. 마치 이 상황조차도 미리 의도했다는 듯이, 다음에 이어질 기나긴 얘기를 위한 것인양, 그렇게 한껏 연기를 하자.
"하지만 그것 마저도 에너지원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그게 바로 덴마크입니다. 덴마크는 도시의 하수도 시스템과 바이오메탄가스를 연계시켰고, 그 결과 그들은 완전한 에너지 자립에 매우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이강철과 눈을 마주한다.
"우리가 쓴다는 값싼 에너지가 뭐죠?"
"...원전이죠. 우리나라의 현실 상, 그 이상이 있을까요."
이쪽에서 당당하게 나가면 한번쯤은 주눅들만도 하건만, 제 할말은 꼭 다 한다.

"있습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모두를 쳐다본다.
"여러분, 원전에서 사용한 핵 연료봉을 식힐려면 바다에 10년은 담가둬야 합니다. 그 뒤에 핵 폐기 처리장에 보내는데, 최소 10만년은 꼼짝없이 보관해야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
"상상이나 가세요? 10만년은 인류가 몇번이라도 문명을 이룩하고 쇠퇴해도 충분할 만큼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위험성을 알릴 수 있을까요. 글? 해골 그림? 아마 그 어떤 것도 확신을 줄 순 없을 겁니다."
"......"
"원전은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미래의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있는 겁니다."
신기하게도 강의실의 모든 사람들과 동시에 마주보는 느낌이 든다.
"이미 사용한 것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책임이니까요. 그럼 앞으로는 어떡할까요?"
말에 탄력이 붙는 것을 스스로도 느낀다.
"저는 그 해결책 중 하나로 바이오매스를 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불편하겠죠, 초기비용도 많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선택지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세요."

그와 마주하는 시선이 번쩍하고 불똥이 튄다.
"더 하실 얘기가 있나요?"
"..큭...!"
강철은 이미 터질듯한 분노를 얼굴 그대로에 그린다. 하지만 그 뿐, 그가 그 이상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자자, 그만하면 충분한듯 한데.."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교수님이 중재의 제스쳐를 취한다.
"사실 오늘 발표 내용 중에서 바이오매스에 대해 관대한 자료들이 있었던건, 5조도 이해하죠?"
"네."
"앗! 네, 네!"
나와 은채는 황급히 대답한다. 사실 우리조가 매우 신뢰성 높은 자료를 예시로 들었다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강철군이 던진 질문도 충분히 납득해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고..."

후릅-
교수님은 커피를 한모금 하신다.
"우리는 사이언스를 탐구하는 이상, 끊임없이 많은 질문 앞에 놓이게 될겁니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나가야합니다."
"......"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론 5조의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하지만 궂이 내색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녀석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삼류의 강의는 선생이 학생에게 질문합니다. 이류는 학생이 선생에게 질문하죠. 그렇다면 일류는 어떨까요?"

강의실이 새삼 조용해진다. 하지만 교수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학생과 학생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것, 오늘 본 것이 바로 일류의 강의입니다."

은채가 잘게 몸을 떤다, 아마 나도 마찬가지리라.
"오늘 5조 참 잘했어요. 좋은 점수를 기대해도 좋겠군요."

드디어 끝났다.






수업이 마치자, 강철이 다가왔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흥미롭더군요, 개인적으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 네.."
반듯한 말투와 당당한 목소리, 하지만 나는 거기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단번에 캐치한다.
언제나 그렇듯, 웃지 않는 것은 눈이니까.
"우리 앞으로 얼굴 마주치면 인사하며 지내죠."
"네, 그래요 그럼."
그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고 마주 잡는다. 으레 그렇듯 두어번 흔들자 강철은 금새 떨어져나간다.
그가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다가온 승호가 쿡-하고 옆구리를 찔러주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해서 강철의 자취를 쫓고 있었을게 틀림 없다.
"우와, 형 오늘 발표 완전 벼르고 왔구만! 살살 좀 하지~"
녀석은 부러움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학점 때문일까, 약간의 시기도 묻어나왔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 쿨하게 넘긴다.
"강철 선배 너무 나쁘게만 보지마. 평소에 학과 활동도 잘하고 우리한테 술도 잘 사주거든. 아마 열정적이라서 그렇지 나쁜 뜻은 없었을거야."
승호는 굳이 내게 와서는 그 사람의 변호를 대신 해준다.
"아, 형 그럼 나는 다음 수업이 있어서 이만!"
그리곤 사라진다.
"..후아..."
나는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댄다. 다 내보냈다고 생각했건만, 시간 내내 꾹꾹 쌓여왔던 긴장감이 입을 통해 휘발한다.

"잘한거 같아?"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녀가 다가왔음을 알았기에.
"그럼. 최고야, 선배.."
적잖은 감동을 받았는지, 은채의 목소리가 촉촉하다.

으아아-
의자가 넘어갈듯 기지개를 쭈욱 핀다.
기분이 빙글빙글.

가볍게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머로 들린다. 나는 가볍게 돌아앉아 은채를 바라본다.
"그나저나 선배, 그런건 언제 준비했대? 우리가 조사한 자료에는 바이오메탄은 거의 없었잖아."
"아, 그거? 그냥 뭐, 지난번에 찾아본건데 아직 안 까먹었거든."
나는 방바닥에 누워서 엉덩이를 긁듯이 느긋하게 말을 한다.
"솔직히, 스웨덴인지 덴마크인지 엄청 헷갈렸는데... 뭐 괜찮겠지?"
"뭐~어??"
으쓱하며 던진 우스갯 소리에, 은채는 와르르 웃어버린다.
싱그럽게도 톡톡터지는 웃음 속에서, 나는 훌쩍 지나가버린 벚꽃을 추억한다.

그녀가 웃는게 참 좋다.
그녀가 참 좋다.
조금만 더 먼저 은채를 알아갈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 좀 더 빨리 기회가 있었다면, 정말 정말 좋았을텐데..

"으이구~"
은채가 툭하고 내 어깨를 친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그만 까끌거림도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사람을 번쩍 흔들곤 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짝 찡그린 미간, 하지만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과 입꼬리가 은채를 싱그럽게 받쳐준다.
"내가 볼때, 선배 그렇게 웃는거 되게 반칙 같아."
"으, 응?"
내가 또 웃었던 걸까, 왜 자꾸 그녀만 보면 이럴까,
나는 뻐근해진 입가를 들었다 놨다하며 가다듬어 본다.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설렘과 혐오의 감정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별로야?"
되묻는 말이 살짝 풀이 죽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건,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뿐.

"으으응~ 그게 아니라~~"
음음거리며 은채는 자신의 말을 곱씹는다.
"사람 너무 홀리잖아, 괜히 아무것도 아닌데 사람 설레게 하고 말야~"

어, 잠깐,
"그래봤자 선배는 뭐... 에이~ 됐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뭐. 그럼 내일 봅시다요~"
그 말만 남기고 은채는 총총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내가 강의실을 빠져나온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오늘은 완전 허탕이다.
왠만하면 적당히 한명 점찍고 대충 해볼 생각이었는데, 별로라도 너무 별로였다.
얼굴에 철판을 주르륵 깔았거나 아니면 옆구리에 남자놈을 한명씩 끼고 있거나.

아, 이렇게 되면 완전 나가린데...

오늘 같이 기분 좋은 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한풀 꺾인다.

아냐, 그래도 혹시.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클럽 근처를 기웃거린다.
하지만 슬펐던 짐작만큼이나 건질만한게 없었고, 나는 어깨의 힘을 뺀다.
왜 그런날 있지 않던가, 귤 한바구니를 샀는데 죄다 뭉개져있는 그런 거지같은.
오늘이 그 날인가보다.

하긴, 아직 불금도 아닌 오늘같은 평일에 유흥가가 붐비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스스로에게 물러설 여지를 던져주곤, 발걸음을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돌린다.


삑- 감사합니다-
카드를 찍으며 슬렁슬렁 버스에 오른다.
꽤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 구석 구석은 빈 자리가 가득했고, 나는 뒷쪽의 적당한 자리에 몸을 묻는다.
자리에 앉을때까지 기다려준 친절한 버스기사님은 슬슬 기어를 넣고 운행을 시작한다.
그 배려 덕분인지 아니면 덜컹대는 엔진의 울림 때문인지, 나는 노곤해짐을 느끼며 생각에 잠긴다.

요즘 내가 이상하다, 특히 오늘만 봐도 그렇다.
성욕이 치솟았고, 여자를 찾아 헤맸지만 허탕을 치고 귀가 중?
말도 안된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한명을 찍은 다음 목을 졸라서라도 끌고 갔을거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 기계적으로 즐기고 알아서 대충 처리했겠지.
그건 둘째치더라도 성욕이 있을때 일을 벌일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 내게는 참을성이 없었다.
하고픈게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몇일이 걸리더라도 결국은 해버리고 마는 놈.
그렇게 일을 벌리고나면 달성감은 최고였지만, 뒷처리는 항상 지저분해지고 골치였었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한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항상 성적으로 흥분하기 전에 적당한 여자를 주워 성욕을 처리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말이다.
100%의 만족은 아니었지만 얼추 70~80%는 채워졌고, 나는 그만큼 얌전해지곤 했었는데...

나 자신과의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오늘 유흥가를 껄떡대고, 거기다 잘 안풀린다고 금방 포기하고는 집에 가서 딸이나 칠 생각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의 작태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창피한 마음에 나는 후드를 푹-하고 눌러쓴다. 하지만 그만큼 튀어오르는 흥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만지작대던 스마트폰을 더이상 놀리지 않고 비소에게 메세지 하나를 보낸다.

[야야ㅋ 오늘은 안했냐ㅋㅋ]

까톡-
기다릴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서 문자가 온다.
<^ㅅ^ㅗ>
[야!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발칙한 비소의 도발에도 나는 낄낄거리는데 여념이 없었고, 그녀 역시도 내가 그렇게 나올줄 알았는지 웃어버리고 만다.
[그 엿 내가 먹어도 되냐?ㅋ 그 남자애가 쪽쪽 빨아야 하는거 아냐?ㅋㅋㅋ]
<뭐래ㅋㅋㅋ 어차~피 걔한테 대줄때는 깨끗하게 씻고나서 줄거라서~ 아, 물론 엿을 말야~ ^ㅅ^ㅋ 다른거 생각한 건 아니지?ㅋㅋㅋ>
[아~ 그래? 잘됐네, 그럼 먼저 빌려줘봐~ 엿은 너부터 먼저 먹여야겠네ㅋㅋ 그 딱딱한 놈을 그냥 콱 쑤셔넣고 빙글빙글 돌려주면 질질 흘릴거 아닌가? 아, 물론 침을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젠가부터 우리는 매일 카톡을 주고받는다.
특히 밤 9시가 지나면, 나는 별 일이 없어도 항상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곤 했다.
그녀와 나 둘 중에 누군가가 먼저 운을 띄우면, 우리는 문자로 수많은 텍스트의 산을 쌓아버린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시콜콜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주로 쓰고 버리기 좋은 음담패설이 주를 이루곤 했다.
가식이 없다는건 즐기기에 편했지만, 브레이크가 없는 것과도 같아서 때로는 섹드립을 넘어선 성희롱과 추행에 발을 디밀기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가 쿨한 사람이 되기위해 경쟁이라도 하듯 더욱 강하게 받아쳐가며 나름의 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뭐, 덕분에 수위는 보다시피 이렇게나 엉망진창이 되버렸지만.

비소와 떠들다보니 어느새 버스에서 내려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내 방을 찾아간다.

털썩-
찌부둥한 몸을 침대에 던져본다.

그 사이에도 비소로부터 꽤 많은 문자가 오고 있었다.
항상 이때가 우리가 멈추는 시간, 아니 굳이 따지자면 재미가 시들해진 내쪽에서 그녀를 밀치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시점인데,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더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비소야, 걔랑 진짜로 또 안했어?]
<안했다니까ㅋㅋㅋ>
[흐음...~]
나는 일부러 의뭉스런 뉘앙스를 날린다.
<왜? 형 왜 왜??ㅋ>
[아니 뭐..]
나는 뭐가 있는 척, 말꼬리를 잡는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꽤 괜찮은 방법이다.
<아, 뭔데, 뭐냐고 형. 왜 그래??>
잘한다 잘한다 하면 안심하지만, 조그만 부정에도 금새 풀이 죽는 그녀.
꽤 친해진 덕분일까, 터프한 척 하는 그녀의 가면이 얼마나 약하고 또 어디가 약한지 쯤은 훤히 꿰고 있었기에, 이쪽에서 원한다면 여린 속살같은 서윤을 끄집어내는 건 식은 죽 먹기와 같았다.

[아니 이상하단 말이지..]
<아 뭐가ㅜㅜ..>
[그렇게 너한테 목매달 정도면 그 이후에 진척이 있어야하는데 말야. 평소 짝사랑하던 여자와 좋은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다? 이건 분명 이상하지.]
<그, 그건..>
[너한테 애원한다며, 너 좋다고 완전 난리라고 했잖아. 혹시 아닌...]
<아, 아니거든! 완전 나 좋다고 난리거든!!>
비소가 발끈한다.
[그래? 음...]
<....>

완전 뻥, 다 개뻥이다.
내가 그녀를 안봤다면 또 모를까, 평소 서윤이 어떻게 행동하고 다니는지는 훤하게 꿰고 있다.
매달리는 건 서윤, 초조한 것도 서윤.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 그럼 네가 철벽 치는거네?]
<그, 그렇지...>
[왜?]
<으,응?>
[너 밀당같은거 딱 질색이라며?]
<뭐, 그랬지 하하..>

사실 그동안의 비소는, 서윤과는 너무 달라서 다루기가 난감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눈치 볼건 다 보면서도 제 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인 연락방법 그리고 온라인에서나 가능한 뻔뻔함까지도.
군대갔다와서는 다시 연락이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반갑고 설레였지만, 돌아서보면 비소와 크고 작은 부딪힘은 심심찮게 있는 편이었다.
그 모든걸 곱씹고 감안한다면, 이번 기회에 비소를 찍어눌러서 그녀의 실제 모습과의 갭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냥 서로 쿨하게 구는게 좋다며? 그럼 철벽 칠 이유가 없지.]
<......>
[걔 고자야? 아, 너 걔랑 했다고 했지. 그럼 아니겠네.]
<..으음;;>
[그럼 뭐가 문제일까, 대충 견적이 나오지 않아?]
<......>
빠르게 쏘아붙인다, 하지만 그녀가 지레 겁먹고 숨어버릴 강도는 아니다.
[내가 이렇게보여도 말야, 경험이 풍부한 편이거든? 주변에 연애상담 같은 것도 많이 해줬고 말야.]
<응..>
[내가 도움이 되진 않을까?]
도망칠 구멍을 내어준다, 물론 내쪽으로.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뭐 하지만, 우리가 하루 이틀 알아온 사이야? 내가 너 실망시켰던 적 한번도 없잖아. 기억나? 너 완전 쪼끄만 중딩 시절때, 남들이 다 어리다고 무시해도 동호회에서 나랑 형, 누나들만 그런거 없이 받아줬잖아. 너 그때 우리보고 뭐라고 했어? "진짜 가족같다"고 그랬지, 안그래?]
<그, 그랬지.>
[이, 형은 말야, 비소 널 도와주고 싶어. 연애 이런건 개인의 사생활적인 부분이라 크게 터치할 순 없지만, 적어도 네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단 말야. 형, 누나들도 계속 연락이 닿았다면 분명 발벗고 나서서 도와줬을걸.. 그건 정말 아쉽다.]
<......>
[남자는 말야, 똑똑한 사람이든, 멍청한 사람이든, 절대로 여자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꼭 지니고 있거든. 진짜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여자로서는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는 부분들이 있단 말야.]
<그, 그래?>
[당연하지! 너 여자친구 있는 남자도 야동 보는거 알아?]
<안볼거 같은데..>
[걔네들 무조건 야동 본다에 내 왼쪽 불알을 건다, 게다가 딸딸이도 칠걸?]
<..엑, 거짓말?>
[TV 못봤어? 걔 누구냐, 연예병사로 간 그 뭐시기 있잖아, 7년 넘게 사귄 모델 여친 놔두고 안마방 갔다가 걸린놈.]
<...>
[이해가 안되지? 근데 남자가 그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가끔은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다니까.]
<...>
[아무리 말투만 남자처럼 한다고 남자를 알 순 없지, 남자와 여자는 자라온 방식이 너무나도 다른데.]
비소는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까운 침묵,
나는 천천히 손을 오므려, 손바닥 안의 그녀를 움켜쥘 준비를 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도와줄 수 있어, 아니 도와줄게. 형, 누나들 몫까지해서 내가 널 팍팍 밀어줄게!]
숱하게 말했던 사실을, 나는 한번 더 그녀에게 주입하듯 문자를 찍어보낸다.


모래알 같은 시간들이 제법 쌓여서, 허술한 성을 만든다.
이해한다.
고민되고 또 고민되겠지, 어쩜 스스로에게 주어진 기회라며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순간만큼은, 나도 그녀처럼 얌전하게 굴어본다.

재촉은 좋지 않아.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비소의 카톡이 도착했다.

<...진짜 도와줄거야?>
짧지만 확실한 허락의 문자, 나는 그녀의 문 하나를 열었다.
[당연하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후우,>
짧은 심호흡과 함께, 비소는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적어내려갔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지난번 놀이터에서 들었던 것과 큰 차이점은 없었기에, 나는 적당한 필터로 대충 걸러버린다.
[대충 알겠네.]
<벌써??>

가지고 놀 인형의 마음까지도 내가 알아야하나?
어차피 그닥 궁금하지도 않았네요~

[너 예뻐?]
<응?>
[걔가 너 예쁘다고 하더냐구.]
<으, 응 뭐..ㅎㅎ>
수줍어하든 말든, 나는 빠르게 진도를 뽑는다.
[지금 집이지?]
<응응.>
[전신사진 찍어보내봐.]
<엥, 지금 바로??>
[응. 근데, 옷 입고 찍으면 안돼.]
일단 먼저 한방.
<어..?>
[몸매가 어떤지 알아야해. 정면 후면 옆면 이렇게 3장씩, 되도록 다양한 각도에서 찍어서 보내줘.]
<뭐, 뭔 소리야...>
예상했던 그대로 화들짝 놀라는 그녀,
[알아, 부끄러운거. 근데 남자들이 가장 엄격하게 따지는게 바로 몸매거든? 가슴, 허리, 엉덩이, 다리 등등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고 꼴리는 곳도 마찬가지야. 객관적인 남자의 시선으로 볼때, 비소 네가 가진 강점을 찾아서 어필할 필요가 있어.]
<자, 잠시;;>
[왠만하면 속옷도 안 입은 상태가 좋을거 같아. 속옷은 체형을 억지로 있어보이게 만들거든. 그리고 부끄러울테니까 가랑이는 손바닥으로 가려도 돼. 하지만 가슴은 안돼, 모양이 찌그러져서 제대로된 볼륨을 알 수가 없어져.]
나는 터진 둑처럼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쏟아낸다.

<...형, 그건 좀ㅠ..>
[난 오로지 정확한 판단을 위해 네 몸의 실루엣이 필요한거야. 왜, 부끄러워? 그럼 얼굴은 안나오게 찍어. 그럼 난 비소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 필요도 없어지겠지. 적어도 네가 보내줄 사진들은, 내게 있어서 마네킹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이 느껴질거야. 이 정도면 너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됐을까?]
<아, 아무리 그래도..하...>
확실한 승낙도, 그렇다고 심지 있는 거절도 없다.
모순의 턱에 걸려서 오도가도 못하는 비소를 보고 있자니 답답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난 네 사진을 본다면 분명이 흥분하게 될거야.]
나는 빼거나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오히려 직구로 승부를 본다.

<..어?>
[발기한다고, 좆이 선다고. 아마 오늘밤은 네 사진을 반찬으로 한 두번은 뽑아낼지도 모르지.]
<......>
[이상해? 아니, 이건 당연해. 남자라면 이게 당연한거야. 남자는 원래 이런거야. 고추달린놈들은 누구라도 여자의 몸을 보면 자지를 세운다고. 나는 이런 고추들의 마음을 너에게 알려주려고 하고 있어, 덤으로 네가 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들까지 합쳐서 말야.]
<..아으...>
[모른다면 모를까, 안다면 그냥 받아들여. 그 사진으로 나는 반드시 자위를 할게, 그러니까 어떻게 쓸 지에 대해 비소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거야.]
<..으...>
[음란한 사진도 아냐, 과한 포즈와 심한 노출은 아직 필요 없어. 그냥 전신상이야, 반듯하게 서서 3장씩 OK?]
그럴싸한 유리가면 따위 박살내버리면 그만, 지금의 비소는 서윤과 너무나도 많이 겹쳐있었다.

<자, 잠시만..생각할 시간을 좀...>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괜찮다 싶으면 그때 문자해. 물론 사진도 같이 말야.]
그렇게 메세지를 보내곤, 나는 휴대폰을 배게 옆에 엎어둔다.

오늘 그렇게 많은 허탕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꽤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비소 때문이리라.
지금 이 시간, 어느 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그녀의 모습만 상상해도, 바지가 스스로 부풀어 오른다.
내가 충분히 굶주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장만한 밥 반찬은 결코 없었다.

비소가 거절한다는 것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시간의 차이일 뿐이지, 그녀는 결국 내게 굴복하고 첫번째 족쇄를 받아들일 것이다.

다음은 어떤 식으로 꼬드겨내볼까.
몇번의 단계를 걸쳐야, 내가 원하는만큼 바꿔놓을 수 있을까.
알아차리고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얼마만큼의 자료를 쌓아야 할까.

그 다음을 생각하기에도, 시간은 꽤나 빠듯했다.


모든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고, 유일하게 남은 자지를 주무르고 있을때쯤 카톡이 울린다.

카톡-
기분 좋은 울림이다.

4.
메세지의 갯수는 딱 적당하다.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올려 메세지를 확인한다.

<...여, 여기요....>
천방지축이었던 그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의 고분고분함,
그리고 이어진 3장의 사진,

어둡다.

[다시.]
<왜, 왜!>
[너무 어두워. 이건 알아볼 수가 없겠어.]
<..으...>

말없이 그녀가 사라진다. 나는 모른 척 기다려준다.

또 한번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나타난다. 그녀의 간담만큼이나 파르르 떨린 사진이 함께다.
나는 역시 퇴짜를 놓는다.
[너무 흔들렸어, 카메라에 손떨림 방지 기능도 없어?]
<떠, 떨리는데 어떡해 그럼..!>
[암튼 다시.]
<...>

그녀가 다시금 꼬리를 감춘다. 그리곤 나타난다.
<어, 어때??>
[밝기, 손떨림 다 좋네.]
<그, 그럼..!>
[근데 너무 위에서 찍었어, 이런게 전신상이야? 이렇게 찍으면 객관적인 판단이 안되잖아.]
<어...>
[다시.]

비소가 몇번이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나는 "다시"를 외친다.
그럴수록 내쪽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계속해서 짧아져갔고,
알몸을 찍어보낸다는 그녀의 부끄러움도 함께 바스라들었다.

한참의 반복이 지나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 나는 원하는 구도의 사진을 손에 넣는다.

[잘 찍었네.]
<저, 정말? 정말이지..!?>
[응, 딱 좋아.]
<아으으!!!>
그녀는 쾌감에 가까운 탄성을 지른다. 텍스트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소리를 엿들을 수 있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사진 속의 그녀를 바라본다.

말랐다. 그걸 대변하듯 허리는 한줌에 들어올만큼 가느다랗다.
하지만 충분히 매끈해보인다. 사진으로 보이는 피부톤도 나쁘지 않았다.
가슴 사이즈는 어쩔 수 없는지, 간신히 A컵을 채울 정도.
대신, 골반은 훌륭하다.

나는 사진을 돌려가며 여러 구도에서 그녀의 엉덩이를 바라본다.
뒤태를 확인하자, 확연한 골반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골반,
확실히 그녀의 체형에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사이즈다.
엎드리거나 엉덩이를 치켜들게 하는 등 좀 더 다양한 포즈를 취하게 하고 싶었다.

<어떤데? 가만 있지 말고 말 좀..>
조용한 내가 여간 신경쓰였는지, 웬일로 그녀 쪽에서 품평을 재촉한다.

[음,]
<아, 왜 그래..>
[먼저 한발 뽑고나서 얘기할테니까, 기다려.]
<...엑?>
[뭐가? 아까 말했잖아.]
<아, 아니 그래도 지금?..>
[당연하지. 그래야 객관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을거 아냐.]
<..아으...>
이젠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뻔뻔스럽게 나갔고,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구른다.

하물을 움켜쥔다.
두근대는 맥박이 느껴졌다. 나는 연신 손을 움직여대며 순환을 돕는다.

[기다려, 지금 딸치고 있으니까.]
<......>
[금방 끝나, 기다려.]
<아, 알았다구 좀...>

그녀는 그렇게 내가 울컥거리길 기다렸고, 5분이 지나서야 자신의 강점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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